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거룩함의 회복(느 13장)

Author
Myung Myung
Date
2008-11-16 14:43
Views
6134
느헤미야  13장  거룩함의 회복



지난 9월초부터 느헤미야서를 다루었는데 이제 감사절을 한주 앞두고 마지막 장을 다룹니다. 느헤미야서를 강해하면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주시는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느헤미야서를 묵상하면 할수록 느헤미야가 얼마나 탁월한 리더였는지 실감하게 됩니다. 그는 기도의 사람, 비전의 사람, 말씀의 사람, 순종의 사람, 섬김의 사람, 열정의 사람, 위기 속에서 더욱 진가를 드러내는 사람이었습니다. 영성과 지성과 추진력을 골고루 갖추었기에 그저 역사적인 인물이 아니라 21세기에도 여전히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느헤미야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려는 비전을 가지고 아닥사스다 왕 20년에 예루살렘 총독으로 부임하였습니다. 12년 동안 재직하면서 대적들의 끈질긴 방해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무너진 성벽을 재건합니다. 계보와 직능에 따라 백성들을 재조직하고 그들에게 적합한 임무를 맡깁니다. 에스라와 함께 말씀을 통하여 부흥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보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여호수아 이후로 천년 동안 제대로 지키지 못했던 초막절을 지킵니다. 회개 운동이 일어납니다. 기쁨과 감사가 충만합니다. 은혜를 체험한 백성들이 자진하여 십일조를 들고 와 하나님의 성전에 바칩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잠시 예루살렘을 떠났다가 다시 오니 유다 사회는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갔습니다. 느헤미야는 개혁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하나님의 뜻대로 회복시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13장에 나타나는 개혁은 느헤미야가 처음 총독으로 있을 때와 다시 부임하였을 때의 한 것으로 나뉩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을 방해했던 장애물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본문의 교훈을 거울삼아 신앙생활의 열심을 회복하고, 삶의 문제점들이 고침을 받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백성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방인들을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분리시킵니다.(1~3절)

1~3절은 느헤미야가 첫 번째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시행했던 개혁의 내용을 적고 있습니다. 이때만 해도 성벽 낙성식을 마치고 아직까지 은혜가 충만하던 때입니다. 율법이 낭독되자 유다 백성들은 자기들이 율법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는 부분이 그들의 마음에 찔렸습니다. 신 14:2, “너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의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셨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자칫하면 우상 숭배의 위험에 노출되어 영적으로 더러워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들과 교제하면서 하나님 중심의 신앙에서 떠나 이방신을 섬기는 신앙으로 타락하였기에 하나님이 진노하셨습니다. 그 결과 북쪽의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망하고 남쪽의 유다는 바벨론에 의하여 망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도 이방인들과 교제하였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합니다.  '섞인 무리'란 종교적으로 유다에 귀화하지 않고 상업이나 결혼 등을 이유로 유다 백성들 가운데 거주하는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암몬 사람들과 모압 사람들이 그들을 대표합니다. 모압과 암몬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와 광야를 지나갈 때에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땅을 지나가지 못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발람을 시켜 이스라엘을 저주케 하였으므로, 모세는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10대 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신 23:3) 선포하였습니다. 그동안 자기들과 함께 살아온 사람들을 쫓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말씀대로 순종하여 과감한 조치를 취합니다. 이방인들을 쫓아낸 것은 단지 이방인에 대한 차별이 아니라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인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적으로 더렵혀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느헤미야는 첫 번째 개혁을 마치고 페르샤로 돌아갑니다.  



6절에는 느헤미야가 ‘며칠 후’에 왕에게 말미를 청하였다고 나와 있으나 실상은 이삼년 정도 경과된 후였습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비운 동안 유대 사회는 엉망이 되었습니다. 대적들은 애써 이루어 놓은 개혁을 망쳐 놓았습니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의지의 사나이 느헤미야는 또  개혁을 추진합니다. 4절부터 언급되는 개혁은 느헤미야가 두 번째 총독으로 부임한 후에 수행한 것들입니다.



