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왕이신 예수님 (요 12:12-19)

Author
Myung Myung
Date
2008-03-16 14:33
Views
4591
요 12:12-19 왕이신 예수님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게 마련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이라고 히브리서 9:27에 나옵니다. 금주가 나의 인생에 마지막 주간이라 생각할 때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먹고 싶은 것 실컷 먹겠습니까? 평소에 꼭 가보고 싶은 곳을 방문하겠습니까? 내가 이렇게 돈을 버느라고 얼마나 애를 많이 썼는데 제대로 누려보지 못하고 떠나는 것에 대하여 안타까워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어떠하셨습니까? 그분은 평소와 다름없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마지막을 향해 담대하게 나아가십니다.



본문을 보니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합니다. 그의 생애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입니다. 방문 이유는 외관상 유월절을 지키기 위함이지만 이전의 방문과 달리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게 방문하십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어‘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위함입니다. 이제 닷새만 있으면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대속의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그래서 이번 유월절은 지난 1500년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오던 유월절과는 의미가 아주 다른 유월절이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는 마지막 사역을 앞두고 왕으로 등극하신 것은 자기 백성들의 왕으로서 모든 언약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왕으로 선포되신 예수께서는 자기 백성에 대하여 대표성을 가집니다. 그 왕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그의 모든 백성이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의미를 가지게 되며 그가 부활하셨을 때 그의 모든 백성 또한 그와 함께 부활에 참여하는 의미를 갖게 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1)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를 일으키는 표적을 보이셨습니다. 그 장면을 본 많은 사람들이 이를 통하여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미워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찾아가 이 사실을 알립니다. 표적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표적을 많이 행하셨다면 당연히 그분을 믿고 구세주로 따르면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부하였습니다. 자기들이 누리던 작은 기득권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에서 제사장들이 속죄제사를 드립니다. 특히 일 년에 한번 있는 구속의 날에는 유대 민족 전체의 죄를 씻기 위하여 대제사장이 속죄 제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대제사장 가야바가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요 11:50) 하며 예수를 죽이기로 작정한 것은 바로 온 민족을 구원하기 위한 제물로 예수를 바치겠다고 선언한 셈이 됩니다. 가야바나 빌라도를 비롯한 세상의 통치자들은 그들의 지혜를 총동원하여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뜻에 대항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악한 행동을 이용하여 도리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만인을 위한 속죄제사로 삼으심으로 만인을 구원하고자 하는 구원 계획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인간의 지혜보다 낫다”(고전 1:25)고 하였습니다.  



2) 마리아는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전 베다니에 들렀을 때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드립니다. 여기에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14:3-9) 예수의 기름부음 받음이 예루살렘 입성 후에 일어나며 머리에 부어지는 것으로 기록됩니다. 요한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전에 발에 받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와 요한은 예수님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음을 공통적으로 보여줍니다. 즉 예수님의 왕 되심을 강조합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의 심문을 하면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요 18:33) 한 이유도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본문에 보니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것에 대하여 여러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1. 무리(12-13, 18절)

본문에는‘무리’라는 단어가 세 번 나옵니다. 12절, 17절과 18절. 먼저 17절에 등장하는 무리는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내실 때 곁에서 그 장면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12절과 18절에 나오는 무리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전 세계에서 모여든 순례자들입니다. 요세푸스가 쓴 유대인 전쟁사에 따르면 네로 당시에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모여든 사람은 약 270만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것입니다. 교통도 불편하던 시절에 이렇게 많이 모인 다는 것은 그들의 종교적 열심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예수님을 열광적으로 환영합니까?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것을 본 사람들의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무리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의 종교적인 성격은 예수님을 맞이하면서 구약성경을 인용하는 데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시 118:26)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오실 자에게 대하여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마 3:11) 세례자 요한이 보낸 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마 11:3) 이것은 바로 메시아에 대한 기대입니다. 이들은 예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오시는 이’라고 부릅니다. 무리는 시편 구절에다가 스바냐 3:15절에 나오는 “이스라엘 왕”을 덧붙입니다. 이렇듯 메시아가 오심을 기대하며 구약을 인용하고 있지만 메시아에 대란 이해는 예수님의 것과 다릅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이스라엘의 왕’은 무력으로 정복하는 왕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여 로마에 대항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합니다.



무리의 열광적인 환영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어떤 반응을 보이십니까?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가십니다. 공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어린 나귀를 구하여 타고 가시는지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맞은편 마을로 가서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어린 나귀를 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나귀를 매고 있는 줄을 풀 때 혹 나귀의 주인이나 이웃 사람들이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답변할 것까지 일러 주십니다. 제자들이 가니 과연 나귀 주인이 나타나 제자들에게 물었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전하였더니 나귀 주인이 어린 나귀를 순순히 내어주었습니다. 그 나귀를 가지고 온 제자들은 자신들의 겉옷을 그 위에 올려놓고 예수님을 태우며 예루살렘을 향할 때 무리들이 자신들의 겉옷을 길 가에 펼치며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맞이합니다.



