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본을 보이는 리더 느헤미야(느 5장)

Author
Myung Myung
Date
2008-10-12 13:19
Views
6232
느 5장  본을 보이는 리더 느헤미야



춘향전 하면 아마 누구나 기억하실 겁니다. 전형적인 탐관오리인 변학도가 자신의 탐욕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던 때에 이몽룡이 어사가 되어 남원을 순찰 중 변사또가 베푼 잔치에 걸인으로 참석합니다. 변사또는 그가 누구인지 모르고 시를 지어보라 하였을 때 이몽룡이 시를 하나 썼습니다. 그 시를 읽으니 내용을 아는 자들은 모두가 겁을 먹고 달아나기 바빴습니다. 어떤 시였기에 그런 반응을 보였을까요?



금준 미주(金樽美酒)는 천인혈(千人血)이요,  옥반 가효(玉盤佳爻)는 만성고(萬姓膏)라.  촉루 낙시(燭淚落時) 민루낙(民淚落)이요,  가성 고처(歌聲高處) 원성고(怨聲高)라.

  금잔에 담긴 좋은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옥쟁반에 놓인 맛있는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촛농이 떨어질 때 백성들의 눈물이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소리 또한 높구나. 



부패했던 그 당시의 상황을 얼마나 잘 표현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춘향전이 쓰인 조선시대보다 2000년 이상 더 오래된 시절 유대 사회의 모습이 본문에 그려집니다. 부익부 빈익빈으로 인한 계층 간의 갈등, 고리 대금, 인신 매매, 과도한 세금 징수, 세금 이외의 뇌물 요구, 권력의 하수인들의 횡포, 부정 축재.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이 들어도 전혀 낯설지 않은 부정의 유형들이 느헤미야 당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 사회에도 있었습니다. 경제 문제로 인한 마음고생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느헤미야가 어떻게 난국을 타개하며 성벽 중건사역을 추진하는지 살펴보며 글로발 금융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오늘의 상황에서 그의 리더십을 우리의 삶의 현장에 적용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의 삶을 살고자 합니다.



백성들이 부르짖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산발랏과 그에 동조하는 무리들을 동원하여 조롱하고 위협을 가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느헤미야의 탁월한 리더십 아래에서 성벽은 순조롭게 지어져 갑니다. 외부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번에는 내부에서 동요를 일으켜 방해하려고 합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지도층이 백성을 섬기겠다는 바른 자세를 갖지 않고 그들이 가진 권력을 남용하면 힘없는 백성들이 고통을 받게 마련입니다. 유대사회에서 경제 정의가 제대로 실천되지 않는 것을 마귀가 이용합니다. 갖지 못한 자들이 가진 자에 대하여 불만을 터뜨립니다. 온 백성이 다 힘을 모아도 성벽을 재건하는 것이 쉽지 않은 판국에 유다 사회 내에서 발생한 빈부간의 갈등으로 인하여 성벽 중건은 또 한 차례 위기를 맞습니다.



성벽 재건 공사가 진행되고 있을 때에 가난한 사람들이 몰려와 느헤미야에게 자기들의 안타까운 사정을 호소합니다. 사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들에게 공사에 참여하는 것이 커다란 희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을 한다고 생계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상은 좋으나 현실이 따라주지 못할 때 고민하게 됩니다. 더구나 그들이 아내와 함께 와서 크게 부르짖었다는 것은 살림살이를 담당하는 주부들의 고통이 아주 심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들이 지적하는 문제점은 당시에 백성들이 겪고 있던 대표적인 사례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형편에 따라 백성들이 세 부류로 나뉩니다. 첫째 부류는 아주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자기 땅이 없으니 경작할 것도 없고 그저 하루하루 노동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흉년이라 일거리도 별로 없습니다. 애들은 왜 그렇게 많이 낳았는지 딸린 식구는 많고 먹을 것은 없으니 양식을 얻는 문제가 절박하다고 합니다. 둘째 부류는 밭과 포도원과 집은 있는데 흉년이 들어 수확한 것이 적으니 부동산을 담보로 해서라도 양식을 얻어야겠다고 합니다. 세 번째 부류는 부과된 세금이 너무 많다보니 밭과 포도원을 저당을 잡히고 빚을 내어 세금을 낼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5절은 그들의 상황을 잘 요약합니다.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우리 자녀도 그들의 자녀와 같거늘 이제 우리 자녀를 종으로 파는도다 우리 딸 중에 벌써 종 된 자가 있고 우리의 밭과 포도원이 이미 남의 것이 되었으나 우리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도다.” 그들의 호소에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가난한 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자기들에게 피해를 준 사람들을 '적'이 아니라 '형제'로 부르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부자들도 우리와 같은 유다 백성이라는 공동체의식이 있었습니다. 부자들을 원수로 여긴다면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그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맞서 싸우려고 하지만 형제로 여길 때에는 공의가 실천되지 않는 부분만 해결되면 됩니다. 특히 가난한 자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우리 자녀도 저희 자녀와 같거늘” 다른 말로 한다면 '우리의 자녀도 저희의 자녀와 같습니다. 저희 자녀가 저희들에게 귀하다면 우리들의 자녀도 우리에게 귀합니다.'  빚 때문에 자녀들을 담보로 돈을 빌렸는데 그 돈을 갚지 못하니 자녀들이 노예로 팔리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딸들이 종으로 팔려 가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잡일을 하기 위하여 팔려갔겠지만 첩으로도 팔려갔을 것입니다. 북한의 탈북자들 중에 상당수는 불법체류라는 이유로 응당히 받아야 할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혹사당하고, 여자들 중에는 농촌에 팔려가 성노리개로 전락한 경우도 많다는 보고를 듣습니다. 백성들 대부분은 포로생활을 경험하였는데 막상 고향 땅에 돌아와 전보다 더 안타까운 종살이를 하며 또 다른 포로생활을 그것도 동족으로부터 강요당하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유다 지도층이 빚쟁이가 되고 가난한 자들이 빚진 자들이 되는 모순이 드러났습니다.

