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참된 예배자입니까? (눅 7:36-39)

Author
Myung Myung
Date
2008-01-13 15:12
Views
5227
눅 7:36-39  참된 예배자입니까?



전에는 목회자의 눈치를 보며 주일예배를 빠졌던 성도들이 이제는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예배를 뒤로 하고 당당하게 주말여행을 떠납니다. 육신이 피곤하다 보니 예배 중에 꾸벅꾸벅 좁니다. 예배에 참석하면서도 머릿속에는 삶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설교를 들어도 아무런 감동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 그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뜻을 깨달아야겠다는 어떤 기대감보다 의무감에 사로 잡혀 교회당에 나옵니다. 교회 밖을 나서면서 삶의 용기나 기쁨 혹은 하나님의 사명을 품거나 소망을 갖기보다 오늘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을 한 지는 오래 되었으나 교회 안과 밖의 삶에 전혀 변화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방금 말한 내용은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생각됩니까? 아니면 바로 나를 두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됩니까? 새해를 맞아 교회 표어를 “주 안에서 세워지는 교회”로 하였습니다. 지난 주 에베소서 2:21-22절을 중심으로 주 안에서 세워지는 교회는 주 안에서 하나가 되는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교회가 먼저 화해를 연습하고 하나됨을 실천하는 곳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도 성도들은 한 몸을 이루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여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려면 예수님을 본받아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서로 용납함을 가져야 하고 상대방에 대하여 그것들을 사용하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은 “주 안에서 세워지는 교회”라는 주제 하에 두 번째 말씀을 전합니다. 성도들이 하나가 되기를 힘쓸 뿐 아니라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 앞에 있던 한 여인을 통하여 참된 예배자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누가복음 7장에는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죽어가는 아들을 고치셨습니다. 기적입니다. 나인 성에 가셔서는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셨습니다. 더 큰 기적입니다. 회복된 백부장의 아들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이미 2000년 전에 죽었습니다. 다시 살아난 과부의 아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 역시 죽었습니다. 과부의 아들이 다시 살아난 것은 부활이 아닙니다. 잠시 살아났지만 다시 죽고 말았습니다. 본문은 이보다 더 큰 기적, 우리가 사모해야할 기적, 기적 중의 기적을 보여줍니다. 그 기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는 것. 예수를 믿으면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죄사함의 확신이 있는 사람은 잠잠하지 않고 그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살아계신 하나님께 근 은혜를 표현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성경에 이름도 나와 있지 않은 한 여인이 예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은 후에 그 구원의 기쁨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보면서 이 자리에 함께 한 모든 분들이 구원의 확신을 가질 뿐 더러 주님께 대한 아름다운 예배자의 모습을 보여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복음서에 보면 바리새인들은 주로 외식적인 사람들이요 사사건건 예수님과 대적하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타나는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을 식사에 초청하였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의도에서 초청한 것은 아니요, 그렇다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바로 알고 정성껏 대접을 한 것도 아닙니다. 어쨌든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청했다는 것 자체만 해도 파격적인 일입니다. 세상에 구원을 전하려오신 예수님이시기에 그에게도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할 기회를 주고자 그 초청에 응하셨습니다. 그 잔치자리에서 일어난 한 사건을 통하여 주님이 기뻐하시는 참 예배자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1) 주님이 계신 곳으로 나옵니다.

죄인인 한 여자. 좀 더 정확한 번역은 죄인이었던 혹은 죄악 된 생활을 했던 여자. 무엇 때문에 죄인이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아마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었을 것입니다. 창기였을지도 모릅니다. 죄에 젖은 삶을 살던 여인, 그래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던 여인이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날 이후로 그 여인은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날마다 구원의 감격 속에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자기 동네에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견딜 수 없는 거룩한 사랑의 충동으로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유대인 랍비들은 공중에서 여인들과 이야기 하지도 함께 식사를 나누지도 않습니다. 더구나 그 여자는 죄인으로 낙인을 찍혔기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자리에 가는 것은, 더구나 바리새인의 집에 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이 계신 그 집에 들어갑니다. 자기의 과거를 인하여 주변의 시선이 곱지 않은 것도 느꼈을 테지만 예수님이 자기에게 보여준 사랑을 생각하면 그런 시선쯤은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 앞에 나가는데 어떠한 것도 그 여인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친구가 찾아와서, 주일밖에 시간이 없는데 나름대로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예배 참석하는 것을 소홀히 하려는 유혹을 받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로 담대히 나아가는 여인의 모습은 큰 도전이 됩니다. 저는 98년부터 주로 진해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제가 다니던 교회 목사님이 “화장실에 갈 힘만 있으면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라”는 말씀이  잊어지지 않습니다. 참된 예배자는 어떻게든지 주님께 나아가려고 합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주님께 예배를 드리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분주한 일정 가운데도 새벽 한적한 곳에 가셔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심으로 하루를 시작하셨습니다. 제자를 부르실 때나 중요한 결정을 하실 때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심으로 인도를 받으셨습니다.  



