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 3:13-21)

Author
Myung Myung
Date
2008-04-06 13:19
Views
4864
요 3:13-21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살다보면 크고 작은 선택을 많이 합니다. 어떤 학교를 선택할 것인가, 어떤 직장을 선택할 것인가, 한국 같으면 이번 총선에서 어떤 후보에 표를 찍을 것인가 등등에서부터 오늘 반찬은 무엇으로 할까 무슨 옷을 입고 나갈 것인가 등등 하루에도 여러 차례 선택을 해야 합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사소한 선택이 있는 반면에 선택을 잘못 했다가 두고두고 후회하고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그 피해가 아주 오래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특히 배우자를 선택할 때 믿음이나 사람 됨됨이를 보기보다 외모나 조건 만을 지나치게 따지고 결혼했다가 낭패를 당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친척도 Cal Tech을 나와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돈도 잘 벌었습니다. 그런데 아는 사람의 소개로 여자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그 여자는 물론 그 집안이 믿지 않습니다. 장인 되는 사람은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에서 조폭과 관련 있던 사람입니다. 처갓집의 농간에 넘어가 돈은 돈대로 날리고 마음고생은 많이 하고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결국 이혼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당한 처지가 너무 기가 막혀 눈물을 흘렸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후회 없는 선택, 두고두고 기쁨을 주는 선택을 할 수 있습니까?



본문을 보니 상반되는 개념들이 여러 개 나옵니다. 영생과 멸망, 구원과 심판, 빛과 어두움. 이것들은 현재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하는 중요한 것들입니다. 어떤 선택이 후회 없는 선택입니까? 믿는 사람들이 보면 쉬운 선택 같은데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지나가는 사람 붙들고 예수 믿어 영생을 얻고 구원을 얻고 빛 가운데 행하라고 하면 과연 얼마나 제대로 선택하겠습니까? 많지 않을 것입니다. 왜 우리에게는 선택할 것이 분명한데 그들은 선택할 것을 제대로 선택하지 못합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선물을 주신 하나님을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영생과 멸망, 구원과 심판, 빛과 어두움. 선택은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으나 문제는 선택에 따른 결과는 우리가 더 이상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바른 선택을 하면서 좋은 열매를 많이 거두어 장차 주님 앞에 섰을 때 거둔 열매로 주님의 칭찬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영생이냐 멸망이냐(3:13-15)

세상에서 존귀한 자인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 선 그의 모습은 한없이 초라했습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은 많았으나 그 지식이 그를 구원으로 인도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때 니고데모도 보통 유대인들과 다를 바 없이 거듭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니고데모가 가졌던 구원관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순간이었습니다. 니고데모를 지탱해왔던 권력, 명예, 학문, 부귀 등은 아래로부터 온 것이기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율법을 지키고 거룩한 삶을 살려고 애를 써도 그것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거듭남의 의미는 다시 난다는 것과 더불어 위로부터 난다는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나야합니다. 니고데모도 위로부터 온 것으로 채워져야 비로소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위하여 하늘로부터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만이 하늘에 있는 일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늘에 올라가 본 경험이 있는 분이 아니라 하늘에 원래 계시던 분입니다. 그렇기에 하늘의 일, 즉 인자의 죽으심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친히 그리고 유일하게 증거하실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아들이 위에서 아래로 왔습니다. 위에서 왔기에 위로 올라갈 수 있는데 마치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 뱀을 든 것 같이 들려 올려져야만 가능합니다. 들림 받다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아래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땅에서 들려 올려지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위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가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감을 뜻합니다. 요한은 들린다는 표현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달리심과 부활을 함께 묶어서 이야기 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영생에 대한 언급하십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의 수난을 수난이라기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높여짐, 또는 예수가 영광을 받는 사건으로 그립니다.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8:28, 12:32, 34)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옵니다. 오직 위에 계신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없는 니고데모조차 아래에 있는 것들로부터 구원을 얻으려 한다면 실패합니다. 니고데모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영생을 얻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위에서 오신 분으로서 예수가 십자가에 들려 올려짐으로 가능합니다. 구원은 그리스도가 가져온 죄의 용서와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도록 한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서만 가능합니다. 마치 모세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리뱀을 바라볼 때 구원을 얻은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민수기 21장에 나온 사건을 언급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를 지나면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고, 이 지겨운 만나도 싫증이 난다고 불평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독사를 보내셔서 물게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독사에 물려 죽었다.  그러자 백성들이 자기들의 죄를 뉘우치고 모세에게 기도를 부탁하니 하나님은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아 뱀에 물린 자가 그것을 보고 고침을 받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놋뱀을 쳐다본 자는 살았습니다. 그러나 의심하고 땅만 바라본 자들은 다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 받을 길을 분명히 알려주셨는데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자들은 죽었습니다. 놋뱀을 바라본 자들이 구원을 받은 것처럼 예수를 믿는 자가 구원을 받습니다. 죄가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느냐 아니냐가 구원의 기준이 됩니다. 죄가 우리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불신앙이 죽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그 의로 구원을 얻게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왜 망했습니까? 단지 죄가 많아서라기보다 그들을 구원할 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많은 죄에도 불구하고 의인 열 명만 있으면 멸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들에게 영생이 주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거듭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바라보지 않는 자들은 멸망을 당합니다.



