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내영혼이 주를 찬양하며(눅 1:39-56)

Author
Myung Myung
Date
2008-12-14 14:59
Views
4305
눅 1:39-56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오늘은 교회력으로 대강절과 성서주일이 겹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사건이 예수님의 탄생이었기에 성경말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보는 성서주일을 대강절과 같은 기간에 배치한 것이 의미 있다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려서 읽히고 있는 책이 성경입니다. 성경은 앞으로도 베스트 셀러로 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인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읽을 때 성령의 감동을 받게 되고 읽으면 읽을수록 은혜가 됩니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노래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은“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시 19:10)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만큼 공격을 많이 받고 박해를 받은 책도 없습니다. 로마제국에서는 큰 박해가 있을 때마다 성경이 압수되어 불살라졌습니다. 중세시대에는 성경이 라틴어로 되어 있어 평신도는 읽을 수 없었습니다. 18세기 프랑스 자유사상가인 볼테르는 앞으로 약 40년 후에는 성경책을 읽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였습니다. 그로부터 50년 후 그가 앉아서 장담하던 그 집이 바로 성서공회가 되어서 마루에서 천정까지 성경책으로 쌓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허더벌스 잉거솔이라는 무신론자가 역시 무신론자 친구인 Lew Wallace에게 기독교를 반대하는 책을 쓰라고 권유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윌리스는 우선 기독교가 무엇인지 알려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깊이 읽어가는 중에 그의 심령이 변화되어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가 1880년에 예수님의 생애를 소재로 소설을 한 편 썼습니다. 우리에게는 1959년 William Wyler 감독이 만들어 11개 부문의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영화“벤허”로 더 친숙합니다.



누가복음 1장은 예수님의 탄생 전후에 일어난 에피소드를 다룹니다.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시는 이 구속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면 보통 사람들입니다. 로마 황실에 있는 귀족이나 장군들도 없고, 그 당시 유대사회를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지배하던 대제사장집안 사람들도 없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을 선택하시고, 선택된 그들의 순종과 헌신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어중이떠중이 마구 사용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평범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무엇인가 있기에 그들을 불러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아내로서 나이 많아 늙기까지 아이를 낳지 못하던 안타까워하던 엘리사벳이나 평범한 시골 처녀인 마리아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이 선택하신 여인들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던 1세기 팔레스타인 지방은 경제 위기를 겪고 있는 지금의 미국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환경 가운데 있었습니다. 로마의 압제를 당하면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기뻐하려야 기뻐할 것이 별로 없던 시절인데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성령의 감동 가운데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감격에 찬 찬양을 부르게 하였을까요? 환경을 초월하여 기뻐하는 그들이야말로 진짜 믿음의 사람들이요 복 받은 성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말씀은 구원에 이르는 길이며 영원한 생명이 담겨 있는 샘물입니다. 말씀 속에서 힘을 얻을 수 있으며 말씀대로 살 때 영육 간에 복을 받게 됩니다. 성서주일을 맞이하면서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비결을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지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영화감독이라면 본문의 첫 장면을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한 처녀가 빠른 걸음으로 산 동네를 올라갑니다.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힙니다. 그녀는 상기된 표정입니다. 마리아는 자기가 천사를 만난 놀라운 경험, 그리고 앞으로 임할 엄청난 일들을 생각하니까 집에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엘리사벳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임신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있는 그녀와 기쁨과 놀라움을 나누기 위하여 갔습니다. 마리아가 살던 갈릴리 나사렛에서 엘리사벳의 집이 있는 유대 산지까지 가려면 족히 3~4일은 걸립니다. 위험한 여정을 혼자 갔는지 같이 갔는지 누가는 말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엘리사벳을 향하여 열심히 갔다는 사실입니다.



