주일예배

보라 어린양이로다 (요 1:19-34)

Author
Myung Myung
Date
2008-02-03 15:40
Views
4096
요 1:19-34 보라 어린양이로다

오늘 오후에 Arizona에 있는 Glendale에서 New England Patriots와 New York Giants 사이에 미식축구의 결승전인 Super Bowl이 열립니다. 아마 단일경기로서는 Super Bowl보다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미국민의 3분의 일이 시청을 할 예정이라 합니다. 더욱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은 New England Patriots가 시즌이 시작되면서부터 한번도 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경기까지 이긴다면 19전 전승으로 시즌을 마치는 최초의 팀이  됩니다. 이 경기를 꼭 보고 싶은데 Warner Springs Ranch에서 Fuller 동문 기도모임을 하필이면 오늘 한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동문들의 교회에서 돌아가면서 개최하는데 이번에는 제 차례인지라 꼼짝없이 가야만 합니다. Patriots 팀이 그동안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었던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선수 개개인의 역량으로 볼 때는 Patriots보다 우수한 선수들을 가진 팀들이 많습니다. Patriots 팀에는 다른 팀에서 한물갔기에 방출된 선수, 드래프트에서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던 무명선수들이 많습니다. 간판선수인 Tom Brady도 8년전 draft로 뽑힐 때에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던 무명선수였습니다. 그러나 감독의 뛰어난 조련을 통하여 끈끈한 팀웍을 가진 훌륭한 팀으로 거듭났습니다. 마지막 4번째 quarter에서 점수가 앞섰을 때 경기를 승리로 이끈 전적이 80승 2패입니다. 거의 역전승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집중력이 뛰어나 좀처럼 흔들리지 않고 마무리를 잘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그 팀을 강하게 한 것은 준비, 또 준비, 그리고 준비입니다. Patriots팀의 감독은 상대방을 철저하게 분석하며 그에 대비한 작전을 세우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게임을 앞두고 선수들은 그 감독이 식당에서 여유 있게 식사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저 빵이나 chip 몇 조각으로 때우면서 준비하는데 온 힘을 기울인다고 합니다. 팀이 비록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으나 선수들은 한 번에 한 게임씩이라는 자세로 겸손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준비를 하였습니다.



세상의 경기도 이기기 위하여 이렇게 최선을 다하여 준비를 하는데 하나님의 일을 담당한다는 성도들의 준비상황은 어떠하십니까? 2008년도 벌써 2월에 접어들었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거두기 위하여 작년보다 더 준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따라 이 땅에 오셔서 사역하시는데 당연히 준비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준비하기 위하여 선택된 사람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는 자기가 누구인지 알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렇기에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자 요한 같은 이가 없다고 예수님께서 칭찬하셨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어떠하십니까? 주님께서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다는 확신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일하기 원하시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할까요?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귀한 교훈을 얻으면서 우리에게 적용하기 원합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신 것이지만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왔다.”(표준, 요 1:17) 이 말씀은 모세 율법에 대하여 아무리 연구를 많이 하고 그 율법의 말씀대로 순종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을 얻거나 구원을 얻지는 못한다는 뜻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본 일이 없습니다. 모세조차도 하나님을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뒷모습 또는 그림자만 보았을 뿐입니다.(출 33:22-23) 그러다보니 어느 누구도 하나님에 대한 완벽한 지식을 전달할 수 없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아들이 된 분이 성육신하여 하나님을 이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제대로 알게 되었고 인간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 계시된 하나님의 위대함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계시와 진정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등장할 당시에 시대적 배경은 어떠합니까?

유다 백성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 500년 동안 대부분의 기간을 열강들의 속국으로 있었습니다. 페르시아(538-331 BC)가 지배했고 이어서 Greece (331-134 BC)가 지배했으며 예수님이 오실 당시에는 Rome (63 BC 이후 예수님 때까지)이 팔레스타인 지방을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가 하루 속히 오셔서 압제중인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간절히 소망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주후 30년 경 Tiberius Caesar가 통치할 때에 유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출현은 구약의 성취입니다.

