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뜻을 정하여(단 1:8-17)

Author
Myung Myung
Date
2008-06-15 16:02
Views
5780
단 1:8-17 뜻을 정하여



금년에 10명의 학생들이 졸업하였습니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고등학교에서 대학으로, 그리고 대학을 마치고는 대학원이나 직장을 얻기 위하여 사회로 나갑니다. 잘 아는 대로 우리말의 ‘졸업’은 공부를 마친다는 뜻이 있지만 영어로 ‘commencement’는 시작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한 과정을 마친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과정을 향하여 나아간다는 미래지향적인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오늘 졸업예배를 드리면서 이런 삶을 살았던 다니엘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비록 이방 땅에 포로로 끌려왔지만 신세타령이나 하면서 불평만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은 다니엘을 본받아 졸업생들이나 이 자리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는 모든 분들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복 되고 값진 인생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다니엘서 1장에는 두 가지 명령이 있습니다. 바벨론 왕의 명령이 있는데 바벨론 사람들은 모두 왕의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바벨론 사람들이야 왕의 명령만 따르면 됩니다. 그러나 바벨론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의 명령도 따라야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도 따라야 합니다. 두 명령이 같으면 상관없지만 다르다면 누구의 명령을 따라야 합니까? 시대적 상황은 다르지만 오늘날도 이러한 딜레마에 있을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것인가?



제가 진해에서 직장생활 할 때에 해군과 같이 일을 하다 보니 군함을 진수하는 행사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돼지 대가리를 제사상에 올려놓고 상 앞에 펴 놓은 돗자리에 구두를 벗고 올라가 절을 합니다. 함대사령관이 먼저 절을 하면 계급 순으로 절을 합니다. 저희 부장이 장로님인데 저 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할까 궁금하여 지켜보았는데 그분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돼지머리에 절을 했습니다. 그래서 동료들과 함께 장로님도 절하는구나 하면서 수군거린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윗사람이 절을 하니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절을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 장면을 지켜보면서 안타까웠던 것은 사실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유다 백성입니다.

다니엘 때에 시대적 상황이 어떠합니까? 유다 왕 여호야김은 하나님 앞에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인 우리야를 죽이고(렘 26:20-23),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칼로 베고 불에 태워 버렸습니다(렘 36:22-23). 하나님께서는 왕으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언약을 깨뜨리고 우상을 섬기면서 불순종한 유다를 벌주시려고, 대적 바벨론의 손에 붙이셨습니다. 여호야김이 다스린 지 삼 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쳐들어 왔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함락되고 성전은 불타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유다를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언약과 다윗의 나라가 견고히 서게 하시겠다는 언약 때문입니다. 유다 백성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신실하게 지키셨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성전 기구 얼마와 함께 유다 귀족 중의 인재들을 포로로 잡아왔습니다. 고대 중동지방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국가 간의 전쟁은 신들의 전쟁입니다. 따라서 성전에서 쓰는 그릇을 옮겨갔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신이 바벨론에 사로잡혀간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이 모든 일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보여줍니다. 바벨론이 성물을 가져간 것은 하나님이 무력하거나 바벨론의 신보다 약해서가 아니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바벨론은 유대 민족의 정체성을 없애려고 합니다.

