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제자도: 섬김

Author
Myung Myung
Date
2021-09-05 17:56
Views
318

‘배워서 남 주나’어렸을 때 많이 듣던 말입니다. 공부 열심히 하면 너에게 유익이 될 것이라는 독려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에 기독교 정신을 반영시키면 ‘배워서 남 주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뿐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시랑으로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세상적으로 볼 때 모순처럼 보이는 역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로 오염된 세상의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모순처럼 들리는 말들이 결국은 진리임이 드러나는 날이 올 것입니다.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마 10:34-38). ‘주님을 위해 목숨을 잃는 자는 얻을 것이다’(마 10:39).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다’(고후 6:10). ‘약할 그 때에 곧 강하다’(고후 12:10) 등등입니다. 본문에도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라’는 역설이 나옵니다. 역설 속에 담겨진 성경적인 원리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십자가를 지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생애는 십자가를 지기 위한 준비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때가 되어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생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더불어 지난 3년을 지내온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섬기려 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게 모르게 세상의 가치관에 젖어 살다보니 예수님이 보여주신 섬김의 정신을 제대로 실천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언제나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질문들이 있습니다. 제자입니까? 정말로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고 있습니까? 혹시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그 길을 막든지 다른 길로 가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로마 황제의 신상이 보이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당신은 그리스도”라는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처음으로 자신이 받으실 수난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하신다는 것입니다(8:31). 이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책망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베드로를 책망하시면서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당장 자기를 부인하고, 당장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세 제자를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 장차 임할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시간에 산 아래 있던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는데 실패함으로 무리 앞에서 무능함을 드러냈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보았듯이 예수님은 참 제자가 되려면 믿음과 기도가 있어야 함을 가르치셨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추가로 갖추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수난 예고(30-32절)


예수님 일행이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곳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아마 변화산 기슭에 있는 어느 곳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갈릴리 가운데로 지나갑니다. 직역하면 ‘갈릴리를 통과해서 지나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사역의 주 무대였던 갈릴리는 예수님과 그분의 사역에 대해 열광적으로 반응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곳을 지나가시면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그 이유는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집중하시기 위함입니다. 8-10장은 예수님이 제자도에 대해 집중적으로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계속해서 깨닫지 못하는 모습을 대조해서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받으실 수난에 대해 두 번째로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3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입니다. 1차 예고에서는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들이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로 분명히 언급되어 있는 반면, 이번에는 포괄적으로 ‘사람들의 손’이라고 언급하십니다. 1차 예고에서는 예수님의 고난과 버림받음이 강조되나, 이번에는 예수님의 죽음이 강조됩니다. 특히, 이번에는 ‘넘겨져’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에 의해 적대적 세력인 사탄과 그 하수인들에게 넘겨지시게 될 것을 암시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 나라의 복과 영광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가르치고자 애쓰신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 복음을 바르게 알아서 그것을 전하고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깨닫지 못하고’와‘두려워하다’는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반복적으로 수난을 예고하셨으나 제자들이 계속해서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깨닫지 못하고”는‘주의를 기울이지 않다, 무시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인데, 제자들은 그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아예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과 동고동락하며 능력을 행사하시던 분이 사람들에게 잡힌다는 것, 심지어 죽임까지 당한다는 것은 믿을 수 없고, 또한 죽은 지 3일 후에 다시 살아난다는 가르침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묻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자신들도 고난을 받을까 봐 또는 자기들의 무지와 실수가 드러날까 봐 또는 섣불리 말하다가 베드로처럼 책망을 받을까 두려워합니다.   


  


쟁론을 벌이는 제자들(32-34절)


가버나움에 도착하여 어느 집에 머무실 때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제자들의 마음까지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의 기습적 질문입니다. 그들이 무엇에 대해 토론했는지 다 아시면서 무언가를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토론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서로 논쟁하는 것을 뜻합니다. 말싸움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제자들은 잠잠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기 때문입니다. 쟁론을 벌이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길에서”라는 용어 선택은 의미심장합니다. ‘길’은 세례자 요한이 등장할 때 구약의 성취 구절로 처음 인용됩니다.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1:2) 제자들 역시 스승이 가는 ‘그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수난의 길인데 제자들은 ‘그 길’을 영광과 지위를 차지하는 길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기는 했으나 어떤 메시아인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보니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를 놓고 적지 않은 신경전을 펴면서 논쟁을 벌였습니다. 사복음서에 제자들의 자리다툼이 나오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9장에는 변화산 사건과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3명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가고 아홉 명은 산 아래 동네에 머물렀습니다. 선택받은 제자들이 기분이 좋았겠지만 선택받지 못한 자들은 세 명을 부러워하며 시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다 길을 가면서 누군가가 시비를 걸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 명의 제자들에게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분명히 경계하셨습니다. 그러나 논쟁이 가열되면서 변화산 이야기도 나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셔서 산에 데리고 가셨어. 우리가 거기서 누구를 보았는지 알아. 모세와 엘리야를 보았다구. 더구나 너희들은 귀신도 제대로 쫓지도 못해 망신을 당하고. 그러자 다른 제자들은 이에 질세라 대꾸했을 것입니다. 너 베드로 예수님이 너에게 무엇이라고 책망하셨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꼴좋다. 그래 가지고 네가 우리보다 크다고. 말도 안 돼. 누가 크냐 논쟁을 벌일 때 제자들이 입에 미소를 머금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했겠습니까? 가시가 돋친 말을 했을 것입니다. 지난 3년 동안 자기들이 관찰한 상대방의 문제점이나 허물을 끄집어내며 흠집 내기에 열을 올렸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면서도 이런 논쟁을 벌였는데 만약 예수님이 안계셨다면 그들은 아마 멱살을 잡고 싸웠을지도 모릅니다. 논쟁을 하고 난후 제자들은 서로 씩씩 대면서 자기에게 말로 상처를 준 다른 제자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걸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묵묵히 길을 가셨습니다. 대기권 밖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면 그저 땅과 바다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단층집이나 고층빌딩이나 구별이 없습니다. 제자들이 잘 나면 얼마나 잘났습니까? 지금 제자들은 하나님이신 예수님 앞에서 도토리 키재는 짓을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계획과 장차 자신들이 어떤 길을 가야할 것인지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영적 무지를 잘 보여 줍니다.    


