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주님 오심을 기다리며(2)(사 11:1-9)

Author
Myung Myung
Date
2008-12-07 14:00
Vi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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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11:1-9  주님 오심을 기다리며(2)



산불이 집 근처까지 접근해옵니다. Sheriff가 와서 빨리 대피하라고 방송을 합니다. 시간은 없고 들고 나갈 것은 제한되어 있을 때 무엇을 들고 나가시겠습니까? 고급 가구를 들고 나가겠습니까 평생 수집한 장서들을 들고 나가겠습니까? 중요서류나 사진 등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평소에 아끼던 것들 대부분을 두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주님 앞에 서게 될 때에 무엇을 들고 가겠습니까? 그때는 아무 것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그때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주님을 믿고 주님을 위하여 수고한 것밖에 보여드릴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땅의 삶이 전부인 것처럼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투자하며 때로는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하고 발버둥 칠 때가 얼마나 많은 지 알 수 없습니다.



2008년도 이제 한 달이 채 남지 않았는데 금년의 top news를 꼽으라 한다면 단연 금융위기로 시작된 경기침체일 것입니다. 투자은행인 Lehmann Brothers의 파산을 신호탄으로 지난 몇 달 동안 격변이 있었습니다. 주가와 주택가치가 폭락하고 많은 기업들이 도산의 위기에 직면하고 회사들마다 대규모로 감원을 하고 있습니다. 정부 차원에서 경기 회복을 위한 각종 대책을 내어 놓고 있지만 그 효과가 좀처럼 나타나지 않습니다. 몇 십 년 동안 곪아왔던 상처가 너무 깊게 그리고 넓게 미국의 경제 시스팀에 퍼져있기 때문입니다. 이 위기가 언제까지 갈 것인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런 가하면 지난 주 인도 뭄바이에서는 파키스탄과 연관된 그룹이 테러를 일으켜 170명 이상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이락과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여전히 많은 민간인들과 군인들의 희생자를 내며 뚜렷한 해결책이 없이 또 한해를 넘깁니다. 미얀마에서 태풍으로 인하여 많은 인명과 물질의 피해를 당하였고 남가주에서는 또다시 산불로 인하여 많은 재산상의 피해를 겪었습니다. 지구촌 소식을 들으면 어디에도 안전한 곳, 평안한 곳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바로 이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평화, 평안, 평강과 관련된 약속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2000년 전이나 3000년 전  사람들의 마음에도 평강이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외부의 침략을 많이 받아왔던 우리나라에서 주로 하는 인사가 무엇입니까?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죽지 않고 살았느냐는 뜻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인사말도 평강을 뜻하는 ‘샬롬’입니다. 성도들은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평강을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 평강을 나누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평강을 누리고 우리가 속한 가정이나 교회나 직장에서 하나님의 평안을 나눌 수 있을까요? 설교를 들으면서 생각해보시고 개인적으로 말씀 묵상을 하면서 생각해 보시고 목장으로 모였을 때 함께 나누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대강절 기간에 그 어느 때보나 하나님의 위로를 풍성하게 체험하며 평강 가운데 성탄절을 맞이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서의 중심단어는 심판과 회복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백성이 되고 그들을 통하여 이방 민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요 복의 근원으로 삼으시고 그와 그의 자손들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사랑과 기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기고 각종 죄악의 열매를 맺으며 불의한 백성으로 전락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사야서에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탄식이 여러 번 나옵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구유를 알건마는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1:3) “좋은 포도를 맺기 바라서 극상품 포도를 심었더니 들포도를 맺었다.” (5:1-2) 백성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공평과 의로움으로 다스리기보다 자기들의 지위와 권력을 이용하여 약한 사람들의 재산을 강탈하고 뇌물을 사랑하고 고아와 과부 등 약한 자들을 돌보기는커녕 그들을 억울하게 하고 고통을 주었습니다. 지도자들이 타락하니 백성들도 덩달아 타락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무수한 제물을 계속하여 드리지만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멀었고 죄에 대하여 무감각하였습니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 1:18) 하면서 이사야는 타락한 백성들에게 회개하는 것만이 진정한 살길임을 깨우칩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악을 행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이 먼저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시리아와 연합하여 남 왕국 유다를 침략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윗 왕조를 영원히 지켜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북 이스라엘의 침략행위는 그런 하나님의 언약을 거스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앗시리아를 사용하여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는데 앗시리아는 자신들이 강하고 자신들의 신이 강해서 그렇게 된 줄로 착각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은 유다까지 정복하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징벌하는 막대기로 사용된 앗시리아가 도를 지나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잔인하게 다루니 하나님은 교만히 행하는 앗시리아에 대하여 심판을 선고하셨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배경입니다.