2) 주님 앞에 겸손합니다.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갑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요 또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의 교만과 세리의 애통함이 대조를 이룹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에 대하여 기도한다(pray about himself)고 합니다. 그가 기도하는 목적은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나누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의 경건의 모양을 자랑하며 인정을 받으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사기꾼, 불의를 하는 사람, 간음하는 사람이 아닌 것을 감사합니다. 더구나 내 옆에 있는 이 세리가 아닌 것을 인하여 감사합니다. 이 바리새인적인 태도가 신앙생활 오래한 사람들에게 나타나기 쉽습니다. 상대방이 자기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음을 인하여 판단하고 공연히 화를 내거나 멸시하는 태도를 합니다. 또한 바리새인은 자기가 한 것을 인하여 자랑합니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금식을 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립니다. 바리새인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의인으로 착각합니다. 반면에 세리의 기도하는 자세는 어떠합니까? 멀리 서서, 눈을 들어 하늘을 보지 못하고 땅만 보고, 가슴을 치며,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옵소서. 자신의 죄를 알고 단순히 하나님의 자비를 구합니다. 내가 과거에 무슨 일을 하였고 현재 어떤 신분에 있는 것이 하나님께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예배자가 되는가 이것이 더 중요합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시나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누가 의인이요 누가 죄인입니까?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바리새인과 달리 세리는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겸손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겸손의 모습을 보입니다. 주님은 그의 기도를 받으셨습니다. 오직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는 마음으로 나아갈 때 참된 예배자가 됩니다. 우리 주님이 하나님 앞에 항상 겸손하셨습니다. 자기를 비워 종의 오실 때부터 십자가에 달리실 때까지 예수님의 삶은 겸손으로 점철된 삶이었기에 하나님은 그와 항상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배에 성공한 자에게 복을 더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은 자의 모습은 주님께 대한 겸손입니다. 당시의 연회는 모든 사람에게 open 되었기에 그 여자도 어렵지 않게 예수님께로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보통 유대인들의 식사자세를 보면 한쪽 발을 바깥쪽으로 뻗으며 비스듬히 몸을 기울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뒤로 가서 그 뻗은 발 곁에 섭니다.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예수님에게 다가가는 여인의 마음은 마구 떨렸을 것입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예수의 뒤로 가서 옷자락을 만진 것처럼 여인도 겸손하게 예수님의 뒤로 가서 그의 발치에 아마 고개를 숙이고 서있었습니다.  



