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위기를 돌파하는 리더 느헤미야(느 4장)

Author
Myung Myung
Date
2008-10-05 13:32
Views
7332
느 4장  위기를 돌파하는 리더 느헤미야



미국이 영국과 독립전쟁을 벌일 때입니다. 영국군은 정식으로 훈련받은 군대요 독립군은 민병대 수준이었습니다. 객관적인 전력으로 볼 때 미 독립군은 영국군에 비하여 절대 열세였습니다. 전면전을 벌여서는 도저히 영국군을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싸울 때마다 독립군은 계속 밀렸고 이대로 가다가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미국의 꿈은 사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던 어느 날 전선을 유심히 관찰하던 독립군지도자가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영국군 모두와 다 싸우려하지 말고 장교들만 골라서 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영국군 장교는 멀리서 보아도 금방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일반사병들과는 전혀 다른 복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효과는 금방 나타났습니다. 독립군과 전쟁을 벌인 영국군 부대들마다 장교들이 집중 사격을 받아 거의 죽든지 큰 부상을 당하였습니다. 영국군은 숫자가 많고 화력이 우세하였지만 지휘계통이 흔들리니 싸움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습니다. 결국 영국군은 패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위기에 빠졌던 독립군이었지만 상황을 잘 분석하고 대처했을 때 역전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위기의 상황에서 한 그룹을 이끄는 리더의 판단이 그룹의 성패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는지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느헤미야도 위기를 경험합니다. 느헤미야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긍심을 불어 넣으며 성벽을 짓자고 하였을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며 공사에 참여하기로 결단합니다. 직업, 신분, 출신지역, 남녀의 구분 없이 모든 사람이 한마음이 되어 일을 시작하니 예루살렘 성벽이 빠른 속도로 건축되어 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이 진행되는 것을 마귀가 그냥 두고 보지 못합니다. 자칫하면 예루살렘 재건 프로젝트가 중단되거나 지체될 위험에 이르게 됩니다. 대적들의 끊임없는 위협과 방해 속에서 느헤미야가 어떻게 리더십을 발휘하여 성벽 재건을 수행하는지 살펴보면서 위기에 대처하는 성경적 원리를 삶에 적용하면서 승리를 맛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대적들이 비웃습니다.

성벽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느헤미야와 그의 백성들은 어려움에 직면합니다. 방해하는 세력이 등장하였기 때문입니다. 방해세력을 언급할 때마다 사마리아 총독인 산발랏의 이름이 제일 먼저 거론되는 것을 보면 그가 주동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산발랏은 암몬 사람 도비야와 함께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케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였습니다.(2:10) 이스라엘이 강해지면 그 지역에서 자기의 영향력이 줄어들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시작하였을 때 “너희의 하는 일이 무엇이냐 왕을 배반코자 하느냐” (2:19) 하며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들이 예루살렘 성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말할 아무런 권리가 없다고 하며 그들의 주장을 일축합니다. 지금까지는 성벽 재건을 방해하려는 대적의 노력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성벽재건을 중단시키라는 왕의 조서까지 있었기에 안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왕궁에서 온 느헤미야의 등장은 그들에게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드러내놓고 느헤미야를 대적할 수 없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유다 땅에 부임할 때 왕의 조서와 함께 왕이 보낸 군대 장관과 마병의 호위를 받았고 그의 임무에 대한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가 주변 총독들에게 알려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담대하게 대처하는 느헤미야를 보면서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성벽 건축이 순조롭게 진행되어가니 산발랏이 크게 분노합니다.(4:1) 심히 분노합니다.(4:7)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유다 백성들의 미약함과 그들이 이루어야 할 사역의 엄청남을 들먹이면서 비웃습니다.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 불탄 돌을 흙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조롱하면서 5개의 질문을 연속적으로 던지는데 그 질문의 내용들이 사실은 하나하나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미약하다고 여기는 유대인들이 지금 거대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하는 것은 ‘성벽을 쌓는다고 니네들이 강해질 것 같애’ 하는 조롱입니다. 제사를 드리려는가? 이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린다고 별 뾰족한 수가 있을 것 같아? 소용없어. 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 지난 백 년 동안에도 못 이룬 일을 이제 와서 한다고 되겠는가? 어림도 없다. 불탄 돌을 흙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유대인들이 다 타버린 잿더미 속에서 돌을 끄집어내어 성벽을 중건하는 데에 다시 사용하는 것을 조롱해서 하는 말입니다. 산발랏의 말을 듣고 있던 도비야가 곁에 있다가 "저들이 건축하는 것은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질 것입니다요!" 하고 맞장구를 칩니다. 능력도 없는 것들이 짓는다고 하는데 그것은 부실공사가 분명해. 금방 무너질 거야. 주변에 있던 무리들이 그 말을 들으면서 함께 웃었을 것입니다. 겉으로는 모두 소리 내어 웃지만 속으로는 무엇인가 불안한 심정을 떨쳐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원수들에게 비웃음을 당하는 느헤미야가 어떻게 대처합니까?  