2) 제자들(16절)

제자들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동행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나귀를 끌어오며 무리와 함께 예수님을 왕으로 맞이하는 일을 합니다. 제자들은 이 사건의 시종을 목격한 증인들입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쏟아지는 무리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으쓱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해하는데 느렸습니다. 성경의 예언이 자기들의 눈앞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삼년동안 한솥밥을 먹으며 함께 지내고 바로 곁에서 예수님의 모든 사역을 지켜본 제자들이지만, 예수님은 단순한 선지자나 선생이나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아닌 메시아인 것을 고백한 제자들이지만, 아직도 영적으로 우둔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알았지만 어떤 왕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 왕이 어린 나귀를 타야했는지 그 의미도 알지 못했습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하니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실 때 제자들은 잠이 들었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였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두려움을 인하여 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스가랴가 예언한 내용이 예수님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을 깨달은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였습니다. 제자들은 무지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당신을 향한 구약의 예언을 하나하나 이루십니다.



3) 바리새인(19절)

무리의 반응에 대제사장들은 당황합니다. 하나님의 승리가 다가오는데 종교지도자들은 이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며 세상이 자기들이 아닌 예수님을 좇는 것에 절망합니다. 냉소적으로 말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진실을 말한 셈이 됩니다. 자신들이 예수를 대적하기 위하여 계획하고 추진하는 일들이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을 암시합니다. 그들이 그토록 원하는 세상은 자신들의 것이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평가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으시고 묵묵히 자기의 길을 가십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12:32) 실제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들려 올려지면서 온 세상을 자기에게로 이끌게 됩니다.



*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 왕

다윗이 주변의 이방 족속들을 차례차례 물리친 후에 그 땅에 전쟁이 그치자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둘 성전을 지으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더구나 자신이 살고 있는 궁전은 화려하고 아름다운데 성전은 아직 지어지지 않은 것이 마음에 상당한 부담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하나님의 선지자 나단을 불러 자기 마음의 품은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삼하 7:2,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려는 것은 자기 이름을 드러내거나 자신의 권세를 자랑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백성들로 하여금 성전에서 마음껏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함입니다. 그날 밤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전하십니다. 전쟁에서 피를 많이 흘린 다윗 대신에 그의 아들 솔로몬을 통하여 성전을 지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성전을 짓겠다는 기특한 마음을 가진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약속하십니다.  다윗의 후손을 통하여 다윗의 나라를 견고케 하시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게 하며, 그 나라를 영원한 나라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예언은 일차적으로 솔로몬을 통하여 일부 이루어졌지만 궁극적으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은 나단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언젠가는 다윗의 후손 중에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메시야가 올 것을 대망해왔습니다.  



‘예수님의 왕’ 되심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다윗 왕조를 재건하여 실제로 정치적 왕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범한 죄를 씻는 속죄 제사와 하나님의 새 백성을 창조하는 새 언약의 제사로 자신을 바침으로써 하나님의 의로운 새 백성을 창조하여 그들 위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당한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로운 새 백성을 창조하여 그들 위에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왕이 됩니다. 이를 나타내기 위하여 요한복음 12장 앞부분에는 예수께서 마리아를 통하여 발에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기록합니다. 이로써 예수의 장례 치름을 상징하여 그의 죽음이 곧 그가 왕으로 등극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고자 하심은 예수님이 오시기 500년 전에 선지자 스가랴가 한 예언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어린 나귀니라.” 이 예언에 의하면 왕적 메시아로서 예수님의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또한 무리들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라 외쳤는데 ‘주’로 번역된 Kyrios는 만물을 다스리는 지배권을 뜻하는 왕으로서의 그분의 이름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무리들이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면서 예수님을 높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을 이루신 평화의 왕이십니다.  



2) 구주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가시는 모습을 보며 무리들이 환호합니다.  막 11:9-10,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이것은 메시야를 대망하던 사람들이 예수를 메시아로서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Hosanna 는 아람어인 hoshana를 발음대로 표현한 단어로, 시 118:25에 보면“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하며 여호와께 구원을 구하는 짧은 기도가 나옵니다. 호산나는 “구원해 주시옵소서(save us)” 라는 뜻을 가집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로마를 제압하고 하나님 나라를 회복할 영광과 승리의 메시아로 생각하고 환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력으로 로마를 제압하고 유대를 해방시키려 오시지 않았습니다.  무리의 기대와 달리 고난의 메시야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하나님과 화평케 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십니다. 막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구주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시기에 우리를 죄악 중에서 건지시고 구원을 베푸십니다.  



*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본받아야 할 부분이 무엇입니까?

1) 겸손해야 합니다.