앗시리아에게 심판을 선포했던 이사야가 유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평화로 다스릴 이상적인 통치자가 다윗 가문에서 나올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장차 올 그는 어떤 분입니까?  

1) 다윗의 혈통에서 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거진 숲과 같은 이스라엘을 불사르시고 그 땅에 남은 것이 거의 없게 하시겠다는 말씀이나 (9:18-21) 레바논의 울창한 숲 같은 앗시리아를 도끼로 다 찍어 황폐하게 하신다는 말씀(10:33-34)을 통해 숲으로 비유된 이스라엘 주변의 환경은 이미 파멸상태에 놓여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환경에서 하나님은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고 하시면서 다윗 왕조를 통한 회복을 약속합니다. 그를 통해 마침내 평화의 나라가 도래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요 다윗은 이새의 여덟 번째 아들입니다. 왜 장차 올 자를 다윗의 줄기라 하지 않고 이새의 줄기라고 했습니까? 다윗이나 솔로몬이 누리던 과거의 영화는 다 사라지고 이제는 불에 타다 남은 재와 같이 초라한 모습만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의 전편에 흐르는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의 허물을 인하여 대적을 들어 그들을 징계하시나 아주 멸하지 않고 그루터기와 같이 남아 하나님께 돌아오는 경건한 백성들을 회복을 시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나 구원하시지 않고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만을 구원하십니다. 이‘남은 자’의 사상은 이사야서 뿐 아니라 구약이나 신약 여러 군데에서 언급됩니다. ‘남은 자’가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올 것을 말합니다(사 10:22).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속을 받고 그 믿음을 고백하는 자들이‘남은 자’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약속의 백성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2) 성령으로 충만합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에게 여호와의 영이 항상 함께 했던 것처럼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나올 새로운 통치자 위에도 하나님의 영이 머물 것입니다. 그 영은 ‘지혜와 총명의 영’,‘모략과 재능의 영’,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으로 소개됩니다. 지혜와 총명, 모략과 재능은 통치자에게 필수적인 것들입니다. 성령이 임할 때 지혜가 있고 명철이 있고 능력이 생기고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게 됩니다.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함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기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만이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가 다스리게 될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1) 공의와 정직이 살아있는 나라

그 당시 세상 임금들은 불의와 거짓으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 결과 백성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세상 임금들은 시태를 공정하게 판단하지 않고 멋대로 판결하여 사람들을 억울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왕은 눈에 보이는 대로만 판단하고 귀에 들리는 대로 판결을 내리는 세상의 재판장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총명을 통하여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배려하며 정확하고도 현명한 판결을 내립니다. 부와 권력을 가지고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거나 불공정한 판결을 하는 자들이 있다면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보내실 평화의 왕이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5)고 하는데 바울이 에베소서 6장에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언급할 때 이 구절을  인용하였습니다.



