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빈들의 잔치(요 6:1-15)

Author
Myung Myung
Date
2008-07-06 14:18
Views
7318
요 6:1-15 빈들의 잔치

복음은 한 마디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복음을 두 주제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

그래서 복음서를 볼 때는 위의 두 가지 질문을 던지면서 그 답을 찾으려고 해야 합니다.



오병이어 표적은 사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는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 표적을 통하여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신지 계시하십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수가성 우물가에 나타나신 여인에게 자신을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로 소개하셨는데 6장에서는 ‘생명의 떡’으로 나타내십니다. 결국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공급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story의 배경은 빈 들입니다. 사람이 살지 않는 광야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이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갑니다. 좋은 일보다는 그렇지 못한 일이 더 많이 생기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렇지만 이 광야 같은 세상을 살면서도 기쁨을 누리며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그 비결을 알기 원합니다.



때는 유월절, 오늘날의 달력으로 따진다면 부활절이 있는 3월이나 4월입니다. 유월절은 출애굽을 통하여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을 기념하는 유대인 최대의 절기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출애굽 사건을 염두에 두고 행하신 표적입니다.



5장의 무대는 예루살렘이었으나 6장에서는 다시 갈릴리로 바뀝니다. 예수님은 디베랴 바다라고도 하는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십니다. 마가복음(6:45)이나 누가복음(9:10)에서는 그 동네가 벳새다라고 합니다. 벧세다는  '어부의 집'이란 뜻을 가지고 있으며 예수의 제자인 빌립과 베드로/안드레 형제의 고향으로 게네사렛 땅에 있습니다(요 1:44).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떠나 갈릴리로 가신 이유는 예수님을 미워하여 그를 죽이고자 하는 종교지도자들과의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많은 무리가 따라다닙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는 예수님을 바로 알고 그분을 통하여 구원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이 병든 사람들을 고치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wonder-worker 즉 신기한 일을 행하는 사람일뿐입니다.  



이 날도 예수님은 제자들과 더불어 쉬기를 원하셨지만 그곳까지 무리가 몰려듭니다. 자기에게로 오는 무리들을 주님은 결코 물리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목자 없는 양 같이 방황하는 인생들인 것을 아십니다. 그들의 삶이 곤고하고 소망이 없는 것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날이 저물어 가는 빈들에서 음식을 공급하기로 작정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표적을 통하여 제자들의 믿음을 시험하심과 동시에 자신이 누구신지 드러내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시험하십니다.

마귀의 시험은 죄를 짓게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험은 제자들의 믿음을 온전케 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일을 맡기시기 전에 혹은 큰 복을 주시기 전에 먼저 시험하십니다. 문제는 주님이 시험을 하신다고 미리 말해주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평소부터 예습 복습을 잘한 학생이 좋은 성적을 거두듯이 항상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영적으로 깨어 있을 때 주님이 하고자 하는 일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또 그 일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날이 이미 저물었습니다. 사람들은 배고파합니다. 인근에 동네가 없습니다. 모인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을 제외하고도 성인남자만 오천 명이나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시험문제는 무리에게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그 많은 무리에게 양식을 마련할 만한 능력이 없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들의 형편과 처지를 잘 아시는 주님께서 제자들의 믿음을 테스트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믿음으로 이 문제를 풀기를 원하셨습니다. 제자들 앞에 있는 예수님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고 가버나움에 사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고 수가성 여인을 변화시킴으로 그 여인을 인하여 수가성 마을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 전에는 베데스다 못가에 있는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은 쫓아내실 수 있어도 빵 문제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제자들이 가진 믿음의 한계입니다. 그들은 문제만 보았지, 문제해결의 열쇠를 가진 예수님이 자기들 앞에 계신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먼저 빌립에게 물어 봅니다.  "이 사람들을 먹일 만한 빵을 우리가 어디서 살 수 있겠느냐?" 주님은 ‘어디서’를 강조합니다. 계산을 해보면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일 만한 것은 어디서도 구할 수 없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주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본 빌립은 마땅히 주님에게서 떡을 구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빌립은 표적과 주님을 연결시키지 못했기에 ‘어디서’라는 주님의 질문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였습니다. 빌립이 모여든 사람 수와 그들을 먹이는데 드는 비용을 재빨리 계산합니다. "한 사람에게 조금씩 나누어 준다고 해도 200데나리온 어치의 빵으로는 부족할 것 같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품삯입니다. 이백 데나리온 즉 노동자가 200일은 일해야 벌수 있는 돈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돈으로도 남자만 오천 명,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치면 만 명은 족히 될 사람들을 먹이기에 부족하다고 합니다.



