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네 아들이 살았다(요 4:43-54)

Author
Myung Myung
Date
2008-06-01 14:17
Views
5129
요 4:43-54   네 아들이 살았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했다 하지만 현재의 의학 수준으로 고치기 어려운 병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무서운 병들이 계속 발견되고 있습니다. 아마 전에도 있었는데 그때는 무슨 병이었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도 여러 분들이 암으로 진단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대부분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였습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은 하나님께 달려있기에 우리가 할 것이라고는 연약한 형제나 자매들을 위하여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병과 죽음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써 시작된 것으로 다시는 아픈 것이나 사망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에 가기 전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본문에 보니 중병에 걸려 자칫하면 아들이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날 수도 있는 상황이 나옵니다. 자식의 병세는 악화되는데 자기로서는 아무 힘도 써볼 수 없는 상황에 있다면 아버지의 심정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런데 위기의 상황에서 그 아들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어떻게 위로를 받았는지 그리고 이 사건이 오늘 우리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지 살펴보면서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성도들은 다 주님의 마음에 합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고 삶 속에서 주님이 함께 하시는 놀라운 증거들을 경험하고 함께 그 기쁨을 나누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예수님께 호의를 보이는 두 동네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한 그룹은 사마리아 사람들입니다. 떳떳치 못한 과거를 가졌다는 이유로 동네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던 한 여인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신 예수님은 물이라는 공통적인 화제를 가지고 대화를 이끌며 여인의 문제점을 드러내시고 당신이 메시야임을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치유를 경험하고 인생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게 된 여인은 그 감격을 인하여 물동이를 내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 메시야를 보았다고 열심히 전합니다. 여인의 전도를 받은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모여듭니다. 예수님께 더 머물라고 부탁하며 예수님을 이틀 동안 붙잡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직접 보지 못하였으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라고 고백합니다.  



또 다른 그룹은 갈릴리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갈릴리에 도착하시자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고 그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명절에 예루살렘에 갔다가 거기서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요한은 적고 있습니다.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이 더 있다는 우리말 속담처럼 예수를 통하여 생명의 구주를 영접하고 구원에 참여하기보다 예수님을 그저 기적이나 일으키는 신기한 사람 정도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또 다른 표적을 볼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말씀중심의 신앙을 가졌습니다. 반면에 갈릴리 사람들은 표적 중심의 신앙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두 그룹 중에서 어느 쪽을 더 기뻐하시겠습니까?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어떠합니까? 표적중심의 신앙입니까 아니면 말씀중심의 신앙입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왕의 신하는 어떠합니까?



선입관이나 편견이 예수님에 대한 이해를 방해합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44절)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 이틀을 머무신 후에 갈릴리로 오시면서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 고 하셨습니다. 고향인 나사렛 사람들의 신앙을 진단하시는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6장에 보면 예수께서 고향에 와서 가르치실 때 무리들이 놀라기는 하지만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보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 즉 자라온 배경, 집안 사정, 그에게 일어났던 일 등을 속속들이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말씀 속에 담겨진 지혜나 예수님에게 나타난 능력은 인정하면서도 예수님을 그저 마리아의 아들, 목수 이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고향 사람들의 자세는 불신앙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을 거절하는 그들에게 더 이상의 능력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예수님은 단지 기적을 통하여 사람들의 인기를 얻기 위함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씀의 권능으로 사단을 능히 압도하고 그의 밑에서 신음하고 고통을 받던 자들을 자유케 하고 회복시키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병 치료나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리기 위한 보조적인 수단이지 그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표적중심의 신앙에 도전하십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가나에 오셨습니다. 가나는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표적을 일으킨 곳입니다. 한창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중에 가장 중요한 포도주가 떨어졌으나 어머니 마리아의 부탁에 따라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가나에 왔다는 소문이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그들 중에 예수님 만나기를 특별히 원하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가나에서 34km쯤 떨어진 가버나움에 사는 왕의 신하입니다. 그는 헤롯 밑에 일하면서 권력도 있었을 것이고 용하다는 의사를 찾아갈 수 있을 만큼 경제력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가진 어떤 것으로도 아들의 병을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자기에게 기쁨을 주던 아들이 죽어간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신하는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지금 같으면 자동차로 한 시간 이내로 갈 거리지만 그 당시에는 걸어서 가는 길이요 더구나 산길을 가야하는지라 한나절 이상 시간이 걸렸습니다. 보통 왕의 신하 같았으면 자기의 신분 때문에 예수님께 선뜻 나아가기를 꺼렸을 것이지만 자기 아이가 죽게 되는 지경에 이르자 그런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 119:71) 하는 시편의 말씀처럼 삶에서 일어나는 위기가 왕의 신하로 하여금 도리어 예수님을 만나는 기회가 됩니다. 이러한 문제가 아니었더라면 그 신하가 예수님을 만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고난을 자원하는 분들은 없겠으나 그런 것이 온다할 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기회인 줄 알고 주님을 끝까지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6)는 바울의 권면도 성도들에게 문제없는 행복한 삶만이 계속된다는 말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과 처지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하는 이유를 찾으라는 뜻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왕의 신하도 아들의 병 때문에 그와 온 가족이 구원을 얻는 주님의 은총을 받게 됩니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께 간절하게 청합니다. “내려 가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청’한다는 단어가 문법적으로 볼 때 반복적이거나 지속적인 동작을 나타냅니다. 제발 자기 아들을 고쳐달라고 끈질기게 부탁하였습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표적을 자기 아들에게도 행해달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왕의 신하에게 어떤 반응을 보이십니까?