2) 평강을 누리는 나라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단순히 영혼의 구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중풍 병자를 고치실 때도 먼저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면서 중풍 병자를 일으키셨습니다. 혈루증 걸린 여인에게도 예수님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면서 혈루증만 치료하신 것이 아니라 영의 구원도 주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서 예수에게 사람을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하며 물을 때 예수님은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고(마 11:5-6) 말씀하셨습니다. ‘샬롬’이라는 히브리 단어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걸쳐 참된 평화와 회복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메시야가 다스리시면 적대감, 시기, 잔혹행위가 없는 완전한 평화의 세상이 될 것입니다. 메시야가 오심으로 하나님과 인간관계만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파괴한 생태계까지도 회복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쫓겨날 때 그들만 하나님의 벌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하면서 인간의 죄로 인하여 자연까지도 벌을 받게 될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관계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복되면 자연도 온전하여집니다.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른다고 (롬 8:21)고 바울이 말합니다.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어린 것들이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는 것과 같이 자연의 질서 속에서 도저히 상상할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이리가 어린 양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요, 표범이 어린 양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요, 사자가 소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이리는 이리요, 표범은 그대로 표범이요 사자는 그대로 사이지만 전과 같이 다른 약한 짐승들에게 해를 주거나 상처를 입히는 일이 없어집니다. 죄로 인하여 파괴된 창조의 원질서가 회복됩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보내실 다윗의 자손, 평강의 왕이 다스리실 때 이루어집니다.



3)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한 나라

땅위에서 이루어질 평강의 전제조건은 ‘여호와를 아는 지식’입니다. 이사야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11:9)이라고 하는데 하박국서에도 이와 비슷한 표현이 있습니다.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합 2:14) 물이 바다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거룩한 산 시온이 그분을 아는 지식으로 가득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영광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예수님을 통하여 얻는 것이 가능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요 14:6). 예수를 믿고 제자가 된 성도들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온 세상에 퍼뜨리기 위하여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온 유대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온 땅에 전파될 때 그제야 끝이 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충만한 성도들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하면서 주님이 원하시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곳에 살면서 우리가 천국을 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이사야가 11장에서 예언한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이사야가 예언한대로 예수님이 오셨을 때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눕는 일이 벌어졌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아직 온 땅에 충만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점차 이루어지고 있고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이 오시기 700년 전 사람입니다. 그는 700년 후에 예수님이 오셨을 때 이루어질 일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의 일들은 성령의 감동 가운데 겹쳐서 보았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처음 오셨을 때의 일어날 것으로 이사야의 예언을 맞추려고 한다면 무리가 생깁니다.  



본문을 통하여 21세기를 사는 성도들이 적용해야 할 삶의 원리들이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고(호 6:3) 호세아는 권면합니다. 안다는 것은 단지 지식적으로 깨닫는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관계를 가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때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책임지시고 선하게 인도 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경험하고 그리스도를 본받도록 합니다. 그것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딤전 1:5)에서 생겨납니다. 초대교회에서 성령이 주는 기쁨과 감격은 흔히 선포된 말씀을 듣고 깨달을 때 동반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하여 천국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 밭에 뿌려지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듣고 깨달을 때 천국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것은 마치 사람이 길을 가다가 밭에 감춰진 보화를 발견하고 숨긴 뒤에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모든 재산을 다 팔아 밭을 산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마 13:23,44). 기쁨을 동반한 진리의 지식이 사람들로 하여금 열매 맺는 삶을 살게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이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켜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고 순종하게 하며 영원한 소망을 갖게 합니다. 다윗의 자손으로서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그분은 먼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는다고 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을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행위, 다시 말하면 늘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사는 삶을 말합니다. coram deo라는 라틴어가 있습니다. 영어로는 in the presence of God.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라는 뜻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시선을 느끼고 살 때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고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 총명, 모략, 재능을 얻을 수 있고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분에 대한 경외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롬 2:13)이라고 바울이 말씀합니다. 본문을 보니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공의와 정직을 생명으로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소금이 음식을 만드는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식재료이고 어둠을 밝히는 빛이 반드시 필요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세상에 필요한 소금과 빛으로 삼으셨습니다. 믿는 사람이 세상의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기독교인으로서의 존재 가치가 사라지며 이 세상은 영적으로 더 혼탁해지고 바로 잡을 길이 없어지게 됩니다. 노아의 때 세상은 죄악으로 관영하여 홍수로서 노아의 여덟 식구만을 제외하고는 땅에서 숨 쉬는 모든 것은 멸망하고 말았고, 소돔과 고모라에는 의인 열 사람이 없어서 불 심판을 받았습니다. 성도들은 어디에서나 거룩한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가정, 직장, 학교, 시장 모두가 착한 행실을 나타내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주일만 믿는 모습을 보이는 Sunday Christian이 아니라 everyday Christian 이 되어야 합니다.



