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환경을 초월한 감사(출 15:22-27)

Author
Myung Myung
Date
2008-11-23 14:27
Views
3499
출 15:22-27 환경을 초월한 감사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어느 하루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날이 없지만 오늘은 한 해 동안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최상의 감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삼대절기를 지키는데 그중의 둘이 추수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오순절이라고도 불리는 맥추절은 거둔 첫 열매를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초막절이라고 불리는 장막절은 광야 생활 가운데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할 뿐 아니라 한해 농사를 지으면서 거둔 수확을 인하여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절기를 통하여 그들의 조상들에게 베풀었던 하나님의 놀라우신 행위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신앙을 이어갔습니다. 오늘날은 과거 농경시대와 같이 곡식을 거두며 추수를 하지는 않지만 감사절을 맞이할 때마다 한해를 돌아보면서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며 우리의 믿음을 이어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감사할 수 있습니까? 금융시장의 위기가 실물경기 침체로 연결되면서 금년은 어느 때보다 추운 겨울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경기 침체 속에 물가와 자산 가치가 함께 하락하는 디플레이션의 조짐이 보입니다. 그러면 소비는 더 얼어붙고 기업은 더욱 투자하기를 꺼립니다. 이는 감봉ㆍ감산ㆍ감원으로 이어지고 소비는 더욱 냉각되는 악순환이 빚어집니다. 담보가치가 떨어져 부실이 늘어나니 금융기관의 대출은 더 경색되어 기업의 자금난이 심화됩니다. 그러다 보니 GM이나 Chrysler 등 대기업들조차 도산의 위기에 직면해있습니다. 실물경기가 회복되기 까지는 적지 않은 기간이 걸릴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합니다. 경기 침체도 힘든데 남가주에 지난주까지 산불로 인하여 천여 채나 되는 집들이 소실되면서 졸지에 보금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업이 잘 되고 건강하고 일들이 뜻대로 잘 풀릴 때 감사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고 아픔이 있고 마음에 눌리는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면 그 감사는 믿음이 담긴 감사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환경을 넘어섭니다. 일 년 365일이 어느 날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은 날이 없지만 특히  감사절은 진정한 감사의 자세를 회복하는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그들이 왜 감사하지 못하는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살펴보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감사자의 삶을 살기 원합니다.



이스라엘은 항상 감사해야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400 년 동안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열 가지 재앙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애굽은 마침내 이스라엘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러나 바로가 이를 후회하고 군대를 보내 이스라엘을 추격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뒤에서 점점 다가옵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진퇴양난의 위기에서 이스라엘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홍해를 가리키자 바람이 밤새도록 불면서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그동안 애굽 군대는 구름기둥에 막혀 더 이상 이스라엘을 추격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자 애굽 군대도 따라 왔으나 홍해가 다시 합치는 바람에 그들은 모두 물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시 한 번 구원을 경험하였습니다. 이에 모세의 누나 미리암은 크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찬양을 통하여 하나님을 용사로 소개합니다. 택한 장관을 물에 던지시고, 주의 오른손이 그들을 물리치시고, 주의 큰 위엄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소멸하시고, 주의 콧김에 물이 쌓였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섬세하고도 dynamic 하게 묘사합니다. 애굽에서 알았던 태양신, 나일강신, 개구리신 파리신은 헛것이고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인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의 인도 속에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쓴 물을 인하여 원망을 합니다.