빌립이 실패하니 이번에는 베드로의 형제인 안드레가 도전합니다. 아마 빌립의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의 표정이 별로 탐탁해 하지 않으시는 것을 눈치 채고 예수님이 자기에게 묻지 않았는데도 나섭니다. “여기에 보리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 보리빵이나 소금에 절여 만든 물고기는 그 당시 서민들이 먹던 평범한 음식입니다. 그 물고기는 양으로 먹는 것이라기보다는 짠맛을 내는 반찬으로 떡과 함께 먹었습니다. 하루 종일 예수님을 따라다녔기에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배고파한다는 것을 소년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소년은 무엇인가 자기가 가진 것으로 예수님께 드리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안드레를 찾아가 예수님께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드리고 싶다고 하였을 것입니다. 안드레는 예수님께 그것을 드리기는 하지만 “어떻게 이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겠습니까?" 하며 문제해결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빌립보다는 그나마 나은 제안을 한다고 볼 수 있지만 그 역시 믿음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믿음을 시험하시기에 믿음으로 답변해야 하는데 자신의 경험과 이성을 사용하여 답변하려니 답이 제대로 나올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였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모범답안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아직 주님이 어떤 분인지 그가 어떤 일을 행하실 수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평범한 것일지라도 주님의 손길이 닿으면 놀라운 것으로 바뀝니다. 음식을 나누어 주기에 앞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동원하여 무리들을 푸른 풀밭에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그룹 별로 앉게 하셨습니다. 질서 가운데 예수님은 이적을 행하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먼저 그 빵을 받아 들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떼어 나누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그것을 무리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오병이어로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먹는 놀라운 표적이 일어났습니다. 떡과 생선을 먹는 사람들의 표정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실컷 먹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많이 먹었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만족하였습니다.



무리는 예수님의 표적을 오해하였습니다.

광야는 시험과 유혹의 장소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시험을 받았고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 동안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시험을 받는 장소인데 오늘 벧세다 광야에서 갈릴리 사람들은 빵을 먹는 순간에 마음에 유혹이 생겼습니다. 마태복음 14장이나 마가복음 6장에 보면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면서 왜 제자들을 재촉하셔서 그곳을 떠나게 하는지 그 이유가 나오지 않는데 요한복음에서 그것을 알려줍니다. 배불리 빵을 먹은 사람들은 신 18:15절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모세가 장차 ‘나와 같은 선지 한 사람’이 오리라고 약속하였는데 ‘그 선지자’는 유대교 전통에서 메시야와 동일시되어 왔습니다. 무리가 기대한 메시야는 로마의 세력을 물리치고 자기들에게 독립을 줄 뿐 아니라 경제적 번영, 사회적 안정을 가져다주는 왕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갈릴리 사람들은 빵을 먹고 나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여기고 "이분이야말로 세상에 오실 바로 그 선지자시다!" 라고 외칩니다. 예수님은 무리가 강제로 자기를 잡아 그들의 왕을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26-27절)고 하시면서 그들의 의도를 정확히 지적하셨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들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으니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주고 경제적 곤경에서 벗어나게 하여 잘 살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면서 메시야 왕국을 꿈꾸고 예수님을 자신들의 필요를 채워줄 메시야로 여겼습니다. 우리의 왕이 되어 주소서. 그들의 마음속에 역사한 사단의 외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세속적인 역할을 감당하기 오신 분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완수함으로써 인류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내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를 ‘보내신 분’ 곧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예수가 행한 모든 표적은 예수의 인격과 능력을 보여주는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영생에 이르는 양식(성령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령을 통해 아들로 인 치신 자였습니다. 사람들은 영생에 이르는 양식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여러 가지 일들을 행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오직 한가지 일’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로 믿는 것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6:29)