느부갓네살은 포로로 끌고 온 사람들 중에 똑똑한 인재들을 발탁하여 특별 훈련을 시켰습니다. 삼년동안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방언을 가르치며 왕이 먹는 음식을 먹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잊게 하고 지도자인 그들부터 완전히 바벨론에 동화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름도 바벨론식으로 바꾸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 하나냐는 ‘여호와가 은혜를 베푸신다’, 미사엘은 ‘여호와가 도우신다’, 그리고 아사랴는 ‘여호와가 도우신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이름에 전부 하나님의 이름을 뜻하는 ‘엘’ 또는 ‘야’라는 단어가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개명을 한 것을 보면 벨드사살은 ‘벨이여 그의 생명을 보호하소서’, 사드락은 ’아쿠의 명령‘,  메삭은 ’누가 아쿠신인가‘ 그리고 아벳느고는 ’느고의 종'이란 뜻으로 개명된 이름에는 전부 바벨론 신인 벨, 아쿠, 느고 등의 이름이 들어가 있습니다. 비록 바벨론 사람들은 다니엘과 세친구들을 바벨론식 이름으로 불렀지만 그들은 여호와 신앙을 굳게 지켰습니다. 바벨론으로 오기 전에 이미 유다에서 언약과 율법에 대하여 교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져질지언정 하루에 세 번씩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 것이나, 세 친구들이 풀무불에 던져질지언정 왕의 금신상에 절하기를 거부한 것이 그들의 신앙을 나타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뜻을 정합니다.  

바벨론 왕은 포로로 끌려온 청년들에게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제공하라고 명을 내렸습니다. 왕의 제안은 보통 사람들이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었습니다. 사실 다니엘과 세 친구 외에는 다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율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과 그 정신에 따라 살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왕이 준 음식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왕의 진미가 무엇이었는지 구체적인 언급은 없으나 그들에게 주어진 음식이 우상의 제물로 드려졌거나 피를 완전히 제거하지 않았거나 율법이 부정한 짐승으로 규정한 것들이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별된 삶을 살려는 경건한 백성들에게는 문제가 되는 음식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어떻게 행동합니까? 환관장에게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주지 말라고 건의합니다. 왕의 음식을 거부하는 행위는 사실 왕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절대왕정 하에서 왕의 명령을 거부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들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신앙의 정절을 지키려고 하였습니다. 만약 환관장이 포로로 끌려온 주제에 무슨 말이 많으냐 주는 대로 먹어라 그렇지 않으면 왕에게 보고하여 너희들을 혼내주겠다고 한다면 다니엘과 친구들은 별수 없이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든지 아니면 큰 어려움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믿음의 행동을 기특하게 여기신 하나님께서 환관장의 마음을 움직이시니 그로부터 호의적인 반응을 얻습니다. 환관장의 임무는 소년들을 잘 훈련시키고 잘 먹여서 왕 앞에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채식만 먹다가 얼굴이 수척하기라도 하면 왕의 명령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죄목으로 자기의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것이라 말합니다. 왕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환관장은 다니엘의 요청을 거절하였습니다.  

  

다니엘이 이번에는 자기들을 직접 담당하고 있는 감독에게 대안을 제시합니다. 열흘 동안 채식과 물만 주면서 자기들을 시험하라고 요청합니다. 열흘이 지나면 얼굴에 변화가 나타날 텐데 그때 가서 왕의 진미를 먹는 다른 소년들과 비교하여 보아 자기들의 모습이 수척하다면  처분대로 따르겠다고 합니다. 판단과 결정을 감독에게 위임함으로 그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합니다. 채식은 직역하면 씨앗입니다. 즉 볶거나 삶은 곡식을 말합니다. 다니엘이 왜 채식만 먹겠다고 제안합니까? no cholesterol, no fat 음식을 먹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함입니까? 자신을 더럽히지 않게 하려함이요, 채식만 먹을지라도 하나님의 도우시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과는 성공적입니다. 불과 열흘이 지났는데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니 다른 사람들이 분명히 알 수 있을 정도로 큰 변화가 나타납니다. 채식만 먹었는데도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얼굴은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이 주는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나아 보였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감독하는 자는 왕의 진미와 포도주 대신에 채식만을 주는 것을 허락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우상에 바쳐진 음식을 인하여 자신들을 더럽히지 않게 되었습니다. 왕의 진미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 귀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믿음으로 승리한 다니엘과 세 친구에게 어떤 복이 임합니까?

