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물을 좀 달라(요 4:1-15)

Author
Myung Myung
Date
2008-04-13 13:09
Views
4431
요 4:1-15  물을 좀 달라

지난 주 월요일 텍사스에서 캔자스대와 멤피스대 사이에 대학농구 디비전 1 결승전이 있었습니다. 후반 종료 10초를 남겼을 때만 해도 캔자스대는 60-62로 뒤진 데다 멤피스대에 자유투 2개를 내줘 패색이 짙었습니다. 그러나 멤피스대 선수가 자유투 1개를 놓치면서 캔자스대에 실낱같은 희망이 생겼습니다. 3점 뒤진 가운데 마지막 반격에 나선 캔자스대는 마리오 샤머스란 선수가 경기 종료 2.1초를 남기고 극적인 동점 3점포를 꽂으며 승부를 연장으로 몰고 갔습니다. 연장전에서 캔자스대는 기적 같은 역전승을 거두었습니다. 어느 사람이 각본을 써도 그처럼 극적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운동경기를 보면 전문가들의 예상이나 객관적인 전력과는 상관없는 의외의 결과가 많이 나옵니다. 이래서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결과는 운동경기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여정에도 그런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성경에도 보니 역전 드라마가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한 여인을 찾아가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셨기에 유대인들 뿐 아니라 그들에게 멸시를 당하는 사마리아인들도 구원하기 원하셨습니다. 보잘것없는 시골 처녀인 마리아를 선택하여 예수를 낳게 하신 하나님은 수가성에 사는 한 죄 많은 여인을 택하여 그 성에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성경에 그 여인의 이름은 나오지 않으나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인들은 수가성 여인과 그가 한 행동을 기억합니다. 여인이 예수님과 어떻게 만났기에 그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여인처럼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며 그 베푸신 사랑에 감격하며 새로운 주님의 역사에 참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전체적인 흐름을 알기 위하여 본문과 함께 그동안 설교했던 요한복음 2장과 3장도 복습하겠습니다. 2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첫 번째 표적을 행하십니다. 포도주가 떨어져 파장이 된 결혼잔치에서 예수님이 맛있는 포도주를 만드심으로 흥겨운 잔치가 되었습니다. 유대교는 마치 포도주가 떨어져 파장한 잔치와 같다는 뜻입니다. 거기에는 진정한 기쁨도 생명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 표적을 통하여 유대교를 완성하여 하나님 나라의 구원 잔치를 가져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 환전하는 자들을 내쫓으며 시위를 하셨습니다. 인간이 지은 죄를 제물의 피로 덮어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는 것이 성전 제사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제 유대교의 예루살렘 성전은 그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유대인들의 타락한 성전 제사를 더 이상 받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의 죽음이 성전 속죄 제사의 완성으로서 모든 피조물이 죄용서를 받고 창조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가 구약과 유대교를 완성하여 종말의 구원을 가지고 왔다는 것은 모세의 시내 언약체계에서 더 이상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3장은 니고데모의 등장으로 시작됩니다. 그는 모세의 시내 언약체계를 기초로 한 정통 유대교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유대인들의 관원이요, 경건한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선생이요 진리를 겸손히 찾는 사람입니다. 세상적인 것으로는 남부러울 것 없이 다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가 어떠합니까?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영생을 얻을 수 없다.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위로부터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이 기쁜 소식, 즉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지만 예수님을 거부하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심판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심판을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구원의 길로 가지 아니하면 출애굽 때에 모세가 쳐든 구리뱀을 보지 않아 죽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수가성 여인이 어떻게 역전승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까?  

1) 예수님이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항상 하나님의 찾아오심과 사람들의 긍정적인 반응이 마주 칠 때 일어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찾으시는 대상은 세상적인 조건을 보고 선택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보다 세례를 더 많이 준다는 소문이 바리새인들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보다 더 경계 대상이 되었습니다. 아직은 때가 아닌지라 예수님은 그들과의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시려고 예루살렘을 떠나 북쪽에 있는 갈릴리로 가십니다. 본문은 그 여정 중에 일어난 일을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길로 가십니까?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3절) 예수님의 단호한 의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일정이 바뀌거나 급한 사정이 있어 어쩔 수 없이 사마리아로 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특별한 계획이 있어 사마리아로 가십니다. 보통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가려면 세 가지 길이 있습니다.