가나안으로의 여정은 믿음의 여정이요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계속하여 감사를 드리며 나아가는 여정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떠난 지 불과 수일 만에 그들의 인내는 바닥이 나고 감사는 사라졌습니다. 홍해를 건넜다고 끝난 것이 아니라 그들 앞에 물도 없고 길도 험한 광야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지나는 수르 광야는 팔레스타인과 애굽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하여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곳입니다. 싸움에 나갈 만한 장정이 60만이요 노인들과 여인들과 어린이들을 합치면 200만은 족히 될법한 큰 무리가 광야를 걸어간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다리도 아프고 목도 마르고 주저앉고 싶었습니다. 가지고 온 물도 떨어져 가던 차에 오아시스를 만나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곳에서 여행에 지친 몸과 마음을 쉴 생각을 하니 갑자기 발걸음도 가벼워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그물이 어찌나 쓴지 마실 수 없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여행이 힘들어 짜증이 나는데 물이 너무 써서 마시지 못하니 이중으로 화가 났습니다. 그곳의 이름을 ‘마라’라고 불렀는데 그 말은 쓰다, 괴롭다는 동사에서 왔습니다. 물이 너무 써서 마시지 못하니 마음이 더 괴로웠을 것입니다. 소망이 낙심으로 바뀝니다. 낙심이 분노로 바뀝니다. 그들이 불과 며칠 전에 경험했던 출애굽 사건에 비하면 사실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모세를 향하여 원망을 늘어놓습니다. 모세가 자기들을 인도하여 냈으니 당연히 마실 물도 해결해 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백성을 이끄는 것밖에 없는데 백성들은 조금만 자기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에게 불평을 했습니다. 백성들은 그 짓을 무려 40년 동안이나 반복하였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모세를 원망했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힘이 들 때마다 그들이 잘 늘어놓던 불평이 무엇입니까? 애굽에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공연히 우리를 이곳으로 불러내어 고생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가장 큰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가나안에 정착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것인가가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비전이 없이 그저 눈앞에 있는 문제만 해결되면 만족하는 자들입니다. 오랫동안 노예로 있으면서 자기들도 모르게 갖게 된 근성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왜 출애굽을 시키셨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생각해 보지도 않습니다. 장래일은 그때 가서 해결할 문제고 당장 마실 물을 내어놓아 갈증을 해결해 달라는 것입니다.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을 보고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보고도 하나님을 거역하는 본성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물 없는 사흘간의 여정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이 얼마나 깊은 지 보여주는 시험의 길이었습니다. 시험문제: 광야에서 사흘 동안 물이 없던 것은 하나님이 주신 시험문제였습니다. 그 시험은 이스라엘은 불평과 원망으로 풀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하면서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렸듯이 모세도 문제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엎드립니다. ‘차아크’라는 히브리 단어는 가슴을 치며 애통하며 부르짖을 때 사용합니다. 백성들의 요구가 어리석고 그들의 태도는 하나님께 불신앙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모세는 하나님께 엎드렸습니다. 온힘을 다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물이었지 믿음이나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첫 시험에 실패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나무를 가리키십니다. 모세가 그 나무를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찾아오셔서 쓴물을 단물로 만드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조금만 참았더라면 조금만 탐욕을 부리지 않았더라면 마라에서 원망 죄를 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라에서 얼마 떨어진 곳에 엘림이 있습니다. 그 곳은 열두 개의 샘과 70그루의 종려나무가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엘림을 미리 준비하셨으나 먼저 마라를 지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물을 주시면서 법도와 율례를 주셨습니다. 말씀에 순종하고 행하면 애굽 사람에게 내린 질병이 하나도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을 주십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때 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것이 우리가 오래 사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대로 행할 때 우리의 악한 본성은 성령으로 치료되고 갈증이 없어집니다. 말씀대로 행할 때 치유와 회복이 나타납니다. 우리들은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시는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항상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당할 만한 시험만을 허락하십니다. 조금만 더 참으면 되는데, 주어진 상황에서 감사하면서 주님에게로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데 주저앉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마라는 불평과 원망의 현장입니다. 거기서 나와 감사의 자리로 가야 합니다. 주님이 함께라면 어디라도 가고, 주님이 원하시면 무엇이라도 하겠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에서 얻은 교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물 없는 사막에서도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죽었습니까?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지 않았고 감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탐욕이 감사를 막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물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마시기에 너무 썼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불과 며칠 만에 출애굽의 감격을 잊고 말았습니다. 400년 이상 노예로 있던 그들을 구원하신 것, 홍해를 갈라 그들을 건너가게 하신 것, 이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가게 된 것을 생각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여정 자체만으로 감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앞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니 불평을 하였습니다. 인간의 욕심은 불평과 죄를 잉태합니다. 감사가 떠난 그들의 원망은 순전히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삶의 문제를 들여다보면 욕심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습니다. 집값은 계속 오르고 이자율이 낮으니 투자할 요량으로 equity를 뽑아서라도 집을 두 채 세 채 구입했다가 이자율이 오르고 집값이 하락하니 payment를 제대로 하지 못해 투자용 집은 물론이요 살고 있는 집까지 날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sub-prime market 에서 시작된 경제위기가 prime market으로 불똥이 튀고 미국에서부터 전 세계로 그 영향력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욕심이 빚은 결과입니다. 우리의 부족함,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변찮는 사랑으로 붙드시는데 우리가 만들어 놓은 욕심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릅니다.



진정한 감사는 환경을 초월합니다.

평상시에는 다 믿음이 있는 것이 보이지만 진짜 믿음은 위기를 당할 때에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는 구절이 있습니다.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이루어졌기에, 바라던 것이 생겼기에 감사한다면 이루어지지 않고 생기지 않으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하라. 감사는 성도들에게 선택사항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사업에 실패한 것, 암에 걸리는 것, 고통을 당하는 것 자체를 인하여 감사할 수는 없지만 사업에 실패한 상황에서도, 암에 걸린 상황에서도, 고통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내게 없는 것이나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인하여 불평하기보다 이미 주신 것을 찾아 감사하면서 현실을 헤쳐 나가는 것이 성도의 지혜입니다.



그리스도인도 세상에서 사는 동안 많은 고난을 겪게 됩니다. 그렇다고 모든 고난이 우리의 실수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고통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타납니다. 예측할 수 없이 나타납니다. 여러 가지 형태로 다가옵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고난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고난이나 아픔조차도 사용하셔서 우리의 인생이 좀 더 가치 있고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기 원하십니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한 차원 높아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 1:2~3)라고 하면서 고난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것을 권유합니다.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키우고 우리를 성숙하고 온전한 자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의미를 깨달을 때 하나님께 온전한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고난을 당할 때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자신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 지혜를 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누구에게 구합니까?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약 1:5) 시련의 날에 성도는 인내 속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하실 것입니다.



