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 5:1-9)

Author
Myung Myung
Date
2008-06-22 19:27
Views
6637
요 5:1-9   네가 낫고자 하느냐



Gas 값이 정신없이 올라갑니다. 독립기념일을 전후하여 gallon 당 5불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습니다. 날씨는 왜 이리도 더운지 에스콘디도를 비롯한 내륙지방은 수은주가 연일 100도 가까이 올라갔습니다. 경기침체는 좀처럼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은 어떠하십니까? 건강하십니까? 삶에 활기가 있습니까? 아니면 의욕도 없고 쉽게 피곤하십니까? 육신의 건강이 중요합니다. 그와 더불어 중요한 것이 영혼의 건강입니다. 하늘의 신령한 것들로 채워지지 않으면 주변 상황에 따라 쉽게 흔들리고 불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 충만하였던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서도 주님을 찬양하였고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지면서도 담대하였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기뻐하지 못할 것 같은 상황에서 기뻐하고 감사하지 못할 것 같은 상황에서도 감사합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 5:16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것이 선택사항이 아니라 실천사항임을 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본문에 보니 병에 걸린 지 38년이 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병자로 오랜 세월을 지내다 보니 이제는 낫겠다는 의욕조차 없어진 사람입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Do you want to get well?")는 예수님의 질문은 38년이 된 그 병자에게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주시는 말씀입니다. 어떤 문제나 아픔이 나를 누르고 있습니까? 어떤 분노나 원망이 내게 있습니까? 38년 된 병자에게 다가오신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다가오십니다. 그 병자를 치유하신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도 치유하기 원하십니다.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두 번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갈릴리 가나에서 열린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습니다. 또한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온 왕의 신하의 죽어가는 아들을 말씀으로 고치셨습니다. 두 표적을 행하실 때는 목격자가 별로 많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소수의 사람들만 보았을 뿐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오셔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세 번째 표적을 행하십니다. 그런데 이 세 번째 표적을 행하시면서 유대인들과의 갈등이 점점 깊어집니다.  



오늘의 표적은 예루살렘 어디에서 일어납니까? 양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 못가입니다. 양문은 예루살렘 성 북쪽에 있는데 이곳을 통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양과 염소가 들어갑니다. 느헤미야가 무너진 성벽을 수축할 때 제일 먼저 작업을 시작한 곳이 바로 양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배의 회복이 가장 필요한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베데스다(Bethesda)는 히브리말로 ‘beth'와 ’hesed'의 합성어입니다. ‘벧’은 집을 뜻하고,  ‘헤세드’는 자비 또는 은혜를 뜻합니다. 따라서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 혹은 ‘은혜의 집’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베데스다 못가에는 행각 다섯이 있습니다. 행각은 기둥이 있고 지붕이 있어서 햇볕을 가릴 수 있고 비를 피할 수 있는 구조물입니다. 그 연못에 행각이 다섯 개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안에 많은 병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그들을 눈이 먼 자, 다리를 저는 자, 혈기 마른 자로 구분합니다. 그 병들은 그 당시 의술로는 쉽게 고칠 수 없는 병들입니다. 혈기 마른 자는 사지가 마비된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모두 행각 안에 누워 있었다고 요한은 기록합니다. 그들로 인하여 행각 안은 지저분하였을 것이고 나쁜 냄새도 많이 났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계속하여 모여 있던 이유는 단 한 가지. 이따금 천사가 그 못에 내려와 못의 물을 움직이는데, 그 때에 먼저 들어간 사람은 어떤 병이든지 낫는다는 소문 때문입니다.