1) 서쪽: 지중해 해안을 따라서 가는 길, 2) 동쪽: 요단강을 건너 베뢰아 지방으로 우회하는 길,

3) 가운데: 사마리아를 가로질러 가는 길. 그 길을 이용하면 예루살렘서 갈릴리까지 3일이면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지름길인줄 알면서도 사마리아로 가기를 꺼려하였습니다. 주전 722년 북 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사마리아가 함락되자 앗수르는 메대와 페르샤 사람들을 그 지역에 이주시켜 유대인과 섞여 살게 함으로 민족의 정체성을 없애버리려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남쪽 유대 사람들은 혈통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유대인으로서의 순수성을 잃어버린 사마리아인들을 부정하게 여기고 이방인 취급을 하며 멸시하였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를 만나신 예수님은 수가 성 여인도 만나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적인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편견을 넘어 그들을 찾아가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수가 성에 도착했을 때에는 정오가 가까웠습니다. 뜨거운 팔레스타인 지방의 햇볕 아래 몇 시간을 걷고 나니 예수님도 지치고 배고프시고 목이 마르셨습니다. 흔히 예수님 하면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분, 병자를 고치시고 심지어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하시는 신적인 존재로만 생각하지만 그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십니다. 예수님도 우리처럼 아파하시고 슬퍼하시고 눈물도 흘리셨습니다. 우리와 다른 점이 있으시다면 항상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그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우물곁에 앉으시고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마침 사마리아 여인 하나가 물을 길러 옵니다. 우연의 만남 같지만 예수님은 바로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하여 일부러 사마리아 지방에 오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접근하시나 여인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어색하게 만납니다. 우물가는 여인들의 장소입니다. 여인들은 그곳에서 교제를 가지고 소식도 듣습니다. 그러나 수가성 여인은 오히려 동네 아낙들을 피하여 그들이 오지 않는 뜨거운 대낮에 물을 길러 왔습니다. 그 여인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소외된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 예수님이 우물가에 계셨습니다. 잃어버린 양 하나를 구하기 위하여 뙤약볕을 걸어 우물가로 오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니고데모와 수가성 여인은 너무도 대조적입니다.

니고데모는 세상적으로 볼 때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습니다.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배운 것도 많고 가진 것도 많은 유대인입니다. 수가 성 여인은 세상적으로 볼 때 무엇 하나 갖춘 것이 없습니다.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결혼도 여러 번 실패하였습니다. 그야말로 바닥인생입니다. 그 여인은 유대인들로부터 멸시받는 사마리아인입니다. 그 여인은 자기 동네 사람들에게조차 멸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니고데모와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는 모습도 대조적입니다.

니고데모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여 밤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수가성 여인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여 대낮에 우물가를 찾다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본문은 현재 나의 상태, 환경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경험하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여기에 나타납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

눅 15:4,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그 사랑을 가지고 예수님은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오셔서 수가성 여인을 만나십니다. 그를 구원하실 뿐 아니라 그가 귀한 사명을 감당하게 하기 원하십니다.  



요한복음 3장의 교훈이 무엇입니까? 니고데모도 구원받지 못할 수 있다. 세상적으로 볼 때 수가성 여인은 니고데모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니고데모가 현재 상태로 구원받지 못한다면 수가성 여인은 당연히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우리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4장의 교훈이 무엇입니까? 수가성 여인도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수가성 여인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영생을 누릴 수 있다고 합니다. 무엇을 말해줍니까? 구원은 세상적인 조건이나 행위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열심에 달린 것도 아닙니다. 여기에 믿음의 묘미가 있습니다. 수가 성 여인처럼 주님의 사랑을 극적으로 경험한 분들도 있을 것이고 극적이지는 않으나 나름대로 주님의 사랑을 체험한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아직 그런 경험이 없으시다면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나를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내게 믿음 주시옵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과학을 개발하고 철학을 연구한다 할지라도 그것으로는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인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니고데모같이 종교심을 가졌거나 율법을 잘 지킴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위에서 오는 성령의 힘으로 거듭나야만 하나님에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성령을 받고 하나님을 알고 영생을 얻습니다.



