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너희도 가려느냐(요 6:60-71)

Author
Myung Myung
Date
2008-07-27 13:14
Views
3948
요 6:60-71 너희도 가려느냐



1930-40년대 독일의 대표적인 신학자 가운데 Bonhoeffer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의 신학적인 안목을 높이 산 미국의 Union 신학교에서 그를 교수로 초빙하였으나 히틀러 밑에서 독일 교회가 처한 어려운 현실을 버려둔 채 미국에 올 수 없다하여 독일에 남아 있다가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후 독일이 붕괴하기 직전에 사형을 당하였습니다. 그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많은 책을 저술하였는데 특히 그가 남긴 유명한 말 중에 “cheap grace”(값싼 은혜)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함으로써 구원이라는 엄청난 선물을 주셨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헌신 없이 복만을 받으려는 일부 신자들의 얄팍한 행위를 지적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알게 모르게 하나님의 귀한 선물을 싸구려로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복 받기를 바라면서도 주님을 위하여 희생하는 데는 인색하지 않습니까?  



가버나움 회당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무리들 거의 대부분이 예수님 곁을 떠납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깨달으며 끝까지 그를 믿고 따르기를 다짐합니다. 한때는 같이 예수님을 따랐는데 여전히 따르는 자가 있고 도중에 떠나는 자가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럴까요? 이 시간 그 이유를 살펴보며 이 자리에 있는 분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중도에 탈락하지 않고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자, 영생의 말씀을 붙드는 자, 그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며 풍성한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회당에서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소개합니다.

육신의 양식만을 위하여 찾아온 무리들에게 예수님은 가버나움 회당에서 열심히 가르치시며 참 생명의 양식이 필요함을 역설합니다.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이요,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요,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소개합니다. 예수님의 살이 생명을 주는 떡이라는 말은 이해하지 못하는 유대인이 반문합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먹으라고 우리에게 줄 수 있겠는가?" (52절) 예수님이 거듭남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을 육신적으로만 생각하였기에 사람이 어떻게 모태에 다시 들어갈 수 있습니까 하고 묻던 니고데모와 다를 바가 없는 태도를 보입니다. 육신의 건강을 위하여 음식이 필요하듯이 영이 살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는 자만이 예수 안에 거하며 참 생명을 소유하게 된다고 하십니다. 살과 피는 예수께서 곧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 찢기고 흘리게 될 그 자신의 ‘몸’과 ‘피’를 가리킵니다. ‘먹고 마신다’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은 그의 희생을 믿음을 통해 개인적으로 받아들임으로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만나와 생명의 떡인 자신을 비교하십니다. 둘의 공통점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만나를 먹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참 만나 되시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육체적으로도 마지막 날 다시 살아날 뿐 아니라 영생을 얻는다고 합니다.



* 대부분이 예수님 곁을 떠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떠나갑니다. 한두 사람이 떠나간다면 떠난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어서 그럴 수 있겠다 하겠는데 말씀을 듣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떠나간다는 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교인들이 집단으로 교회를 나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목사 개인 신상에 돈이나 이성과 관련된 심각한 일이 생겼거나, 교회 리더십을 가진 사람들을 중심으로 교회 내에 분쟁이 생겼거나, 요즈음 많이 공개된 신천지와 같은 이단에 교인들의 상당수가 빠질 때 그렇습니다. 교회당 건축을 한다고 하니 부담이 되는 사람들이 그럴듯한 이유를 대며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경우에 해당됩니까? 떠난 사람들은 예수님을 한두 번 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 중에는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표적을 맛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까지 삼으려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들이 실망하고 떠나간 것은 회당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성령 충만하여 권세 있는 말씀을 전하시는 예수님인데 이날따라 영력이 떨어졌을까요? 그럴 리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기에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까?

한국에서 쇠고기 파동을 인하여 촛불시위가 있었는데 그 배후에는 누가 있습니까? 일본이 또 영유권을 주장하는데 독도 문제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금강산에서 관광객이 총에 맞아 죽었는데 북한 문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미국은 미국대로 개스값은 자꾸 오르고 부동산 경기도 침체에 빠져 있는데 앞으로 전망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시국에 관한 궁금한 이야기를 시원스럽게 듣고 싶은데. 나의 살을 먹지 않고 나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이 없다.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하면서 예수님이 당장 현실에 도움이 되지 않는 구름 잡는 이야기나 한다고 무리들이 생각하였습니다. 주일마다 교회에 오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험난한 세상을 지혜롭게 사는 비결을 얻기 위함입니까? 도덕적으로 완벽한 삶을 살기 위한 비결을 얻기 위함입니까? 무엇인가 잔뜩 기대를 하고 교회에 왔는데 목사가 실생활에 구체적인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구원, 생명, 십자가, 심판 이런 이야기만 늘어놓는다고 생각지는 않습니까?