가만히 있는 물이 갑자기 움직이는 현상을 어디서 볼 수 있습니까? Wyoming주 Yellowstone 국립공원에 있는 간헐천(Geyser)입니다. 그곳에 있는 Fountain Geyser는 4시간에서 15시간 간격으로 약 75ft까지 물이 솟구칩니다. 정확한 설명은 없으나 베데스다 못에서 물이 움직이는 현상을 그런 간헐천 효과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그 신기한 현상을 천사가 가끔 내려와 물을 움직이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게다가 물이 움직인 후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려도 나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병에 걸린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금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1849년에 캘리포니아로 금을 캐러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캘리포니아에 소문만큼 금이 많지는 않았는데 사람들을 많이 끌어들여 캘리포니아를 개발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부러 그런 소문을 퍼뜨렸다고 합니다. 어쨌든 그런 허황된 소문을 듣고 고치기 어려운 병을 가진 사람들이 베데스다 못가에 몰려들어 물이 언제 움직일지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남보다 먼저 들어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항상 그들을 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 서로가 경쟁 상대였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기에 그곳에 왔는데 모인 사람 중에서 제일 먼저 못에 들어가려면 다른 사람들보다 몸을 더 잘 움직여야 합니다. 소경보다는 눈을 뜬 사람이, 중풍이 들어 몸을 못 쓰는 사람보다는 그래도 사지를 제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먼저 못가로 달려갈 수 있습니다. 몸이 아파서 왔는데 다른 사람들보다 건강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베데스다 못입니다. 도움을 얻을 것을 기대하고 왔는데 막상 아무런 도움을 얻을 수 없는 곳이 베데스다 못입니다. 진짜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전혀 그 필요를 채울 수 없는 곳이 베데스다 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이 아니라 무자비의 집입니다.



베데스다 못은 세상을 상징합니다. 남들보다 항상 먼저 달려야 하고 잘 달리기 위하여 항상 신경을 곤두세워야 합니다. 남을 누르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합니다. 경쟁에 지면 도태할 수밖에 없습니다. 힘은 들지만 지지 않으려고 계속 나아가다 보면 탈진(burn-out)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돌아설 수도 없습니다. 분명히 문제가 있음을 알면서도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주저앉아 혹시라도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막연하게 기다리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베데스다 못가에 있는 행각에 있는 병자들에게서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누워있는 사람들을 둘러봅니다. 그러다가 병에 걸린 지 오랜 듯이 보이는 한 사람에게 시선이 멈춥니다. 다가가 말을 건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얼핏 들으면 예수님은 당연한 질문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은 의도적입니다. 사실 그 병자는 38년 동안이나 누워 있는 동안 낫고자 하는 소망을 오래 전에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소망을 주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셨다는 것은 100% 치료를 보증합니다. 아픈 사람에게 얼마나 듣고 싶은 주님의 음성입니까? 우리 같으면 ‘예 낫기를 원합니다’ 얼른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선생님, 저에겐 물이 움직여도 물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 혼자 가려고 애쓰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



그의 대답을 통하여 몇 가지 문제점에 사로잡힌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하는 예수님의 질문은 그 사람이 과연 얼마나 나으려는 의지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그 사람도 병에 걸린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는 낫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이것저것 시도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38년 동안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으면서 쌓여온 높은 현실의 벽이 그런 소망을 사라지게 하였습니다. 이제 그는 문제만 볼 뿐이지 해결책은 찾아 볼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몸만 마비가 된 것이 아니라 그의 의지도 마비가 되고 말았습니다. 마음의 깊은 상처가 그가 하는 말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나를 도와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신은 철저하게 소외되었고 버림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병 자체보다 무서운 것은 자기와 자기 주변의 여건으로 인하여 병이 나을 수 없다는 절망감입니다. 절망이야말로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우리 모두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침체의 늪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2)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자신은 베데스다에서 구원을 받는 방법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고 합니다. 천사가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을 때 제일 먼저 못가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군가가 자기를 옮겨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는 이미 38년을 허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방법만을 붙들고 있습니다. 병자는 지금 자기 앞에 서 있는 예수님이 지난 38년동안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지나쳐 버린 수많은 다른 사람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알게 모르게 쌓여 가는 고정관념은 우리로 하여금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자세를 가지게 합니다. 나는 안돼, 내가 해보았자 별 수 있는가? 하면서도 자기의 방법, 자기의 주장을 고집합니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눈을 밝혀주셔서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보고, 내게 능력을 주셔서 하지 못하던 것을 하게 하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부족과 한계를 인정하게 자신의 연약함을 내어 넣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보게 하시고 하게 하십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양을 치고 있을 때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그러나 모세는 가기를 주저했습니다. 자기는 그런 막중한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내가 누굽니까? 나는 전에 애굽 사람을 쳐 죽인 도망자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그런데 누가 나를 보냈다고 하죠?  여호와 하나님 즉 스스로 있는 자가 보냈다고 하라. 그래도 안 믿으면 어떡하죠? 이적을 행할 능력을 줄께 지팡이를 던지면 뱀이 되고 손을 품에 넣으면 문둥병이 생겨나고 강물을 뜨면 피가 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 나는 말을 더듬어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하니 어떻게 말을 전하죠. 공연히 헛고생하지 마시고 보낼만한 사람을 보내소서. 계속 주저하는 모세에 대하여 하나님이 화를 내십니다.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출 4:11-12) 모세가 가진 고정관념은 무엇이었습니까? 나는 능력이 부족하다. 그러므로 출애굽과 같은 일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제한합니다. 물론 모세 개인의 힘으로 출애굽 사건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출애굽을 주관하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모세는 그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만 하면 되는데 모세는 자기가 가진 고정관념에 묶여 있었습니다.



