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성탄절의 그리스도(3): God-Man (요 1:14)

Author
Myung Myung
Date
2007-12-16 14:32
Views
3066
요 1:14  성탄절의 그리스도(3): God-Man

  

우리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관계입니다. 관계를 떠나 살 수 없습니다. 원만한 대인 관계를 가진 사람은 어디에 있어도 잘 적응하고 열매도 많이 거둡니다. 사회생활 뿐 아니라 신앙생활도 관계를 토대로 이루어집니다.

1)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관계를 맺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의 죄 짐을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성탄절을 즐거워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소유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하나님과의 관계는 믿음의 형제나 자매와 올바른 관계로 발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섬기려고 오셨던 것처럼 믿는 자들은 주 안에서 한 가족이므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자세로 형제나 자매를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잘 해보겠다는 열정은 좋으나 이웃을 섬기는 자세가 바로 되지 않을 때 그 열정으로 도리어 다른 형제나 자매에게 알게 모르게 상처를 주게 되고, 자기의 잣대로 남을 판단하다 보면 공동체의 하나 됨에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3) 믿는 자들과의 교제는 궁극적으로 세상을 향하여 우리의 눈을 돌리게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삶의 현장에서부터 변화가 나타나기 원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교회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셔서 주님이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택하신 이유도 그들을 통하여 세상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도들이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기 원하십니다.

  

성탄절이 한 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무엇이 가장 마음을 설레게 합니까? 선물, 파티, home-coming? 이번 성탄절 기간에는 우리가 맞이하는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깨닫기 원합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볼까요?



* 요한이 복음서를 쓰게 된 목적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3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1:1a)

1. 예수님은 영원하십니다. (Jesus is eternal)

예수님은 천지 창조 이전부터 계셨던 분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영원하시기에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과 연결이 됩니다. 영생의 소망이 있기에 성탄절에 주님을 기뻐합니다.



2.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Jesus is God)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1) 예수님은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가지신 분이요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요한은 선포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때에 천사가 마리아와 요셉에게 나타났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마 1:21, 23) immanuel은 God with us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커다란 위로를 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탄절에 주님을 기뻐합니다.



3. 예수님은 하나님-인간이십니다. (Jesus is the God-Man)

사도 요한은 선포합니다.“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요한은 하나님을 직접 보았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얼굴과 얼굴로 마주 뵈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1) “말씀이 육신이 되어” (14a)

1절에서 사도 요한은 로고스가 태초부터 존재하시는 신성을 가지신 분이며 동시에 그 자신이 하나님이시고 이 세계를 창조한 분이라고 소개하였는데 지금은 그 로고스가 육체가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로고스가 육체로 되었다는 것은 로고스가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의 몸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이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육체를 가지고 이 땅에 오실 수 없고 육체로 나타난 나사렛 예수는 실체가 아니라는 영지주의적 이단 사상이 널리 퍼졌는데 요한을 이를 강력하게 반박합니다.



신약성경에는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오신 예수님에 대하여 많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갈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골 2:9,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신성이 몸이 되어서, 충만하게 머물러 있습니다.

딤전 3:16,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2)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14b)

거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에스케노센’는 원래 ‘텐트를 치다’는 말로서 출애굽 시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성막에 거하는 것을 연상시키는 단어입니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출 25:8)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출 29:46). 즉 신성을 가지신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텐트를 치시고 거하셨다는 것입니다. 문법적으로는 ‘잠깐 동안 장막을 쳤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분은 이 땅에 영원히 살기 위하여 오시지 않았습니다. 특별한 목적이 있기에 오셨습니다.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셨다가 다시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속성: 전지전능하심. 인간의 특징: 약함.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습니다. 약하기에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 5:19-21) 물론 예수님이 인간이시나 우리와 다른 것이 있다면 그분은 죄가 없으시다는 사실입니다. 죄가 없으셨으나 우리의 죄를 대신 지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육신을 가질 수 있을까? 이것은 영원한 신비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사람이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릴 때 육신으로 계셨고 부활하신 후에도 부활체로 바뀌기는 하였으나 육신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볼 수 있었습니다. 승천하실 때도 그 육신으로 하나님께 오르셨고 그 육신을 가지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로고스 하나님이 육신이 되신 것은 우리 죄를 그 몸으로 담당하기 위함이요 우리를 이 육신을 가진 채로 하나님 앞에 서게 하기 위함입니다.

  

3)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14c)

예수님이 거처를 정하신 ‘우리’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열두 사도를 가리킵니까? 12절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4절에‘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고 하는데,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기에 ‘우리’는 바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성육신 하신 예수는 어디에 거하십니까? 그를 믿는 신자들의 공동체에 거하십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8:20)



요한은 신자들이 공동체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출 33:22) 구약에서 영광은 하나님께 사용된 말임을 감안할 때 요한이 예수님의 영광을 언급하였다는 것은 예수께서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이신 분임을 말해줍니다.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과 영광을 여러 번 언급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요 2:11)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요 11:4)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요 7:39)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요 12:16)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요 13:31)



예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구약과 다른 것은 이제 이 하나님의 영광을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멀리 계신 간접적으로 보는 하나님이거나 모세와 같이 특별히 택함을 받은 사람들과만 대화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신자들이 직접 경험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4)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14d)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시 86:11) 일심으로 번역된 ‘야히드’라는 히브리어를 헬라어 70인역에는 monogenes라는 단어로 번역하였고 우리말 개역성경에서는 ‘독생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일심으로’로 쓰인 ‘야히드’는 단어는 유일하다는 뜻입니다. 종류가 하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창조와 계시의 중보자인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서 육신이 되어 하나님을 계시하고 그의 구원을 이루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시고 100% 사람이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아주 unique한, 독특한 존재이십니다.



