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와 보라(요 4:27-42)

Author
Myung Myung
Date
2008-04-27 23:13
Views
4343
요 4:27-42 와 보라

다른 것은 다 참아도 배고픈 것은 못 참겠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배가 고프면 신경질이 막 난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생리적인 현상이니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예수님도 인간이신지라 예루살렘을 떠나 사마리아까지 걸어오시니 지치고 시장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동네에 들어가 먹을 양식을 구해가지고 왔습니다. 양식을 구하는 동안 시간이 흘렀을 테니 예수님은 더 시장하셨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배가 고픈데 왜 이제 왔느냐 하시거나 힘이 없어 누워계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활기있게 보이셨습니다. 기쁨이 충만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안 먹어도 배가 부르고 도리어 힘이 난다면 요즘 같이 물가가 뛰는 때에 얼마나 기쁜 소식이 됩니까? 오늘 그 비결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삼 주째 수가성 여인 시리즈를 다루고 있는데 오늘이 마지막 시간입니다. 누구와도 교제를 거부하던 여인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과의 대화에 끌리면서 자신을 발견합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시겠다고 하자 그런 물을 자기에게 달라고 합니다. 자신의 본색을 감추려던 여인이 “네 남편을 불러 오라”는 주님의 말씀에 흔들리더니“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하는 말씀에 완전히 무너집니다. 자신의 문제가 주님 앞에 낱낱이 드러납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여인의 부족한 모습을 책망한 것은 아닙니다. 나는 네가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아라고 하시며 도리어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렇지 않아도 자기의 과거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이 분이 혹시 선지자가 아닐 까 생각하던 차에 직접 나는 네가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야라고 말씀하시니 여인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나 같은 죄인에게 메시야가 나타나시다니. 말로만 듣던 그분을 바로 눈앞에서 보다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여인은 가슴이 뛰고 한동안 말을 잃었을 것입니다.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 여인의 모습을 예수님은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여인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위로와 평안을 경험하였습니다. 자기를 처음으로 사람 대접해준 예수님께 대한 감사와 감격이 밀려옵니다. 죄짐에서 벗어나 자유함을 느낍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확신합니다.

    

1. 전도는 예수님께로의 초청입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29절)

여인이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예수님을 더 깊게 알아갑니다. 예수님을 처음 보았을 때는 그저 유대인 남자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을 깨달으면서 예수님을 선지자로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참 예배에 대하여 언급하는 예수님이 메시아인것을 알게 됩니다. 지금까지 여인은 스스로 자기 울타리에 갇혀 자신만을 바라보았습니다. 문제밖에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불행, 절망, 소외가 여인을 표현하는 단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달라집니다. 껍질을 벗고 나온 나방처럼 자유함을 느낍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치유, 회복, 소망이 여인을 표현하는 단어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나도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나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집니다. 이제 그녀에게 우선순위는 자신에 대한 방어가 아니라 자신이 만난 메시야를 알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낯을 피하여 조용히 살까 하던 여인이 이제는 어떻게 하면 내가 체험한 예수님을 전할까 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가올 때는 이미 예수님과 대화가 끝난 때였습니다. 여인은 더 이상 우물가에 있을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마셔도 마셔도 여전히 목이 마른 물이 아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물을 긷기 위하여 물동이를 가져왔으나 이제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갔습니다. 왜 버려둡니까? 야곱의 우물에서 얻으려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영혼 속에서 흘러나오는 생수를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버린다는 것은 제자가 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자기 몸을 십자가에서 버리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도 버릴 것은 버려야 합니다.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마 4:20).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 19:29). 여인이 처음 우물가에 올 때와는 전혀 딴판입니다. 사람을 피하던 여인이 지금은 사람을 찾아갑니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여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었고 나누고 싶었습니다. 전에 자기를 향하여 손가락질 하던 사람들, 아직 어둠에 있던 동네 사람들을 전도의 대상으로 봅니다. 그들도 자기처럼 예수님을 알고 영생을 얻기를 원합니다. 여인은 빛이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을 통하여 수가성 여인은 빛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동네사람들 이야말로 아직 주님을 모르는 어둠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들 와서 좀 보세요! 내가 과거에 행한 모든 것을 말해 준 사람이 있어요. 이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 동네 사람들이 처음에는 그 여인의 말을 시큰둥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에는 자신의 허물을 감추려고 했던 여인이 이제는 자기의 죄를 지적하신 예수님을 간증합니다. 자신에게 고개를 돌리던 사람들에게 “와 보라” 하면서 전도합니다. 동네사람들은 여인의 담대한 말투, 밝아진 얼굴 표정 등 너무도 달라진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저 여자를 저렇게 바꾸어 놓을 수 있단 말인가 생각하며 여인을 변화시킨 사람을  보기 위하여 우물가로 많이 몰려들었습니다. 여인의 변화가 동네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목마름을 일으켰습니다.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 더 머물라고 요청을 하였기에 예수님은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졸지에 예수님은 수가 성에서 전도 집회를 가졌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게 되었고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동네 사람들이 그 여자에게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당신의 말 때문이 아니요. 우리가 직접 이분의 말씀을 들었고 또 이분이야말로 정말 세상의 구주라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동네 사람들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그분을 구주로 영접하였습니다.



