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제자도: 섬김

Author
Myung Myung
Date
2021-10-10 14:16
Vi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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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일은 우연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일을 계획하시고 또한 이루십니다. 그리고 택한 사람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시편 138:8절을 보면 다윗의 기도가 나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주옵소서’(NIV). 그 목적은 다윗 개인의 야망이나 소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이었습니다. 다윗은 주께서 자기의 목적을 이루어 주시기를 구하지 않고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나의 목적’과 ‘나를 향하신 목적’에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나의 목적’은 내가 원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를 향한 목적이 다 이루어지기까지 자기를 붙들어 주시기를 소원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부르심을 받은 사명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부족함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끈질긴 사랑으로 붙드시며 우리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그동안 살펴본 제자도를 요약해 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계속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을 가져야 하고 그 믿음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이기주의, 파벌주의를 경계하고 관용해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데 걸림돌이 있으면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은 본문에서도 계속됩니다. 예수님은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자신의 수난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때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길과 제자도에 대한 오해와 무지를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참된 제자도가 무엇인지를 계속해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 번째 수난 예고가 주어집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더 노골적으로 탐욕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제자들에게 참된 제자도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큰 자는 섬기는 자여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본받아야 할 궁극적인 섬김의 본보기를 제시하십니다. 본문의 핵심 단어는 섬김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본받고 따라야 하는 사명자로서 어떻게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할까요? 제자도를 잘 알고 각자의 삶에 적용하면서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섬김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수난에 대한 세 번째 예고(32-34절)


예루살렘은 예수님이 가셔야 할 최종 목적지였고, 거기에는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 서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앞에 서서”가 현재분사형으로 되어 있으니 계속해서 앞서 가신다는 뜻입니다. 고난과 죽음의 길을 마지못해 가시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가십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에도 제자들보다 앞서 갈릴리로 가시겠다고 하셨습니다(14:28, 16:7). 그런데 예루살렘에 가까이 갈수록 제자들은 놀라고 따르는 무리는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당당하게 앞서가시는 모습에서 신적 위엄 때문에 놀라지 않았을까요? 또 뒤따르는 자들은 제자 그룹과는 구분되는 좀 더 넓은 범위의 예수님 추종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이 느낀 두려움의 감정 역시 메시아 되심 때문에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예루살렘의 권세자들과 어떤 식으로든 충돌하시지 않을까 두려워했을 수도 있고, 혹시나 자신들에게 불똥이 튀기지 않을까 두려워했을 수도 있습니다. 앞장 서서 가시는 예수님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데, 두려워한다는 것은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 당할 수난과 부활에 대해서는 12명의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십니다. ‘자기가 당할 일’을 직역하면 ‘그에게 곧 닥칠 일’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이 임박했음을 긴장감 있게 전달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 번째 수난 예고를 하십니다. 그런데 이전과는 다른 언급이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수난 당하시는 장소로 예루살렘이 명시됩니다. 그리고 수난 당하시는 과정을 이전보다 상세하게 묘사하십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질 것이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할 것입니다. ‘넘겨지다’는 동사는 ‘허락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인자가 넘겨지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허락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이방인에게 넘겨준다는 것은 로마총독인 빌라도에게 넘겨 재판을 받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방인들은 두 번째 수난 예고에서 ‘사람들의 손’(9:31)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입니다. 채찍질은 십자가 형벌을 당하기 전에 받는 매질입니다. 마가는 네 개의 동사를 연속적으로 사용해서, 고난의 강도가 점차 커지는 것을 강조합니다. 구약에 나타난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에 대한 예언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시 22:6~7; 사 50:6). 시편 2편에 언급된 대로 메시아를 박해하고 죽이는 일에 유대인과 이방인의 주권자들 모두가 참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세상의 영광을 구하는 제자들(35-40절)