3) 분노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나보다 먼저 들어갑니다. 아마 그는 “먼저” 라는 말을 힘주어 말을 했을 것입니다. 나보다 나중에 온 친구들이 나를 앞질러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 나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물이 움직일 때 나를 재빨리 물에다 옮겨다 줄 건장한 사람입니다. 그의 말 속에는 깊은 좌절과 분노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 때문에 자기 신세를 망쳤다고 합니다.



38년 된 병자는 베데스다 못까지 가는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입니다. 내용이나 정도는 다르지만 무한경쟁 시대에 사는 우리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도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뒤처지거나 탈락했던 쓰라린 기억들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긴 자, 먼저 나아간 자에게만 주목을 하는 것 같고 뒤처진 자기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럴 때 분노와 허탈감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그것이 깊어지면 의욕을 잃고 우울증에 빠집니다. 요즘같이 경기가 어려운 때 더욱 이런 감정에 휩쓸리기 쉽습니다.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를 향한 주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주님께 물어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저희들에게 은혜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이끄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역의 전반부는 물과 많이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예수님은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첫 번째 표적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물을 길러온 수가 성 여인에게 야곱의 물과는 차원이 다른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베데스다 못가에서 절망가운데 있는 중환자를 살리십니다. 사람들은 천사가 내려와 물을 움직일 때 치유가 일어난다고 생각하였으나 예수님은 오셔서 물이 움직이는 정도와는 차원이 다른 우리의 삶 전체를 움직이셔서 치유와 회복을 주시고 구원을 베푸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절)

예수님이 병자에게 하신 말씀은 세 개의 명령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일어나라, 지금 당장 네 자리를 들어라, 그리고 계속해서 걸어가라 하십니다. 일어나고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은 그 병자가 지난 38년 동안 전혀 할 수 없었던 행동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과연 38년 만에 일어났고, 38년 만에 자기 자리를 들었고 38년 만에 걸었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 1:16)이라 하였는데 과연 예수님의 말씀은 능력 그 자체입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바로 그 능력의 말씀이 병자에게 소망을 주었고 치유를 주었고 기쁨을 주었습니다.



그 병자는 신이 나서 자리를 들고 이리저리 다닙니다. 베데스다 못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가 다니는 것을 봅니다.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 사람이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다닌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같은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다가와“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시비를 겁니다. 38년 동안 걷기는커녕 한 번도 일어서지 못한 사람이 일어나고 걸었으면 얼마나 함께 기뻐해야 합니까? 그러나 율법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은 함께 기뻐하기는커녕 도리어 자리를 들고 걸어간 것을 일을 한 것이라 해석을 내리고 안식일의 규정을 어기는 것이라고 하여 이 사람에게 시비를 겁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였다고 대답합니다. 그가 누군데. 모르겠는데요. 그 병자는 아직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병자를 일으키자마자 조용히 군중들 사이로 사라지셨습니다. 베데스다 못가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14절)