3) 눈물이 있습니다.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어떤 목사님이 곰보였습니다. 외모 때문에 적지 않은 콤플렉스를 가졌습니다. 우리 목사님은 곰보라고 일부 교인들이 수군거리기도 했습니다. 목회에도 점점 자신감을 잃었습니다. 덩달아 교회도 부흥이 안 됩니다. 그렇다고 정형수술 할 수는 없고 날마다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자기의 안타까움을 고합니다. 이 곰보를 고쳐주세요. 어느 날 예배 시간에 말씀을 열심히 전하는데 갑자기 성령의 감동이 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죄를 인하여 채찍에 맞으시고 찢기시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데 나는 예수님을 위하여 일을 한다면서 외모를 인하여 불평해 왔다는 생각이 들자 한심한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흘러내리는 눈물이 목사님 얼굴에 있는 곰보 자국마다 채워집니다. 강대상에 비추는 조명을 인하여 곰보 자국에 들어간 눈물이 반사가 됩니다. 설교를 듣던 모든 교인들이 목사님 얼굴에 반사되는 광채를 보며 커다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거룩한 얼굴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후로부터 그 목사님은 더 영력있는 설교를 할 수 있었고 그 교회는 아름답게 성장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은 자의 대표적인 모습이 눈물입니다. 주님 앞에서 죄인 된 자신의 모습을 고백하며 기도를 드릴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눈물입니다. 주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여인은 달려왔습니다.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니 과연 예수님이 계셨고, 그분이 지금 자기 앞에 계십니다. 예수님을 보자마자 감격 속에 예수님 뒤에 앉아 눈물을 흘립니다. 여인의 흘리는 눈물이 예수님의 발을 적십니다. 여인의 눈물은 죄사함 받은 감동의 눈물이었습니다. 예배에는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근래에 예배를 드리면서 마음이 뜨거운 적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신 적이 있습니까? 눈물은 여자나 흘리는 것이지 그렇게 생각하는 남자 분들이 계십니까? 주님 앞에 자신을 쏟아놓으며 회개할 때 눈물이 나옵니다. 아직 주님을 모르는 형제자매를 위하여 중보기도를 드릴 때 안타까움을 인하여 눈물이 나옵니다. 고난에 처한 형제자매와 함께 아픔을 나눌 때 눈물이 나옵니다.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생각할 때 눈물이 나옵니다. 성도의 눈물은 주님에 대한 거룩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인하여 안타까워하는 심령들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안타까움으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4) 헌신이 있습니다.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은 자는 헌신하게 되어 있습니다. 씻다, 입맞추다, 붓다라는 동작을 사용하는데 누가는 과거 반복적인 동작을 나타내는 동사형을 사용합니다. 계속해서 씻고, 계속해서 입맞추고, 계속해서 향유를 붓습니다. 흘리는 눈물로 인하여 예수님의 발이 적셔지자 주저 없이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습니다. 머리털은 여자에게 자존심과 같이 소중한 것이지만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먼지가 묻고 물로 적셔져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머리털로 씻는다는 것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의 발을 씻기면서 죄인이었던 자신의 죄를 씻겨주신 감동을 재연합니다. 정성껏 씻고 나서 이제는 예수님의 발에 계속해서 입을 맞춥니다. 여인의 예배 속에는 거룩한 입맞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이 자신의 발에 입 맞추는 것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입 맞추는 모습은 감동적인 예배의 장면입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요 자기는 종이라는 자세로 철저하게 낮추며 예수님을 섬깁니다. 그리고 나서 옥합을 깨뜨립니다. 옥합을 깨뜨리는 것을 자신을 깨뜨리는 행위였습니다.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습니다.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이 향기로운 기름으로 표현됩니다. 온 집안에 향유의 냄새가 가득 찹니다. 자신을 깨뜨려 예수님께 부어 드렸습니다.



5) 경배를 드립니다.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고 그 발에 입을 맞추려면 엎드려야 합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하고 있습니다. 말없이 온몸으로 감격 속에 예배하고 있습니다. 여인의 주님에 대한 사랑이 모든 것을 압도하니 향유를 예수님께 아낌없이 부을 수 있었습니다. 여인의 생각 속에는 예수님밖에 없었습니다. 그분께만 초점이 맞추어졌습니다. 이 여인은 사람들의 시선이나 비난, 분노나 조롱을 초월하여 온전히 예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여인은 예수님 안으로 깊이 빨려 들어가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 때마다 감동적인 예배를 드립니까? 그저 순서에 따라 참여하며 너무나 익숙하고 타성에 젖어 예배의 감동을 상실하지는 않았습니까? 기대가 없고 만족이 없고 충만이 없고 감동이 없는 예배에 지쳐있지는 않습니까? 죄인이었던 여인이 예수님 앞에서 보여준 행위는 주님이 받으신 예배요 한편의 감동적인 드라마였습니다. 여인은 주님께 나왔습니다. 여인의 헌신에는 뜨거운 눈물이 있고, 거룩한 입맞춤이 있고, 아름다운 향기가 있습니다. 이제부터 이런 예배를 드리지 않으시겠습니까?