신하는 심각한 청에 예수님은 엉뚱한 답변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그 시대를 향한 예수님의 탄식이 담겨져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 나타난 왕의 신하도 예수님을 그저 표적이나 행하시는 분(miracle worker)정도로 생각하는 갈릴리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표적과 기사를 보이신 목적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능력을 통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표적 그 자체를 보는데서 만족을 느끼므로 예수님의 마음이 안타까우셨습니다. 주님은 자기 앞에 있는 왕의 신하를 비롯하여 모든 갈릴리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가 치료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이 지금 무슨 뜻으로 말씀하시는지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아들이 낫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예수님을 재촉합니다.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죽기 전’이라 말한 것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 난다는 뜻입니다. 죽으면 예수님도 어쩔 수 없으니 지금 당장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자고 합니다. 신하가 가진 믿음의 한계가 드러납니다.



주님은 우리의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왕으로 모신다고 하면서도 은근히 종처럼 부리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의 뜻보다는 내 뜻이 더 급하고 우선한다고 생각하며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제자도의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아무든지 예수님을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부정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생각, 자기 방법이 옳다고 주장하며 주여 이렇게 해주셔야겠나이다 해결책까지 제시하면서 자기 생각대로 하나님을 이끌려는 것은 주님의 제자가 가질 자세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라고 하셨습니다.  



아들이 죽기 전에 내려와 달라는 신하의 간곡한 요청을 듣고 예수님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십니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이 자기와 함께 가버나움에 가야만 아이가 나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전혀 다른 처방을 제시합니다. 혼자 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실 필요가 없이 그가 혼자 가야하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아들이 살았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개역 성경에는‘살았다’ 하면서 과거형으로 번역되어 있으나 원문에는 현재형입니다. 살아있다. 계속해서 산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왕의 신하 앞에서 아무런 표적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표적 대신에 주신 것은 말씀입니다. 표적중심의 신앙을 가진 신하에 대한 도전입니다. 말씀이 믿어지면 가라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왕의 신하는 할 수 있는 행동이 무엇입니까?

1) 자기 아들의 안타까운 상태를 언급하면서 어떻게 하든지 자기와 함께 가버나움에 가지고 계속 졸라 대는 것입니다.

2) 아들이 살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말씀에 순종하여 왔던 길로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3) 예수님에 대한 모든 기대를 다 내려놓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잠시 침묵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계속 설득하여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갈 것인가 아니면 이미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고 가버나움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다 포기하고 그냥 가버릴 것인가? 사도 요한은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그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떠났다. 문법적으로 보면 믿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떠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왕의 신하가 가나에 올 때에는 표적 중심의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대단한 기적을 행하시는 분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그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원하던 표적은 보지 못하고 함께 가자는 요청은 거절되었으나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는 말씀을 듣는 순간 그 말씀이 믿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왜 나와 함께 내려가시지 않느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표적을 보여주시면 믿겠나이다 하지 않고 믿음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 가버나움으로 내려갑니다. 사도 요한은 그가 집으로 돌아가는 근거가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만일 예수님의 말씀이 전혀 믿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는 예수님께 같이 가자고 계속 졸라댔을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말씀에 의심이 생겼더라면 가버나움으로 가는 도중에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의 신하는 끝까지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가나에서 가버나움까지는 34km 쯤 떨어져 있습니다. 산길을 가자면 하루는 걸어가야 하는 거리입니다. 하루 종일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 왔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고 다시 그 밤에 가버나움으로 돌아갑니다. 온밤을 꼬박 지새우며 그 밤길을 갔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이 보입니다. 여전히 아들의 안부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었을 것입니다. 내 아들이 죽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길은 믿음의 여정입니다. 한밤의 어두움을 뚫고 빛 되신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가는 승리의 행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기 아들이 살아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갔을 것입니다. 날이 밝아옵니다.  