예루살렘 성전은 몸이 성하지 못한 사람은 들어가지 못합니다. 아무리 성전에 들어가고 싶어도 몸이 불구이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통하여 치유함을 받은 이 사람은 낫자마자 꿈에도 그리던 성전으로 갔습니다. 사도행전 3장을 보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거지가 베드로를 통하여 걷게 되었을 때도 먼저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병자가 나은 것은 본인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38년 된 병든 육체가 회복 되는 이상입니다. 영적인 건강의 회복. 즉 하나님과 관계의 회복입니다. 육신의 건강뿐 아니라 영혼의 건강도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를 개인적으로 만나셔서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권면하셨습니다. 다시 죄를 범치 말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어떤 특정한 죄 때문에 지난 38년 동안 병으로 고생하였으니 더 심한 병이 생기지 않도록 다시 죄를 짓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의 뜻은 38년 동안 너는 계속 죄를 범했는데 이제는 그런 죄를 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지난 38년 동안 베데스다 행각에서 누워 있으며 무슨 죄를 범했겠습니까?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다고 원망하였고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먼저 간다고 불평하고 분노하였습니다. 출애굽 제1세대가 하나님께 끊임없는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다가 광야생활을 40년이나 하였고 결국은 가나안에 들어가 보지도 못한 채 죽고 말았습니다.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라고 말씀하신 것은 지금 당장 육신의 병만 낫는다고 이 사람의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육신의 병이 치료된 후에도 계속하여 죄악 된 삶을 산다면 장차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을 닫고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으려는 자들도 그 병자처럼 일시적으로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변화되지 않으면 받은 은혜조차도 쏟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알고 고쳐주기 원하십니다.

베데스다 못에 먼저 들어가면 치유가 일어난다는 것은 헛된 소문입니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허상에 이끌리어 인생을 허비하고 있습니까? 그러면서도 베데스다 못에 누워있는 환자들과 같이 거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여전히 머물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먼저 못에 들어갔다고 하면서 원망하고 분노하던 38년이 된 병자와 같이 현재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은 다른 사람 탓이라고 하면서 원망과 좌절의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사 55:1-3) 전에는 주님이 육신을 가지고 직접 찾아 오셨으나 이제는 성령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이제는 우리의 시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시는 주님을 향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는 성경적인 원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저와 여러분이 소망을 갖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저와 여러분을 일으켜 세우고 우리의 누웠던  자리를 걷어치우게 하고 주님의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고 주님과 더불어 걷게 하십니다. 다시는 어두움의 권세에 휘둘리지 않고 자유의 사람, 구원의 사람, 안식의 사람이 되어 때를 따라 돕는 주님의 은혜 가운데 있게 하십니다.



나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나의 진정한 필요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솔직하게 자신을 하나님께 드러내고 각자의 죄성, 부족한 부분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말씀을 통하여 찾아오십니다. 우리의 변명이나 핑계를 듣기 위하여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고쳐주고 회복시켜 주시려고 오십니다. 전해지는 메시지가 나의 양심을 건드릴 때 그 말씀에 나의 삶, 생각, 자세를 비추어 보고 고칠 것은 고쳐야 합니다. 주여 말씀하소서 내가 듣겠나이다, 나의 문제, 나의 필요를 깨닫게 하소서 하는 겸손한 자세로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께 시선을 고정할 때 우리를 누르는 문제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압도함으로 마음의 분노가 사라집니다. 기쁨과 평강이 생깁니다. 감사가 나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이요,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어야 할 말씀입니다.



38년 된 병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몰랐고 예수님께 자기의 병을 고쳐달라고 부탁한 적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수가 성 여인을 찾아가시듯이 그 사람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란 아무런 받을 자격이 없는데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베풀어주신 선물을 뜻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내달라고 요청해서 하나님이 그를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신앙생활은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는데서 출발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더 풍성한 삶을 살게 됩니다. 내가 믿음이 좋아서 헌신을 많이 하여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주신다고 생각지 마세요. 내가 믿음이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도울 수 없다고도 생각지 마세요. 고난은 도리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기회가 됩니다. 사나 죽으나 하나님이 높임을 받기 원한다는 바울의 기도처럼 현재의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깨달으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38년을 자리에 누운 자가 바로 우리의 삶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무엇인가 잘못된 것 같은데도 어찌할 방도를 몰라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막연한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육신의 질병 뿐 아니라 영혼의 병까지 고쳐주시는 분입니다. 주님께서 해결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는 없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 말씀을 힘입어 주안에서 새로운 기쁨과 능력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일어나는 것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인한 일어남과 연관이 있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면서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놀라운 표적들을 때마다 시마다 경험하며 치유와 회복과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능력 있는 성도들, 소망을 주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