예수님은 제2의 출애굽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출애굽을 연상시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언 사건을 통하여 제2의 모세로 등장합니다. 출애굽 때에 이스라엘이 먹던 만나는 시간이 지나면 벌레가 생기고 상해서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병이어로 남긴 주님의 떡은 남은 것이 열두 광주리에 찼을 뿐 아니라 보존이 가능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이 담으라고 했을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오병이어 사역은 모세 시대의 만나 사건보다 더 완성된 사역입니다. 구약은 장차 오실 메시야에 관한 책이라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 생활 40년 동안에 만나를 내리신 것은 양식이 하나님에게 온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오병이어 표적은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양식인지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54절)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생명의 빵이 되시는 예수님과 신령한 교제를 나눌 뿐 아니라 그분이 원하시는 사역에 동참해야 합니다. 비록 제자들도 시험에서는 실패하였지만 섬김의 사역에 참여함으로 이 영원한 빵의 풍요로움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3년은 제자들이 그 예수님을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을 알아간다는 것은 그분의 관점으로 보며 그분의 마음을 품으며 그분의 사역을 감당할 준비를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사건은 단지 오병이어로 5000명이 배불리 먹었다는 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적을 행하신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며 그분이 누구신지 깨달으며 그분만을 의지할 것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목자 없이 방황하는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선한 목자로 오셨습니다. 주님은 빈들에 있던 그 영혼들을 보시며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들의 필요를 아시고 영육 간에 풍성한 것으로 채워 주셨습니다. 굶주리고 지친 백성들을 푸른 풀밭에 앉히시고 배불리 먹이셨기에  그들은 참된 만족과 위로와 기쁨을 가졌을 것입니다. 겔 34:23,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예수님에게서 문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저물어 빈들에서 방황하는 영혼들이 많습니다.  지치고 피곤하고 상처를 받은 영혼들을 찾아내고 돌보고 주님께로 인도하는 사역을 이제는 저와 여러분을 통하여 그런 일을 하기 원하십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는 예수님의 선언은 예수께 나아와 그를 믿는 자들은 구원을 얻어 영원히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사 49:10; 계 7:16).  



하나님의 복을 받는 성경적인 원리들이 무엇입니까?

1) 주님의 역사는 헌신에서 시작됩니다.

빈들의 잔치는 오병이어를 드림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소년이나 안드레가 오병이어를 가지고 있었을 때는 오병이어 그대로였습니다. 그러나 오병이어가 일단 예수님의 손에 들려지니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아이가 드린 오병이어를 보시면서 너무 시시하다고 탓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그 오병이어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하며 기도드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하늘에 상달되는 순간 오병이어는 많은 무리들이 먹고도 남은 풍성한 양식으로 바뀌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것일지라도 믿음으로 주님께 드리기만 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물론 주님은 오병이어가 없어도 얼마든지 크신 능력을 행할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드리는 오병이어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를 기뻐하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내 손을 떠나 주님께 옮겨질 때 나타납니다. 믿음으로 자기의 것을 내놓을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아무리 작게 여겨지는 것이라 할지라도 (시간, 물질, 달란트) 주님께 드리시기 바랍니다. 주님 손에 들리지 않고 내 손에 움켜쥐고 있는 것은 아무리 많아도 주님의 축사를 받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그것을 들고 가지 못합니다. 자기의 것은 손해 보지 않으려는 사람들, 자기 것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능력이 결코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께 믿음으로 드린 것만이 주님의 손에 들려진 것만이 가치를 발하고 주님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주님의 축사가 있을 때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풍성한 배가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런 헌신의 삶을 살 때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됩니다. 주님이 기억하시는 오병이어. 나도 풍성해지고 우리 이웃이 함께 풍성해지는 믿음의 오병이어를 주님께 드리지 않으시겠습니까?  



2) 주님 안에서 나누면 풍성해집니다.