1) 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에 합한 자들에게 베푸시는 은혜는 언제나 풍성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육신적으로도 강건하게 하시고 지식을 얻게 하심으로 모든 학문과 재주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세상의 지식은 배워서 얻을 수 있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때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에게 특별한 은사를 주셨는데, 그것은 인간의 지혜로는 도저히 깨달을 수가 없는 모든 이상과 꿈의 징조를 깨달아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 은사는 앞으로 그가 왕의 꿈을 해석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환상을 받는 사역을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이기에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자만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에게 이러한 능력을 주셔서 바벨론의 모든 박사들보다 뛰어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2) 왕 앞에 서게 합니다.

삼 년이란 기간이 지나 그들이 느부갓네살 왕 앞에 섰을 때 왕이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그들이 다른 무리보다 뛰어날 뿐 아니라 이미 활약하던 바벨론의 모든 지혜자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 지혜를 가진 것을 알게 되어 그들을 왕의 모사로 삼았습니다. 포로로 잡혀 온 자들이 왕 앞에 모시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요셉과 공통점이 많습니다. 본인의 의사에 상관없이 남의 나라에 끌려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둘 다 꿈을 잘 해석하였고 꿈 해석을 잘함으로 출세하였습니다. 두 사람 다 왕 다음가는 둘째 치리자가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두 사람 다 이방인들의 사이에 살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런 역경 속에서도 어떻게 믿음을 유지하며 사는 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어떤 교훈을 얻습니까?

1)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포로로 끌려온 자들 중에 선택받은 유대인입니다. 그들에게 출세가 보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훈련을 마치면 정부의 요직에서 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작 음식 문제로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 어리석은 선택으로 비추어집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다른 세 친구들과 더불어 뜻을 정하여 바벨론의 안락을 버리고 고난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있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였기에 뜻을 정하였고 그 뜻을 실천하였더니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이 처음부터 지혜와 총명을 얻고자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기로 뜻을 정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우선순위의 삶을 살기로 뜻을 정하였더니 그가 구하지 아니한 것까지 넘치도록 채워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면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고난 가운데서도 은혜를 베푸십니다. 다니엘의 결단은 무모한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헌신, 말씀에 대한 확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중심으로 살 것을 요구하는 구절이 많습니다.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 하나님 중심으로 살면 이 땅에서의 삶은 주님께서 책임지신다고 합니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뜻을 정하고 삶 전체를 하나님께 헌신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십니다.

삼상 2:35,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잠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요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하나님 중심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입니다. 이것은 시대를 초월한 진리입니다. 바벨론 왕이 유대 청년들에게 종교적 동화요 신앙의 무력화를 시도하였습니다. 바벨론을 따라가다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다 잃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이 바벨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질만능, 쾌락지상주의, 절대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팽배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이 우리를 알게 모르게 세뇌시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어디로 끌려갈지 모릅니다. 이에 대한 대응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2) 세상의 것도 잘 배워야 합니다.

일제 강점기에 학교에서는 일본말을 가르치고,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꿀 것을 강요하고 역사를 왜곡하며 한국의 고유문화, 한국인의 정체성을 말살하려고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름을 바꾸었지만 거부하다가 옥에 갇힌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 해방 후에 교회에서도 신사참배 했느냐 여부만을 가지고 정죄하며 교단이 갈라지기도 하였습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식으로 이름을 바꾸고 바벨론의 최고 학문을 배우고 바벨론에서 관직생활을 했다고 그를 유대 민족의 배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다니엘이 그런 삶을 산 것은 바벨론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동의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바벨론 생활과 사역에 필요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드리는 것은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알게 모르게 세상적인 가치관을 배웁니다. 진화론이 진리인 것처럼 배웁니다. 기독교는 그저 세상의 많은 종교 중의 하나라고 배웁니다. 자칫하면 그런 가르침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주일학교 때부터 받은 기독교의 가르침이 너무 편협하다는 생각이 들며 신앙에 회의를 가질 수 있습니다. 특히 부모 곁을 떠나는 대학생활은 더욱 그런 유혹에 노출이 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세상 학문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의 기초 위에 배운 지식을 올려놓아야 합니다. 믿는 사람이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믿는 사람이 정직해야 합니다.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자들보다 더 신뢰감을 주어야 합니다. 다니엘은 유다에 있을 때에 신앙 훈련을 잘 받았기에 바벨론에 가서 이방 학문을 배우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았습니다.