집에 들어서면서 엘리사벳에게 문안합니다. Shalom. 마리아의 문안을 받을 때에 엘리사벳의 아이가 복중에서 뛰놉니다. 어느 정도 자란 아기가 복중에서 움직이는 것은 자연 현상이지만 이 경우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 아이는 약속된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시는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예수님보다 이 땅에 6개월 먼저 온 약속된 메신저 요한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복중에서도 예수님의 방문을 알고 기쁨으로 반응합니다.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자신의 뱃속에서 아이가 기쁨으로 뛰어노는 것과 마리아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를 알게 되자 큰 소리로 찬양을 합니다. 누가는 엘리사벳의 축복을 통하여 예수님의 수태가 요한의 수태보다 더 크고 놀라운 기적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신을 드려 주님의 뜻을 이루기 원하는 마리아가 모든 여자들 중에 가장 큰 복을 받은 여자라고 축복합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아이가 성령의 감동으로 메시야인 것을 알고 그 아이를 주라 부르며 그 아이를 또한 축복합니다.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엘리사벳이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와 임재에 대한 경외감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와 더불어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마리아를 다시 한 번 축복합니다. 엘리사벳의 남편 사가랴와 달리 마리아는 천사가 나타나서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고 하였을 때 그대로 받아들이는 믿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사가랴는 자식이 없음을 인하여 오랫동안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성소 안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분향단 옆에 천사가 서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천사는 무서워 말라 하면서 사가랴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그의 아내에게 요한이라는 아이가 있을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 아이는 보통 아이가 아니라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자가 될 것이라 하니까 사가랴는 자기가 기도한 이상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는데도 감사보다는 의심이 생겼습니다. 자기와 아내의 육신의 장애를 보았습니다. 말도 안 돼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1:18) 천사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니 하나님은 사가랴의 입을 막으셨습니다. 아들을 낳을 때까지 벙어리가 됨으로써 불신앙의 대가를 치르게 하였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하여 찬양이 여럿 나옵니다. 누가복음 1:46-55을 토대로 한 마리아의 찬양을 라틴어로 "Magnificat"이라 부릅니다. 눅 1:68-79절에서 요한의 탄생을 기뻐하고 메시야의 예언을 이루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가랴의 찬양을 "Benedictus"라 부르고 눅 2:29-32에서 아기 예수를 안고 감격하여 부르는 시므온의 찬양을 "Nunc Dimittis"라고 합니다. 두려워 떨던 마리아가 엘리사벳의 확신에 찬 찬양을 듣고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를 깨닫습니다. 힘과 용기를 얻습니다. 이에 마리아가 찬양으로 화답을 합니다. 엘리사벳이 가진 영적 감동이 마리아의 찬양에도 그대로 담겨져 있습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로 시작됩니다.  마리아의 찬양은 그렇게 바라던 아이를 가지게 된 감격 속에 부르는 사무엘의 모친 한나의 찬양을 연상케 합니다. 분위기나 사용된 단어들이 아주 비슷합니다.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하 2:1, 7)



마리아의 찬송은 기적적인 방법으로 메시야를 수태하게 함으로써 이제 구세주로서 인간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기뻐한다는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마리아는 찬양을 통하여 자신을 이스라엘 백성과 연결시킵니다. ‘마리아의 비천함’이 암시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비천함은 메시야요 구원자가 될 아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의 찬양 속에는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에 대한 소망과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소망이 담겨져 있습니다. “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 도다”(49-50) 하며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모든 세대를 향하신 그의 긍휼하심은 변함이 없습니다. 구약에서 손이나 팔은 하나님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출애굽 때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그 능력으로 애굽을 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출 6:1) 하나님의 구원의 손은 교만한 자들을 흩으십니다. 낮추시고 부끄럽게 하십니다. 교만한 자들은 자신들이 이루어 놓은 업적에 자신만만해져서 자신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높이고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큰소리치는 자들입니다.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착각 속에 멸망을 향하여 치닫는 자들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크신 능력을 보이시며 제2의 출애굽을 이루시려고 하십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더니 기적을 체험하였고 그 결과 감격 속에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마리아의 아름다운 찬양은 말씀을 통하여 깨달은 하나님의 성품과 역사하심과 자신의 놀라운 체험이 연합되었을 때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저희도 마리아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든다면 기적을 체험하고 그 결과 감격 속에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환경에 상관없이 기쁨으로 충만하며 찬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1)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개인적인 신앙체험이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겪는 체험은 제한적입니다. 체험만으로는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신학적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나타내는 것을 계시라고 하는데 계시에는 일반계시와 특수계시가 있습니다. 일반계시는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일반적으로 깨달을 수 있는 내용입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시 19:1-4) 특수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도들이 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누구신지, 그가 무엇을 하셨고 앞으로 무엇을 하실 것인지 알게 됩니다.“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시 19:7-9)