  

느헤미야가 문제를 지적합니다.

서민들이 경제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것은 어제 오늘에 생긴 일이 아닙니다. 느헤미야가 부임하기 전에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성벽 재건 때문에 이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진행하는 과정에 드러났을 뿐입니다. 지도층 인사들이 탐욕을 부렸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흉년이 겹치고 과도한 세금 징수가 따랐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명분이 있을지라도 내부적으로 이런 심각한 문제가 있으면 엉뚱하게 다른 문제와 연결시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문제를 신속히 해결하지 않으면 성벽 재건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겼느니 느헤미야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느니 하는 말이 나올 수도 있었습니다. 사실 느헤미야가 가난한 자들이 와서 하소연하기 전까지 그들의 심각함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에 부임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성벽 재건에 온 힘을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쇠고기 파동이 왜 일어나는가, 왜 물가는 뛰고 외환사정은 좋지 않은가 국민들이 불만을 털어놓는데 과거 정부 탓으로만 돌리며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그런 정부는 무책임하다 하겠습니다. 현 정부가 어떻게든 어려운 시국을 헤쳐 나갈 해결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도 자기 때문에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무엇인가 조치를 취해야 했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의 불만을 들은 느헤미야가 크게 분노합니다. 이제 그에게 성벽 재건의 과제 외에 경제 정의의 실현이라는 또 다른 무거운 과제가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민감한 문제였습니다. 개혁이란 기득권층에서 그동안 누리던 것을 포기하려는 각오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기득권층의 공감대 없이 섣불리 추진하는 개혁은 도리어 기득권층의 반발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 일을 한다는 미명 아래 백성들의 불만을 무시하고 성벽 쌓는 일을 계속 추진하다가는 백성의 강한 저항을 일으킵니다.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에서 사회적인 개혁은 어쩌면 성벽 건축보다 더 풀기 어려운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지도자로서 결단의 순간입니다. 제일 외롭고 고통스러운 순간입니다. 다시 한 번 느헤미야의 리더십을 필요로 하는 순간입니다.



느헤미야가 이 문제를 어떻게 대처합니까?

1단계:  “깊이 생각하고”  

느헤미야는 사회 지도계층이 한 행동을 인하여 크게 분노합니다. 지도층의 탐욕이 의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고 백성이 어려움에 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습니다. 이제 막 총독으로 부임하여 예루살렘에 지지기반이 별로 없는 상태에서 지역의 기득권층을 무시하는 것은 현명한 처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벽재건에 그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깊이 생각하였다는 것은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인도함을 구하면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백성의 상황을 살펴보고 어떠한 대책을 세워야 할지 하나님의 지혜를 구했을 것입니다.

  

2단계: “귀족들과 민장들을 꾸짖어”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원인을 조사해보니 지도층의 고리대금 때문인 것이 밝혀졌습니다. 돈 있는 사람이 돈 없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는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시기와 상황입니다. 느헤미야는 귀족들과 관리들을 불러 꾸짖습니다. ‘꾸짖다’는 말은 단지 야단을 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이 한 일을 논리적으로 지적한다는 것입니다. 약자에 대한 관심이 곧 하나님의 관심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행동인 것을 확신하면서 지도층이 가난한 동족을 형제로 취급하지 않고 돈 버는 대상으로 여겨서 막대한 이익을 취하고 있다고 합니다.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출 22:23) 지도층이 가난한 자들에게 저지른 행동은 율법의 정신을 어긴 것이라는 것이 느헤미야의 지적입니다. 집회를 열고 백성들 앞에서 지도층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정죄하기에 앞서 그들을 개인적으로 먼저 만나 그들의 잘못을 지적한 것은 그들을 배려한 행동입니다.



