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제자도: 믿음과 기도

Author
Myung Myung
Date
2021-08-29 16:17
Views
328

팬데믹이 작년 3월에 시작된 이래 1년 반이 되어 가는데 여전히 그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습니다. 지금은 델타 변종까지 기승을 부리니 전세계적으로 누적 확진자 수가 2억 1600만 명이 되었습니다. 우리 생애에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누가 예상했겠습니까? 예수님을 믿어도 건강, 자녀, 사업, 관계 등등 다양한 문제가 예상치 않게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문제에 부딪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주실 것으로 믿고 그냥 기다려야 합니까? 아니면 하면 된다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밀고 나가야 합니까? 성도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그분의 뜻대로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주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1장부터 8장까지 마가복음의 전반부라 한다면 9장부터 16장까지 후반부라 할 수 있습니다. 귀신을 쫓는 사역은 전반부에 여러 번 나오지만 후반부에는 이번 한번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도 제자 훈련의 기회로 삼습니다.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 후에 예수님은 자신이 당하실 수난에 대하여 처음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받고 죽음을 당하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실망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세 제자들과 더불어 변화산에 올라가 장차 갖게 되실 영광의 모습을 잠시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분위기에 압도되어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하며 그곳에 초막을 짓고 계속 머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영광은 십자가의 고난을 전제로 한 것이기에 예수님은 세 제자들을 데리고 다시 산 밑으로 내려오십니다.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14-18절) 


예수님이 세 제자들과 함께 내려오시다가 왁자지껄하는 소리를 들으십니다. 산 아래 있던 아홉 제자들이 사역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6:7을 보면 예수님은 열 두 제자를 두 사람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홉 명이 번갈아가며 달라붙어도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무슨 볼거리가 있나 하여 점점 모여드는데 아이에게 붙어있는 귀신이 떠나지 않으니 제자들은 몹시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역 초기부터 예수님을 쫓아다니며 어떻게든지 흠잡을 거리를 찾고 있었던 서기관들에게 제자들의 무력한 모습은 또 다른 시빗거리를 제공합니다. 서기관들은 무능한 제자들을 비난하며 내친 김에 예수님의 능력과 그 가르침까지 비난하였을 것이고 제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변명하느라 진땀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시니 온 무리가 예수님을 보고 놀랍니다. 아마 모세가 산에서 내려올 때 광채가 났던 것처럼 예수님도 산에서 변화하셨을 때 가지셨던 광채가 여전히 나고 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달려와 문안하거늘”에서 ‘달려와’는 분사형으로 직역하면 ‘달려오면서’, ‘달리는 도중에’가 됩니다. ‘문안하거늘’은 미완료시제로, 문안하는 무리의 지속적인 동작을 강조합니다. 무리가 달려오면서 예수님을 반기고 있었다 하면서, 마가는 예수님을 본 무리의 열광적인 반응을 상세히 전달합니다. 예수님이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 변론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이 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먼저 나서서 말합니다. ‘선생님,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습니다. 그 아이는 말을 못하게 하는 귀신이 들려 있습니다. 어디서나 귀신이 아이를 잡으면, 아이를 거꾸러뜨립니다. ‘잡으면’은‘소유로 삼다’는 뜻입니다. 귀신이 아이를 소유로 삼아 통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는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몸이 뻣뻣해집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그 귀신을 쫓아달라고 했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했습니다’누가 그 말을 듣고 있습니까? 제자들뿐 아니라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듣고 있습니다. 흥분하여 제자들의 무능함을 질타하는 아버지의 말을 들으면서 산 아래 있던 제자들은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얼굴이 확확 달아오르고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그리로 피하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어물전 망신 꼴뚜기가 시킨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사역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니 예수님께 욕이 됩니다. 이 모습은 우리들에게 도전이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믿는 사람들이 잘못하면 세상은 가차 없이 비난합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삶에 변화가 없고 믿는 자인지 아닌지 구별이 안 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 사람에게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아이의 아버지를 대면하신 예수님(19-24절)