9:30에서 예수님이 수난을 예고하신 후 제자들이 “누가 크냐”를 두고 다투었습니다. 이번에도 예수님의 수난이 예고된 후 또 한 번 제자들이 다투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고난을 향해 가고 있는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난이 주는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자리다툼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가장 가까이서 예수님을 섬기는 모습이 자주 나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 갈 때도, 변화산에 갈 때도, 감람산에서 예수님께 질문할 때도(13:3), 겟세마네 동산에서도(14:33)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야고보와 요한만이 은밀히 예수님께 다가갑니다. 한편 마태복음에서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요구한 것으로 나옵니다(20:20-21).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들이 구하는 것을 들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무엇을 구하는지 예수님이 물으시자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대답합니다. “주의 영광중에서”는 직역하면 ‘당신의 영광과 함께’가 됩니다. ‘영광’이라는 말을 언급하기는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이 땅에서 누리기 원하는 세속적인 영광입니다. 구약에서 왕좌의 오른편은 왕 다음으로 가장 높은 자리였습니다.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해 달라는 것은 명예롭고 영광스런 자리에 앉게 해 달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것을 보고 영광의 날이 다가왔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왕으로서의 메시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첫 번째 수난을 예언하셨을 때(8:31) 베드로가 예수님을 꾸짖으며 강력하게 반발했던 것도 그가 생각한 메시아는 강력한 힘을 가진 정치적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베드로나 야고보와 요한은 권세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은 고난의 길인데, 그들은 정반대로 명예와 영광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구약에서 ‘잔’은 구원과 기쁨을 의지할 때가 있지만(시 16:5)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을 의미할 때가 많습니다(시 75:8).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14:36) 기도하실 때의 ‘이 잔’역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의 잔을 뜻합니다. ‘세례’역시 예수님의 고난을 의미합니다. 세례는 세례자 요한을 떠올리는 표현이기에 그의 비참한 죽음과 이어질 예수님의 죽음과 연관시킬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롬 6:4)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잔과 세례는 예수님이 당하실 고난과 죽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은 잔과 세례를 영광으로 오해하고 자신들도 ‘할 수 있다’라고 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도 자신의 잔을 마시고 세례를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야고보는 사도행전 12:2에 의하면 헤롯 아그립바 왕 1세에게 붙잡혀 제자들 가운데 가장 먼저 순교했습니다. 요한은 100세가 거의 되어 밧모섬에 유배를 갔다가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아 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좌우편에 앉는 것은 제자들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자신이 주시는 것도 아니라고 하시면서 누구를 위해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준비되다’는 신적 수동태 동사로 ‘하나님이 그 자리에 앉을 사람을 정해 놓으셨다’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또한 누가 세속적 영광의 자리에 오를 것인지 다툴 것이 아니라, 욕심을 버리고 오직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섬김을 원하시는 예수님(41-45절)


세베대의 아들들이 예수님께 청탁한 것을 알게 된 다른 제자들은 그들이 예수님의 좌우편을 다 차지하지 않을까 우려해 분노합니다. 그들도 먼저 말만 안했을 뿐 마음속으로는 동일한 것을 원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들 역시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잘못된 동기로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공감하기는커녕 어리석은 욕망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드러내는 제자들의 모습이 한심하기만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참된 제자도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이방인의 집권자들’은 ‘이방 사람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을 가리키고 ‘임의로 주관하다’는 권력을 남용하는 악한 지배를 뜻합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크고자 하는 사람은 섬겨야 합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즉 한 사람의 종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친히 그 말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하는 말씀은 세상 사람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제자들은 달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기적인 욕망을 위하여 타인 위에 군림하는 세속적 삶의 원리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통용될 수 없음을 분명히 선언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섬기는 자’를 의미하는 헬라어 ‘디아코노스’에서 영어 deacon(집사)이 나왔습니다. 이를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 minister(목사)입니다. 즉 기독교의 직분은 군림과 지배가 아닌 ‘섬김’을 목적으로 합니다. 예수님도 섬기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적으로 받은 사명이 바로 섬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일도 잘하고 헌금을 내는 일은 잘해도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은 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일에는 성자같이 보이는데 주중에는 전혀 예수 믿지 않는 사람같이 행동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신실한 일꾼 같이 보이는데 직장이나 가정에서는 폭군으로 행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물론 우선이지만 사람을 잘 섬겨야 하나님 앞에서 큰 자가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에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종이라는 것은 노예와 몸종을 의미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말씀이 제자들에게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특정한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나보다 힘이 있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은 잘 섬기지만 반대로 나보다 힘이 없고 보잘것없는 사람은 함부로 대하거나 무시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섬김은 같은 동료,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 나보다 더 연약하고 더 힘이 없는 자들을 잘 섬기는 것입니다. 자기보다 높은 사람을 섬길 때는 무엇인가 대가가 주어질 수도 있으나, 연약한 자들을 섬기면 대가는커녕 도리어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당시 종에게는 어떤 대가도 주지 않았고 종도 대가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종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어떤 대가를 기대하면 그때부터 진정한 섬김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저 주님만 알아주시면 된다는 생각만 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을 품고 섬길 때 진정한 섬김이 되고 주님이 인정하시는 큰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개역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으나 45절은 이유를 밝히는 접속사 ‘가르’로 시작하여 예수님의 섬김이 제자들의 섬김의 근거가 됨을 보여줍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대속물’은 노예나 전쟁 포로를 자유의 몸이 되게 하기 위해 치르는  대가, 즉 속전을 가리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속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대속물이라고 언급하심으로써 당신의 죽음이 대속적 죽음임을 처음으로 나타내십니다. 마지막 만찬 때 잔을 드시면서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14:24)라고 언급하신 것 역시 대속적 죽음을 의미합니다. 한편 여기서 많은 사람은 ‘모든 사람’을 뜻하는 셈어적 표현입니다. 예수님을 인해 우리는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자유케 되었습니다.  


