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내가 그로라(요 4:16-26)

Author
Myung Myung
Date
2008-04-20 14:18
Views
4193
요 4:16-26  내가 그로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아들을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기 위하여. 즉 영혼 구원을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영혼 구원을 누가 합니까? 이미 믿은 자들이 해야 합니다. 그들이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다가가서 전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영혼 구원을 받은 자들이 궁극적으로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예배. 하나님은 택함을 받은 백성들의 예배를 받기 원하십니다. 수가성 여인의 스토리에는 회심과 전도, 예배가 다 언급되어 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과 만남을 통하여 자신의 문제를 깨닫습니다. 치유와 회복을 경험합니다. 무엇이 참된 예배인지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게 된 여인이 동네 사람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전합니다. 동네 사람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누구신가 알게 됩니다.



수가 성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이런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지 않습니까? 여기에는 이미 예수를 만난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말은 하지 않지만 예수님을 아직 만나지 못하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수가성 여인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어 새로운 의미를 가진 삶을 살게 되었는지 살펴보기 원합니다.



먼저 지난주에 있었던 수가성 여인의 스토리를 복습해 볼까요?

목마른 두 사람이 우물가에서 만났습니다. 그 만남은 우연한 만남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주관하신 만남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 갈릴리로 돌아가시는 중에 일부러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가시면서 여인을 만납니다. 그런데 그 만남은 거리끼는 만남이었습니다.

1) 유대인들이 가기를 꺼려하는 길을 가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교제하지 않습니다.

2) 수가성 여인이 사람 만나기를 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한낮에 물을 길러 우물가에 왔습니다.

3) 그 당시 낯선 남자와 여자가 드러내놓고 대화를 나누는 것은 꺼렸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유대인남자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거리낌에도 불구하고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거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은 목마른 두 사람이 만나 어떻게 서로의 갈증을 채워주었는지 말해줍니다.



성경에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여인이 떳떳하지 못한 인생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뜨거운 햇볕 아래서 빈 항아리를 지고 가는 여인이 그의 모습을 대변합니다. 지금 여인이 함께 지내는 남자는 여섯 번째 남자입니다. 왜 이렇게 자주 바뀌었습니까? 한번 물어 보겠습니다. 여자가 남자들을 바꾸었을까요 아니면 남자들이 여자를 떠났을까요? 예수님 당시는 가부장 사회였습니다. 남자는 이혼증서만 한 장 써주면 쉽게 여자를 버릴 수 있었습니다. 여자는 남자를 버릴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수가성 여인이 한 남자로 만족하지 못하여 남자를 계속 바꾸었다고 하기 보다는 남자들에게 계속 버림을 받았을지 모릅니다. 아마 여인은 남자를 계속 바꾼 행실이 나쁜 여인이기 보다는 남자들로부터 계속 버림받은 불행한 여인일지 모릅니다. 의지할 것이 없거나 먹고 살기 힘들어서 어쩔 수 없이 지금 남자와 살고 있을 수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여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자신의 현실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미래에 대한 아무 소망이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여인에게 주님께서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1. 자신의 문제를 깨닫습니다.

“이런 물을 내게 주소서”(15절)

