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성탄절의 그리스도(2) (요 1:1)

Author
Myung Myung
Date
2007-12-09 14:45
Views
3058
요 1:1  성탄절의 그리스도(2)

  

어제 LA에 사는 한 집사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버지가 5년 전에 폐암 수술을 받았는데 그동안 잘 지내오시다가 재발했다고 합니다. 의사는 가망이 거의 없으니 식구들에게 준비를 하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그 집사님은 자기 아버지가 집 근처 성당을 다니기는 하는데 구원의 확신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합니다. 저보고 와서 아버지가 분명히 예수님을 영접하고 영생의 소망을 가졌는지 확인을 하고 그렇지 못하다면 갖게 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예수를 믿느냐 아니냐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느냐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지느냐 지금의 선택에 영원이 달려 있습니다. 목사의 사역이 교회를 섬기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거나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사명이 있음을 기억하며 다시 한 번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지난주에도 물어 보았는데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천국이 있음을 확신합니까? 지금 죽어도 하나님과 함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습니까? 적어도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영생의 소망과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성도들은 기쁨을 가집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쁨은 행복이상의 것입니다. 세상의 행복은 자신이 바라는 대로 이루어졌을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기쁨은 자기를 둘러싼 형편이나 처지에 상관없이 그것이 원하는 것이든 원하지 않는 것이든 주님을 여전히 신뢰함으로 가지는 감정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어떻게 기분 좋은 일만 있습니까? 범사에 감사하라. 감사하기는커녕 도리어 허탈감이나 분노가 생길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모든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바로 참된 기쁨은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advent season 즉 강림절은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주님의 오심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구약 시대에 수많은 선지자들이 메시야가 오실 것을 예언하였는데 과연 하나님의 때에 그분이 실제로 오셨습니다.  그가 오심으로 구원의 길이 활짝 열려졌습니다. 성탄절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성탄절에 맞이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지난주에 이어 좀 더 살펴보기로 합니다.



1.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선포합니다.

성경 전체가 예수님에 관한 책이라 할 수 있으나 특히 사복음서는 예수님의 일생과 그분이 하신 말씀, 그리고 부활 승천하신 후 다시 오실 것이라는 약속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가 천편일률적으로 같은 내용만을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저자마다 강조하는 메시지가 각각 다릅니다. 마태는 마태대로, 마가는 마가대로, 누가는 누가대로, 오늘 본문의 저자인 요한은 요한 나름대로 독특한 관점을 가지고 예수님에 관하여 기록하였습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쓴 책이라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정점으로 이스라엘의 족보가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임을 밝힙니다. 마가복음은 서두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하면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이요 특히 섬기기 위하여 오신 분임을 강조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막 10:45)고 합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강조합니다. 누가가 쓴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누가 나옵니까? 아담.

요한복음은 어떠합니까?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처럼 족보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스토리도 없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1)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처음부터 강조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시작이 없으신 분입니다. 만들어진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영원 전부터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원을 따지는 족보가 없습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눅 1:1-2) 누가는 예수님에 관하여 전해들은 내용을 차례대로 적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어떠합니까?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왜 요한이 왜 복음서를 기록했는지 그 이유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30-31)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전 생애를 다 기록하려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특정한 기적들만을 선택하여 적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기록한 궁극적인 목적은 요한복음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특히 요한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은 구약과 연결시킵니다. 실제로 메시야가 오셔서 할 것이라는 사역들을 보여줌으로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야임을 증명합니다.  



“이튿날 요한은 예수님이 자기에게 나아오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보라! 세상 죄를 짊어지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다!  내가 전에 '내 뒤에 오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나보다 위대한 것은 나보다 먼저 계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분이 바로 이분이시다. (현대, 요 1:29-30)

세례자 요한은 육신적으로는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으나 예수님께서 자기보다 먼저 계신분이라 성령의 감동으로 말합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요 6:14) 무리는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구약에 예언한 메시야가 오셨음을 인정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창조적인 능력을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에게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므로 나도 일한다" 하고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과 똑같은 자리에 올려놓고 하나님을 친아버지라고 부른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그를 돌로 치려고 하였습니다. (요 5:17-18)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의 이름 속에 영생이 담겨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은 생명을 주십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니 하나님은 모든 믿는 자들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따름으로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가지게 됩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우리에게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한 분뿐이십니다. 그분은 만물을 창조하셨고 우리도 그분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또 우리의 주님도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그분을 통해서 만물이 창조되었고 우리도 그분을 통해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현대, 고전 8:6)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사도 요한이 선포하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시가 되신다. ‘태초에’라는 것을 통하여 예수님은 영원하신 분이다.



그 다음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요한은 모든 단어를 아주 조심스럽게 선택하였습니다. 함께로 번역된 헬라어 전치사 ‘pros’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함, 분리할 수 없음 등을 뜻하며 아주 인격적인 관계를 나타낼 때 사용합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할 정도로 친밀하였고 영원하였고 개인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말씀은 하나님과 분리할 수 없는 인격적인 관계를 가집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분으로서 그를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느끼시는지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는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계시니라”로 번역된 헬라어는 미완료 동사로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계속해서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창세전부터 계셨고 지금도 계신데 하나님의 때에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주의 깊게 볼 표현이 있습니다.

이사야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For us a child is born, to us a son is given

아기는 태어난다고 하고 아들은 주어진다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존재는 전에도 이미 있었다. 이사야가 예언할 때가 그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사야가 예언한지 700년 후에 아기로 세상에 태어나면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아들이 태어났다고 하지 않고 아들이 주어진다로 표현합니다.