오병이어를 바친 소년은 자기가 드린 보잘것없는 음식이 주님의 손에 들려지고 주님의 축사 속에 오천 명이 먹고도 남는 음식으로 바뀌는 것을 지켜보며 얼마나 감격하였겠습니까? 아마 그는 일생동안 그 장면을 잊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주님은 믿음으로 드리는 오병이어를 기뻐 받으십니다. 주님은 드리는 자의 믿음을 보시고 깊은 감사를 하나님께 올려 드립니다. 오병이어를 바친 소년이 그날 저녁 굶었습니까? 아닙니다. 그 소년은 배불리 먹었습니다. 자기만 배불리 먹은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사람들과 함께 먹고 싶은 만큼 만족스럽게 먹었습니다.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 남은 것을 주워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그날에 빵과 물고기를 먹은 사람이 여자와 어린 아이들을 제외하고 남자 어른만도 오천 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는 언제나 풍성합니다. 나누면 점점 없어지는 것이 세상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혼자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나눔으로 더 풍성해집니다.  



3) 주님을 섬기면 상급이 있습니다.

오병이어 표적은 예수님이 주관하셨지만 혼자 하신 것이 아닙니다. 소년의 드림이 있었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도와 음식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다 배불리 먹었을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남은 조각을 거둬 보니 보리빵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왜 예수님은 남은 조각에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까? 한국에는 별로 그런 것 같지 않은데 미국에서는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다가 남으면 집에 싸가는 것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지 않습니다.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먹고 살기 힘든 때니 낭비하지 말고 절약하자는 차원에서 하시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의 식사 습관에 의하면 식탁에서 먹고 남은 음식은 언제나 시중을 든 사람들의 몫입니다. 오늘 열두 제자들이 주님의 떡을 무리에게 나누어주는 역할을 감당하였기에 열두 바구니에 남아 있는 것은 전부 제자들의 몫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앉아서 먹는 자들보다 섬기는 자들에게 그 생명의 양식을 풍성하게 주십니다. 주님의 사역에 헌신한 사람들에게는 상급을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이 아이와 같이 주님께 대한 순전한 사랑을 보이면 주님은 그 헌신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내가 한 일을 나는 잊어버려도 주님은 결코 잊지 않으시고 더 풍성한 것으로 채워 주십니다. 이것이 세상의 것과 다른 주님의 계산법입니다.



4) 주님을 따르는 동기가 순수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사람들이 강제로 자기를 잡아 그들의 왕을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그들을 피해 혼자서 다시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속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있을 때 주님은 그 무리를 피해 떠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열두 광주리가 차고 넘치는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목적이 어떤 세속적 욕망에 이끌리는 것이라면 거기서 속히 벗어나야 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모를지라도 불꽃 같은 눈으로 중심을 보시는 주님은 다 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병이어의 기적은 궁궐에서 벌어진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벌어졌습니다.  빈들이라 인적도 드물고 바위투성이요, 바람이 부는 광야지만 그 곳에도 주님이 함께 하시니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광야 같은 세상에 사느라 힘들고 지치고 피곤하지 않습니까? 주 안에서의 풍성한 삶은 우리가 어디에 있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주님과 함께 하시는 가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을 믿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길 때 주님은 우리와 함께 일하십니다. 주님이 함께 하실 때 요셉과 같이 형통하며 다윗과 같이 점점 강성해지는 복을 받습니다.  



교회적으로 다음 주일에 창립 13주년을 맞이합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볼 때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부족한 것도 많고 좀 더 잘했어야 하는데 아쉬움도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붙드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이 있었기에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교회당을 짓는 project를 현재 진행 중에 있습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역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는 호세안 선지의 말과 같이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힘써 알아야 합니다. 그분과 더불어 교제 나누는 것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매주일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들을 때마다 주님과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향한 헌신을 새롭게 다짐해야 합니다. 이 교회가 주님의 마음에 합한 교회가 되고 주님이 원하시는 사명을 감당하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사랑과 용서와 화해와 섬김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우리 교회에 복 주셔서 열두 광주리에 차고 넘치는 은혜를 부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즐겨 쓰임을 받는 성도들, 주님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