마가복음은 요한의 출현과 관련하여 구약의 두 구절을 인용합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사 40:3)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말 3:1a)  마가는 두 구절을 종합하여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적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어느 날 갑자기 유대 땅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가 오기 700년 전부터 선지자들이 예언하였는데 그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주로 사역한 곳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회당이나 시장이 아니라 광야였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는 잡초가 여기저기 널려지고 바람이 부는 황량한 돌 언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광야에서 요한은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 앞서 와서 백성들에게 왕을 맞을 준비를 시킵니다. 두 가지를 하는데, 하나는 백성들로 죄를 회개하도록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예수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고민하는 것이 죄 문제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지 않는 것입니다. 스스로 행복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보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었던 아담과 하와와 같은 죄를 범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mess up 된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는 이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제한된 자원 속에서 죽어가는 인생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밖에서 우리를 위하여 오셔서 구원을 이루셨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이 귀한 예수님의 사역을 준비하기 위하여 세례자 요한은 백성들에게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합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 400년간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정치, 경제적으로 로마의 속국이었으므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가 오기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그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주고 전 세계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이끌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약대 털옷을 입고 가죽 띠를 띠면서 엘리야와 같은 모습을 한 사람이 유대 광야에 나타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외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혹시 그가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이방인이 유대인 되거나 또는 유대인 중에 죄를 지어 이스라엘 회중에서 쫓겨났다가 회복되는 유대인들에게 제사장은 우슬초로 물을 찍어 정결케 하는 의식을 행하였습니다. 그것이 세례의 기원입니다. 그런데 누가 그 세례를 받습니까? 이방인들이 아니라 유대인들입니다. 주로 이방인이 유대인 되는 의식인 세례를 유대인들에게 베푼다는 것은 유대인 모두가 하나님 앞에 이방인들과 다를 바 없는 죄인이요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될 필요가 있음을 상징합니다. 마가복음 1:4절에 보면 유대 땅 시골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요한에게 나왔다고 합니다. 그들의 모습 속에서 당시 유대인들이 얼마나 삶이 고달프고 영적으로 갈급하여 하나님의 위로를 간절히 기다렸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본질을 밝힙니다.

유대 사회의 대표하는 기관이요 종교적인 문제에 관한 한 파수꾼의 역할을 감당한다고 자부하던 산헤드린 공회원들에게 세례자 요한의 존재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어디서 이상한 친구가 나타나 백성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치고 세례를 베푸니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여간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보내 세례자 요한의 자격을 문제 삼고 그의 활동에 시비를 겁니다.  세례 요한을 보자마자 ‘네가 누구냐’ 묻습니다. 요한은 주저하지 않고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왜 요한은 ‘아니다’하는 답변을 먼저 합니까? 요한이 혹시 메시야가 아닐까 의문을 제기한 사람이 그 당시에 많았다는 것을 반영합니다. 그들은 계속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엘리야냐’  아니다. 말 4:5,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전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실제로 예수님도 세례 요한이 엘리야였다고 마 11:14에 언급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선지자냐? 신 18:15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그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종말에 일으키시기로 약속하신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가리킵니다. 요한이 그것도 아니라고 대답하니 파송된 무리가 답답해집니다. 우리가 예루살렘에 돌아가 너에 대한 보고를 해야 하는데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도대체 너는 누구냐? 너 스스로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 말해보라고 합니다. 그때 요한은 이사야 40:3절의 예언을 인용합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원래 이 예언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하여 천사가 할 역할에 대하여 언급한 것인데 세례자 요한은 자기의 할 일이 메시야가 와서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그것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 밭을 갈아놓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이시면 세례자 요한 자신은 그 말씀을 전달하는 소리라고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역의 본질을 밝힙니다.