3) 받은 은혜를 나누어야 합니다.

6-7절에 ‘함께’라는 단어가 5번이나 반복됩니다. 신앙생활은 나만 혼자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기뻐하고 함께 울고 함께 기도하며 서로의 기쁨과 아픔과 고통을 나누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을 뿐 아니라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시고 그들의 아픔에 불쌍함을 느끼시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평화를 주러 오셨기에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하며 천사들이 찬송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살지만 천국을 경험하고 평강을 누리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회복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과 교회에서 하나됨의 역사가 항상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 구원의 완성은 예수님의 재림 때 이루어 질 일이지만 성도들과 교제 속에서 기쁨을 얻고 받은 은혜를 함께 나눌 때 이미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며 살게 됩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분의 말씀대로 살고 받은 은혜를 나눌 때 우리의 삶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북이스라엘과 유다 사이의 화합과 통일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 이전 역사부터 뿌리 같은 반목과 200년 이상의 분열 때문입니다. 하지만 평강의 왕이 다스리시는 나라에서는 이 둘이 서로 화합하고 질투와 반목의 사슬이 끊어지며 함께 힘을 합쳐 이전 다윗 왕 시절의 영광을 재현하게 됩니다. 인간의 상식이나 경험에 비추어볼 때 불가능한 일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엄청난 일을 계획하셨고 또 이루십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 가진 것이 없어도 신앙을 가진 사람이 사자같이 담대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내 앞에 놓인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돈입니까? 100년 만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경제위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불황의 끝은 아직도 멀었다고 합니다. 건강입니까? 물론 중요하지요. 건강을 다 잃으면 다 잃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음식조절을 하고 운동을 해야 하지만 우리가 마음먹는 대로 건강할 수는 없습니다. 저희 교회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건축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는데 만만치 않습니다. 건축할 자금이 많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은행에서 loan을 얻는 것이 현재로서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의 집을 건축할 마음으로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실 줄을 믿습니다. 남한과 북한이 분단되어 반목과 갈등을 가진 지 60여년이 흘렀습니다. 반세기 이상 떨어져 살다보니 하나가 되는 것이 보통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김정일의 병세가 예상보다 깊다는 보도와 함께 향후 북한의 체제 변화와 한반도 정세 변화 가능성을 둘러싼 한반도 주변 강국들의 물밑 움직임이 활발하다고 합니다.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 인터넷판은 최근 북한이 붕괴될 경우 중국이 여러 가지 이유를 내세워 북한을 침공할 가능성을 제시하였습니다. 러시아도 그런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문제는 중국이 북한에 들어가면 철수할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염려합니다. 상황이 이렇게 금박한데 국회는 여전히 여당과 야당으로 갈리어 힘겨루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들을 어떻게 풀겠습니까?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십니다.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역시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낙심하거나 염려하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분을 알고 그분과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문제로 생각되는 것들을 하나님께 내어 놓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릎으로 풀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이사야가 바라본 아름다운 미래를 소망 중에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에게 밀려옵니다. 이 은혜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소망의 이유를 나누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나누고 목장에서 나누고 사람들과 만나는 곳에서 나누어야 합니다.



바울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고후 4:8) 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성도들은 어려움을 당해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도리어 고난이 가져올 유익을 바라보며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는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며 문제를 풀기 바랍니다. 질그릇과 같은 우리를 부르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채우시고 넘치도록 열매를 맺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십니까?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그분의 사역에 동참하여 하나님과 이웃과 화목하며 삶 속에서 기적을 경험하며 진정한 의미에서 샬롬/평강을 체험하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