1) 기도를 드립니다.

대적들은 유다 백성들의 미약한 능력이나 이루어야 할 사역의 방대함은 보았지만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가진 능력이 어떠한지 제대로 알지 못하였기에 함부로 지껄이고 있습니다. 느헤미야와 유대인들을 향한 조롱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대적이 하는 비웃음이나 모욕은 참기 어려운 것이지만 느헤미야는 그들의 계략에 말려들지 않습니다. 더구나 지금 함께 일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얼마 전까지 자기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는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자들입니다. 자칫하면 그들이 동요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어떻게 대처합니까? 그들과 논쟁을 벌이지 않습니다.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원수들이 지금 감히 하나님께 도전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려고 하는 것을 잘 알았기에 그 해결책을 하나님에게서 찾습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4절) 여기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느헤미야가 혼자 기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모아놓고 함께 기도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산발랏은 자기 부하들을 모아놓고 이스라엘을 비웃고 있는데 느헤미야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모습이 대조가 됩니다. 하나님이 누구에게 복을 주시겠습니까?



“그들이 욕하는 것을 자기들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주 앞에서 그들의 악을 덮어 두지 마시며 그들의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그들이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를 노하시게 하였음이니이다” 하며 기도를 드립니다. ‘주 앞에서 그들의 악을 덮어 두지 마시며’, ‘주를 노하시게’  라는 표현을 한 것은 현재 자기가 기도를 드리는 이유가 개인적으로 비방을 당하여 기분 나빠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대적들로부터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복수하려기보다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달려있다고 믿으며 기도합니다. 느헤미야의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된 근거는 멀리 아브라함까지 올라갑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창 12:3)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처음 부르실 때 하신 약속입니다. 느헤미야는 그 약속에 근거하여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공의대로 처리해달라고 기도합니다.



2) 힘써 일합니다.

성도들이 비난과 고난을 당할 때에 낙심하여 하던 일을 중단하고 주저앉는다면 마귀의 의도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성도들이 취해야 할 가장 좋은 방법은 기도하는 것과 더불어 현재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유다 백성들을 격려하면서 성벽 재건을 계속 추진하였습니다. ‘백성이 마음 들여 역사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전심전력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최선을 다하여 일했기에 공사는 큰 진척을 보게 되어 구간 별로 하는 성벽 전체가 연결되고 그 높이도 예정한 높이의 절반 정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대적들이 두려움을 심습니다.

마귀의 사주를 받는 무리들은 그들의 나쁜 목적을 이루려고 할 때 힘을 모으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악의 세력들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눅 23:11-12)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도 힘을 모아 예수님을 대적했습니다. 자신들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공사가 잘 진척되어 간다는 것을 알고 대적들은 더욱 분노합니다. 산발랏에게 동조하는 세력이 언급됩니다. 공교롭게도 그 당시에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은 동서남북 사면으로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유다 북쪽에는 산발랏과 사마리아인들이 있고, 동쪽에는 암몬 사람 도비야가 있고, 남쪽에는 아라비아 사람들이 있고 서쪽에는 블레셋에 속한 아스돗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이 건축되는 것을 계기로 유다가 강성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남한과 북한의 통일을 주변국가인 러시아나 중국이나 일본이 달가워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하겠습니다. 그들은 비웃고 조롱하던 전략을 넘어서서 더 적극적으로 위협하려고 합니다. 느헤미야가 오기 전에 하던 것처럼 예루살렘에 쳐들어가 혼란을 일으키려는 음모를 꾸밉니다.



백성들이 동요합니다.