예루살렘에 보낸 자들은 이제 세례 요한이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에서 그의 사역에 관한 질문으로 넘어갑니다. 메시야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선지자도 아니라면 네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요한은 그들의 질문에 바로 답하기보다 자신의 세례 사역을 예수와의 연관 지어 설명합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26~27절) 그 당시 누가 샌달의 끈을 풉니까?  종이 하는 일입니다. 요한은 그 당시 종이나 하는 역할을 자신의 역할로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은 예수의 사역을 준비하는 것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세례를 주는 목적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함이라 요한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글의 저자인 사도 요한은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곳이 “요단강 건너 편 베다니에서 된 일”(28)이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증언의 확실성을 더합니다.



이제 예수님의 본질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직접 증인이 이어집니다.

* 세례자 요한은 어떻게 예수님을 증거합니까?

1) 하나님의 어린양 (1:29)

많은 사람들이 요단강에 있는 세례자 요한에게 나아와 가르침을 받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얼핏 볼 때는 예수님도 수많은 무리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이 자기에게 나아오시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볼 수 있는 영안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성령에 감동하여 말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짊어지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외칩니다. 양은 종교적 희생 제사에 쓰이는 제물입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빠져나올 때 어린 양을 희생시킨 피를 집 문설주에 발라 장자의 죽음을 면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레위기 16장에 보면 속죄일에 숫염소 두 마리를 취하여 제비뽑아 한 마리는 여호와께 드릴 것으로 뽑힌 염소는 죽여서 속죄제로 드리고 또 한 마리는 대제사장이 안수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를 고백하여 그 죄를 그 염소에게 씌우고 광야로 내보냅니다. 요한은 예수를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광야로 나아가는 염소를 염두에 두면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단지 이스라엘의 죄를 지고 갈 뿐 아니라 세상 죄를 지고 간다고 함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이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의 구원을 선포하기 위한 것임을 증거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2) 자기보다 먼저 계신 분 (1:30)

요한은 31절과 33절에서 자기도 예수를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예수를 요한이 개인적으로 전혀 몰랐다는 말이 아닙니다.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는 친족 간입니다. 요한은 예수보다 6개월가량 먼저 났습니다. 요한이 처음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줄 몰랐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계시하셨는데, 과연 예수님이 자기에게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에서 내려와 예수님 위에 머무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보다 늦게 출생했지만 요한이 그의 먼저 계심을 인정하는 것은 창조의 동참자로서 신성을 가지신 분인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자기보다 뛰어난 자라고 고백합니다.



3)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분 (1:33)

요한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여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분임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물로 세례를 준다면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분이라는 내용은 사복음서에 다 나옵니다. 마가복음 1장 7절에 의하면 나는 지금 너희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나의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세례는 단지 죄를 씻어버리지만 예수님이 오시면 사람들의 마음까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새롭게 하시고 궁극적으로 영원한 구원을 보장합니다.  



4)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 (1:34)

요한은 성령의 감동 가운데 예수님을 보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에 대한 대표적인 칭호입니다. 1:18에 나오는 하나님의 독자를 다른 단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우리에게 보내신 독특한 분이십니다.



* 하나님의 역사는 택하신 사람들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약속된 하나님의 메신저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삶과 사역은 우리에게 어떠한 교훈을 줍니까?