내려가던 길에 자기를 향하여 오던 종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주인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오던 중이었습니다. 그들의 첫마디는 주인의 아들이 살았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입니까? 드디어 살았구나 하면서 흥분하여 살아난 아들을 보려고 집으로 달려가지 않습니다. 너무도 차분합니다. 내 아들이 언제 나았지? 낫기 시작한 때를 묻습니다. 그러자 종들은 어제 7시경에 즉 오후 1시쯤 열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고 보고합니다. 예수님이 "네 아들은 살아있다" 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때인 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말씀 중심의 신앙이 확증되는 순간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다고 하는(롬 10:17) 바울의 말을 그는 체험을 통하여 깨달았습니다. 말씀이 임한 때와 표적이 일어난 때를 비교하며 왕의 신하는 더 깊은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표적과 기사를 보아야만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표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분의 능력을 신뢰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기적이라고 사도 요한은 소개합니다. 가나에서 처음 표적을 행하실 때에는 물을 포도주로 만드심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창조주로서의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이제 가나에서 두 번째 표적을 통하여 죽어가는 아이를 말씀으로 고치심으로 생명을 살리는 구원자로서의 능력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살아있는 말씀임을 실증합니다.



말씀중심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못한다고 탓하셨는데 오늘 왕의 신하는 예수의 말씀만 듣고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믿었을 때 자기의 아들이 낫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신하가 처음 예수님을 만날 때의 믿음은 예수님이 보시기에 형편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그의 믿음에 도전하셨습니다. 그런데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왔던 길로 되돌아갔습니다. 물론 가는 동안 의심과 초조와 불안과 갈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그 결과 자기 아들이 온전케 되는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말씀 중심의 신앙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의심의 생각을 누르고 감정의 불안을 극복하며 말씀 위에 굳게 선 의지로 어둠을 뚫고 나아가야 하는 전 인격적인 결단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표적만 따라갈 때 말씀은 뒷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이 표적을 낳는 것이지 표적이 말씀을 낳지 않습니다. 표적은 촉매제와 같이 말씀을 믿는 것을 도와줄 뿐입니다. 수많은 갈릴리 사람들이 유대에서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으나 그들은 예수님을 그저 표적이나 행하는 정도로 알았을 뿐이지 예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 그분이 인정하시는 참 믿음을 갖지는 못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셨을 때 무슨 일인지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도마는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눈으로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분명한 증거가 있어야만 믿겠다고 항변합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확인하기 위하여 세 번씩이나 다시 사실 것을 예언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이나 제자들의 증거보다 자신의 눈과 손을 더 의지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다시 나타나셔서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 복된 사람이 되는 비결은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우리가 죄인임을 고백할 때 죄용서 함을 받습니다. 믿음으로 안타까운 심령을 주님 앞에 간구할 때 들어주십니다. 믿음으로 어려운 시험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응답을 하십니다. 표적중심이 아닌 말씀중심의 삶을 원하십니다. 말씀 중심의 삶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어떻게 생깁니까? 주님을 만남으로 생깁니다. 2000년 전에야 주님이 직접 몸으로 오셨지만 지금은 어떻게 만납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주님이기에 살았고 능력 있는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만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대하며 묵상하고 배우고 서로의 삶을 나누는 기회를 자주 가지도록 애를 써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부족함과 죄인 됨이 깨달아지게 되고 주님을 경험함으로 인하여 평강이 없던 자가 평강 있는 자로 믿음이 없던 자가 믿음 있는 자로 바뀌어 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시간이나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아니하고 역사 합니다. 그래서 가버나움에 있던 아이를 고치실 수 있었고 오늘날도 저희의 연약함을 고치실 수 있습니다. 왕의 하인은 예수님께 나아가서 아들을 고쳐달라고 말했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합니다. 함께 한 가족이나 이웃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고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습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눅 1:37)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약속된 능력의 말씀을 의심 없이 믿을 때 오늘날도 성도들의 삶의 현장에서도 “네 아들이 살아있다”는 놀라운 주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어떤 길을 가고 계십니까? 의심과 걱정과 불안의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무엇인가 붙잡고 싶은 데 뚜렷하게 잡히는 것도 없이 혼자 방황하며 외롭게 간다고 생각하십니까? 왕의 신하처럼 빛 되신 주님의 말씀을 붙드는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믿으면 우리의 삶은 변화되고 새 생명을 얻습니다.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역사를 일으킵니다. 기사와 표적 위주의 신앙에서 벗어나 이제부터는 말씀 중심의 신앙으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표적중심의 신앙은 위험합니다. 표적을 행한다고 그것만 좇다가는 자칫하면 마귀에게 이용을 당하거나 잘못된 길로 갈 수도 있습니다. 표적이 신앙의 중심이 되면 그 표적을 일으킨 사람은 절대시되고 우상시 됩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수많은 이단들이 그 이단의 교주에게 빠지는 이유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당신이 보여주신 표적을 보고 무리가 환호하고 예수님을 쫓아다니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을 보이셨을 때도 무리들은 자기들의 빵 문제를 해결할 사람이 나타났다고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사람들은 표적을 행하신 분, 표적 뒤에 계신 분을 제대로 보지 못하였습니다.



어떻게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어떻게 홍해가 둘로 갈라집니까? 어떻게 오병이어의 기적이 가능합니까? 어떻게 죽은 나사로가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우리는 그저 믿을 뿐입니다.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 말씀을 의지하여 나아가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신지라 믿음으로 나온 자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십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끝까지 주님을 붙들면서 인생의 문제들이 해결될 뿐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