총독으로 재부임한 느헤미야가 어떻게 개혁을 추진합니까?

1. 성전의 기능을 회복시킵니다.

느헤미야가 총독으로 있었을 때는 대적들의 도전을 잘 막아내었으나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떠난 후에는 유대인 어느 누구도 그들을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도비야는 예루살렘에서 자기 영향력을 넓혀갔습니다. 도비야는 산발랏과 함께 느헤미야를 대적하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느헤미야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을 뿐 아니라 유대인 지도층 인사들까지 포섭하여 느헤미야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하였습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총독으로 부임하였을 때 자기가 누리던 기득권이 없어질까 염려하여 심히 근심하였고 (1:10), 성벽 중건을 하려고 할 때 너희들이 무엇을 하려느냐 왕을 배반코자 하느냐 하며 비웃었습니다 (2:19). “저들의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하며 조롱하였고(4:3), “예루살렘으로 가서 쳐서 요란하게 하자”(4:8)고 위협하였습니다. 유대인 지도자들과 인척관계를 맺어(6:18) 내통하면서 지속적으로 느헤미야에게 부담을 주었습니다. 한심한 제사장 엘리아십은 성전에 딸린 큰 방 하나를 비워 도비야에게 제공하였습니다. 그곳은 제사에 쓰이는 제물과 성전 봉사자들을 위한 양식, 제사장들에게 주는 거제물을 보관하던 골방입니다. 그런데 엘리야십은 이방인이 성전에 마음대로 출입하며 처소를 삼는 것을 허용하며 성전을 더럽혔습니다. 도비야는 성전의 방을 차지하였을 뿐 아니라 제사 지내는데 필요한 여러 도구들을 바깥에 내어놓았습니다. 예루살렘에 다시 돌아온 느헤미야는 엘리아십이 도비야를 위해 행한 일을 알고 크게 근심하고 분노했습니다. 성전의 기능을 살리는 것은 유대 사회를 성전 중심으로 바로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도비야의 세간들을 밖으로 다 내어 던지고 그 방을 정결케 한 다음 하나님의 전의 그릇과 소제물과 유향을 다시 들여놓았습니다.

  

9장을 보면 말씀을 인하여 부흥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면서 모든 산물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충실히 드려 레위인들과 제사장들로 하여금 경제적인 어려움이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데 전념할 것을 엄숙히 맹세하였습니다. 10:47절을 보면 “스룹바벨과 느헤미야 때에는 온 이스라엘이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날마다 쓸 것을 주되” 이 말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가 있었을 때에는 성전 봉사자들을 위하여 물질적 지원을 하였지만 없었을 때에는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레위인들은 다른 지파와 달리 기업도 없고 땅도 없습니다. 오로지 성전에서 나오는 십일조와 헌물로 살아가야 했는데 물질적 지원이 없으니 성전에서의 직무를 버리고 생계를 찾아 떠났습니다. 성전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버린 바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버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버린다는 뜻입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바 되었느냐?'고 민장들을 불러 꾸짖습니다. ‘민장'은 집단의 우두머리인 지파의 유력한 족장들과 예루살렘의 귀족들을 가리킵니다. 느헤미야는 성전을 떠난 레위인들을 다시 불러 모으고 그들의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게 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드린 십일조와 헌물을 곳간에 들이고 충성스런 자들로 하여금 곳간을 담당하게 하고 레위인들에게 분배하게 합니다. 백성들이 다시 십일조를 드리기 시작합니다. 성전이 다시 제 기능을 발휘하게 됩니다. 지도자들의 나태함과 범죄가 온 백성의 신앙을 그릇되게 만들었고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약화시켰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들의 모습이 혹시 우리들의 모습은 아닙니까? 세파에 시달리면서 받은 은혜를 쉽게 쏟아버리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십니까?