세상의 왕들은 자신의 위엄과 영광을 과시하기 위하여 말이나 병거를 타고 개선 행진을 하지만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모습은 세상적으로 눈으로 볼 때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어린 나귀는 준마와 같이 빨리 달릴 수 없습니다. 건장한 말과 같이 많은 무장을 하고 달릴 수 없습니다. 나귀를 탄 자에게서도 큰 위엄을 찾을 수 없습니다. 보통 왕들처럼 앞에서 나팔을 부는 사람도 없고 큰 깃발을 앞세우고 가는 사람도 없고 그를 호위하는 군사들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연약한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가십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것도 겸손인데 이제 나귀를 타고 가심으로 다시 한 번 겸손한 모습을 보이십니다. 나귀는 겸손과 평화를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온다는 것은 그분이 무력으로 강제적으로 억압하는 이 세상의 왕들과 달리 사랑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평화와 겸손의 왕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본받기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이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아야 합니다.



2) 주님의 뜻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무리는 로마제국과 부패한 유대지도자들의 지배가 끝나기를 간절히 원했고 예수님에게서 그런 희망을 기대했습니다. 그렇기에 무리는 호산나 우리를 구원해달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얕은 기대에 이끌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데 우선순위를 두셨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으로 말미암아 예수가 메시아라는 소문이 온 성내에 퍼지자 종교 지도자들은 본격적으로 예수를 잡아죽일 구체적인 계획을 세웁니다. 그래서 주님은 유월절의 어린 양으로 돌아가시는 하나님의 뜻이 정확하게 이루어집니다. 주님이 종교 지도자들의 손에 넘기어 잡히셔서 죽음을 당하신 것은 그들의 계획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스스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기꺼이 자신을 드림으로 우리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12:24절에 보면 예수님은 인자의 영광을 선포할 때가 다가왔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곧 죽게 될 것과 그 죽음은 많은 생명을 살리시게 될 것을 제자들에게 암시하십니다.  세상의 정복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켜 자신이 영광을 얻으나 예수님은 도리어 자기 백성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영광을 받습니다. 예수님 한 분이 죽으심으로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의 원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백성들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자기중심으로 신앙생활하고 자신을 죽이지 못하여 펄펄 뛸 때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내어 놓을 것이 없는 면목 없는, 후회스런 삶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를 낮출 수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도 보전하고 그 헌신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열매를 맺게 합니다.  날마다 자기를 죽이는 자들이 영생을 얻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죽는 것을 영광이라고 하신 주님. 이제 우리들도 주님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을 영광과 기쁨으로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을 본받기 원한다면 각자의 십자가를 지며 주님의 뜻을 이루는데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나귀 의 주인의 이름은 성경에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하여튼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니 기꺼이 그 나귀를 드림으로 구약의 예언을 이루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옥합을 깨뜨려 값비싼 향유를 부어 드림으로 결과적으로 주님의 장사를 예비하였습니다.



3)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백성들은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보고 그분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합니다. 무리들은 종려가지를 흔들고, 겉옷이나 나뭇가지를 길에 펴고, 호산나를 힘차게 외쳐 댑니다. 찬송은 힘차게 불러 대나 무리들이 과연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그랬습니까?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중심을 주시는 주님입니다. 행위도 중요하지만 동기를 보시는 주님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실 때도 식량 문제를 해결하여 주신 예수님을 인하여 무리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하였습니다.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맞아들인 것은 예수님께서 죄에 빠진 자신들을 건져 주실 구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그 표적 행하심을 들었기에 그러한 표적을 다시 보기 원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다윗의 왕국을 재건시킬 정치적 해방, 경제적 풍요, 사회의 질서 회복을 시킬 육신의 메시아로 생각했습니다. 무리들은 흥분하여 호산나를 외치며 열광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의 예언을 온전히 이루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그 자리에 있었으나 그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제대로 깨닫지 못하니 그에 합당한 영광을 주님께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깨어 있으십니까? 하나님의 역사에 민감하십니까? 우리가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배우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깨닫기 위함입니다. 기도하면서 성령의 인도함을 구하여야 합니다.

        

4)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의 찬송을 부른 자세는 어떠합니까? 주일이니 한 번 정도는 나와야 할 것같은 의무감으로 나와서 순서에 있으니 그저 한 번 따라 부르는 정도가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찬송은 불러도 그 마음 가운데 나를 구원하여 주시고 오늘날까지 나의 삶을 지켜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마음으로 불러야 합니다. 찬송 자체보다도 찬송을 부르는 우리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감사하고 찬송을 드릴 마땅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높이는 찬송 소리가 듣기 싫어 바리새인들은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할 때 예수님은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눅 19:40) 말씀하셨다. 우리가 받은 은혜를 감사하지도 않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성취시키시고 그것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 우리에고 주님을 높이지도 않고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지도 않을 때 주님은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다른 방법으로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주시는 주님을 날마다 삶 속에서 높여드려야 합니다.



고난 주간을 맞이하면서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이 정신없이 살아왔던 그 동안의 생활을 한 번 정리하여 보시면서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주님께 회개할 것이 있으면 회개하고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주님께 구하시면서 다시 한 번 열심을 회복합시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면서 때를 따라 돕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기뻐하며 기도하며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