3) 성도들은 세상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하신 약속이 있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편이 되어주시겠다 합니다. 더구나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인하여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을 통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힘입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똑같이 주시는 약속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성도들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기업을 함께 나눌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전달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애굽으로 인도하신 것도 단지 야곱의 70명의 가족들을 이주시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기근으로 신음하던 애굽과 그 인근나라 사람들이 요셉을 인하여 복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다니엘 6장을 보면 다니엘을 시기하는 자들이 모함하여 사자굴에 던져지게 됩니다. 다니엘의 진실함을 아는 왕은 근심하여 그를 구하고자 애를 썼으나 무리들이 자꾸 재촉을 하니 왕은 어쩔 수 없이 사자굴에 던지는 것을 허락하고 맙니다. 왕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네가 항상 섬기는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실 것이라” 하며 다니엘을 위로합니다. 아침 일찍 왕은 사자 굴에 달려가서 다니엘이 살았는지 알고자 하였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네 하나님이 사자에게서 너를 구원하였느냐? 그때 다니엘이 왕에게 대답하기를,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였나이다” 왕은 너무 기뻐하였다. 그래서 그는 조서를 내립니다. “왕국의 모든 백성들은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라 그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치 않으실 자라 그는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라” 다리오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 왕이지만 다니엘이 항상 진실하고 하나님의 지혜로 나라를 잘 다스리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이 비록 바벨론에 있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나아가니 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놀라운 증거들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있습니다.(we are in the world),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but we are not of the world), 도리어 세상을 위하여 존재합니다(rather, we are for the world)는 말이 있습니다.



학생들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믿음의 기초 위에 그 배운 것을 잘 활용함으로 세상을 섬기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에 육신적인 박해는 없다할지라도 신앙생활을 하는 환경이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믿지 않는 직장상사나 동료, 친구들 속에서 어떻게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야 할지 지혜가 필요합니다. 세상 속에 살면서도 구별되어야 하고, 세상의 것을 수용을 하면서도 거절할 줄 아는 균형이 필요합니다. 비록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세상을 위하여 사는 영적으로 긴장된 자세가 필요합니다.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분명한 증거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4)  신앙의 여정에는 믿음의 동지들이 필요합니다.

다니엘 혼자만 있었더라면 자기의 뜻을 정한대로 실천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비록 포로의 신분으로 살았지만 서로의 존재는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습니다. 위기 가운데서도  신앙을 지킬 수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 4:12)는 전도서의 말씀이 있습니다.  함께 있으면 힘이 더 강해지는 것이요 서로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마음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신앙생활을 하고 또한 세상을 살아 나간다면 이것은 얼마나 큰 복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서로 격려하고 기도하여 주는 support group의 중요성을 볼 수 있습니다. 어른들은 목장 식구들이 필요합니다. 주 안에서 한 형제자매들이 되어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는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를 이룰 때 우리의 신앙생활은 synergy 효과가 나타나서 더 많은 열매를 거둡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게 있어 “왕의 진미”와 “포도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유혹하는 것들이 있습니까? 다니엘과 같이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기로 뜻을 정해야 합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갔다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바벨론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은 역사하셨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믿음으로 뜻을 정하였습니다. 뜻을 정하고 그 뜻을 실천한 결과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지혜와 명철을 가졌을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아 귀한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현재의 환경을 탓하지 맙시다.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을 찾고 그 뜻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모든 교우들이 다니엘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안에서 뜻을 세우며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여 살면서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을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성령의 지혜와 능력으로 갖추어져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