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내가 생명의 떡(요 6:22-59)

Author
Myung Myung
Date
2008-07-20 13:30
Views
4660
요 6:22-59  내가 생명의 떡



예수님은 자신을 억지로 왕으로 삼으려는 무리들의 계획을 아시고 제자들을 배에 태워 먼저 가버나움으로 보내시고 자신은 혼자 산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그 과정에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에게 주신 문제가 무엇입니까?  

어둡고 풍랑이 일고 예수님이 그들 곁에 계시지 않은 상황에서 가버나움까지 가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문제를 자기들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배는 나아가지 않고 여전히 갈릴리 바다 한 가운데 있습니다.

1)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밤 바다 위를 걸어오는 예수님을 유령으로 착각하고 두려워 소리를 질렀습니다.

2) 말씀으로 위로하십니다.

“내니 두려워말라”

3) 바람을 잠잠케 하십니다.

예수님에 배에 타시자마자 배는 순식간에 가버나움에 도착합니다.

예수님은 빛이시고 평강이 되시고 임마누엘이시기에 예수님을 의지하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실물로 보여주십니다. 같은 맥락에서 오늘 본문을 보아야 합니다.



무리가 예수님을 열심히 찾습니다.

예수님을 찾으려는 무리들의 노력은 필사적입니다. 오랜만에 떡과 생선을 배불리 먹고 나니 예수님을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삼아 육신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가 바다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갔던 그 밤에도 빵을 먹었던 장소에 계속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남아 있던 군중들은 한 척밖에 없던 배에 예수님은 타시지 않고 제자들만 타고 떠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디베랴에서 왔던 다른 배들을 타고 예수님을 찾으러 가버나움까지 와서 기어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을 만나니 한편으로는 반가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궁금해합니다.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25) 어제 저녁 제자들이 탄 배에 예수님이 함께 타지 않은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바다 위를 걸어왔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병이어 표적을 보고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는 무리에게 물 위를 걸었다는 이야기를 해보았자 믿지 않을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는 무리에게 할 말이 없으십니다.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삼상 16:7) 예수님이신지라  무리가 자신을 찾아 온 이유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찾아온 것이 아님을 아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잘못된 동기를 책망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26) 오병이어의 표적을 행하신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닫고 베푸신 은혜의 감격 때문에 주님을 찾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기보다 어제 저녁에 먹은 떡맛을 잊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만 붙들고 있으면 굶어죽을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주님을 찾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주님을 찾을지라도 동기가 바르지 않으면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을 만나도 응답을 얻지 못합니다. 왜 교회에 나오십니까? 적적해서 친구를 만나려고? 사업에 도움이 될까 해서? 아니면 정말로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기 때문입니까? 그 이유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26절에서 58절까지의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유대인들에게 가르치실 때에 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왜 우리 영혼이 살아야 하는지, 예수님을 믿으면 어떤 복이 임하는지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표적은 그분의 인격과 능력을 가르쳐 주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여주신 까닭은 예수님이 생명의 떡을 공급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예수님이 참된 생명의 떡임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표적을 경험하였으면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그분을 믿어야 하는데 무리들은 예수님을 그저 표적을 행하는 사람정도로만 알고 있습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27절) 썩을 양식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기 위하여 필요한 육의 양식을 가리킵니다. 주님은 이 양식을 구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있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에 답답해하십니다. 육신의 건강보다 더 소중한 것이 영혼의 건강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영원히 비참한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 있다고 하십니다. 어떻게 해야 병든 영혼이 치료받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 4:4) 우리의 몸이 음식을 먹어야 살 수 있듯이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삽니다. 예수님은 영생하게 있는 그 양식을  주는 자신을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 치신 자”(27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치셨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보증하셨다는 것입니다. 한동안 미국 전역에서 음식을 먹고 식중독 증세가 나타나서 FDA는 그 원인이 아마 도마도에 있던 살모넬라균 때문이었을 것이라 하여 도마도 판매를 일시 중단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증세가 둔화되자 이제는 도마도를 먹어도 안전하다고 정부가 보증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보증하셨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진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우리의 영혼이 피가 되고 살이 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표적을 행하신 것도 이 분이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요 이분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성령으로 인 치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영혼의 병이 치료가 됩니다. 이제부터는 육체적 만족만을 위하여 살지 말고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분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는 영생을 주는 양식을 얻기 위하여 일을 하라고 합니다.



일을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무리가 묻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8절)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신앙을 하나의 거래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할 테니까 하나님도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해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이런 오해에 빠질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전도도 많이 하고 헌금을 많이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복 주시고 기도에 응답을 주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의 표현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지 단지 육신의 복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을 얻기 위하여 일하라는 말씀은 인간의 노력과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영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분께 우리의 삶 전체를 맡기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어디에 삶의 최고 가치를 두고 있습니까? 혹시 썩을 양식을 얻는 데에 삶 전체를 투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보다 귀한 것, 보다 가치있는 것, 영원한 것에 우리의 시선을 두어야 합니다. 외형적인 것, 물질적인 것에 현혹되어 본질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사 55:2-3a) 하나님이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우리의 인생에 최우선 순위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한번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면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놀라운 생명의 말씀이 우리를 붙들어 우리의 병든 영혼을 소생시키고 하나님의 관계를 회복시킵니다. 이제부터는 우리의 유익만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합니다.