하나님께 최상의 것을 드리기보다 쓰다 남은 것으로 그것도 마지못하여 드리지는 않습니까?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깨어 있지 않으면 우는 사자와 같이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마귀에게 공격을 당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특히 영적 리더들이 바로 서야 합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거짓으로 신앙을 고백하며, 교회를 이용하려는 도비야와 같은 사람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사사로운 감정으로 인해 불의한 자와 타협했던 엘리아십과 같은 자들이 없어야 합니다.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성전이요, 우리 각자는 성령을 모시고 사는 전이기에 이 성전을 더럽히는 죄악의 요소들은 즉시로 제거되어야 하고, 정결하게 유지되어야 합니다. 말씀 앞에 엎드리며 회개하면서 우리의 영을 맑게 해야 합니다.

  

2. 안식일의 전통을 회복시킵니다.

느헤미야가 두 번째로 안식일 준수에 대한 개혁을 실시합니다. 사실 안식일 준수 문제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포로로 끌려가기 전에도 예레미야 선지자가 경고한 적이 있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지 말며 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내지 말며 어떤 일이라도 하지 말고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함 같이 안식일을 거룩히 할지어다”(렘 12:22-23) 그런데 포로에서 돌아와서도 안식일에 대한 그들의 자세가 바뀌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술틀을 밟고 곡식단을 나귀에 실어 운반하며 포도주와 포도와 무화과와 여러 가지 짐을 지고 안식일에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음식물을 팝니다. 이방인인 두로 사람도 예루살렘에 살면서 안식일에도 물고기와 여러 물건들을 팝니다.  

  

느헤미야는 먼저 지도자들을 소집하여 물건을 사고팔며 운반하도록 허락한 것을 꾸짖습니다.  '너희가 어찌 이 악을 행하여 안식일을 범하느냐' 하면서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를 일깨웁니다. 느헤미야는 성문마다 신복들을 세워 안식일 전날 해질 때에 성문을 닫고 안식일이 지나기 전에는 성문을 열지 않게 함으로 안식일에 아예 장사꾼들이 짐을 가지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일부 상인들이 안식일에 성 밖에서 잠을 자며 때를 기다리니 그들을 체포하겠다고 경고하여 다 쫓아버립니다. 그리고 나서 레위 사람들에게 몸을 정결하게 하고 와서 성문을 지켜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라고 합니다. 성문을 지키는 목적이 대적으로부터 성을 보호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도록 성문 통제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창 2:3). 안식일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 안식일을 제대로 지킴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영육 간에 힘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채움 받아 이웃을 섬기고 맡겨진 사명을 감당합니다. 지금은 구약의 안식일 대신에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을 지킵니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는 같습니다. 주일을 제대로 지키는 것은 하나님과 예배를 삶에 최우선 순위로 인정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반면에 주일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3. 민족의 정체성을 회복시킵니다.

포로 귀환 시대의 유다가 처리해야 할 가장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가 이방인과 결혼 문제였습니다. 1차 귀국 당시에 백성들이 언약한 조항 중에 '우리 딸은 이 땅 백성에게 주지 아니하고 우리 아들을 위하여 저희 딸을 데려오지 아니한다'고 하였지만 이방인과의 결혼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에게 충격을 준 것은 유다 사람들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의 여자들과 결혼하였는데 그 자녀들의 태반이 아스돗 말과 그 밖의 다른 말은 하면서도 유다 말을 할 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릴 때는 자녀들이 아무래도 엄마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많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자녀들이 엄마가 쓰던 나라의 말을 배우면서 유다 말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유다 사회로서는 하나의 위기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잡혼을 금한 것은 단지 혈통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여호와를 믿는 신앙에서 떠나게 된다는 중요한 이유에서였습니다. 히브리어를 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도 들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며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겠습니까? 에스라도 이 소식을 듣고 놀랐습니다. 에스라 9장 3절을 보면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았다고 합니다(스 9:3). 느헤미야는 사태의 심각성을 의식하고 그 부모들을 책망하며 저주하고 몇 사람을 때리며 그 머리털을 뽑고 다시는 그들의 자녀들을 이방 사람과 결혼시키지 않겠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시킵니다. 머리털을 뽑는 행위는 극도의 수치를 안겨 주는 형벌입니다. 요즈음의 시각으로 보면 느헤미야의 행동이 지나치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의 행동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거룩한 백성, 하나님의 복을 계속해서 받는 백성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합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 요야다의 아들 중 한 사람이 대적의 우두머리인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제사장의 결혼에 관한 법률은 명백하게 이를 금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은…자기 백성 중 처녀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 자손으로 백성 중에서 더럽히지 말지니'(레 21:10-15). 그는 이 결혼을 정략적인 측면에서 이용하려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룩하게 분별하여 그 명령대로 순종해야 할 제사장 집안에서 악을 행하며 직분을 더럽히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습니다. 지도자들이 율법대로 살지 않으니 일반 백성들도 그들을 따라 율법을 무시하고 거룩하지 못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엘리야십은 대제사장직의 직권을 남용한 죄와 성전을 더럽히는 신성 모독의 죄를 범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관련자를 즉각 쫓았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섬길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을 새로이 세웠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섬기는 교역자와 성도들에게도 육체적, 도덕적 성결을 요구하십니다. 지도자가 성결해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고 남을 지도할 수 있습니다.