1) 영적인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에게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증거가 있었기에 구약의 예언을 예수님과 연결시킬 수 있었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신하였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담대하게 소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이 영적으로 무지하였기에 예수님이 오셨으나 그를 영접하기는커녕 도리어 하나님을 모독한 자라고 정죄하고 죽이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세례 요한처럼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영의 눈이 밝아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행 1:4) 하니 그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여 120명의 성도들이 열흘을 기도하며 기다리다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을 때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문제들이 해결되고 우리가 변하여 새사람이 되고 변화를 체험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조명이 없으면 아무리 설교를 많이 들어도 깨달음이 없고 말씀대로 살겠다는 열망도 생기지 않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예수님이 오셨던 것처럼 쓰인 성경이 우리에게 살아있는 말씀으로 가슴을 와 닿아야 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성경이 기록된 말씀이 성령의 조명을 통하여 영안이 열려져 깨달을 뿐 아니라 그 말씀대로 살면서 많은 열매를 거두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 사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엘리야처럼 ‘주의 날’이 임하기 전에 이스라엘을 성결케 하기 위하여 왔기에 사명을 시작한 날부터 철저하게 ‘광야의 삶’을 살았습니다. 삶의 목표는 자기의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띤 세례 요한의 모습 속에서 엘리야를 보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가 입은 복장과 그가 먹는 음식과 그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메시지를 생생하게 전달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참 제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우선순위를 두고 자신의 져야 할 십자가를 지며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하여 기꺼이 내려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버릴 것은 버리면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충실한 요한의 모습은 저희들에게 도전을 줍니다. 그 모든 사람이 세례 요한과 똑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명에 충실하기 위하여 불필요한 것은 가지를 치며 사는 simple life를 우리가 본받아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는데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찌 그리도 미적지근한지 모릅니다. 너무 많이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너무 벌려놓은 것이 많아 그것을 수습하느라 하나님이 주신 에너지를 엉뚱하게 낭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일에는 강 건너 불을 보듯 무관심하면서 자기 일에만 몰두하지는 않습니까? 정말로 내게 주신 시간이나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하는 희생과 결단과 순종이 필요합니다. ‘광야의 삶’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광야의 삶’을 통하여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의 삶’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었습니다.  

  

3) 겸손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에베소에서 사역하던 아볼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예수의 도를 전하고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뿐이라. 당시 시리아나 소아시아 지방에까지 예수를 메시아로 가르치면서도 세례자 요한을 숭배하는 무리들이 있었으니 요한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구름 떼와 같이 몰려들어 자기의 메시지를 듣습니다. 자기 앞에 무릎 꿇고 죄를 자복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치고 요한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하나님이 보낸 사람으로 여깁니다. 저 분이 혹시 엘리야가 아닐까? 모세가 말한 그 선지자가 아닐까? 갑자기 높아진 인기로 인하여 인간적으로 볼 때는 얼마든지 우쭐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요한이 자신을 메시야라고 하기만 하면 많은 사람들이 더욱 그를 믿고 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자기가 설 자리를 잘 알았습니다. 그는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고 예수님만을 높였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 속에 중심인 존재가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을 위한 증인에 불과하다고 솔직하게 선언합니다.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사역의 정점에서 이제 막 사역을 시작하는 예수님을 보면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요 3:29) 말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과의 관계 밖에서는 자신의 본질을 깨달을 수 없으며 예수님을 통해서만 삶에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이루어 놓은 일이나 업적을 알리고 싶고 남들이 칭찬해주었으면 합니다. 또 공치사를 들으면 공연히 우쭐댑니다. 자기의 능력과 지혜로 한 것처럼 말꼬리를 흐리거나 자신이 영광을 받으려고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의 사명과 위치를 분명히 알았기에 세상의 인기나 영예에 연연하지 않고 사명을 감당하다가 때가 되었을 때 조용히 무대의 뒤로 물러갔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겸손하게 자기의 한계를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지속적으로 주님의 손에 붙들려 쓰임을 받습니다.  



4)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1장 19절부터 51절까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첫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난 경험을 토대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들의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 됩니다.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사건으로서의 예수의 삶과 행적, 즉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여 그들처럼 신앙을 고백하고 그들처럼 예수님에 대한 증인의 역할을 할 것을 요한은 암시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대의 세례자 요한이 되어 말과 삶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던 세례자 요한처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는 메신저로서의 삶을 살고 싶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기실 때 기꺼이 나가지 않으시렵니까? 신앙생활을 제대로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기도와 말씀 가운데 교제하며 하나님의 뜻에 깨달아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의 고백을 통하여 날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며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우리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깨닫고 우리의 삶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모습은 예수님에게서 또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낮아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이 땅에 보내신 사명에 충실하셨기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같이 사명에 충실하기 위하여 ‘광야의 삶’을 사는 연습을 하면서, 예수님처럼 한 알의 밀알이 되기를 사모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채움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