기독교는 체험을 통하여 알게 되는 종교입니다. 전도는 훈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난 생생한 체험, 주님을 만난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우물가에 오기 전 여인은 예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나면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발견하였습니다. 여인은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동네사람들에게 전하였습니다. 여인은 전도훈련은 받지 않았지만 자신의 감동을 그대로 전하니 놀라운 전도의 열매가 맺혔습니다. 이름 없는 한 여인을 통하여 마을 전체에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곳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고향인 갈릴리도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 취급을 하던 사마리아지방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조건이나 환경에 상관없이 택하신 사람들의 순종, 예수님을 전하려는 헌신을 통하여 일어납니다. 성도들의 삶의 현장에서 이와 같은 놀라운 주님의 부흥을 경험해야 합니다.“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복음의 능력이 여인에게 나타났습니다.



2. 전도는 하나님의 뜻입니다.“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34절)

예수님과 수가 성 여인이 대화를 거의 마쳤을 때 제자들이 우물가로 다가옵니다. 여인은 당황하였을 것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대낮에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시는 것을 보고 놀랐지만 왜 이야기를 나누시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더 놀란 것은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자기들이 양식을 구하러 마을에 들어갈 때 예수님은 피곤해 하셨습니다. 양식을 구하는데 시간이 걸렸으므로 지금쯤 예수님은 더 힘들어 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표정은 밝고 행동은 힘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여인 사이에 무슨 대화가 있었는지 여인에게 지금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저 예수님께서 배가 고프실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가지고 온 음식을 잡수시라고 권합니다. 아이구, 시장하던 차에 잘 됐다 하면서 예수님이 금방 드십니까? 아니요.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하십니다. 비유를 사용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듣기는 사마리아 여인이나 제자들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것입니다.



장사 잘되면 몸은 좀 피곤해도 견딜 만합니다. 그러나 오는 사람이 없이 파리만 날리고 있으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얼마나 고역인지 모릅니다. 안 먹어도 배부르고 안 마셔도 목이 마르지 않은 경험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경우 영혼 구원하는 것이 그랬습니다. 그분에겐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체가 양식이었습니다. 이 양식이 무엇이지 모르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설명해주십니다. 누가 잡수실 것을 예수님께 갖다 드렸나보다 하며 의아하게 생각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만일 제자들이 마을에서 전도하고 열매를 거두고 왔다면 그들도 배불렀을 것입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어야 삽니다. 먹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기에 음식이 곧 생명입니다. 이 양식을 얻기 위하여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땀을 흘립니까? 자기와 식구들이 먹어도 남을 양식을 쌓아 두고도 더 얻겠다고 지나칠 정도로 수고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양식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대로 순종하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거두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고 계십니다. 그 열매가 무엇일까요? 영혼 구원.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였는데 이제 수가 성 여인이 예수님을 누구신지 알고 영생을 얻었습니다. 손가락질 받던 영혼이 예수님과 만남을 통하여 삶의 의욕을 갖게 되고 구원을 받게 된 것을 인하여 주님은 크게 기뻐하십니다. 여인이 구원의 감격을 인하여 동네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러 갔습니다. 여인의 전도로 많은 영혼들이 주님께로 올 것을 아셨기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인하여 더욱 기뻐하셨습니다. 영에 힘을 얻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양식을 드셨다고 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음식을 먹어야 함이 나지만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 힘을 얻습니다. 참된 성도의 기쁨은 주님의 일을 할 때 느낍니다.

  

3. 전도는 성도의 사명입니다.

“아직 넉 달이 더 있어야 추수 때가 온다고 하지 않느냐? 그러나 눈을 떠서 들판을 바라보아라. 곡식이 다 익어 추수할 때가 되었다.” (현대, 35절)   간증은 예수님을 믿기 전 자신의 모습과 예수님을 만나게 된 동기와 그 후의 변화된 모습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통해 드러낸 예수님에 대한 증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마리아 여인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추수할 것이 많다고 하셨는데 과연 그렇게 되었습니다.



35절은 제자들에게 주시는 도전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영혼 구원을 염두에 두고 추수라는 말을 언급하십니다. 영의 눈을 떠서 보라 온 들판에 곡식이 다 익어 추수할 때가 되었구나. 수가 성 여인을 보라 그는 나와 잠깐 만나고 나서 벌써 전도하며 많은 심령들을 구원하고 있지 않느냐? 여인의 전도로 온 동네가 구원에 이르게 된 것을 이미 주님은 보고 계십니다. 과연 구원받은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를 통하여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런데 너희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직 추수 때가 멀었다고 하면서 추수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구나.