13장에서 느헤미야가 보여준 개혁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1) 말씀을 기초로 합니다.

느헤미야의 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방인들을 분리시키면서 느헤미야는 신명기 23:3~6절의 말씀을 요약하여 전합니다. 백성들은 낭독되는 말씀을 들으면서 자신들의 삶을 그 말씀에 비추어 봅니다. 안식일을 지키게 하면서 유다의 패망과 포로됨이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지 아니한 데서 온 것임을 상기시키며 앞으로도 계속 안 지키게 되면 하나님의 진노가 더 심해질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민족의 정체성을 회복하려고 느헤미야는 이방인과의 결혼 때문에 하나님께 범죄한 예로 솔로몬을 듭니다. 솔로몬이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지혜를 가진 사람이었지만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맞아들이므로 결국은 그들의 영향을 받아 이스라엘에 우상 숭배가 만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왕상 11:3,4, “솔로몬이 나이 늙을 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 11:9, “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저에게 진노하시니라” 하나님이 진노하신 결과 솔로몬이 죽고 나서 나라는 둘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당연한 것을 알고 살아온 가치관이나 생활 방식을 바꾸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좌우에 날 선 검보다 예리한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파고드니 그들이 움직입니다. 말씀에 비추어 자기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깨달으면서 그 말씀대로 즉시 실천합니다. 자신들과 함께 살아 온 이방인들을 모두 내어 보냅니다. 말씀을 통한 삶의 변화는 오늘날도 일어납니다. 사도행전 2장에 의하면 성령 충만한 사람은 성령이 시키는 대로 움직인다고 합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말씀대로 살려는 욕구를 줄 뿐 아니라 말씀대로 사는 능력을 줍니다. 성령의 감동이 있으면 마음에 찔림을 느끼기도 하고 이렇게 살 수 없다는 도전을 받기도 합니다. 마음의 부담을 행동으로 옮길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것을 무시하면 감동으로만 그칠 뿐 아무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 있게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 말씀이 잘 박힌 못과 같이 성도들의 마음 밭에 뿌려지고 풍성한 열매를 거두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교우들이 말씀의 은혜를 사모해야 하고 설교자도 두렵고 떨림으로 말씀을 준비하고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들의 삶의 내용이 되어야 합니다.



2) 기도를 추진력으로 삼습니다.