지금까지 여인은 야곱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마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유대인이 나타나 물을 좀 달라고 합니다. 그러더니 이제는 그가 목마르지 않는 물을 준다고 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물을 좀 달라고 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생수를 달라고 했을 것이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4:10) 예수님은 야곱의 우물에서 나오는 물과 차원이 다른 물을 가리킨 것이지만 니고데모와 마찬가지로 수가 성 여인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물을 먹고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 이 물보다 더 좋은 물이 있다구요? 그러면 당신이 야곱보다 더 위대한 분입니까? 야곱의 우물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여인의 질문에 예수님은 답변하지 않으십니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마다 다시 목마를 것이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절대로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내가 주는 물은 그에게 끊임없이 솟구쳐 나오는 영원한 생명의 샘물이 될 것이다." 여인이 그동안 먹던 야곱의 물은 먹어보았자 다시 목마를 뿐이라고 합니다. 야곱의 우물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은 언약 즉 율법의 체계를 의미합니다. 사마리아인들이 농사를 짓고 목축도 하고 식수를 얻었다는 것은 그들이 지금까지 율법 아래서 하나님의 백성 노릇을 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주어진 언약은 다시 목마르게 할 뿐이지 진정한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포도주가 떨어진 가나 혼인잔치와 다를 바 없습니다. 율법 아래서는 목마름에 대한 진정한 해결방법이 없습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영혼의 갈증을 해소하려는 모든 노력, 구원에 이르려는 모든 시도가 다 헛것입니다. 말세에는 성령이 물같이 부어질 것이라고 요엘 선지자가 예언하였는데(요엘 2:29) 이제 예수님의 오심으로 그 예언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물은 생명을 얻게 하는 성령입니다. 그 물을 마시는 자는 영생 즉 신적 생명을 얻게 합니다.



여인은 절대로 목마르지 않는 물을 준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가 솔깃합니다. 그래서 자기 앞에 있는 유대인 남자를 “주”(Lord)라고 부르면서 그 물을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수가 성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여 이들의 만남이 시작되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수가 성 여인이 예수님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다. 여인의 부탁을 보면 개역성경에는“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가 명령형 같이 보이지만 진짜 명령형은 “이런 물을 내게 주소서”입니다. 과거명령형을 사용합니다. 지금 당장 그 물을 내게 주소서 하는 간절한 바람이 담겨져 있습니다. 지금 마시는 물은 자신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물을 길러 또 오고 또 왔습니다. 이제는 지쳤어요. 더 이상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지 않기 원합니다. 야곱의 우물을 마셨지만 여전히 목이 말라요 이제는 나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옵소서. 그런 물을 구하기만 한다면 다시는 물을 길러 여기까지 올 필요도 없다고 애절하게 호소합니다.



“네 남편을 데려오라”(16절)

그런데 예수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네 남편을 데려오라” 지금 당장 시행하라고 합니다. 물을 주시는 것과 남편을 데려오라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여인이 왜 목말라 하는지 아셨습니다. 그래서 여인이 숨기고 싶었던 것을 들추어내십니다. 병에 걸렸을 때 증상만 완화시킨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병의 원인을 알고 그에 대한 치료가 있어야 합니다. 여인이 가진 문제의 본질을 치유하지 않고서는 목마름이 해결될 수 없었습니다. 그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펄쩍 뛰며 그냥 지나치려 하는데 예수님은 재촉하십니다. 과거에 남편이 다섯 있었으나 지금 같이 사는 사람은 네 남편이 아니니 현재 남편이 없다는 네 말이 맞기는 맞지. 예수님의 말씀에 여인은 소스라치게 놀랐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이기에 나의 과거와 현재를 이렇게 잘 알고 있단 말인가? 복음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가는 과정을 적고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말씀으로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셨을 때 제자들의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저가 뉘기에(Who is this?)



예수님과의 만남은 시간만 때우는 피상적인 만남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그저 위로해주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여인이 감추고 싶었던 부분이 다 드러난 만남이었습니다. 처음에 드러날 때는 두려웠으나 이내 그 안에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시는(히 4:12)예수님의 말씀은 여인의 심령 깊숙이 파고들면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십니다. 감추고 싶었던 수치,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자괴감 등이 점차로 사라집니다. 한 여인으로서 존엄성을 회복합니다. 여인은 처음으로 자유함을 맛봅니다.