무리는 또 다른 표적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자 무리들은 예수님께 하나님이 보내신 자임을 증명하는 표적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게 할 만한 표적이 무엇입니까?” (30절) 전날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았지만 그것으로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출애굽 시에 모세가 조상들에게 나타낸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먹인’것과 같은 정도의 표적을 보여야 믿을 수 있겠다는 것입니다. 실상은 모세가 만나를 내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만나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음식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만나를 보면서 ‘이것이 무엇이냐’ 사람들이 물어보다가 그대로 이름이 되고 말았습니다. 광야에서 내린 만나는 매일 내리는 일용할 양식이었습니다. 왜 만나를 한 번에 많이 내리셔서 여러 날 먹을 수 있도록 하지 않으시고 그날의 양식을 거두도록 하였습니까? 만나의 양이 부족해서도 하나님이 인색해서도 아닙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 만나를 내려주심은 육신을 배부르게 함도 있었지만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깨달아 믿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도 떡으로 육신을 배부르게 하셨지만 그것을 통하여 예수님 자신을 믿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이상 만나는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나보다 더 크신 분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까?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져야 믿는 표적 중심의 신앙입니까?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말씀 중심의 신앙입니까?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2-24) 표적을 좇는 유대인들과 달리 말씀을 좇는 신앙을 가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떡’또는 ‘생명의 떡’으로 소개하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기원입니다. 만나가 이 세상에서 온 것이 아니요 하늘에서 내린 것처럼 예수님도 하늘에서 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떡을 먹음으로 사람들이 육신의 힘을 얻습니다. 떡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희생되는 것처럼 예수님 자신의 희생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받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늘에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생명의 떡을 먹는 자 즉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기에 예수님에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모세 때에 출애굽 제일세대에게 내려온 만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 떡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자들은 결국 죽었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참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니 무리의 귀가 뻔쩍 뜨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도 믿지 않고 계속해서 썩을 떡만 달라고 졸라댑니다.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34절) 사마리아 성에 있던 여인이 예수님과 대화할 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언급하니 그물을 자기에게 달라고 부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무리의 반응을 보시는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혹시 주님이 우리의 중심을 들여다보시면서 같은 생각을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항상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과 주님의 뜻을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럴 때 주님은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응답이 마주쳐야 일어납니다.

유대인들은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은 그저 지옥의 땔감정도로 생각하였습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이방인들은 다 멸망을 당하지만 유대인들은 전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본문은 그런 생각을 가진 유대인들에게 착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지난 주 목요일 구약 파노라마 시간에 소선지서를 다루었습니다. 선지서의 일관적인 패턴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하시면서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회개를 촉구합니다. 돌이키지 않으면 무서운 심판이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그러나 진노 중에도 이스라엘을 아주 멸망시키지는 않고 ‘남은 자’를 살려두신다고 합니다. 그 남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회복이 있을 것을 약속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유대인들이 다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만 구원을 얻는다고 하면서 우리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사람들을 예수님에게 오도록 주권적으로 부르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면서도 유대인이라는 것 때문에 당연히 구원받을 줄로 알고 있는 그들에게 경고하십니다. 또한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당신에게 오는 모든 사람을 영접하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이 모든 사람들을 무조건 영접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이미 그에게 주신 사람들을 예수님이 보전하고 지키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루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하나도 잃지 않고 구원하고자 하심이요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요 예수님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섭리와 더불어 인간의 책임을 동시에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을 보여야 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요 1:12)다고 합니다. 마음을 열어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받으면 됩니다. 주님의 초청에 자발적으로 응한 자에게는 영생이 주어집니다. 영생은 이 땅에서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성령 안에서 교제하는 은혜를 누리는 삶이요 동시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이 세상 마지막 날 생명의 부활로 무덤에서 나아와 영원한 영광 가운데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하여 ‘생명의 떡’, ‘하늘에서 내려온 떡’,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다양하게 증거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께서 자신의 희생함으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그림언어로 전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기대하고 있는 만나와 자신을 분명하게 구별하십니다. 만나가 하늘에서 내려온 신령한 양식이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육신의 양식이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떡’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은 바로 예수 자신이며 그가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내어 줄 그의 살이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성도들은 어떠하십니까? 생명의 떡인 예수님을 항상 필요로 하십니까? 아니면 무슨 문제가 있을 때만 예수님을 찾습니까? 혹시 가버나움에 모인 유대인들처럼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의 기대만을 채우려고 하지 않습니까? 음식을 먹고 육신의 생명이 유지되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날마다 주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영적인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기 원합니다. 믿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주님의 원하시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입니다.  

  

우리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두 가지 사명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를 모르는 이에게 영적인 굶주림을 느끼게 하는 일입니다. 주변에는 썩을 양식만을 위하여 수고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두움의 세상에 이미 믿는 자들이 빛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생명을 주는 양식, 썩지 않는 하늘의 양식이 있음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4~17)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이웃이 누구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둘째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제대로 깨닫게 하는 일입니다. 가버나움 회당에 모였던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파 서기관들은 자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떡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광야생활을 할 때 불평하던 광야 제일세대의 모습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눈에 예수님은 그저 목수인 요셉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을 잘 안다는 선입관이 도리어 예수님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게 막습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여건상으로는 예수님을 영접하기 좋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 이끌림을 받지 못하였기에 주님께 나올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복음을 전하는 이방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고 구원을 받는데 육신의 동족인 이스라엘은 도리어 예수를 배척하고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합니다. 롬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하며 애타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드렸습니다. 오늘날도 교회에 오래 다녀서 지식적으로 예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은 많지만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영접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들을 이끌고 가주셔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성도들의  중보기도가 필요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뜻을 생각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대속적 죽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예수님과 올바른 관계, 인격적인 관계를 갖게 됨으로 예수님과 하나 된 삶을 삽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며 주님과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주님 주신 것을 가지고 마음껏 헌신하시며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며 주님께 영광 돌리는 복된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