환경을 넘어선 감사의 모습을 우리는 성경에서, 삶의 현장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페르샤의 다리오 왕은 다니엘을 세워서 왕국 전체를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전쟁포로로 끌려온 주제에 자기들보다 높아진 다니엘을 시기하여 다른 관리들이 그를 제거하려고 하지만 워낙 성실한 다니엘인지라 도무지 그에게서 흠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다니엘을 고소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을 찾았는데 다니엘이 하나님께 매일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왕에게 가서 이제부터 삼십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하자는 법령을 만들자고 제안합니다. 영문도 모르는 다리오왕은 그 조서에 어인을 찍었습니다. 법령이 선포되었지만 다니엘은 전과 다름없이 자기 집으로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이 열린 방에서 하루에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죽게 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감사가 나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드렸더니 나중에 사자 굴에 던져져서도 다니엘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환경을 초월한 감사자의 모습입니다.



지난 10월말 노회 참석차 한국에 갔을 때 여수를 방문하였습니다. 그곳에는 손양원 목사가 마지막으로 시무한 애양원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 옆에 전시관 있는데 그곳에서 문둥병자들을 어떻게 치료하였는지 애양원의 역사를 보여주고 지하층에는 손양원 목사와 관련된 사진이나 유품들을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일제치하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고문을 당하는 장면, 6.25때에 공산당에 의하여 총살을 당하고 순교한 모습들이 있는데 그 중에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이 손 목사가 직접 쓴 9가지 감사문이었습니다. 여순반란 사건 때에 공산당 청년이 손목사의 두 아들 동신과 동인을 죽였습니다. 사랑하는 두 아들들을 졸지에 잃어버린 그 슬픔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런데 손 목사님은 장례식장에서 9가지 감사문을 낭독했습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이 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성도들 중에 이런 보배를 나에게 주시니 감사합니다.

셋째, 3남3녀 중에서 가장 귀한 장남과 차남을 바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거늘, 두 아들이 순교할 수 있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는 사람은 병들어 죽어도 복인데 전도하다 순교했으니 감사합니다.

여섯째, 아들들이 미국으로 유학가려고 했는데 그보다 좋은 천국에 갔으니 내 마음이 안심되어 감사합니다.

일곱째, 내 아들을 죽인 원수를 회개시켜 아들을 삼는 마음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아들의 순교의 열매로서 무수한 천국의 열매가 생길 것을 인하여 감사합니다.

아홉째,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이길 수 있는 믿음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장례식을 치르고 다음 주일 손양원 목사는 두 아들의 순교를 감사하는 감사헌금을 드렸습니다. 당시에 손목사의 한 달 봉급이 80원이었는데 그의 감사헌금 액수는 일만 원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환경을 초월한 감사자의 모습입니다.



같은 현실을 놓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고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행복합니까? 그런 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게도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경험하고서도 현실에 눌려 감사하지 못하고 도리어 원망합니다. 그들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삶이 힘들다고 느낍니까? 벗어날 길이 좀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자기도 모르게 낙심이 되고 불평이 나옵니까? 마음이 평안이 없습니까? 예전에는 힘이 들어도 주님 앞에 엎드릴 줄 알았고 주일이 기다려졌고 찬송 소리가 절로 나왔는데 지금은 기도할 줄 모르고 모든 것이 다 귀찮고 불평만 늘어놓지 않습니까? 감사를 회복해야 합니다.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성도의 감사는 환경에 지배되지 않습니다. 환경을 초월한 감사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렇기에 하박국은 바벨론의 침략이 임박한 상황에서 노래하였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17, 18절).  어떤 형편이나 처지에서도 하나님만을 즐거워하고 감사하는 생활이 성도의 기본자세입니다. 진정한 기쁨, 감사의 근원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에서 나옵니다. 결국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 말씀으로 충만한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시 37:4) 다른 사람들은 짜증을 내고 불평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을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를 드리면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이루시고 우리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모든 것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지켜주셨다는 은혜에 대한 고백이 있을 때 참다운 감사가 나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을 붙들 때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입니다. 입에 쓴물이 들어올지라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여기까지 도우신 에벤에셀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앞으로도 인도하실 신실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진정한 마음의 감사는 환경에서 오지 않습니다. 도리어 환경을 넘어설 때 옵니다.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무엇을 많이 소유함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인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 자체가 구원과 생명을 소유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때 기쁨이 있습니다. 감사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감사할 때 염려가 사라집니다. 감사할 때 건강해집니다. 추수감사절은 감사를 주는 날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감사할 뿐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감사를 나누어야 합니다. 어느 때보다 어려운 상황에서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고 기쁨이 충만하고 감사가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장래는 여전히 불투명하지만 감사의 씨를 뿌림으로 풍성한 감사의 열매를 거두시기를 기원합니다. 광야 같은 세상에서도 기쁨이 있고 감격이 있고 찬송이 있고 소망이 있는 여정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엘림의 풍성함을 곧 베풀어 주실 것을 바라보면서 가나안을 향하여 힘차게 그리고 함께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