  


섬김에 관해 가르치신 예수님(35-37절)


예수님은 자리에 앉아서 열두 제자를 불러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의 앉으신 자세는 권위 있는 교사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또 예수님이 제자들을 ‘불러’말씀하셨다는 표현은 무엇인가 중요한 교훈을 하실 때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도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제자들이 쟁론한 것은 누가 더 크냐였지만, 예수님은 이것을 누가 첫째인가의 문제로 말씀하십니다. 결국 제자들의 관심이 권력 서열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첫째가 되고자 하는 욕구 자체를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권력을 갖기 원하고 높은 자리나 지도자의 자리에 앉기를 원하는 욕구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권력을 얻는 방법이고 권력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뭇 사람의 끝’이 되어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삶을 통해 친히 보여 주신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귀신 들린 자들, 병든 자들, 죄인으로 낙인 찍혀 사회적으로 밀려나고 쫓겨난 사람들, 즉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을 찾아 가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모든 자의 첫째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세우셔야 되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뜻을 따라 그분의 뜻을 이뤄드리는 자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권세입니다(벧전 5:6). ‘뭇사람의 끝’이 되라는 말씀은 권력의 본질을 가르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제자도의 정신은 첫째가 되는 것에 목표를 두는 것이 아니라 섬김에 둡니다. 그렇다고 낮은 자들만을 섬기라는 것이 ‘모든 이’를 섬기는 것입니다. 전체 공동체를 유익하게 하는 섬김이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가장 잘 나타난 것이 십자가입니다. 세상의 가장 치욕스러운 형벌 도구가 온 인류를 구원하는 통로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가르침을 더욱 명확하게 전달하시기 위해 시청각 교육을 하십니다.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가다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그 아이를 안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영접하다”는 단어에는 ‘역경을 극복하고 참다, 인내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연약한 누군가를 섬기려면 인내하며 참고 받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시될 수 있는 작은 아이, 그들 가운데 가장 작은 자, ‘모든 이의 끝’에 있는 그런 작은 아이를 영접하고 섬기는 것이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며,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어린아이와 같이 낮고 천한 자를 영접하는 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요, 이 세상이 지배와 군림하는 것을 높게 보는데 반해, 하나님 나라는 섬김을 가치 있게 보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이 왕이신 나라는 서로 큰 자가 되려고 다투는 곳이 아니라, 약한 자가 주님과 같이 영접 받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이 가르치신 섬김의 정신을 제대로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power game을 멀리해야 합니다


누가 크냐 하는 논쟁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만 있던 독특한 현상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크고 작은 power game이 있게 마련입니다. 교회에서도 내가 다른 사람보다 낫고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논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을 주님으로 섬기면 믿는 자들은 다 주님의 종일 텐데 종들끼리 자리다툼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자기 주제를 모르는 행동입니까? 예수님의 표현을 빈다면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개는 일을 제대로 안 하는 사람들이 감 놓아라 팥 놓아라 자기 목소리를 높이거나 선동합니다. 일을 성실하게 맡아 수행하는 사람들은 잠잠합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하기에도 바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자기를 드러내는 곳이 아니라 주님을 드러내는 곳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누가 크냐 싸울지라도 주님의 제자들은 그러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 길을 가고 계시는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이용해 자신이 높이려고 했습니다. 이렇듯 십자가에 대한 무지와 오해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부와 영광과 권세를 추구하게 만듭니다. 우리도 제자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봐야 합니다.  