주님은 이 땅에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목적을 분명히 아셨습니다. “나는 의로운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고 왔다."(눅 5:32).  "사실 나는 진리를 증거하려고 났으며 이것을 위해 세상에 왔다."(요 18:37). 내가 온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되 더욱 풍성히 얻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요 10:10)



그렇다면 하나님이 사람들을 구원하신 소식을 알리는 것은 성도의 당연한 책임입니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할 때에, 네가 그 악인을 깨우쳐 주지 않거나, 그 악인에게 말로 타일러서 그가 악한 길을 버리고 떠나 생명이 구원 받도록 경고해 주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신의 악한 행실 때문에 죽을 것이지만 그 사람이 죽은 책임은 내가 너에게 묻겠다." (겔 3:18)

예수님은 이미 성도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요 20:21)  

전도하는 것을 주님께서 주신 특권으로 알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전도에 대하여 많이 언급됩니다.

예수님이 전도에 힘을 쓰셨습니다.

(막 1:38)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막 1:39)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더라

교회가 예수님을 본을 받아 전도에 힘을 썼습니다.

(행 5:42)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신 목적이 전도에 있음을 알았습니다.“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딤후 4:17)

그러나 전도는 단지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전 2: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그래서 바울은 전도의 열매를 맺기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골 4:3)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Carlsbad에 딸기농장이 있습니다. 지금 한창 딸기철인지라 딸기가 많이 열렸습니다. 그 밭은 Pick your own 방식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밭에 직접 들어가 따오는 것입니다. 10불정도 내면 딸기를 담는 통을 줍니다. 그 안에서는 마음껏 따먹고 나올 때 그 통 안에 채워서 나오기만 하면 됩니다. 따먹기는 쉽고 재미있지만 심고 기르는 것은 힘듭니다. 뙤약볕 아래서 농부들이 밭을 갈고 씨를 뿌렸기 때문에 우리가 열매를 거둡니다. 그렇기에 심고 기른 자에 대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전도의 씨를 뿌리는 사람이나 열매를 추수하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함께 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은 앞날에 있을 열매를 바라보고 기뻐하고, 열매를 거두는 사람은 자신이 심지도 않은 열매를 거두면서 감사하고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열매를 거두지 못한다고 낙심할 필요도 없고 자신이 뿌리지 않은 열매를 거둔다고 자만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를 올려야 합니다.



이제 전도의 우리의 몫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잡초정도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알곡으로 보셨습니다.  그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지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택하신 사람들을 통하여 이루어지기에 하나님은 수가 성에서 살고 있는 한 불행한 여인을 택하셨습니다. 인생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그저 사람들의 낯을 피하여 어둠 속에 살던 목마른 여인이었습니다. 여인에게 주님을 찾아오시고 대화를 나누심으로 야곱의 우물로서 해결될 수 없던 여인에게 목마르지 않는 영원한 생수를 주셨습니다. 그랬더니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도로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의 양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잃어버린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택하신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원하십니다. 택하신 자들의 모임이 교회가 아닙니까? 교회가 하나님의 목적을 붙들면 하나님이 교회를 붙드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아도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으면 인생의 의미가 없습니다. 나중에 하나님 앞에 가서 내가 너에게 모든 것을 주었는데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고 물으신다면 보여드릴 것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진정 나의 목마름과 배고픔을 해결해 줍니다. 진정한 목마름과 배고픔은 하나님의 일에 대한 목마름과 배고픔이 되어야 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는 이유는 그 주림 때문에 하나님께 나와 구하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양식입니다.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의 갈증과 목마름이 해소됩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구원하는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니 목마름과 배고픔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여인이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하여 여인이 필요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생명의 양식을 공급하셨습니다. 여인도 예수님께 양식을 공급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듯이 하나님도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돕는 자들이라는 자부심이 있어야 합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는 구원을 받았고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수가 성 여인의 이름이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그가 남긴 행적, 그가 거둔 전도의 열매는 오늘까지 전해져 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 가치 있는 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 무엇을 보여드리겠습니까? 오래 살았든 짧게 살았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쌓아놓은 업적이 주님 보시기에 별로 의미가 없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과 동행한 삶, 주님을 위하여 수고한 것은 남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보배를 질그릇과 같은 우리가 가졌다고 합니다.(고후 4:7)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담아주신 것은 잘 간직하라고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후 4:15) 하면서 우리가 받은 은혜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표현하여 길 잃은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것을 말씀합니다.  교회에 일꾼이 없다고 타령만 하면서 막상 우리는 잠자고 있지는 않습니까?



전도라는 말을 많이 한다고 전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예수 믿고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와 보라” 21세기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잃어버린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원하십니다. 성도들은 먹어서 배부른 자들이 아니라 영혼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여 그 기쁨이 충만함을 인하여 배부른 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