예수님이 인간이 되셨다. 아들은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속성을 가진다.

그는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고 불릴 것이다. (사 9:6b) he will be called wonderful counselor, mighty God, everlasting father, prince of peace



메시야의 오심은 하나님에 의하여 예언되었습니다. 사 7:14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부를 것이다. 아들을 낳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것이요, 신비적인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니 천사가 마리아와 요셉에게 소식을 전합니다.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 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과연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이 자기와 아버지가 하나님을 분명히 선포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10장을 보면 예수께서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행각을 거닐고 계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를 궁금하게 할 셈이오?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하였다. 그때 예수님은  "내가 이미 말했어도 너희는 믿지 않고 있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고 있는 이 일들이 나를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내 양이 아니므로 나를 믿지 않는다.  내 양은 내 음성을 알아듣고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내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며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아버지는 그 무엇보다도 위대하신 분이시므로 아버지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아 갈 자가 없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고 하였다. 그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여러 가지 좋은 일을 너희에게 많이 했는데 무엇 때문에 나를 돌로 치려고 하느냐?"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그런 일 때문에 우리가 당신을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하나님을 모독하기 때문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도 하나님인 체한단 말이오!"



하나님이 약속하셨고 약속대로 이루셨습니다. 아기가 태어나고 아들이 주어졌는데 그가 메시야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평강이 되고 소망이 되려고 오셨습니다. 그분은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그분은 하나님 자신,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신 임마누엘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믿고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 됩니다. 그리고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임마누엘이신 예수님을 인하여 새로운 확신을 가집니다.  



이런 심벌의 본적이 있습니까? 무엇을 나타냅니까? 물고기(fish). 차의 트렁크 뒷면에 이 심벌을 붙인 것을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명함에다가 이 심벌을 새겨놓기도 합니다. 그 심벌은 기독교와 관련된 것이지만 특별히 성탄절의 의미를 잘 요약해줍니다.



계속되는 로마의 박해 속에서 기독교인들이 체포가 되어 형장의 이슬로 살아갔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들로, 광야로, 카타쿰으로 피신하였습니다. 누가 기독교인인지 알 수 없었을 때 물고기 심벌은 자기의 존재를 알리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헬라어로 물고기는 “ΙΧΘUS”입니다. 그런데 그 단어는 신앙적으로 볼 때 아주 중요한 네 가지 진리를 담고 있는 약자가 됩니다.  



“I” 는 Iesous 즉 Jesus. 천사가 나타나서 마리아에게 이야기 합니다.

눅 1:31,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X” Xristos, 즉 Christ.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말합니다.

눅 2: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Θ” theos, 즉 God.

“U” uios,  son.

두 단어를 연결하면 하나님의 아들.

눅 1:35,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S”는 soter, 즉 savior

눅 2: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초대교인들이 믿던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구주입니다. 온전한 인간으로서 그의 이름은 예수입니다. 예수의 뜻이 무엇입니까?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그리스도 또는 메시야는‘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결국 구원자를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구주로서 죄의 징벌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보혈의 능력을 통하여 영생을 주신 분입니다. 이 물고기 심벌을 볼 때 성탄절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가 되기 위하여 오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라 할 수 있습니다. 물고기는 정말로 이 성탄절의 상징입니다.



2. 예수님은 당신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스스로 말씀하시든지 의식하십니다.

· 열두 살 때에

예수가 부모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하였다. 그러나 부모는 예수가 자기들에게 한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지 못하였다. (표준, 눅 2:49-50)

· 세례 받으실 때에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 3:17)

· 산상수훈에서 자신의 가르침을 구약과 같은 권위에 두시면서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 5:21-22)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 5:27-28)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마 5:31-32)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마 5:38-39)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3-44)



· 열두제자를 보내시면서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마 10:1)



· 전부터 계셨음을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요 8:48)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 17:5)



· 하나님 아버지와 당신을 동일시하십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요 10:30)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 17:11)



·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를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세상에 보내신 사람이,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말을 가지고, 어찌하여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하느냐? (표준, 요 10:36)



· 장차 능력과 영광 가운데 나타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마 25:64)

  

*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는 확신

우리는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자연재해가 있고 언제 어떤 사고가 우리에게 임할지 모르는 불확실한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갈등 속에 살아갑니다. 어려운 때에 살지만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고난에서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셨기에 고난을 피하게 하시든지 극복할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 관점을 가질 때 힘과 소망과 용기를 가집니다.



성경에는 임마누엘의 약속이 많이 주어져 있습니다.

사 43:1-2,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시 139:7-10,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임마누엘의 의식 속에 살기를 원하십니다. 비록 문제가 있고 대적이 있어도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평강을 가지고 소망을 가지고 기쁨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메시야로 구주로 하나님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궁극적인 치유, 평화, 소망을 약속하십니다. 또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믿음의 행동을 인하여 변화가 나타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존재를 인하여 세상이 달라지기 원합니다. 전에는 아무개 때문에 교회 안다닌다고 하던 대상이었던 사람들, 전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낙심을 시키는 사람들이 이제는 변하여 바로 그 사람들 때문에 예수를 믿고 싶은 사람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그들과 더불어 살아계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싶은 자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가 되시고 임마누엘의 주님이 되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이 자리를 떠나기 원합니다. 빛이 되시고 사랑이 되시고 소망이 되시는 주님을 붙들며 이 기쁨을 이웃과 나누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오심을 기념하는 성탄절에 임마누엘 주님의 참된 위로와 평강을 경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