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주님 오심을 기다리며(1)(벧후 3:8-13)

Author
Myung Myung
Date
2008-11-30 14:22
Vi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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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후 3:8-13  주님 오심을 기다리며(1)



추수감사절 바로 다음 날인 28일을 Black Friday라고 부르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크리스마스 shopping season이 시작됩니다. 어느 때보다 심한 불황을 맞이한지라 지갑을 열기가 쉽지 않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shopping mall마다 세일 품목을 사려는 사람들도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북적댑니다. 달력을 보면 30일 밑에 대강절이라 적혀 있습니다. 영어로는 advent라 하는데 출현한다, 도래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대강절은 성탄절 4주전 일요일부터 시작되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유대 땅에 오셨습니다. 왜 오셨습니까?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사셨습니다. 하늘에 오르신 주님은 다시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2000년 전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렸지만 오늘 우리들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립니다. 따라서 대강절은 성탄절을 앞두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할 준비가 제대로 되어있다면 성탄절을 맞이할 준비가 제대로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08년도 대강절을 맞이하면서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구약을 ‘오실 메시야에 관한 책’이라고 한다면 신약은 ‘이미 오신 메시야에 관한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1세기의 경건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들의 예언에 따라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을 가져주고 경제적 사회적으로 불안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고 샬롬을 가져다 줄 메시야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예수님이 오셨는데 유대인들의 반응이 어떠하였습니까? 예언이 이루어진 것을 감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국가적인 환영의 행사를 벌였습니까? 그들의 대표적인 반응이 마태복음 2장에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야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렸다 하나 예수님의 탄생에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하나님의 언약과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방인인 동방 박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별의 변화를 관측하고 하늘의 징조를 찾다가 어느 날 밤하늘에 빛나는 신비한 별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별을 왕의 탄생의 징조로 알고, 별의 임자를 찾아 길을 떠납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박사들이 던지는 질문 때문에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을 벌입니다. 헤롯왕은 유대인의 왕의 탄생을 왕권에 대한 위협으로 생각하기에 그 장소가 어디인지 종교 지도자들에게 묻습니다. 그들은 미가 선지의 예언을 기억하며 메시야의 탄생 장소가 유대 베들레헴이라고 주저하지 않고 대답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메시야가 오실 것도 알고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게 될 것이라는 지식은 있었지만 유대인의 왕이 태어난 사실을 인하여 흥분하거나 그 분을 만나러 베들레헴에 가보자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지식은 공허한 지식이요, 그들의 기다림은 막연한 기다림입니다. 메시야를 만나겠다는 열망이 없습니다.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을 찾아 수만리를 왔지만 종교지도자들은 아기 예수를 향하여 한발자국도 떼지 않습니다. 아이의 탄생장소를 알게 된 헤롯이 이번에는 가만히 박사들을 부릅니다. 헤롯은 박사들에게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그 아이가 있는 장소를 알려주면 자기도 그 아이에게 찾아가서 경배를 하겠다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합니다. 유대인들의 무덤덤한 반응은 예수님이 태어날 때만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천국 복음을 전하시고 수많은 기사와 이적을 행하셨으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종교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예수님을 대적하다가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을 모독하였다는 죄목으로 십자가에 매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기 원하셨으나 그들은 끝내 거부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마 23:37) 하시면서 예수님은 장차 망할 예루살렘 성을 안타깝게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우리를 바라보시면 무슨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정말로 주님을 영접하고 있습니까? 그분을 나의 왕으로 모시기를 원하십니까? 유대인들을 지켜보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성탄절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베드로 후서를 쓰게 된 동기는 교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거짓 선생들에 대한 경고를 하기 위함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단들은 하나님을 공개적으로 욕하고 비방하기보다 은밀하게 복음과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하여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믿음에서 떨어지게 합니다. 또한 그들의 특징은 호색과 탐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판단할 때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알라고 하셨습니다.(마 7:15~16)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3:4)고 거짓 선생들이 주장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다시 온다고 하였는데 몇 십 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재림은 없으니 그런 것을 믿지 말라고 합니다. 재림을 부인하기 때문에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내세에 대한 소망도 없어서 방탕하게 살게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그들의 유혹에 넘어간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전혀 준비되지 않은 모습으로 있다가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을 바로 잡으려면 예수님의 재림을 믿게 만들고 재림을 근거로 바른 생활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재림을 부인하는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을 논박하고 예수님의 재림이 확실하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재림을 근거로 방탕한 삶을 씻어버리고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도록 가르쳐줍니다.