 


* 우리의 자세


예수님은 이 세상에 섬기려고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어떻게 섬겨야 합니까? 


- 섬김의 동기가 순수해야 합니다


내가 갖고 싶은데 혹은 하고 싶은데 주변 눈치만 보며 망설이다가 다른 사람이 선수를 치게 되면 공연히 화를 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야고보와 요한만 세상의 영광을 갖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분노한 것을 보면 그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 분노는 하나님 나라를 잘 이해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아니라 자칫하면 그들과의 경쟁에서 밀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주의 길을 막고(8:33), 자리다툼을 하고(9:34), 주님께 나아오는 자들마저 가로막았던 (10:13) 한심한 모습이 여전히 나타납니다. 섬기는 동기가 무엇입니까? 섬기면서도 무엇인가 세상적인 대가를 바란다면 그 동기가 문제가 있습니다. 현재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권리와 영광을 포기하시고 이 세상에 종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까지 자신을 철저히 낮추신 이유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빌 2:5)고 한 것은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겸손과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순종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면 제대로 섬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본받을 때 섬김의 동기가 순수해지고 우리의 삶이 겸손해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풍성하게 거둡니다.  


- 섬김에는 고난이 따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어쩌다 보니 당한 것이 아닙니다. 대적자들이 강해서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수난을 당하고 죽을 것을 아셨지만,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당당하게 나아가셨습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려는 예수님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제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고난은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그 길을 가기를 주저합니다. 믿음의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자기 부인이 없이는 십자가도 영광도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희생이 없는 섬김은 참된 섬김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고자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 섬김에는 보상이 따릅니다


주님이 가신 길은 우리를 위한 길일 뿐 아니라 우리도 가야 할 길입니다. 주님을 따라 섬길 지라도 고난은 있지만 그럼에도 소망이 있는 것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우리가 감당할 만한 고난을 허락하시고 또 피할 길을 내셔서 능히 이기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 2:18) 이 길을 먼저 가신 주님이 도우시겠다고 하시니 우리도 주님만 의지하여 소망을 가지고 끝까지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온전히 섬긴 예수님에게 어떤 보상이 있었습니까? 빌립보서 2:9-11에 의하면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습니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보상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현재의 고난에 주저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장차 올 영광을 바라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나가면서


예수님은 마지못해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도리어 그 길을 앞장서서 올라가셨습니다. 그 길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셔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는 제자들에게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섬기는 것이 높아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종의 자세로 섬길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큰 자가 되고 하나님의 칭찬과 보상을 받게 됩니다. 그러려면 세상의 가치관과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얼마나 오래 사는 지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애를 얼마나 아름답게 마무리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각자가 걸어가는 삶의 길은 다르지만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할 때 후회 없이 살다가 영광스럽게 생을 마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산하시는 하나님 앞에 점도 없이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설 수 있습니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입니다. 신앙적으로도 열매를 거두어야 합니다. 어떻게 섬기면서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거두시겠습니까? 주변을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교우들 중에 육신이 연약한 자들이 있습니다. 격려가 필요한 자들이 있습니다. 믿다 낙심한 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팬데믹을 이유로 주춤해지거나 게을러진 우리의 신앙생활이 열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모든 성도들이 주님이 원하시는 사명을 감당하는 과정에 우리의 이웃, 가까이는 가정과 교회에서 그리고 세상을 향해 주님을 대하듯 우리의 이웃을 대하여 사랑과 겸손을 실천하며 아름다운 섬김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생명보다 사명을 귀하게 여기며 역동적으로 주님을 섬기는 제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