지난 수요일 성경공부 시간에 영화 Mission 의 전반부를 보았습니다. 노예상이었던 사람이 동생과 삼각관계를 가지다가 결투 끝에 동생을 죽인 것을 인하여 절망에 빠져 죽기를 구합니다. 그러다가 선교사를 만나게 되고 그의 사역에 동참하기로 합니다. 폭포 위에 있는 인디언 마을로 올라가는데 그의 갑옷과 칼이 든 자루를 가지고 갑니다. 그 무거운 것을 끌고 올라가려니 얼마나 힘듭니까? 고행을 통하여 자기가 지은 죄를 속해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가 힘들어 하는 장면을 인디언들이 계속 지켜봅니다. 인디언들은 그 사람이 얼마 전까지 자기 동족을 죽이고 팔았던 노예상인 것을 알았습니다. 한 사람이 다가가 그의 목에 칼을 댑니다. 그러나 인디언들은 이미 예수님을 알았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를 죽이지 않고 대신 그가 끌고 있는 짐과 연결된 줄을 끊어버립니다. 그가 힘들게 끌고 오던 짐이 절벽 아래로 떨어집니다. 그는 갑자기 웁니다. 그러다가 웃습니다. 비로소 자유함을 맛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한 화해를 경험합니다.



이런 자유함을 맛보기 원하십니까? 자신을 드러내는 만큼 예수님이 더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우리의 삶에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십니다. 이제는 움켜쥐었던 손을 펴시기 바랍니다. 주님 앞에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길 때 참된 평안과 기쁨이 비워진 곳에 채워집니다.



2. 참 예배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여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여깁니다. 그래서 평소에 궁금하게 여기던 것을 예수님께 묻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께 왜 갑자기 예배 장소를 들먹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예배를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원합니다. 아브라함도 그랬고 이삭도 그랬습니다. 오늘날 모슬렘들은 이스마엘의 후손입니다. 그들은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적자라고 주장하며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생각은 다릅니다. 이삭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약속의 자손이고 이스마엘은 서자 취급합니다. 이렇듯 생각이 다르다 보니 이삭의 자손과 이스마엘의 자손들은 서로 자기가 정통이라 주장하며 지금까지도 경쟁관계에 있습니다. 본문에도 보니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도 그런 경쟁 관계에 있습니다.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예배 장소에 대하여 입장이 달랐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던 시온 산에 예루살렘 성전을 지어놓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모세가 율법을 가르치고 언약을 갱신하던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서로 자기들의 예배가 진짜라고 우겼습니다. 그래서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어느 쪽이 진짜입니까? 누가 시내산 언약의 계승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누가 드리는 예배를 받으십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을 보면 여인이 그저 정욕에만 빠진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여인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 예배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22절에 보면 예수님은 유대인의 손을 들어줍니다. 사마리아인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 유대인은 아는 것을 예배한다. 이것은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유대인들이 지금 드리는 예배가 참 예배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제는 그런 논쟁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제사, 시내산의 언약을 온전케 하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입니다. 여인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답변하십니까?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21-22절) 예배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자의 자세가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장소를 초월하여 계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장소에 제한되는 분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날 때 그들의 중심에는 법궤가 있었습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들을 기뻐하시고 그들과 동행하십니다. 장소나 형식보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고 대상입니다. 사람들은 경건한 모양이나 형식을 중요시하지만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을 바로 알고 예배를 드리면 그 예배는 참된 예배가 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24절)

“신령과 진정으로”라는 개역성경에 번역되어 있는데 성령과 진리가 더 맞습니다. 하나님은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드리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진리라는 말은 진짜, 그림자가 아닌 실체를 가리킵니다. 그동안 드려진 예배는 예수님께서 종말에 가지고 오는 하나님에 대한 실체적 예배에 대한 그림자요 모조품에 불과합니다. 유대교가 정통인지 사마리아교가 정통인지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을 섬기려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 가운데 내주하십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예배하는 시대가 열린다고 하십니다. 구원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성전의 완성으로 오는 것이기에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들이나 자신들이 드려온 기존의 성전예배는 더 이상 참 예배가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율법을 통하여 구원을 받을 수 없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습니다. 그렇기에 유대교의 대표자가 할 수 있는 니고데모도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고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는 수가 성 여인도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습니다. 성령과 진리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참된 예배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예배 장소에 관한 논쟁은 본질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의 대상을 바로 알고 성령과 말씀이 충만한 그리스도 중심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예배자들을 찾으시고 그들이 드리는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3. 자기가 경험한 주님을 전합니다