본문은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이 틀렸음을 설명하기 위하여 두 가지를 지적합니다.



1) 하나님의 시간 개념이 사람의 시간 개념과 다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3:8)

우리에게 천년이 하나님에게는 하루와 같을 수도 있고 우리에게 하루가 하나님께는 천년과 같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직까지 재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재림은 없는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인간의 좁은 안목에서 비롯된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도 내가 생각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대로 응답이 오지 않는다고 낙심하면 안 됩니다.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따라서 재림을 인간의 시간개념으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때가 가장 좋은 때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과 달리 일이 진행된다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2) 재림이 늦어지는 이유는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3:9)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기를 원하신다는 표현은 모든 인간이 궁극적으로 다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그렇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이 구원받기를 기다리시지만 끝까지 복음을 거부하고 예수 믿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주님의 재림이 늦어지는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이 멸망치 않고 회개하여 구원받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재림의 시기를 늦추어 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데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재림이 없다고 하며 구원에서 떨어지는 한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기는 하지만 영원히 참지는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악한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옛 하늘과 옛 땅은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등장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재림 때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무서운 심판과 함께 임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때는 더 이상 회개의 기회가 없습니다. 은혜의 시대가 끝이 납니다. 심판을 통하여 악에게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십니다. 악을 제거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십니다.



재림의 날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아직까지 교통위반으로 인한 티켓을 한 번도 받지 않았다고 하여 앞으로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재림이 아직 없었다고 재림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재림이 더딘 것 같지만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그런데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은 도둑 같이 임한다고 합니다. 도둑이 올 때 미리 알려주고 오지 않습니다. 도둑이 언제 들어올 지 미리 안다면 준비하여 피해를 막을 수 있지만 알지 못하기에 방심하다가 당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재림은 아무도 예상치 못할 때에 일어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막 13:32)고 하셨습니다. 재림의 시기를 사람들에게 알려주시지도 않지만 알려고 하는 것도 월권입니다.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그때 예수님은 자칭 그리스도라 하는 자들이 많이 나타나 사람을 미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는 전쟁이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을 것입니다. 성도들이 박해를 많이 받을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할 것이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진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된다고 합니다. 왜 하나님은 재림의 날을 미리 알지 못하게 하십니까? 사람들의 유익을 위함입니다. 사람들이 나쁜 데는 얼마나 머리를 잘 굴리는지 모릅니다. 재림의 날을 미리 알면 사람들은 그 날이 가까워올 때까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재림의 날을 몰라야 늘 영적 긴장 속에 깨어 있어 정신을 차리고 바른 신앙을 할 수 있습니다. 등불의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고 신랑을 기다리는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2차 대전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인 1945년 8월 6일 Enola Gay라고 불리는 B29 폭격기가 히로시마로 날아갔습니다. 인류가 개발한 가장 가공할 무기중의 하나인 원자폭탄이 역사상 처음으로 실전에 사용되려는 참이었습니다. 히로시마 상공에 이르자 B29 폭격기는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기수를 돌려 전속력으로 히로시마로부터 멀어져갔습니다. 원자폭탄이 폭발하는 순간 뜨거운 불덩어리가 강한 바람과 함께 사방으로 퍼지며 반경 2.4km 내에는 완전히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승조원들이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니 커다란 버섯구름이 히로시마로부터 하늘로 솟구치는 것이 보였습니다.  