은혜를 입은 자들이 은혜의 맛을 압니다. 여인과 같이 죄사함의 감격, 구원의 감격을 느끼지 못하면 눈물이 나올 리 없고, 예수님의 발에 뿌려지는 향유는 아깝게만 여겨질 뿐입니다. 그 장면을 처음부터 지켜보던 곁에서 지켜보던 바리새인 시몬은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여인이 예수님께 드리는 최상의 헌신의 모습도 감동 없이 바라볼 뿐입니다. 시몬에게 있어 여인은 죄인일 뿐입니다. 그 여인이 자기 집에 들어온 것도 불쾌하고, 더구나 잔치자리에 분위기를 깨뜨리는 것도 불쾌합니다. 그 불쾌감이 예수님께로 향합니다.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고 난 후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이 큰 선지자가 우리에게 났다고 하며 그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퍼졌습니다. 예수가 진짜 선지자라면 이 앞에 있는 여인이 얼마나 죄가 많은 여인인지 알고 그 여인을 물리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예수는 사이비가 분명하다고 속으로 단정합니다. 같은 자리에 있으면서 한 사람은 베푸신 은혜에 감격하며 주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립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은 심기가 불편하고 예배 드리는 자를 정죄합니다. 여인이 누리는 감동을 갖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게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주님께 드리는 헌신을 낭비로 여깁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한 모든 경건한 노력을 우습게 여깁니다.  마리아의 '봉헌'을 이웃을 향한 '자선'보다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만나서 웃고 떠들고 교제하는 것은 좋아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경배를 드리는 예배나 주님을 위한 헌신에는 우선순위를 두지 않습니다.



예배가 영어로 worship인데 이는 worth-ship의 줄인 말입니다. 문자적으로 궁극적인 가치를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그 대상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가치에 대하여 그것을 깨닫고 존중하며 높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려면 하나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깨달으며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원한다면 그분의 위대하심이나 위엄, 능력, 거룩하심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천사의 말과 인간의 혀로 그럴듯한 찬양을 부른다고 해도 만약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진심으로 예배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다만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웅장한 건물을 짓는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배란 무엇입니까? 왕 되신 하나님께 부복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 앞에서 충성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개역 요 4:24) 예배를 드리는데 진리가 우선이 되어야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면서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면 예배에 능력이 생깁니다. 진정한 예배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분이셨으며 또 현재 어떠한 분이신지에 대한 감사의 반응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엎드리고 왕 되신 하나님을 높이고 예배를 통하여 그분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시는 것을 체험하고 예배당을 떠나서도 주님을 여전히 왕으로 모시고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개역 히 13:15-16)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을 예배한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삶을 산다는 것이며 더 이상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궁극적으로 그들의  삶 가운데서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풍성하게 하여 모든 지혜로 서로 가르치고 권면하며 시와 찬미와 영적인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현대, 골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할 때 자연스럽게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예배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원의 역사에 대하여 알 때 마음으로만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온 몸과 마음으로 깊은 감동 가운데 드리는 예배가 됩니다.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표준 요 4:23) 하나님은 지금부터 그런 예배를 드리기 원하십니다.



계시록 4-6장에 하늘의 천군천사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그 무리 속에 누가 있습니까? 예수 믿는 저와 여러분들이 함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 예배 속에 동참합니다.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그때를 위하여 이 땅에서도 우리는 부지런히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교회당이 크던 작던, 사람들이 많이 모였든 적게 모였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예배 속에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이 임재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놀라운 예배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우리의 심령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감격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예배가 교회당에서만 국한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삶에 연장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분의 섬기는 일이 우리의 삶에 날마다 나타나야 합니다.



진정한 예배란 하나님께 열려져 있는 것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고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간청한 한 가지 일을 구하리니 내가 평생 여호와의 집에서 살며 그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성전에서 그를 묵상하는 일이다. (현대, 시 27:4)  진정한 부흥은 교회건물을 좋은 것으로 마련하는 것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요, 거창한 행사를 벌이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흥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즐거움을 찾으며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며 주님의 백성으로서 백성답게 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주님 앞에 회개하며 우리 자신을 낮추며 헌신을 다짐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 부흥하는 믿음의 공동체에 자원하여 참여하여 구원의 감격을 누릴 뿐 아니라 성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함께 교제에 참여하며 2008년도 은혜와 평강으로 충만한 한해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