여인은 예수님과의 만나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세상을 깜박 잊었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자기와 대화를 나누는 남자가 유대인인 것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메시아가 오실 줄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실 것입니다." 그동안 여인은 메시야도 알고 예배도 알고 선지자에 대하여 말할 정도로 종교적인 지식은 있었지만 그 지식이 삶과 아무런 연관이 없었기에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여전히 죄악 된 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고무적인 것은 여인이 메시야를 기다렸다는 사실입니다. 언젠가 그분이 오시면 자기를 변화시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갈망이 있었습니다. 그 갈망이 상달되어 예수님의 발길을 돌리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그로라”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메시야라 내가 구원자라는 말입니다. 그 말씀이 여인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메시야로 직접 밝히기는 성경에서 이 부분이 아마 유일할 것입니다. 니고데모와의 만남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훨씬 강도 깊은 만남입니다.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는 이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나 이후에 여인이 취한 행동으로 보면 여인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인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허물을 고하며 회개하였을 것입니다. 그동안 여인을 누르던 짐이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벗겨집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자유와 위로와 평안과 기쁨을 주는 만남입니다. 잠깐의 만남이었지만 그 만남은 여인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여인은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여인의 영안이 밝아졌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발견합니다. 남의 눈을 피하여 뜨거운 대낮 사람이 다니지 않던 시간에 우물가에 물을 길러 온 여인, 사람들도 대하기를 꺼려하고 본인도 사람들과 접촉하기를 꺼려하던 여인이었으나 생명의 구주가 되는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무거웠던 죄의 짐이 벗겨짐을 경험합니다. 과거의 수치가 벗겨지며 한 여인으로서의 존엄성과 가치를 회복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니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구원의 기쁨을 인하여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함께 나누고자 하는 열망이 생겼습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갔습니다. 진정한 생수를 발견함으로 만족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 기쁨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빨리 가서 다른 사람들을 예수께로 데려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야곱의 우물물을 마시지 않고도 오랫동안 가졌던 목마름이 해결되었습니다. 여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더 이상 목마르지 않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자기의 허물을 감추기에 급급했던 여인이 정신없이 동네에 다니며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어떤 내용을 전합니까?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 사람은 우리가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야라.”(29절) 동네 사람들은 너무도 달라진 여인을 보고 놀랐을 것입니다. 그 여인이 복음의 전도자가 되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하나님의 역사는 이렇게 놀랍습니다. 그 여인을 인하여 많은 사람이 우물가로 나와 여인을 변화시킨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말씀을 직접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치유와 회복을 경험한 여인을 통하여 수가성에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 여인의 변화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목마름을 유발하였습니다. 우리의 변화가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갈증을 유발합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줍니까?

1) 마음 문을 열어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납니다.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데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다 주님 앞에 내어 놓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왕으로 모시고 일생동안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후회 없는 선택입니다. 마음 문을 여는 만큼 주님이 더 가깝게 다가오십니다. 우리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의 것으로 더 채움 받게 됩니다. 그럴 때 근본적인 치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2) 성도의 삶은 예배자의 삶입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를 드릴 때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은혜를 사모하며 드려야 합니다.

3)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인의 전도가 아니었으면 동네사람들은 예수님을 알 수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도 없었습니다.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남들보다 환경이 좋지 않다고 낙심하지 말기 바랍니다. 자기의 문제를 알고 주님에게서 해결 받으려 하는 자들이 좀 더 나은 환경에 있으면서 주님의 도움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자들보다 더 복됩니다. 자기의 부족함, 자기의 한계를 알 때가 하나님이 역사하실 때입니다. 자신의 문제를 알고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예수님을 찾는 자들이 복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수가 성 여인은 그 마을에 있는 어떤 여인들보다 예루살렘 성에 사는 어떤 여인들보다 복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를 알고 주님을 알고 주님 앞에 참된 예배자가 되어 삶 전체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를 드릴 뿐 아니라 삶의 열매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증인의 삶의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