느헤미야서는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느헤미야가 울며 기도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하는 기도로 마무리를 짓습니다. 그야말로 느헤미야서는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이 납니다. 13장을 보면 개혁을 하나씩 추진할 때마다 느헤미야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도비야가 있던 성전의 방을 정결하게 하고 레위인들의 성전 업무를 회복시킨 다음에 “내 하나님이여 이 일을 인하여 나를 기억하옵소서. 내 하나님의 전과 그 모든 직무를 위하여 나의 행한 선한 일을 도말하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안식일을 안식일답게 지키도록 한 후에 “내 하나님이여 나를 위하여 이 일도 기억하시옵고 주의 크신 은혜대로 나를 아끼시옵소서”(22절)라고 기도합니다.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지하여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고 사역을 마무리 지으면서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31절)하며 기도를 드립니다. 느헤미야가 개혁한 내용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당연히 지켜야 할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제대로 지키지 않았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것이 지금이나 그때나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줍니다. 느헤미야가 이렇게 기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가 한 일은 하나님께서 알아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득권층이나 대적들을 상대로 개혁을 하는 것이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닙니다. 그가 추진하는 일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루기 불가능합니다. 현실을 헤쳐 나가기 너무 힘들기에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엎드렸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자기를 붙들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개혁을 하셨습니다.

느헤미야의 활동으로 잠시 동안 신앙의 부흥이 있었으나 말라기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타락하였습니다. 그들의 한심한 모습을 보시면서 하나님께서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말 1:10) 좋겠다고 하시며 탄식하셨습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말 3:8)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10)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물질을 드리는 것은 드린 물질 자체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물과 함께 깨끗하고 진실된 심령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롬 12:1에서 바울은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합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 하나님은 4 백 년 동안 그들에게 침묵하시고 세례자 요한 때까지 선지자를 보내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하시면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성전에 가셔서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팔거나 제사에 쓰려고 그것들을 사려고 하는 자들이나 다 내어 쫓으셨습니다.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장사 하려고 성전 안에 다니는 무리들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사 56:7)인데 종교지도자들은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 찾아오신다면 무슨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할수록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통한 다이내믹한 신앙생활을 하기보다는 타성에 빠지기 쉽습니다. 신앙의 경주는 한때 잘 달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계속 달려가야 합니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말씀과 기도가 풍성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인 활력이 생깁니다. 신앙생활의 능력은 건물이나 예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표현되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교제를 통해서 나옵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지속적인 교제를 나눌 때 죄 사함을 받게 될 뿐 아니라 점차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되고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개혁하는 사람들입니다.

느헤미야가 없다고 백성들이 그렇게 빨리 영적으로 느슨해질 수 있습니까? 성벽을 재건하고 난 후 말씀을 인하여 생겨난 감격과 열심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회개하며 흘린 눈물,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다짐은 어디로 갔습니까? 성벽 낙성식 때의 그들이 드린 감사와 찬송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들은 포로로 끌려가기 전 조상들의 모습으로 돌아갔습니다.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바 되었느냐?' 느헤미야의 안타까운 절규는 이 시간 이 자리에 앉은 모든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나의 나태함 때문에 하나님의 전이 비거나 황폐하게 되지는 않습니까?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 방황하지는 않습니까? 주위 사람도 다 그렇게 사는데 하며 자신의 신앙생활을 합리화하지는 않습니까?



느헤미야서 전체를 아우르는 key word를 하나 선택하라 한다면 개혁입니다. 개혁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이요, 그 개혁의 열매가 부흥으로 나타납니다. 우리의 삶도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합니다. 변화해야 합니다. 거룩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사 58:12,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이 황폐되고 무너진 곳을 다시 세우는 자들입니다. 개혁하는 자입니다. 삶의 현장(신앙생활, 가정, 자녀, 사업)에서 깨어지고 무너지고 부서진 부분을 회복시키고, 변화시키고, 새바람을 일으키는 사명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영적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야생화처럼 생명력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충만한 가운데 가정을 이끌고, 사역도 하고, 사업도 하고, 공부도 해야 합니다. 주님이 지금 나의 신앙생활을 보고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지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모든 교인들이 영적으로 성숙하고 구별된 삶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시대를 초월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거룩함을 요구합니다. 지속적인 성령 충만함만이 거룩한 성도가 되는 비결입니다. 세상의 것은 비우고, 날마다 하나님의 것으로 충만히 채움을 받을 때 우리의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달라져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됨으로 주님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삶 속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이웃에게는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