여인이 역전승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는

2) 여인이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항상 하나님의 찾아오심과 사람들의 긍정적인 반응이 마주 칠 때 일어납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여인을 위하여 구원의 선물을 준비하셨지만 여인이 예수님 곁을 떠나버렸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상대방의 형편과 처지에 따라 접근 방법과 내용을 달리하십니다. 영생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던 경건한 유대인인 니고데모에게는 거듭나는 문제로 말문을 여셨습니다. 지금 우물가에 있는 예수님과 여인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두 사람 다 목이 마르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공통 화제인 물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은“물을 좀 달라” 하며 말문을 엽니다.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죄 많은 여인과 만나는 순간입니다. 평소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우물가였지만 지금은 예수님과 여인 두 사람밖에 없습니다. 여인은 유대인 남자가 자기에게 말을 걸자 깜짝 놀랍니다. 보통 경건한 유대인은 공중에서 낯선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지 않습니다. 더구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교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은 그런 사회적인 제약이나 장벽을 넘어서 여인에게 접근합니다.  4:9,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예수님은 유대인의 남자로 오신 것이 아니라 그런 문화적 한계를 초월하여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에 속한 분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속한 분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질문에 답하지 않으시고 또 다시 물과 관련하여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4:10,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다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예수님이 무엇인가 주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은 피곤하고 목이 말랐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목 말라 하신 것은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목마름 때문입니다. 영혼구원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수가서 여인입니다. 또한 여인의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다른 차원의 물을 말씀하신 것이지만 여인이 알 리 없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는 성령을 통하여 주시는 풍성한 삶이지만 여인은 생수를 단순히 마시는 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예수님에게 우물도 깊고 물을 길을 그릇도 없는데 당신은 어떻게 나에게 생수를 주겠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면서 여인은 우리 조상 야곱이 생수가 나오는 우물을 사마리아인들에게 주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합니다. 당신이 생수를 준다는데 그렇다면 당신이 야곱보다 큰 자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야곱보다 큰 자이시고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 분입니다. 남의 눈을 피하여 한낮에 물을 길러 우물가에 온 여인이지만 처음 보는 유대인 남자와 대화하는 동안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마음이 열리며 대화에 끌려 들어갑니다.



사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마음과 마음을 터놓고 나누는 대화입니다. 지난 주 일간지의 제목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우리 말 좀 하고 살아요” 어떤 부부는 맞벌이를 하다 보니 밤에나 겨우 얼굴을 볼 정도이고 만날 시간이 부족하다 보니 사소한 일에도 짜증을 내기는 일이 잦아졌고 그러다 보니 부부 간의 대화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또 어떤 부부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업을 하면서 항상 붙어 지내다보니 무덤덤해져 사는 맛을 못 느껴 이혼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고 합니다. 분주한 이민 생활 속에서 시간에 쫓기고 마음에 여유가 없다보니 부부 간에 더 나아가서 부모와 자식 간에 대화가 단절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가족 간의 갈등이 점점 심해집니다. 교인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화가 부족하다보니 간혹 오해가 생겨도 풀 기회가 없고, 자기의 입장에서만 남을 판단하려다 보니 더욱 문제가 커집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상대방의 필요를 그 문제를 가지고 대화를 이끌어 가십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관심을 가지는 것에 마음을 두기 때문입니다. 그러려면 상대방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필요를 파악해야 합니다.  귀찮게 생각마시고 오늘 저녁부터 연습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의 첫 단계가 죄인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13-14,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의 영적인 의미는 알 리가 없는 여인은 그저 물을 준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입니다. 한번 마시면 다시 목마르지 않는 그런 물이 있다구요? 그런 물을 자기에게 달라고 합니다. 물론 여인의 대답한 엉뚱한 것이지만 그 말 속에 여인의 필요가 담겨져 있습니다. 사람들의 낯을 피하여 뜨거운 대낮에 물을 길러 오기 지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물을 길러 우물가에 오지 않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여인이 예수님과 대화를 통하여 어떻게 변화되는 지는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마리아 성에도 복음이 전해지기 원하셨습니다. 제자들을 동원하여 전도하실 수도 있었지만 한 소외된 여인, 구원과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이 여겨지던 여인, 고통과 공허함을 가진 여인을 택하시고 사용하셨습니다. 그 여인에게 필요한 것은 당장의 냉수 한 그릇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었습니다. 더 이상 쓸모 없는 여인이 아니라 그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인간으로서의 가치 회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생각도 못해본 여인,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고 꿈도 꾸어보지 못한 여인, 예수님을 만날 아무런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던 여인이 자기를 직접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남을 계기로 죄 용서함 받고 구원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죄로 인하여 소극적이고 부정적이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니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가지게 되고 하나님이 귀하게 쓰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구원의 감격을 인하여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그 여인의 마음속에는 이 예수를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샘솟았습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갑니다. 왜 물동이를 버려두었습니까? 진정한 생수를 발견함으로 진정한 만족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만난 체험이 너무도 분명하니 자기가 만난 예수를 남들에게 담대하게 전합니다. 그가 전하던 자들이 누구입니까? 전에 자기에게 손가락질 하던 사람들 아닙니까? 어떤 내용을 전합니까?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 사람은 우리가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야라. 여인은 기쁨이 충만하여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아랑곳하지 않고 동네를 뛰어다니며 다니며 예수님을 전했을 것입니다. 복음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여겨지던 여인이 예수를 만나고 나니 변화를 받고 도리어 복음을 전파하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 여인으로 인하여 더 많은 사람이 우물가로 나와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말씀을 직접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본 백성이라 자부하던 유대인들은 아직 예수님을 모릅니다. 도리어 배척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에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이라고 멸시를 당하던 사마리아 사람들이 먼저 예수님을 발견하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아노라 하며 예수님을 만난 담대한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여인이 역전승의 기쁨을 맛보니 여인이 살던 동네 사람들도 예수님을 영접하며 그들도 역전승의 기쁨을 맛봅니다. 무시하던 여인, 천덕꾸러기로 생각되던 여인이 도리어 그들에게는 복덩이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 수가성 여인을 변화시킨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수가성 여인을 둘러싼 아름다운 구원의 역사는 지금도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나는 소외되었다. 나는 능력도 별로 없다 하는 일마다 되는 것이 없다고 낙심하거나 자신감을 잃고 계신 분은 안 계십니까? 부정적인 생각, 섭섭한 생각 등에 사로잡히고 모든 것이 귀찮게만 여겨지지 않습니까?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도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은 지금도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전세계 복음화에도 관심을 가지시지만 한 영혼 한 영혼에도 관심을 가지십니다.