영생이 무엇입니까?

'영생'을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장차 올 세상의 삶' ("life of the world to come")입니다. 이 세상을 떠난 후의 삶입니다. 영생은 단지 육체적으로 죽지 않고 계속해서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누릴 영생은 영원하신 예수님과 더불어 교제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육체적으로 죽어도 우리는 주 안에서 영원히 삽니다. 그러나 육신이 살아 있어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 앞에 영생과 멸망이 있습니다. 영생이냐 멸망이냐 선택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우리가 선택할 수 없습니다. 선택에 따른 책임을 우리 각자가 져야 합니다.



구원이냐 심판이냐(3:16-17)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은 성경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생각할 때 우리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 큰 사랑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말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구원받는 길의 유일성과 믿는 자에게는 누구든지 구원이 주어지는 개방성을 동시에 의미합니다.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영어로 선을 뜻하는 "good"이라는 단어와 하나님을 뜻하는 “God"이라는 단어와 어원이 같습니다. 모든 선은 하나님께 속한다는 의미입니다. 선을 잘 표현하는 단어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을 주심으로 잘 표현이 되었습니다. 구원을 받을 만한 아무런 자격도 없는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구원하십니까?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전에도 세상을 사랑하셨고 지금도 세상을 사랑하시고 앞으로도 사랑하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세상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반역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마음의 생각이 항상 악하여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5:10에서 이 세상이 하나님과 원수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이 세상에 저와 여러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우리에게 기쁨을 줍니까? 더구나 그 사랑하는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인 것을 알게 될 때 얼마나 위로가 되고 힘이 생깁니까? 그 사랑을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나를 사랑하신다는 고백을 날마다 해야 합니다. 나의 부족함,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사랑으로 지금도 나를 붙드신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그런 믿음이 있었기에 온갖 고난 속에서도 주님의 원하시는 삶을 살고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말로만 사랑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시기에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세상에 육신을 입으시고 오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입니다. 단지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피흘림이 없으면 죄사함이 없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 아들의 생명을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셨습니다. 롬 5:7-8,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보여주신 사랑의 극치입니다.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것은 아들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자에게 큰 선물을 주십니다. 그 선물이 바로 영생입니다. 누구든지 이 아들을 믿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단하는 자들에게 영생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Highway Patrol car가 다리 밑이나 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 있다가 과속으로 달리는 차량을 보면 쏜살같이 나타나 티켓을 줍니다. 교통법규를 위반하여 티켓을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굳이 이런 식으로 치사하게 단속을 해야 하는가 하면서 잡히는 사람 쪽에서 볼 때는 기분이 나쁩니다. 그러나 경찰 쪽에서 볼 때는 그렇게 해야 단속실적도 올라가고 사람들에도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잠복하거나 함정수사를 하여 우리를 잡으려고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심은 심판이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낱낱이 기억했다가 그것에 합당한 벌을 내리려고 준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지으신 분이기에 누구보다도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십니다. 아들을 보내신 것은 우리에게 심판의 무서움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잘못 이해하면 심판만 생각하는 고약한 하나님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교회사를 보더라도 구약의 하나님의 심판하는 하나님이요 신약의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신 사랑의 하나님이라 하면서 신구약의 하나님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은 그런 자들의 생각이 잘못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를 책망하시기보다 위로하고 격려하고 치유하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고후 6:2) 이라고 선포합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때가 끝나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지금 믿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복음서 전체의 주제선언과도 같은 핵심구절이요 구원의 보편적인 원리를 제시합니다. 따라서 복음서 전체를 하나님의 넓은 사랑에 비추어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유대인만을 사랑하셔서 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교회만을 사랑하셔서 오지 않으셨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게 하심으로 패역한 세상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모든 시대와 지역, 인종을 초월하여 빈부․귀천․남녀․노소의 차이가 없이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습니다. 교회의 그릇된 고립주의 또는 배타주의를 피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구원이냐 심판의 선택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우리가 선택할 수 없습니다. 선택에 따른 책임을 우리 각자가 져야 합니다.



