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누가 승리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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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6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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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계 7:1-17


지난 12일에 57회 수퍼보울 게임이 있었습니다. Philadelphia Eagles가 Kansas City Chiefs를 3 쿼터까지 리드하였다가 마지막 4쿼터에서 역전패를 당했습니다. Eagles를 응원한 사람들은 아쉬움의 눈물을 흘리거나 마음이 상했을 것이지만, Chiefs를 응원한 사람들은 역전승의 짜릿한 감격을 누렸을 것입니다. 게임이든 인생의 일어나는 일이든 이왕 시작했으면 누구든지 이기고 싶어 합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통쾌한 승리나 역전승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통한의 패배를 당해 눈물을 흘린 적이 있습니까? 계시록을 얼핏 보면 재앙을 내리시며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진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소망을 잃지 않도록 배려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계시록을 읽고 묵상하면서 성도들을 이기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계시록의 일차 독자들은 로마제국에서 박해를 받던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쫓겨 다니거나 숨어 지내며 날마다 생존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때로 감옥에 던져지기도 하고 순교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언제까지 이러한 시련을 당해야 하는지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계시록 2장과 3장에서는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를 향하여 칭찬과 책망을 하실 뿐 아니라 놀라운 약속을 주시며 소망을 갖게 합니다. 4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환상 가운데 하늘 보좌를 보여주시고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은 로마황제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보좌 주위에 24장로들과 네 생물이 있어서 하나님께 경배를 드립니다. 5장에서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 두루마리가 있음을 봅니다. 인봉을 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6장에는 어린양이 여섯 개의 인을 떼는 장면이 나옵니다. 인을 뗄 때마다 전쟁, 기근, 사망 등의 재앙이 일어납니다. 다섯 번째 인을 떼니 순교한 자들이 원수를 갚아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순교자의 수가 차기까지 교회는 박해와 죽음의 상황을 겪는다고 하십니다. 그때까지 순교한 자들은 주님이 주시는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섯 번째 인을 떼니 지진이 일어나고 해가 어두워지고, 하늘이 두루마리처럼 말리고, 산과 섬들이 사라집니다. 이러한 재앙들이 우리의 현실 속에서 일어난다면 그 재앙의 직접적인 대상자가 아닐지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입장에서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아시고 요한으로 하여금 다시 한 번 교회를 위로하는 글을 쓰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재앙의 수위를 조절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재앙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6장은 두려운 탄식으로 끝을 맺습니다. “누가 능히 서리요”(6:17) 이런 재앙을 당할 때 도대체 누가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7장은 이에 대한 대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7장이 6번째 인과 7번째 인 사이에 있고 앞에 언급한 6가지 인 재앙의 내용과 사뭇 다르다는 점에서 막간이라고 부르는데, 그렇다고 해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계시록의 기록 목적은 고난에 직면한 독자들에게 위로와 소망과 용기를 주기 위함입니다. 6장이 종말론적 재앙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면, 7장은 재앙들로부터 보호받고 이기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재앙을 당하지만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소개함으로써 교회를 위로합니다. 2000년 전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이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살아있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고난의 내용은 다르지만 고난을 인하여 고통을 당하는 것은 같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믿음의 눈을 들어 하늘 보좌를 바라보고 궁극적으로 승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서로 위로하고,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십사만 사천의 인 맞은 성도들(1-8절)
어린양이 일곱째 인을 떼시기 전에 요한은 이 땅을 해할 권세를 위임받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서서 바람을 붙잡아 땅과 바다와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땅 네 모퉁이는 온 세상을 의미하고, 바람은 마지막 때에 세상에 임할 재앙을 의미합니다. 요한은 또 다른 천사가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동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봅니다. 그 천사는 앞서 언급한 네 천사를 향해 하나님의 종들이 이마에 인침을 받기까지 땅과 바다와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고 외칩니다. 바람을 붙잡는 것은 재앙이 연기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을 쳐서 장차 있을 재앙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려는 것입니다. 에스겔 9:4~6을 보면 하나님이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심판에서 제외될 것이지만, 이마에 표가 없는 자들은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는 마치 출애굽 때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있는 집은 죽음의 사자가 그냥 지나간 것과 같습니다(출 12:23). 14:1에 의하면, 구원받은 십사만 사천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 있다고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인 치심은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또는 어린양)의 이름이 그 종들의 이마에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22:4을 떠올립니다.