베드로는 주의 날에 있을 장면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B29에서 떨어뜨린 원자폭탄 하나로 히로시마 시가 재로 변하고 말았으나 마지막 날에는 온 하늘이 불에 휩싸여 큰 소리로 순식간에 떠나 버리고 하늘에 있는 해나 달이나 별들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고 땅에 그 중에 있는 모든 것들이 타버릴 것입니다. 인류가 자랑하는 모든 크고 웅장한 건축물들도 다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악이 관영하던 노아시대에 하나님께서 물로 땅을 심판하셨는데 노아 때보다 더 패역한 마지막 때에는 불로 하늘과 땅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도 이런 장면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분하여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사 13:13); 하늘의 만상이 사라지고 하늘들이 두루마리 같이 말리되 그 만상의 쇠잔함이 포도나무 잎이 마름 같고 무화과나무 잎이 마름 같으리라(사 34:4); 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욜 2:10)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어떤 현상이 있습니까?

1)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갑니다.

큰 토네이도가 오면 지축이 흔들리고 지붕이 날아가고 큰 소리가 납니다. 마지막 때에는 그런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격변이 일어납니다. 하늘은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공중을 의미합니다. 하늘이 떠나가는 것은 새로운 상태가 되기 위함입니다. 하늘이 떠나가는 것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함을 의미합니다. 큰 소리로 떠나가는 것은 그 심판이 무섭고 엄청난 것임을 보여줍니다.  



2)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집니다.

물질은 세상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들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하늘은 새 하늘과 대응되고 물질은 새 땅과 대응됩니다. 따라서 물질은 땅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지금의 하늘과 땅은 사라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3)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납니다.

구약에 의하면 주의 날은 이스라엘에게는 승리의 날이요(욜 3:14~18), 대적들에게는 어두움과 패배의 날로 묘사됩니다(사 13:9~11).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영원한 구원 속으로 들어가지만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영원한 멸망에 빠집니다. 재림 때에 사람들이 행한 모든 것이 낱낱이 드러납니다. 재림 때에 심판이 있습니다. 심판 후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납니다. 그곳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의로운 삶을 살아야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재림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알려줍니다.

  

1965년에 이민법이 개정된 이래 많은 이민자들이 미국에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보다 나은 교육을 위하여, 보다 나은 삶의 환경을 위하여 보다 나은 직장을 갖기 위하여 등등 저마다의 포부를 가지고 왔습니다. 미국이 보다 좋은 교육환경과 더 많은 성공의 기회를 주는 나라이기는 하지만 4.29 폭동생활에 회의를 갖기도 했고, 심한 지진이나 산불로 인하여 대피하기도 하였고, 9.11 테러로 인하여 미국도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이 젖과 꿀이 흐르는 이상향이 아니요, 우리가 정착할 영원한 본향도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언제까지 있는 것이 아니요 뒤집어질 때가 옵니다. 주님의 재림이 엄연한 사실로 다가오는데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고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 때에 물로 세상을 심판하셨지만 마지막 때에는 불로 심판하십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불로 인하여 다 없어질 텐데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불에 넣어도 타지 않을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뒤져 불 속에서도 살아난 사람들을 찾아 그들이 왜 살아났는지 알면 우리도 살아나는 비결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느부갓네살 왕이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지겠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왕의 신상 앞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왕의 앞에 불려와 심문을 당합니다. 왕이 마지막으로 제안합니다. 만약 이제라도 신상에 절을 한다면 살려 주겠다고 합니다. 비록 포로로 바벨론에 끌려왔어도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가운데 높은 관직에까지 오를 수 있었는데 이 땅에서의 모든 영화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심지어 목숨까지도 잃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우상에 절하고 목숨을 부지할 것인가 절하지 않고 죽을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쉬운 선택이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세 친구들에게는 목숨을 내건 결단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그들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다시 말하면 왕이 물어보나 마나 우리의 행동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뜨겁게 타는 풀무 불 가운데서도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실 것입니다. 세 친구들은 더 감동적인 말을 합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않겠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뜻이 우리들의 생각과 달리 혹시 풀무 불 가운데서 죽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항상 선하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꺼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합니다.



세 친구의 담대한 답변을 들은 왕은 자기의 권위에 감히 도전하는 이들을 인하여 화가 머리끝까지 치밉니다.  풀무 불을 평소보다 일곱 배나 뜨겁게 하여 이들을 던지라고 명령합니다. 어찌나 그 불이 뜨거운지 곁에서 세 친구들을 붙잡고 가던 사람들이 불에 타 죽을 정도였습니다. 세 친구들이 뜨거운 풀무 불 가운데 던짐을 받았는데도 그들이 살아났을 뿐 아니라 머리털도 그슬리지 않고 옷의 색깔도 변하지 않고 불탄 냄새조차 없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자기들의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우상에 절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이니 하나님이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려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 믿음과 열정이 그들로 하여금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게 하였고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지키신다고 약속하십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라.”(사 43:2).  