예수님께서 어떤 반응을 보이십니까? 개역성경에는 빠져 있지만 ‘오’라는 감탄사가 들어갑니다. “오 믿음이 없는 세대여”병행 본문인 마태복음 17:20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믿음 없음을 세대의 차원으로 확대하십니다. 세대에는 무리들뿐 아니라 제자들도 포함됩니다. 사탄이 다스리는 세대의 특징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는 권세, 병을 고치는 권세, 귀신 쫓아내는 권세, 죄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셨는데 여전히 믿음으로 응답하지 않는 세대를 향한 실망이 담겨 있습니다.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예수님은 이제 떠날 때가 되었는데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의 뒤를 이어 사역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제자들의 믿음은 주위에 있던 무리, 서기관들, 아이의 아버지와 별로 다르지 않게 보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또한 자신이 이제 지상에 오래 머무르지 못할 것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은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데려오라’는 명령형은 2인칭 복수입니다. 즉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에게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무리를 대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 앞에서 꼼짝 않고 있던 귀신이 예수님을 보자 아이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땅에 엎드러져 뒹굴게 하고 거품을 흘리게 합니다. 요즈음은 간질에 걸린 사람들을 별로 볼 수 없지만 제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월요일 조회 시간에 운동장에 서 있는 동안 간질로 인하여 땅바닥에 쓰러져서 입에 거품을 물고 발작을 하는 학생들이 가끔 있었습니다. 주님은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느냐”아버지에게 물으십니다. 예수님이 그 아이를 고치기 위한 정확한 정보가 필요해서 물어 보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에 대하여 묻지 않고도 예수님은 얼마든지 그 아이를 고칠 수 있습니다. 이런 질문을 던지신 이유는 그 아버지로 하여금 그가 현재 절박한 상황에 있다는 것과 예수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을 느끼게 함이요, 또한 둘러선 무리에게 이 부자가 당하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을 들려줌으로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함입니다.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그랬습니다.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과거를 회상합니다. ‘죽이려고’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완전히 파괴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아이의 치료를 인하여 그 아버지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겠습니까? 용하다는 의사나 사람들은 다 찾아보느라 돈도 적지 않게 사용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마 17:14을 보면 그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렸다고 합니다. 그가 얼마나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께 나왔는지를 보여줍니다. “무엇을 할 수 있으시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시옵소서.”부탁을 하기는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아이를 반드시 치유하실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이 아니라 반신반의하는 마음 상태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아이를 고치기 위하여 나름대로 무엇인가 시도해보라는 것입니다.  


 


아이의 아버지의 말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하며 우리말 번역에는 ‘무슨 말이냐’를 추가했지만 원문에는 단순히 “할 수 있거든(If you can)”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시면서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믿는 대로, 원하는 대로, 내 뜻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강조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권세와 능력과 긍휼과 도우심을 믿는 믿음을 통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까지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고 합니다(히 4:12). 예수님의 말씀이 그 아버지에게 깊게 파고 들어갑니다. 정신이 번쩍 듭니다. 순간 자기의 부족했던 부분이 깨달아집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의심한 것이 마음에 찔립니다. 그래서 큰 소리를 지르며 말합니다. 아마 눈물 콧물까지 흘리며 말하지 않았을까요? “소리를 질러 이르되”에서‘이르되’는 미완료 시제로 계속적인 동작을 나타냅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급박한 상황에서 예수님께 자신의 믿음 없음을 도와달라며 간곡하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문제는 자기 아들에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아들만 고침 받으면 자기에게 더 이상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문제는 아들이 아니라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부탁하는 내용이 달라집니다. 조금 전까지 “내 아들의 귀신 들린 것을 고쳐”달라고 부탁하던 사람이 이제는 자기에게 믿음 없는 것을 도와달라고 주님께 매달립니다. 모든 신자의 마음속에도 믿음과 불신의 긴장이 있으며, 그렇기에 주님의 지속적인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아이의 치유 뿐 아니라 그 아버지의 믿음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질병의 치료는 잠깐으로 그치지만 믿음은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이의 육신의 병보다 먼저 아버지의 영혼의 병인 불신앙을 치료하십니다.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25-27절)