회당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듣고 난 제자들 중의 일부가 이 말씀은 어렵구나. 누가 들을 수 있느냐? (60절)하면서 서로 수군거립니다. 제자 하면 예수님의 열두제자를 떠올리지만 여기에 나오는 제자들은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신기하여 온 사람들도 있겠고, 예수님의 권세 있는 말씀에 반하여 무엇인가 인생에 필요한 지혜를 얻기 위하여 모여든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아예 예수님을 계속하여 따라다니겠다고 다짐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요한은 그들을 제자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렵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철학적이고 심오한 단어를 많이 사용하여 말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만약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되는 방법 또는 경제적인 난국을 극복하는 비결 등의 주제를 가지고 말씀하셨다면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열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는 말씀이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요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 하고 아버지가 자기를 보내서 이 땅에 왔다고 합니다. 더구나 자신의 살과 피로 인하여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는 하니 그들의 마음에 반발심이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고 물으신 것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는 말씀은 자기들이 듣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그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예수님의 말씀은 영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하시면서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려 하지 말고 영적으로 이해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전에 계셨던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올라가신다고 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예수의 죽음에 관한 말씀에 걸려 넘어진다면 그 뒤에 이어질 승천을 본다 해도 믿지 못할 것이 뻔합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십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생명의 떡이기에 입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먹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 말씀이 우리를 살립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영양 있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시간이 지나면 배설물이 되어 나가고 또다시 허기를 느낍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 썩는 양식, 진정 배부르게 하지 못한 양식을 얻기 위하여 얼마나 수고하고 땀을 흘립니까? 그들에게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한 시간조차 아까울 뿐입니다. 인생이 길다고 해도 백년을 넘기기 힘든데 영원이란 시간에 비하면 백년이란 시간조차 그저 한 점에 불과합니다. 이 땅에 생명이 끝나면 또  영원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하신 설교의 요지는 인간의 우선적 과제는 빵 문제가 아니라 죄로 인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실의 생존을 위하여 시급한 빵문제를 세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 하는 무리들에게 믿음과 영생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 가버나움 설교는 참 제자를 구분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1) 예수님을 떠나는 사람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신적 통찰력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을 꿰뚫어 볼 수 있었기에 누가 믿지 않는 사람인지 누가 주님을 배신하고 팔 사람인지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을 떠날 자들이 있을 것인데 그들은 원래 믿음이 있었는데 예수님을 따라다니다가 시험이 들어 믿음을 잃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믿음이 없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열심히 따라 다니기는 했지만 자기의 현실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한 것이요 그저 믿는 척을 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먼저 지목하여 쫓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떠나기까지 한명도 내쫓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떠나는 것은 자기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이지 결코 하나님이 강제로 쫓아내시지 않습니다. 자기의 교만과 욕심 때문에 떠날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계속 머물러 있는 사람은 그 머물러 있는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택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2) 예수님을 떠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 회당에서 하신 설교는 하나님이 택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광야에서 남자만 오천 명이 떡을 먹었다고 했는데 그들 중에 배를 타고 극성스럽게 가버나움까지 쫓아온 무리들이 적어도 몇 백 명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설교 한번 듣고 나니 대부분 떠납니다. 그들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따라 새로운 영생의 길로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무리의 불신과 떠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놀라거나 낙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44절) 아니하고 ‘오게 하여 주시지’(65절)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자가 없다고 하십니다. 자기에게 오게 하여 주지 않은 자는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사람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시는 것으로 한정합니다.(37, 39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게 된 것이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고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돌아가신 것이 믿어지고 장차 예수님을 따라 부활할 것이 믿어지는 믿음을 주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부모나 형제가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은 분들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택하신 자가 아니라고 섣불리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아직 하나님의 때가 안 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할 것은 때를 얻든지 못 얻었든지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끈질기게 기도를 드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믿음을 갖게 해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사람은 결국 주님께 오게 되어 있습니다.



* 참 제자는 예수님과 그의 말씀을 붙듭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영혼 구원입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믿고 그 다음에 주님을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의 비밀을 전해야 합니다. 구원의 비밀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음으로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완악함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던 출애굽 제일세대와 다를 바 없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믿기를 주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주님의 시선은 남은 열두제자들을 향하십니다. 그들은 어쩌다가 주님을 따른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주님이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아마 주님의 이 말씀은 개척교회 목사들이 더 피부에 와 닿는 말일 것입니다. 지금은 교인이 자체 건물을 가진 중형 교회로 성장했지만 제 친구 목사가 처음 개척할 때는 자기 가족으로만 시작했기에 처음 몇 년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주일예배 시간 시작이 되어도 예배실에 앉아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오늘은 누가 새로 오려는가 하여 오른 편에 있는 문 쪽만 몇 년을 바라보았더니 목이 굳어 왼쪽으로 잘 돌아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쩌다가 한 가정이 새로 오면 그렇게 반갑고 신이 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일꾼이 될 만하면 애들 교육 때문에, 제자훈련을 잘 시킨다기에 하는 이유를 대며 큰 교회로 간다고 합니다. 하도 안타까워서 그 목사님이 하나님께 하소연 섞인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논산 훈련소 소장입니까? 왜 훈련만 시켜 놓으면 다른 교회로 간다고 합니까? 하나님은 그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셔서 지금은 많이 채워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 주변에는 몇몇 제자들만 남아 있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그 말씀은 떠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떠날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들은 아버지께서 주신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주님을 따르는 동기를 물어 보십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가는데 너희는 왜 떠나지 않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68-69절)



주님을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따르겠다는 이유는?