산발랏이 유대인들 중에 첩자들을 둔 것처럼 느헤미야도 원수들의 진중에 첩자를 두어 그들의 동향을 살핀 것 같습니다. 적극적으로 나오려는 그들의 계략에 대하여 느헤미야가 취하는 대응책은 전과 동일합니다. 리더들과 백성을 모아 함께 하나님께 기도하고 파수꾼을 두어 밤낮으로 경계하는 전략으로 맞섭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원수들의 끈질긴 심리전과 공격의 위협이 먹혀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같은 사물도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달리 해석이 됩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할 때는 무너진 성읍을 보면서 빨리 재건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니 무너진 성읍이 더 크게 보이면서 도저히 자기들의 힘으로 다시 세우는 것이 불가능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다보니 백성들 중에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는 비관론이 퍼집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공사하느라고 너무 지쳤고 제거할 흙무더기가 아직도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원수들이 느닷없이 밀어닥쳐 우리를 죽이고 공사를 중단시킬 계획을 꾸미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마 산발랏의 조종을 받는 세력이 배후에서 그런 소문을 퍼뜨렸을 것입니다. 산발랏의 군대가 곧 쳐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원수들 근처에 사는 유대인들은 공사현장에 있는 자기 가족들, 즉 아들이나 남편이나 아버지에게 빨리 일을 멈추고 돌아오라고 열 번씩이나 재촉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들이 제시한 이유가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사실 열악한 상황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적은 인원을 가지고 성벽을 따라 돌이 섞인 흙무더기를 쉴 새 없이 날라야 했습니다. 더구나 예루살렘 성은 언덕에 위치하였기에 험난한 지형에서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느헤미야의 도전을 듣고 의욕적으로 일을 시작하기는 하였으나 공사가 힘이 들고 일이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으니 낙심하기 시작합니다. 게다가 대적들이 언제 공격해올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대적들은 느헤미야가 오기 전에도 여러 번 쳐들어와서 어지럽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열심히 일을 할 때는 몰랐는데 공연히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 보니 마음이 철렁 내려앉고 더욱 불안해집니다.  



위기를 극복하는 전략을 세웁니다.

느헤미야가 얼마나 기도하고 열심히 준비하면서 시작한 사업입니까? 그렇지만 백성들이 크게 동요하는 것을 방치한다면 자칫 공사가 중단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지도자로서 분위기를 반전시킬 조치를 취해야 할 때입니다. 느헤미야는 두 가지 방법으로 대처합니다. 첫째는 대적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하여 먼저 든든한 방어태세를 갖춥니다. 성벽 뒤의 낮고 넓은 곳에 백성을 가족별로 칼과 창과 활을 가지고 서 있게 합니다. 일반적으로 적의 시야에 노출되는 낮고 넓은 곳에 군대를 배치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중무장한 군대가 배치되었다는 것을 일부러 보여줌으로써 이쪽의 경계태세를 보여주고 상대방의 기세를 꺾으려고 합니다. 둘째로, 백성과 지도자들을 격려합니다. 대적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극히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유대 백성들을 위하여 싸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은 백성들에게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울 것을 명함으로 사기를 돋웁니다. 가족을 위해서는 목숨을 돌보지 않고 싸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긴장을 풀지 않고 경계를 강화합니다.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는 힘과 실력을 갖고 있으면 적들이 만만히 보지 못합니다. 느헤미야는 유대 백성들이 철통같은 경계를 서는 것을 보면서 원수들은 자기들의 작전이 노출된 것을 알고 공격계획을 취소합니다. 유다 백성들은 활 한번 쏘지 않고 한 사람의 피도 흘리지 않고 전쟁을 막습니다. 느헤미야의 전략이 먹혀들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자기의 전략이 좋아서 적이 계획을 포기했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꾀를 폐하셨”기 때문이라고 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유다 백성들을 원수의 손에서 지키는 이도 하나님이시요 성벽 재건을 완성하실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위협적인 분위기가 수그러들자 백성들은 다시 성벽 재건을 시작합니다.