우물가에서 목마른 두 사람이 만났습니다. 그 만남은 여인에게는 역전승을 가져다 준 만남이었습니다. 2002년 월드컵이 한국에서 열렸을 때 히딩크 감독은 ‘나는 아직도 목마르다’ 하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지금까지 거둔 승리에 만족하지 않고 세계 강호들을 상대로 더 이기고 싶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상에서 “내가 목마르다” 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목말라하십니다. 예수님 당시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의 목마름을 어떻게 해결해 드렸습니까? 예수님을 영접하였고 그가 만난 예수님을 동네 사람들에게 전하였습니다. 지금은 예수님의 목마름을 누가 해결합니까? 저와 여러분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목마름을 해결해 드려야 합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먼저 주님을 만나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주님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경험한 주님, 그분에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전에는 육신을 입으시고 다가오셨지만 지금은

1) 말씀으로 다가오십니다.

2) 택하신 사람들을 통하여 다가오십니다.

* 예수님은 여인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목마름을 해결하여 드렸습니다.

* 이제는 우리가 예수님의 목마름을 해결해 드려야 합니다.  



마셔도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는 목마른 영혼을 누가 채울 것인가? 돈이나 권세, 취미생활, 쾌락이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을 주지는 못합니다. 세상에서는 가진 자가 더 많이 가지려고 하고 누리는 자가 더 많이 누리려고 합니다. 오직 예수 안에서 만족을 얻고 참된 안식을 누립니다. 병든 자를 치료하고 상처 받은 자를 싸매 주고 영생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물을 좀 달라” 하면서 지금도 다가오시는 주님. 그분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분과의 만남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인생을 걸고 사랑할 만한 분, 우리의 인생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분. 그분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예배를 통하여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나타나 주시고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남으로 각자의 향한 삶의 의미와 목적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굴레에서 자유함을 얻게 하신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영혼이 잘될 때 범사가 잘되고 강건해집니다. 또한 성도들과의 교제를 통하여 각자가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눌 때 그 경험이 더욱 풍성해집니다. 오늘도 주님은 이런 자들을 찾으십니다. 주님을 만나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시는 체험을 하며 수가성 여인과 같이 하나님의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으며 주님을 시원케 해드리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