1) 예수님께서 생명의 말씀을 가지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현실적인 기대나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동안 그 말씀이 바로 생명의 말씀인줄을 깨달았습니다. 어디에서도 이 은혜의 말씀을 들을 수 없기에 결코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합니다.  

2) 예수님이 신성을 가지신 분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표적을 행하신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행하시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거룩한 분인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동안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깨닫기 시작했기에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합니다.  



물론 이런 고백을 하는 제자들이 아직까지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아직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귀한 고백을 하고도 나중에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실 때 제자들은 다 도망가 버리고 골방에 문을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향하여 마음을 열고 주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또한 열두 사람이 다 귀한 신앙고백을 한 것은 아닙니다. 떠나지 않고 남아 있던 제자들 중에 배반자가 있습니다. 가룟 유다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가리켜 믿지 않는 자라고 합니다. 그를 마귀라고 부릅니다.  주님은 그가 자신을 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다가 배신할 것을 알고도 다른 제자들 앞에서 유다를 공개적으로 책망하거나 쫓지 않으셨습니다. 유다는 회개할 기회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육신을 따라 행하다가 자기의 죄로 인하여 망하였습니다.



육신적인 필요 때문에 예수님을 찾은 사람은 그 필요가 채워지면 예수님을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영생의 길이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순종하는 자들은 결코 주님의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계속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원하였습니다. 영생은 마지막 날에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나의 주로 고백하고 주님과 올바른 교제를 가지고 주안에서 사는 순간부터 이미 누리는 것입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1) 말씀의 중요성

새벽기도 시간에 신명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신명기는 되풀이해서 주시는 말씀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 1 세대에게 말씀을 주었으나 그들이 순종하지 않았기에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신명기는 가나안 정복을 앞둔 출애굽 2세대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전쟁을 앞둔 이스라엘에게 작전을 지시하고 무기 쓰는 법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족속과 싸워 이기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릿심산과 에발산에서 언약식을 거행하였습니다. 레위 지파가 복의 말씀을 낭독하면 그리심 산에 있던 6지파가 일제히 아멘을 외칩니다. 그러다가 저주의 말씀을 낭독하면 에발산에 있던 6지파가 일제히 아멘을 외칩니다. 골짜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멘 하는 소리가 메아리쳐 울렸을 것입니다. 이렇게 청각적인 효과를 노렸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과 생각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새기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말씀이 약한 신앙생활은 뿌리가 약한 나무처럼 감상적인 체험에만 의존하기 쉽고 쉽게 흔들리는 특징이 있습니다. 진리의 능력인 하나님의 말씀은 죄인을 생명의 구주로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하는 것은 주님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소홀히 하는 것은 주님을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구세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요 주안에서 새로운 삶인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 때 하나님은 그 인생을 책임지시고 복을 주십니다.



2) 행함의 중요성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살기 전에 그들에 복과 저주가 함께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가나안 땅의 복과 저주는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가나안은 복 받은 땅이 될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고 우상을 섬기면 그들은 저주를 받고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복종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과 규례를 행할지니라”(신 27:10) 하면서 말씀을 실천하는 행함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말씀을 가르치는 목적은 말씀대로 행하는 데 있습니다.



교회에서 무엇을 찾으십니까?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갈 지혜를 구합니까? 누가 인정해주기를 원하십니까? 그런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아 실망하고 떠날 것입니다.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변하여 새 사람이 되기 원하는 사람들은 교회 외에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교회에는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습니다. 그 성령께서 우리에게 영원히 생명의 말씀을 들려주실 것입니다. 세속주의 물결에 휘말려 세속화된 그리스도인들, 하나님의 은혜를 값싸게 만드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진리를 붙들고 그 진리대로 행할 때 우리에게 소망이 있고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암 8:11,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요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바로 지금이 그런 때가 아닙니까? 국내외의 유명한 설교자들의 설교를 책이나 방송을 통하여 24시간 접합니다. 마켓에 가면 설교자들의 설교 테이프들이 넘쳐납니다. 성경공부 교재, 말씀 묵상하는 책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기갈을 느낍니다. 이번 여름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합시다. 부지런히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살길이요, 영적으로 새롭게 충전되는 비결입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이 시간 주님께서 잠자거나 피곤한 심령들, 하나님의 귀한 은혜를 싸구려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도전의 말씀입니다. 생명의 떡인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까? 혹시 어려울 때만 문제가 생길 때만 예수님을 찾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고 사랑하며 섬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영생의 말씀이 계시오매 내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베드로는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떤 고백을 주님께 드리겠습니까? 나를 구원하여 주신 주님을 부족하지만 계속하여 따르기 원합니다. 내게 믿음 더하여 주시옵소서. 영육 간에 필요를 채워주시고 은혜 가운데 우리를 지탱하여 주시는 주님을 날마다 바라보아야 합니다. 생명의 떡이 되시는 주님과 기도와 말씀을 통한 교제로 삶이 더욱 풍성해지고 영생을 누리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