3단계:  “대회를 열고”

지금 이 갈등에 많은 지도층 인사들이 연관되어 있기에 느헤미야 혼자서는 이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없어서  백성들을 참여하는 대회를 소집했습니다. 여기에서 느헤미야의 결단과 담대함을 보게 됩니다. 귀족과 관리들의 불의를 공개적으로 꾸짖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가진 자를 타도하자고 공산당 식으로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 목적이 그들을 정죄하는 데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문제를 지적하고 다시는 그와 같은 죄를 범치 않도록 권면을 합니다.



권면의 내용을 요약해보면

1) 형제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이방인들에게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도와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게 했는데 지금 당신들은 당신의 형제들을 팔려고 하느냐? 이 지적에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우리 형제 유다 사람” “당신의 형제들” 하면서 가난한 자들이 지도층의 형제임을 강조합니다. 느헤미야와 그의 부하들은 유다로 귀환한 후에 인근 이방인들에게 팔린 동족들을 몸값을 치르고 데려오고 있는데 지도층 인사들은 도리어 동족들을 이방인들에게 종으로 팔고 있으니 이게 될법한 일이냐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지적하는 느헤미야의 말에 지도층 인사들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2)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자들이 형제가 가난해서 돈을 못 갚는다고 그들의 자식을 이방인들에게 종으로 팔아버린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비웃고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비웃지 않겠느냐?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성전을 짓고 성벽을 중수하는 일이 아무런 가치가 없게 되고 또 대적들에게 공격의 명분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신 이유는 그들이 다른 민족보다 더 우수하거나 하나님을 더 잘 섬겨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들을 부르신 목적은 하나님을 잘 섬김으로 일차적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요 궁극적으로는 이방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선택받은 백성으로서의 특권만 누리려고 했지 하나님의 백성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였습니다. 영적인 이스라엘이라 할 수 있는 오늘날의 크리스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우리를 통하여 주님을 모르는 자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행동이나 말하는 것은 우리 개인의 문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성도들의 옳지 못한 행위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 뿐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로 하여금 복음에 대하여 마음의 문을 닫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성도들의 변화된 삶, 성도들의 능력 있는 삶 자체가 간증이 됩니다.



느헤미야가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느헤미야가 귀족들과 관리들을 꾸짖은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백성들에게 돈을 꾸어 주고 이자를 받았다는 것 때문이라기보다 어려운 형편에 있는 형제에게 고리의 이자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담보로 잡혀 있는 부동산들 즉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집을 당장 돌려주고, 돈과 곡식과 새 포도주와 올리브기름을 꾸어 주고서 받은 비싼 이자도 당장 돌려주라고 합니다. 그동안 부자들이 백분지 일, 즉 한 달에 1% 일 년이면  12%의 높은 이자를 받고 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단지 담보물만을 반환하게 하여 백성들이 다시 자신의 일터에서 힘써 일하면서 가족도 부양하고 빌린 돈도 갚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귀족이나 관리들은 이미 빌려 준 돈의 원금을 되찾을 수 있게 되는 동시에 담보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사회의 지탄을 받게 되지 않을 것이며, 백성들은 되찾은 집과 토지로 다시 돈을 벌 수 있게 되므로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합리적인 해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들이 모든 것을 되돌려 주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겠다고 하자 느헤미야는 법적으로 유효하게 하기 위해 제사장들 앞에서 맹세를 하도록 시켰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경고합니다. '이 말대로 행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이 또한 이와 같이 그 집과 산업에서 떨치시리라' (13절). 경제적으로 소외된 계층들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아마 그들은 하늘이 떠나갈 정도로 ‘아멘’을 외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가난과 압제의 이중고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모처럼 기쁨과 평안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지도자들도 자기들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느헤미야의 제안이 먹혀든 이유가 무엇입니까?

말을 그럴듯하게 하지만 자기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사람들이 생각한다면 느헤미야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생각하는 리더입니다. 그는 실제로 본을 보이는 삶을 살았습니다. 느헤미야는 자신과 자기 형제와 종자들도 이자를 받는 일에 관련되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백성에게 꾸어 준 돈에 대한 이자를 받지 않겠다고 합니다. 느헤미야가 자기를 지도계층이 한 일에 포함시킨 것은 귀족과 관리들만이 죄인 취급당함으로 인한 반감을 줄이고 공동체 전체의 유익과 단합을 위함입니다. 그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거부할 수 없는 영적 권위를 느꼈습니다.



이어서 느헤미야는 자기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모인 무리에게 이야기 합니다.

1) 희생의 삶을 살았음을 보여줍니다.