5)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4e)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시고 찾아오시고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며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언약을 끝까지 지키셨으나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일방적으로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깨뜨렸습니다. 돌아오라 돌아오라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시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했지만 그들이 거부하니 이스라엘은 이방나라들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고 백성들은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셔서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고 그들을 통하여 예배를 받기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여전히 악을 행하자 하나님은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 400년 동안 침묵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안하시고 쉬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낼 준비를 하셨습니다. 때가 되어 아들이 오셨습니다. 로고스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은 인간의 요청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은 죄와 허물로 영적으로 죽은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삶과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자와 신실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연약한 자들을 한번도 물리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눅 4:18)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스스로 알 수 없지만 성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예수를 경험한 요한은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을 보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말했습니다. 이제도 믿음의 공동체는 예수님이 바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분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 성탄절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로서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계신 신성을 가진 존재이며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성육신 하신 분입니다. 그는 영원하신 분이요, 하나님이시오, 사람이신 유일무이한 아주 독특하신 분입니다.  



*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1) 영접해야 합니다.

주님에 대한 태도는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분을 거부하든지 영접하고 믿는 것입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하면서 예수님이 처음 오셨을 당시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이 지금도 주어집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하시면서 예수님은 자녀의 특권을 현재에 영생을 소유함으로써 이 땅에서도 누릴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믿음의 공동체만이 예수의 영광을 보며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으로부터 받아 그 은혜를 풍성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그 공동체가 교회요 예수님을 영접한 자들,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들,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의 모임입니다. 예수님의 열두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과 삶을 함께 나누며 그분에게 배웠던 것처럼 모든 신자들을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배우며 본받으며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교회란 궁극적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는 제자들의 모임입니다. 어떤 인간도 예수 밖에서는 자신의 본질을 깨달을 수 없으며 아무리 오래 살고 이 땅에서 업적이 많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그 삶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지금도 초청하십니다. 그분을 영접할 때 우리의 인생은 결코 전과 같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그런 삶을 살 때 우리는 즐거워합니다. 이 아침에 우리는 그 영광을 보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진리가 있을 때 우리는 영광을 경험합니다. 우리가 비록 자격이 없고 하나님 앞에 그렇게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상관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사랑스러운 존재가 됩니다.



2) 본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과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닮기 원합니다. 그분의 생각을 닮고 그분의 삶을 닮기 원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예수님을 보여주기 원합니다. 강림절 기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더 알기 원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메시야입니다. 구원자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오신 그분을 영접하고 그분과 동행하기 원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통하여 일하기 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일생동안 신뢰할 만한 분입니다.



빌 2:6-8,“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바울은 성육신하신 주님을 설명하면서 자기를 비우고,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자기를 낮추셨다고 합니다. 비운다는 말은 용기에 있는 것을 다 비워 버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특권을 자발적으로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의 겸손으로 가득 찬 삶이었습니다. 태어나실 때 보통 사람들조차 꺼려하는 구유에서 누이셨습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하실 정도로 (마 8:20)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살지 않으셨습니다.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에도 그는 겸손하여서 나귀의 어린것을 타셨습니다.(슥 9:9)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겸손을 보이셨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십자가에 돌라가신 것 이보다 더한 겸손은 없습니다. 이는 누가 시켜서나 떠밀려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신 것입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예수님은 범죄자와 같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겸손에는 희생이 반드시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아 하나님을 섬길 뿐더러 서로를 섬기고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그러한 삶을 살 때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셨던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시고 높이실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섬기는 믿음의 공동체는 주안에서 하나가 되어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에게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그분이 스스로의 결단과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안에 거처를 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을에 심방하십니다. 주를 의지하는 자들에게 당신의 사랑과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이 주님의 베푸신 사랑과 은혜를 이웃에 보여주면 나누기 원합니다.



3) 기다려야 합니다.

지금은  advent season. advent의 뜻은 coming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고 계신 분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대강절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일세기에 경건한 유대인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누가 오는 것을 기다립니까?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지금은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그분이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립니다. 그분이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셨기에 우리에게 영생이 보장되었습니다. 그분은 하늘에 올라가신 대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 모두 그분 앞에 서게 됩니다. 더 이상 고통이 없고, 죽음이 없고 복잡한 가정불화가 없는 곳, 더 이상 상처와 아픔이 없는 곳에 있게 됩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빼앗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그 끈질긴 사랑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섭니다. 영원토록 그분 앞에 있게 됩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 25:13) ‘깨어 있으라’는 말은 ‘오실 주님을 항상 준비하는 삶’을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은 깨어 있으십니까?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언제 오실지라도 반가이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벧후 3:8-10,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하려면 지금 땀을 흘려야 합니다.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의 시간을 드리고, 재능을 드리고, 재물을 드리면서 그분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 가운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으로 나신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우리를 치유하시고 회복시켜주시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얻기 원하십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이제부터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분과 동행하며 빛의 자녀로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