  

느헤미야는 적의 침공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을 알면서도 경계태세를 조금도 늦추지 않았습니다. 각자 자기 일터로 돌아가서 다시 성벽을 쌓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한 그룹이 공사를 하면 다른 그룹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지고 파수를 보게 하였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의 관리들도 느헤미야를 도와 성벽을 쌓는 백성들을 뒤에서 지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와 짐을 나르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무기를 잡게 하였으며 각자 칼을 허리에 차고 일하게 하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습니다. 느헤미야 자신은 나팔을 부는 자는 항상 자기 곁에 두면서 적의 기습이 있을 경우 나팔을 불어 백성들을 한 군데로 집결시켜 싸울 준비를 갖춥니다. “공사가 너무 광범위하여 우리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지 나팔 소리를 들으면 우리 있는 곳으로 달려오십시오.” 철저하게 싸울 준비를 하면서도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강한 믿음을 보입니다. 이렇게 해서 백성들은 매일 동이 틀 때부터 별이 나올 때까지 절반은 계속 일을 하며 절반은 창을 들고 경계를 했습니다. 그때 느헤미야는 성 밖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예루살렘성 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자기들을 위해 밤에는 경비하고 낮에는 일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와 그의 형제들, 종들, 그리고 느헤미야와 함께 있는 경비병들은 밤에도 옷을 벗지 않고 항상 무기를 휴대하였습니다.



* 느헤미야의 뛰어난 영적 리더십을 통하여 위기를 헤쳐 나가는 비결을 얻습니다.

1) 기도의 능력을 믿습니다.

원수들이 비웃고 위협하고 백성들은 두려워 떨었지만 느헤미야는 기도로 극복하였습니다. 백성들과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기도하였습니다. 백성이 적의 위협 때문에 두려움에 떨 때에도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원수들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이시며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싸우실 것이라 하며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격려하였습니다.



2) 철저한 대책을 세웁니다.

믿음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현실적인 대책을 세우는 것을 세속적인 타협으로 간주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의 리더십은 그가 대적들의 위협에 대하여 얼마나 철저하게 방어하고 대책을 세웠는가에 잘 나타납니다. 그의 지혜와 지략은 싸워보기도 전에 적들이 좌절할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싸우리라고 백성들을 격려하고 일을 하면서 상황이 호전되지만 긴장을 늦추지 않고 계속 경계태세를 강화하는 느헤미야를 통하여 영력과 실력을 조화있게 갖춘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3) 행동과 삶으로 본을 보입니다.  

원수들의 조롱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의 지혜로운 대처로 인하여 혼란은 잠잠해지고 다시 성벽 재건 역사가 진행되었습니다. 백성들이 다시 한 마음이 되어 일을 재개한 것은 느헤미야의 설득력 있는 말 때문이 아니라 백성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는 신실한 삶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를 하는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을 지고 희생적으로 함께 하며 짐을 나누었습니다. 느헤미야 자신도 성 안에서 백성들과 함께 잤을 뿐 아니라 그들처럼 옷을 벗지 않고 지냈습니다. 공동체의 구성원은 모범을 보이는 리더를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 사랑과 순종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우리 각자는 삶의 현장에서 말로만 아니라 행동과 삶으로 믿음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눈을 감으면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 같은 믿음이 생기는데 눈을 뜨면 답답한 현실을 인하여 고민하고 있지 않으십니까? 하는 일이 힘들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낙담이 되고 그냥 주저앉고 싶지는 않습니까? 누가 나를 비웃는 것 같아 우울하지는 않습니까? 비웃음, 두려움, 위기. 지금부터 2500년 전에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이 처한 상황을 나타내는 단어들입니다. 인생여정에 문제가 없을 수 없습니다. 두려움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마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 1:7) 바울이 권면합니다.



우리가 육적인 눈을 가졌느냐 영적인 눈을 가졌느냐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이 다르고 대처하는 행동이 다릅니다.  육신의 눈은 문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그것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상황의 변화가 아니라 영적인 안목을 주심으로 두려워 떠는 성도들을 평안케 하십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문제나 우리를 둘러싼 상황을 인하여 낙심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모든 문제의 해결자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위기의 상황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백성들과 함께 기도해야 했습니다. 한손에 연장을 들고 다른 손에 칼을 들고 삶의 현장에 함께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싸우시리라고 하며 백성을 격려할 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고난에 동참하였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영적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 6:11)고 권면합니다. 믿음과 말씀과 기도입니다.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갖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이 우리를 인도하게 해야 합니다. 특히 바울은 특히 기도와 관련하여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고 합니다. 주님의 시각으로 모든 상황을 보아야 합니다. 힘들지만 각자에게 주신 사명 끝까지 그리고 담대하게 감당하면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며 거둔 열매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