느헤미야가 12년 동안 (주전 444~432) 총독으로 있는 동안 총독으로서 관행적으로 해오던 권리들을 행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① 그는 총독으로서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봉급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18절).  그는 바사 왕국에서 얻은 재산과 유다에 있던 자기 자신의 개인 재산으로 살았습니다. 고통당하는 백성들의 형편을 생각하고 그들의 부담을 가중시킬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② 자기의 종들에게도 일을 시켰습니다. 느헤미야의 종들은 그의 명령에 따라서 '모여서 역사를' 하였습니다(16절). ③ 그는 자신의 부담으로 해서 매일 음식을 차려 사람들을 대접했습니다.  '유다 사람들과 민장들 일백오십 인과 그 외 이방인 중에서' 먹고 살기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한 식탁에서 먹었습니다. 그러면서 함께 먹는 음식의 양을 말한 이유는 그 액수가 만만치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가 희생하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2) 희생의 동기가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 하나님을 경외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이렇게 고생했으니 알아달라는 것도, 칭찬을 해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였기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유보하고 성벽 재건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 동족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총독들과 달리 자기 비용을 들여가면서도 총독이 당연히 받아야 할 것들을 요구하지 않은 것은 백성들의 부담이 너무 큰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예루살렘의 형편을 듣고 울며 금식하며 그 회복을 자기를 사용하여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조상들의 죄를 자기와 자기 아비의 집에 돌려달라고 하며 중보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동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표현이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율법의 정신을 느헤미야는 철저히 이행하고 있습니다.



3) 소망의 동기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느헤미야의 기도는 자기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알아주시면 된다는 자세를 보여줍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하였는데 느헤미야는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 상을 주시는 하나님임을 믿는 믿음을 보여줍니다.



느헤미야의 리더십을 요약해 보면

1.  용기 있는 지도자

기득권층을 상대로 특별 조치를 취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상당수 지도자들이 성벽재건 사업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면 그들의 협조는커녕 도리어 느헤미야에게서 등을 돌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지도계층이 동족을 착취하는 행동을 묵인한다면 가난한 백성들이 점점 더 어려움을 겪게 되고 백성 중에 불만이 커질 것입니다. 지도자로서의 결단이 필요할 때 느헤미야는 과감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는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을 제사 드리는 것보다 더 기쁘게 여기는 하나님'(잠 21:3)을 사랑하는 공의로운 지도자였습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의 죄를 지적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단호한 자세를 취했습니다.  



2. 본을 보이는 지도자

느헤미야는 자신의 직위를 치부의 수단으로 이용하던 이전 총독들과는 달리 바사 제국의 녹을 먹지 않았으며 백성들을 착취하지도 않았고 도리어 성벽 중수 공사를 위해 온 힘을 다했다고 말합니다. 공직 생활에서도 청렴결백했으며, 백성들을 압제하지도 않았고,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늘리려 하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느헤미야의 모습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예수님의 예표라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포기하거나 유보해야 할 것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공동체가 모두 겸손하고 온유하며 서로를 나보다 낫게 여긴다면 그 모임은 주님이 함께 계신 모임이요, 주님이 기뻐하시고 그들의 영혼에 기쁨을 주시고 위로와 평안을 더하십니다.  



3.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도자

느헤미야가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푼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언젠가는 자기도 하나님 앞에서 회계해야 할 때가 있음을 알았기에 통치자로서의 직무를 충실하게 감당했으며, 백성들을 사랑하며, 공의로운 정치를 펼쳤습니다. 느헤미야는 이웃의 아픔을 진정으로 알고 함께 나누기를 원했던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큰 부담을 안으면서도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교회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명목으로 불쌍한 이웃과 무관해서도 안 되며, 불쌍한 이웃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에 소홀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생각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19절).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면 그것으로써 더 바랄 것이 없다는 마음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충성됨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보답해 주실 것을 기도했습니다.  



우리 주변에 물질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지만 지우기 어려운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기도, 구제, 위로를 통하여 그들의 짐을 기억하고 서로 나누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통해서 이 세상의 연약하고 소외된 자들의 아픔과 상처들이 치유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가 위로를 받는 대로 이웃을 돌아볼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전에는 우리도 아픔을 가지고 상처도 받은 자였으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위로를 받고 치유를 받았기에 이제는 다른 형제나 자매들에게 눈을 돌려 그들을 돕는 하나님의 agent들이 되어야 합니다. koinonia 라는 헬라 단어에는 단지 교제의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눔, 구제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교제는 우리의 모든 것을 함께 나누면서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느헤미야는 물론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자기의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들을 섬기는데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와 나와 차원이 틀린 사람이라고 생각지 마세요. 그가 처한 환경과 형편은 우리와 다르지만 우리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들을 섬기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느헤미야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진리를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날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건한 백성이 되고, 주님의 사랑을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복된 성도의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