빛이냐 어두움이냐(3:18-21)

본문은 구원과 심판의 현재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이미 받은 것이지 죽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이미 현재에 영생을 경험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우리의 삶을 성화의 삶이라고 합니다. 날마다 거룩하여져 가는 삶입니다. 날마다 예수님을 닮아가면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갑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지금부터 천국 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기쁨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믿는 사람으로 빛의 자녀로서 살아야 합니다.



심판도 마찬가지입니다. 심판은 세상의 마지막 때에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한 자 즉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믿지 않으면 최후의 심판날이 이르기 전에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온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자기들만 구원 받고 온 세상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편협한 것으로 전락시켰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요 원수 된 상태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왜 예수를 영접하지 않습니까? 왜 복음을 듣고서도 믿지 않습니까? 복음이 삶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것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고 죄악된 삶을 청산하여 새로운 삶을 살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고상한 말씀은 좋아하지만 예수 앞에 나아와 회개하고 죄악을 버리고 나오는 것을 싫어합니다. 다른 사람은 달라져야겠다고 하면서 자신은 달라지기 싫어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 죄악된 삶을 버리기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저질러온 죄악들과 숨겨온 죄악들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 어두움에 머물기를 좋아합니다. 예수님이 심판을 받는 자들에게 주는 판결문이 무엇입니까?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도리어 어두움을 사랑했다. 악을 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봐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나아오지 않는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아직까지 우리 속에 빛보다 어둠을 사랑하려는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으며 긍정적인 자세로 나아가기보다 안 될 것을 먼저 생각하며 부정적인 자세를 가질 때가 있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을 의지하며 소망을 갖기보다 낙심하거나 섭섭해 하거나 불평을 먼저 털어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삶은 진리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여기의 진리는 객관적인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진리가 예수님 자신입니다. 참 진리를 좇는 자들은 빛으로 나아옵니다. 자신의 부족과 죄악됨을 인정하고 주님께 나아옵니다. 주님께 가까이 나아갈 때 죄에서 자유함과 온전한 치유와 회복을 경험합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이 생명으로 가는 길이요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순종의 삶입니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빛과 거룩을 따라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놀라운 일들을 세상에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삶입니다. 빛이냐 어두움이냐 선택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우리가 선택할 수 없습니다. 선택에 따른 책임을 우리 각자가 져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을 계시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계시자임과 하나님의 계시자로서 하나님과 같은 분임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아들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고 아버지가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3장은 위에서 오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들려 올려짐으로써 하나님의 사랑과 힘을 계시하고 아래 세상 사람들이 영생, 곧 신적 생명을 얻는 구원을 가져다준다고 선포합니다. 영생을 얻기 위하여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예수님 성육신의 목적은 누구든지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을 초림이라고 한다면 다시 오시는 것은 재림입니다. 초림은 구원을 주기 위한 것이지만 재림은 심판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는데 영접하지 않은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현재의 삶 자체가 심판 아래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있는 세상을 향하여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가요?

나 자신이 믿음에 있는지 먼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의 삶속에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고 어둠 속에 속한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어두움의 요소들을 비워버리고 하나님의 아름다운 것으로 채움받은 후 우리의 시선을 세상으로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을 기억하며 이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야 합니다. 구원의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합니다. 언제 주님이 오실 지 알 수 없습니다. 초림 때는 구원을 위하여 오셨지만 재림 때는 심판하러 오십니다.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영혼 구원에 대한 긴급한 마음이 생깁니다. (롬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예수님의 재림이 왜 늦어집니까?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대통령이 장로요 장관이 장로라 자동적으로 나라가 깨끗하게 되고 부정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성도로서의 삶을 살 때 변화가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교회당에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 직장, 학교, 시장 모두가 믿음을 나타내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주일뿐만 아니라 일주일 내내 소금과 빛이 되는 Everyday Christian 이 되어야 합니다. 성가대에 참여하고 회계 업무를 보고 주일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도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일이지만 우리가 안 믿는 자들은 섬기는 것도 선한 일입니다. Food Bank Drive를 통하여 저소득층을 섬기는 것도 선한 일입니다.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Care enter를 방문하여 노래와 율동으로 섬긴 것이 좋은 반응을 보여 다시 정기적으로 와주었으면 한다고 합니다. 방문함으로 그들에게도 위로를 주고 또한 어린이들에게도 새로운 세계를 보여줌으로 도전을 주고 신앙 성장에 좋은 기회가 됩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입니다. 소금은 짠맛을 내어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하고 빛과 같이 어두움을 환히 비추어야 합니다. 이처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세상의 빛을 비추는 믿음의 주역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