마리아에게는 능하신 이가 내게 큰일을 행하셨다는 것을 아는 안목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영적인 안목은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둘 때 생깁니다. 신앙의 기쁨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해주신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지식에 달려 있습니다. 마리아의 찬양의 내용을 보면 구약의 말씀이 많이 녹아 있습니다. 말씀을 평소에 많이 암송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하나님의 언약적 성취에 관련된 성품들 즉 전능하심(49), 거룩하심(49), 자비하심(50, 54), 신실하심(56)에 근거하여 찬양을 드렸습니다. 이것은 마리아가 하나님의 은혜의 수혜자로 선택되기 이전부터 구약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크고 넓었는지를 알게 해줍니다.



2) 말씀에 대한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어느 날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에게 소식을 전합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는 천사를 보는 것이나 천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말을 듣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기에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천사가 전해주는 말씀을 믿었습니다. 다만 그 방법을 몰랐기에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아이를 낳겠느냐고 방법을 물었습니다. 천사는 장차 태어날 아이는 요셉과의 결합을 통하여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능력이 마리아를 덮을 때 생긴다고 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구름이 성막을 덮은 것처럼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이 마리아에게 덮일 것을 말씀합니다. 마리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면 쉽지 않은 결단을 해야 합니다. 정혼한 처녀가 동거하기 전에 임신한 것이 밝혀지면 그 인생은 엉망이 되어버립니다. 남편에게 버림받고 파혼을 당하든지, 사람들에게 부정한 여자로 취급받아 돌에 맞아 죽든지, 아니면 죽을 고비를 넘긴다 해도 가족이나 공동체와 분리되어 평생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지 모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앞으로 당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1:37)는 천사의 말을 듣고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믿음으로 화답하였습니다. 믿음으로 그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놀라운 믿음입니다. 믿음은 기적을 낳게 되어 있습니다. 비천한 나를 통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의 뜻대로 나를 도구로 사용하십시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겠다는 의지적 표현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와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순종한 결과 성령의 능력이 마리아에게 임하여 메시아에 대한 구약의 예언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마리아의 순종을 기뻐하셨기에 엘리사벳의 찬송을 통하여 마리아에게 영광스러운 ‘주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붙여주었습니다. ‘사랑받는,’‘높여진’이란 이름의 뜻을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어 성경에 나오는 여인 중에 가장 큰 복을 받은 여인이 되었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의 수혜자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3) 말씀의 은혜를 나누어야 합니다.