비록 종말의 때에 심판이 일어나지만 파괴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그날을 사모하는 자들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의 회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 회복은 확실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합니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11~13절)



베드로는 믿는 자들을 가리켜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행인 같다고 표현합니다.(벧전 2:11) 그 이유는 이 세상이 우리의 본향이 아니요 더 좋은 세계, 즉 하나님의 영원한 도성을 사모하고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과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이 불 가운데 녹아져 버릴 것이기에 세상에만 관심을 기울일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거룩하다는 말에는 구별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기에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1:15에서도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권면합니다. 또한 경건하다는 말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헌신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배, 기도, 말씀을 통하여 항상 하나님과 교제하며 지내는 것입니다. 종말론 세미나도 좋고 종말론에 관한 책을 읽는 것도 좋지만 삶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지 생각하며 실천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거룩한 삶과 경건한 삶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재림의 날이 속히 오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개역개정판에는 ‘간절히 사모하라’로 번역되어 있으나 헬라어는 재촉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한 심령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재림이 더뎌지는데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성결의 삶을 힘쓸 때에 주님의 재림이 빨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과 섭리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것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하나님께 대한 반응이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주기도문에서 “나라이 임하옵시여”(마 6:10)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으며 종말에 관한 예언 중에는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하시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성도들의 순종이 중요함을 보여줍니다.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으며,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다 불 가운데 사라질 것입니다. 인간이 지혜와 능력을 총동원하여 이루어 놓은 모든 것들이 다 없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성도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더 이상 죄가 주장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의만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곳에 살게 될 성도들은 지금부터 그곳에 살기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힘쓰면서 그날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경건하게 살면 주 앞에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날 수 있으니 그렇게 되도록 힘을 쓰라고 권면합니다. 이제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영적으로 깨어있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평강으로 주님을 맞이하도록 의롭게 사는 것이 성도의 책임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흠 없고 점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 재림을 준비하는 자세:

1) 주 앞에 설 것을 소망 중에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경의 가장 중요한 약속중의 하나입니다. 재림은 아주 중요한 사건이고 앞으로 반드시 일어날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최후 심판을 확실한 것으로 믿는 자들은 심판에 대한 불안 때문이 아니라 회복에 대한 소망으로 주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이 소망을 소홀히 하기 시작하면 주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지고 세속적이며 불신앙적인 생활로 빠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는 자세는 거룩함과 경건함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의 삶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천국의 소망을 가지며 세상의 유혹과 욕심을 이겨내야 합니다. 재림을 기다리는 삶은 세상에서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있을 삶의 회계를 생각하면서 사명을 다합니다. 사업을 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가사를 돌보거나 무슨 일을 하든지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또한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는 지금이 구원의 때이므로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합니다.



2)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지체된다고 신실하신 하나님이 약속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문밖에 서서 집을 나간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와 같이 하나님은 사랑으로 구원의 문을 열고 한 심령이라도 더 회개하며 하나님께 나아와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은혜의 기간을 연장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구원을 받는 계기가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감사해야겠고 날마다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삶이 되어야지 도리어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인하는 거짓 선생들의 꼬임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한때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재림의 시기를 안다고 하면서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재림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재림에 대한 말씀에 거부반응을 보인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사단의 계략에 속아 사단의 도구가 되었지만 그것 때문에 재림을 무시 하는 것도 사단의 계략에 빠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경건의 훈련을 쌓아야겠고 영적으로 성숙하게 되려고 힘을 써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점차로 예수님을 본받게 되고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의를 드러내게 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주 안에서 승리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런 삶을 살 때 오늘이나 내일이나 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으며 언제 주님이 다시 오시든지 평강 가운데 맞이할 수 있습니다. 이번 대강절을 계기로 다시 한 번 마음을 새롭게 하며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잘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