믿음이 없어 의심의 안개로 가려졌던 아이의 아버지가 믿음을 가지니 예수님의 능력이 비로소 흘러 나갑니다. 그 아버지가 소리를 치니 무리는 무슨 일인가 하여 사방에서 모여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예수님은 큰소리로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하시며 귀신의 정체를 밝힙니다.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하나님의 권세로 명령하시니 즉시로 귀신이 떠나갑니다.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하게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같이 됩니다. 많은 사람이 수군댑니다. 아이가 죽었나봐. 꼼짝하지 않아.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아이가 일어섭니다. “일어서니라”는 ‘생명으로 돌아오다’, ‘누워 있는 상태에서 일어나다’라는 뜻입니다. 이 두 동사는 모두 부활과 깊은 연관이 있는 단어로 앞으로 있을 예수님의 행보를 암시합니다. 아이를 잡아 일으켜 세우시는 예수님은 얼마 후 당신 자신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실 것입니다. 무리는 아이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이 사건을 통해 아이의 아버지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아버지의 믿음을 인하여 아이가 온전해졌습니다. 아이가 온전케 된 것을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기도(28-29절)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이것은 예수님이 가르치시려 했던 핵심을 보여주는 질문입니다. 전에는 귀신을 쫓아낼 수 있었는데 왜 이번에는 쫓아내지 못했을까요? 전에 내쫓았던 귀신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었을까요? ‘이런 종류’란 아이를 사로잡고 있었던 ‘듣지 못하게 하고 말하지 못하게 하는 귀신’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신 이후에 그 권세를 거두셨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실패한 원인은 무엇입니까? 과거의 성공에 도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처음 귀신을 내쫓았을 때는 의기양양했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갈채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능력의 원천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자기 자신들에게로 시선이 옮겨졌을 것입니다. 어제의 성공이 오늘의 승리를 보장하지 못합니다. 9명의 제자들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무엇인가 보여주려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아마 귀신 들린 아이를 놓고 서로 먼저 고치겠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제자들이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칠 수 없었던 까닭은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기에 합당한 믿음의 자세를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를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오직 기도로써만’이 됩니다. 문맥을 통해 볼 때 여기서 ‘기도’는 ‘믿음의 기도’를 의미합니다. 믿음은 곧 기도로 강화되고 기도로 표현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믿음이 없는 세대’에 포함시키셨습니다. 귀신을 내쫓지 못한 이유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는 말씀 역시 제자들이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기도라고 하십니다. 마가복음 11:22-24에서도 산을 옮기는 믿음과 기도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합니다. 능력의 근원이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신령한 은사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지속적인 믿음의 기도가 없을 때 무용지물이 되어 버립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한탄하시고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 대한 지속적인 신뢰와 믿음의 기도가 결여된 제자들의 영적 상태를 지적한 책망이었습니다. 귀신을 쫓기 위해 어떤 특별한 종류의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둠의 세력을 대항하려면 오로지 하나님을 의지하며 드리는 믿음의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능력 있게 살아가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 주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변화산의 영광을 뒤에 두고서 산 아래 제자들에게 내려오시는 분이 우리들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그들을 아주 떠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그들이 주님의 임재와 능력을 더욱 신뢰하고 사모하도록 잠시 자리를 비우셨는지도 모릅니다. 누가복음 9:38절을 보면 귀신 들렸던 아이는 외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를 보고 어찌하여 자식을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었느냐고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눅 9:41)고 하십니다. 그 아이를 고친 후에 그의 아버지에게 도로 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녀들의 고통과 수치와 실패를 안으시려고 가까이오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귀중한 것들이 병들거나 망가지지는 않았습니까? 주님은 그것들을 우리의 손에서 받아내기 위해 오늘도 다가오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께 드리기를 꺼립니다.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고 거품을 흘리며 창백해지고 상처투성이가 된 나의 아들을 선뜻 하나님께 맡기기를 주저합니다. 우리의 부끄러운 문제를 주님께 내어드리는 것은 주님께 대한 나의 신뢰의 표현입니다. 제자란 믿음으로 예수님을 의지하며 주님의 능력으로 사역하는 사람입니다. 문제가 해결되는 첫 단계는 먼저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구원을 베푸시는 주님께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 주님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기는 했지만 주님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예수님에게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이라고 한 것은 앞에서 제자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라고 했던 말과 연관이 됩니다. 그 아버지는 예수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올 때 그분을 믿을 뿐 아니라 그분의 능력을 믿을 때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믿는 대로, 원하는 대로, 내 뜻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허망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자신의 믿음의 연약함을 깨닫고 절규하는 그 아버지의 진실한 고백이 바로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 주님께 구하는 기도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는 모든 과정을 제자들이 다 지켜보았습니다. 자신들의 무력함과 권위 있게 꾸짖어 귀신을 쫓아내시는 주님의 권능이 대조된 가운데 제자들은 부끄러움과 동시에 깊은 생각에 잠겼을 것입니다. 그들이 집에 들어 왔을 때에 슬그머니 묻습니다. “우리가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마가복음에는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17:20)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종합해 보면 제자들은 믿음이 적었기에 적게 기도하였고, 적게 기도하다보니 하나님의 능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여전히 자기들에게 있는 것으로 착각했다가 부끄러움을 당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아니라 능력을 행하는 믿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거룩하신 성품을 이루는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기 신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인격적인 응답입니다. 때로 고통을 동반하는 회개와 수고가 요구됩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을 가져야 하고 그 믿음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자기의 부족함을 깨닫고 믿음으로 구하는 자를 기꺼이 받아주십니다. 성도들에게 생긴 문제는 하나님께 개인적으로 기도하고 또 함께 기도함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나를 위하여 기도해 줄 수 있는 사람들과 기도의 제목을 나누어야 합니다. 


 


나가면서


얼마나 많은 경우에 우리는 문제만 보고, 그 문제에 사로잡혀 고민합니까? 믿음이 있어도 고난은 여전히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어떻게 세파를 헤쳐 나가고 계십니까? 문제를 통하여 우리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주님 앞에 나아가지 않기에, 매달리지 않기에, 순종하지 않기에 문제 해결을 받지 못합니다. 산 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었지만 산 아래는 고통과 탄식과 불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개입하시니 고통이 치유로, 탄식이 기쁨으로, 불신이 믿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아들의 귀신 들린 것을 인해 예수님께 나아왔던 아버지가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깨달으며 믿음을 갖게 되었듯이 우리가 경험하는 문제의 근원이 무엇인지 제대로 진단하며 믿음을 회복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팬데믹을 계기로 신앙생활이 게을러지거나 우선순위가 바뀐 분들이 있습니다. 참다운 성도의 능력은 직분이나 신앙경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현재 하나님과의 신실하고도 지속적인 교제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가질 때 우리의 믿음이 견고해질 뿐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의 제자란 기도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능력 있는 제자가 되려면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의심하지 않고 주님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께 구하는 기도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문제를 도리어 기도 제목으로 바꿔야 합니다. 당면한 문제들이 주님의 능력으로 해결됨으로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회의로 가득한 세대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고 또한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