받은 은혜는 나눌 때 더욱 풍성해집니다. 엡 5:18-20에 의하면 성령이 충만한 자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골 3:16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할 때 서로 가르칠 뿐 더러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의 감동으로 마리아를 축복하였습니다. 축복의 내용을 살펴보면 마리아에게 대한 시기심이 전혀 없습니다. 이왕 자식을 주실 바에야 나를 통하여 메시야를 낳게 하셨으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아쉬워하며 마리아를 질투하지 않습니다. 마리아의 삶에 하나님이 역사하심을 확인하고 마리아를 진심으로 축하하고 함께 기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의 모습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친구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사업상 어떤 이익을 얻기 위하여, 상대방으로부터 무엇인가 필요한 것을 얻어내기 위하여 만나는 관계가 아니라 정말로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를 나누는 친구가 필요합니다. 낙심될 때 함께 눈물을 흘릴 수 있고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친구요, 서로에 대하여 솔직하게 마음을 열어놓고 대화할 수 있는 친구를 말합니다. 왜 내게는 그런 사람이 없는지 이유를 다른 데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부정적인 말, 비판하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가까이 하려 하지 없습니다. 대화를 나누면서 자꾸 충고만 하려하고 자신의 의견을 주입하려는 사람은 부담스럽습니다. 분주한 이민 생활을 하다보면 우리의 심령이 메말라지기 쉽습니다. 자기의 속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상대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좋은 친구는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 들어주기만 해도 위로가 되고 힘을 주는 사람입니다. 목장은 안심하고 자기의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 할 수 있고 들어줄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들은 이야기를 가지고 가십으로 남에게 전하거나 서로 깎아내리거나 시기하면 안 됩니다. 서로 돌보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서로 사랑하며 자라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목장 사역을 통하여 이러한 관계를 연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신년 들어 약간의 목장 개편이 있는데 여러분들이 속한 목장이 그런 아름다운 나눔의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말씀생활을 하려면  

1)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성경 일독 캠페인을 벌였는데 많은 분들이 참여하여 완독을 하였습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혹은 가장 외적인 방해를 적게 받는 시간을 정하여 규칙적으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말씀하심’과 ‘들음’이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기본 조건입니다. 자신들의 무지를 시인하고 결단과 용기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갔던 제자들과 같이 우리의 부족함을 깨닫고 겸손하게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2)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듣는 것만 해도 신통하다 할 수 있지만 많은 사람이 이 단계에서 그칩니다. 주일날 교회에서 설교 한 번 듣는 것으로 성도의 임무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는 것으로 부족하고, 들은 것의 의미를 깨달아 알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읽다가 감동 받은 부분을 나누고 이해가 되지 않는 표시해 두었다가 물으면 됩니다. 성경을 읽다가 이해되지 않은 부분이 나오더라도 계속 읽어가야 합니다. 나중에 다시 읽을 때 깨달아질 수 있고 설교나 성경공부 시간에 해결할 수 있습니다.



3)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4장에 나오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의 초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가에 있습니다. 단단한 길과 같이 마음이 굳어져서 신앙적으로 게을러지거나 신앙생활을 멀리 할 때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습관적이 됩니다. 돌짝밭과 같이 말씀을 들을 때 잠시 기쁨을 누리지만 외적인 환경의 지배를 쉽게 받으며 받은 은혜를 쉽게 쏟아 버릴 때가 있습니다. 가시떨기 밭과 같이 흙도 부드러워 남들 보기에는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은 같은데 실상은 세상의 염려, 돈 생각, 탐욕과 정욕으로 온전한 열매를 거두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설교를 듣고 은혜 받았다고 하면서 마음에 기쁨이 생겨도 그 말씀을 시간을 내어 계속 상고해 보고 자기의 것으로 소화하지 않으면 생활의 분주함 속에 감격은 금새 사라집니다.  좋은 밭에서 풍성한 결실을 거두게 됩니다. 열매를 풍성히 맺으려면 깨달은 말씀을 삶에 적용하여야 합니다. 마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운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자라야 예수님의 가족이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됩니다. 주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듣고 깨달고 행함으로 풍성한 결실을 맺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열매를 찾으십니다. 아무리 잎사귀가 무성해도 열매가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열매가 없다면 밖에 던져져서 밟힐 뿐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날 당시 이를 기뻐하며 노래를 부른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 중에 바라보며 기다리는 대강절에 과연 누가 기쁨의 찬가를 부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믿는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우리의 비천함을 돌아보시는 하나님, 겸손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성탄의 계절에 말씀을 통하여 묵상하시면서 엘리사벳과 마리아처럼 지체들을 서로 축복하고 받은 구원을 찬양해야 합니다. 어떠한 형편과 처지에서도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다” 하는 담대한 고백과 간증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하실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