 


- 주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의 일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며, 직장 일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일 자체가 그 일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과 신앙이 그 일의 의미를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그 일을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섬긴다면 그가 어떤 일을 하고 있든지 그는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있는 사람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가 아무리 거룩하고 거창한 일을 하고 있어도 그는 자신의 일을 도모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 안에 있지 있다면 우리를 낮추고 희생할 수 없습니다.  섬김의 자리도 섬김의 능력도 섬김의 마음도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섬김의 기회를 가졌다면, 그 은혜에 감사하며 마음을 다해 섬겨야 합니다.


 


눈을 들어 우리의 주변을 보십시다. 대학부는 선교에 불이 붙었습니다. 10월에도 멕시코 단기 선교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필요합니다. 멕시코인들을 섬길 뿐 아니라 참가한 학생들이 은혜를 체험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굳이 멀리 가지 않더라도 우리를 필요로 하는 곳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더라면 분명히 영혼들을 섬기셨을 그 자리가 많이 비어 있지는 않습니까? 각자가 가지고 있는 자원을 사용하여 주님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섬기며 살아도,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설 때는 우리의 섬김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젊음, 우리의 건강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진 재능과 물질로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 역시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지금 절감하는 senior 교우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섬길 수 있을 때 섬기지 않으면, 후에 섬기고 싶어도 섬길 수 없음을 인해 아쉬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후회해도 늦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아 부지런히 섬겨야 합니다. 자신을 게으름에 방치하지 말고, 자기의 욕심을 만족시키는 하찮은 일에 세월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그 일이 크든 작든 이름이 드러나든 드러나지 않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긴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세상은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사람들은 우리를 주목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 주님의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팬데믹 기간에 ‘확 찐자’가 많아졌다고 합니다. 왜 비만이 생깁니까? 나가는 것보다 들어오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영적 비만이 생기는 이유는 받은 은혜가 많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느끼는 구체적인 섬김의 현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은혜 받는 자리인 자신의 교회에서조차 섬기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세상에 나가서 얼마나 주님을 드러나며 살겠습니까? 십자가의 감격이 아득한 추억이 되어 버렸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본받아 사는 삶에서 멀어졌다는 증거입니다. 대부분의 교우들은 주일 예배 시간에 나와 편안히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그런 예배를 드리기까지 묵묵히 섬기는 지체들의 수고가 있습니다. 교회를 위해, 예배를 위해 주중에 또는 1부와 2부 예배드리기 전에 중보 기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남보다 일찍 나와 찬양을 연습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배 시에 사용할 파워포인트를 준비하고 미디어 시스템을 관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매주 방역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팬데믹 중에도 수고한 교우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환우들을 찾아가 음식을 대접하고 도움을 제공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주린 자를 먹이시고, 외로운 자를 위로하시고, 무지한 자를 일깨우시고, 소외된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자신은 머리 둘 곳이 없는 삶을 사셨지만,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달려 가셨습니다. 십자가 사랑의 핵심은 자기를 돌보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주기까지 한없이 베푸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만났다면 예수님을 본받아 자기를 돌아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돌아보고 싶어 합니다. 연약한 지체들을 정성껏 돌봐 주고 싶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온전케 되도록 몸과 마음을 바쳐 섬기고 싶어 합니다. 물론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마음을 다해 주님을 섬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섬기지 않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지금 이 자리에 계셨더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나도 주님처럼 하고 싶다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주변에 고통 받고 아파하는 사람들을 품고 섬기며 살아갈 때 하나님의 복이 임합니다.


 


나가면서


교회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가만히 와서 편안한 환경에서 예배만 드리고 바람 같이 사라지고 싶어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집니다. 그런데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성실하게 섬기는 사람은 그렇게 늘지 않습니다. 더구나 팬데믹을 맞이하면서 신앙의 열정이 전보다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타성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많은 경우 교회의 문제는 교회에 갓 들어온 새신자들이 아니라, 그동안 교회를 위해 많은 일을 했지만 십자가의 감격을 잃어버리고 이제는 제대로 섬기지 않는 오래된 신자들에게 나타납니다. 성도들을 섬기고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 모본이 되도록 부름을 받은 중직자들이 십자가의 은혜에 사로잡혀 있지 않을 때 교회는 생명력을 잃어갑니다. 교회를 위해 가장 많이 섬김의 본을 보여야 할 사람들이 올바른 섬김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다른 지체들이 누구를 통해 배우겠습니까? ‘나 같은 죄인 살리신’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산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이므로, 이제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오직 주님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성도는 자신에게 있는 최상의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섬김의 본을 가장 잘 보여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성령의 능력으로 섬김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분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이 무시하던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시고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기꺼이 섬기셨습니다.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향한 지극한 헌신과 죄인의 구원을 위한 사랑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섬김의 극치를 보여주게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죽어가는 영혼들을 제대로 섬기려면 나를 씻기신 예수님에 대한 감격과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크신 사랑을 깨달아 사랑할 수 없는 것까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임하고 심령에 기쁨이 충만하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참된 주님의 제자의 삶을 살며 주님 앞에 섰을 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칭찬 듣는, 주님의 마음에 합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