요한은 인 치심을 받은 하나님의 종들의 수가 십사만 사천이라고 들었습니다. ‘십사만 사천’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 어떤 기독교 이단들의 주장처럼 문자적으로 그 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구원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고,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서 나온 유대인들만을 가리키는 것도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자칭 유대인들을 사탄의 회당으로 부르면서(2:9; 3:9).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영적 유대인들을 참유대인들이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 역시 참유대인은 표면적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이라고 말했습니다(롬 2:28-29). 야고보서 1:18은 교회 전체를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라고 합니다. 따라서 십사만 사천은 구원받은 모든 성도를 가리킵니다. 그들이 세상과 사탄에 의해서 시련을 겪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인을 맞았는지 어떻게 압니까? 성령의 인 치심은 우리를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고후 1:22에 따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 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구원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습니다(엡 4:30). 우리가 그분의 소유가 되는 길은 하나님 편에서는 은혜를 베푸시는 것으로 나타나고, 우리 편에서 믿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한다면 인침 받은 증거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고, 주님과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겠다는 마음이 든다면 인침 받은 또 다른 증거입니다. 인침 받은 자들이 주님 뜻대로 살지 못할 때 마음에 부담감이 생기거나 가책을 느끼게 됩니다. 주일에 예배 안 드리고 다른 일을 하면 마음에 평안이 있습니까 아니면 찜찜합니까?

5~8절은 구원받은 공동체가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허락한 영적인 복과 유산을 이어가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에서 인 맞은 144,000을 각 지파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이스라엘 열두 지파 목록은 성경 다른 곳에서 나오는 목록과 다릅니다. 야곱의 장자인 르우벤보다 유다가 먼저 기록되어 있는 것은 이 기록이 육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영적 백성을 가리키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유다 지파는 메시아의 언약을 받은 지파로, 영적 장자의 직분을 수행했습니다(창 49:10; 히 7:131-4). 이 목록에는 또한 단 지파의 이름이 빠져 있고, 요셉의 아들 중 므낫세는 나오는데 에브라임은 없고, 대신 요셉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 분배에서 제외된 레위 지파가 포함됩니다. 레위가 포함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의 기업이라’(신 10:9)는 원리가 이제 모든 지파에게 확대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모든 자가 구원의 인을 받기까지 구원 역사를 행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3절의 ‘우리 하나님’이라는 표현도 이방인 성도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열 재앙을 목격하고 바로의 위협을 경험했지만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이제 영적인 이스라엘도 동일하게 환난의 시대를 지나지만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될 것입니다.

셀 수 없는 큰 무리의 찬송(9-10절)
십사만 사천에 대한 환상 후에 요한은 새로운 광경을 목격합니다. 1~8절에서는 지상에서 영적 전쟁을 벌이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9~17절에서는 승리한 천상의 교회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교회가 맞이할 미래를 앞당겨 볼 수 있게 합니다. 환난을 통과하는 교회로 하여금 주님은 그들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승리의 과정에 있다는 점을 상기시킵니다. 신자들은 승리가 보장된 싸움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4절에서 요한은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라는 말을 들었고, 9절에서는 셀 수 없는 큰 무리를 보았다고 합니다. 요한이 십사만 사천의 무리를 보았다면 능히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로 보았을 것입니다. 인침을 받은 십사만 사천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보호를 받는 영적 이스라엘을, 큰 무리는 짐승으로 인한 환난을 이기고 승리하는 교회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십사만 사천과 큰 무리는 모두 구원받은 성도를 의미합니다.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교회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적인 한계를 넘어 모든 나라와 족속과 방언에 속한 자들로부터 모여든 자들로 구성됩니다. 하나님께서 자손을 티끌같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번창시켜 주신다는 약속을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주셨는데 그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이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종려가지를 흔들며 찬양합니다. 흰옷은 정결과 순결과 승리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데, 어린양의 피로 씻음을 받아 깨끗하게 된 자의 옷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실 때에 종려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쳤던 것처럼 그들은 주님을 인한 승리와 구원을 축하하고 경배합니다. 그들은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 있는데,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 및 천사들의 대열에 합류한 것입니다. 큰 무리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구속하심에 대해 큰 소리로 찬양합니다.

모든 천사들의 찬송(11-12절)
계시록은 고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로 하여금 찬양하게 만드는 책입니다. 계시록 4~5장에서 하늘 보좌 주변에서 네 생물들과 24장로들과 천군천사들이 경배를 드립니다. 구원받은 허다한 무리가 주님의 구원을 찬양합니다. 큰 무리의 찬송에 화답하듯이,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의 주위에 서 있던 천사들이 보좌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합니다. 그들이 부르는 찬송의 목록은 이미 계시록 4장과 5장에 다 나왔습니다. 네 생물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리고(4:9), 24장로가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고 경배하고(4:11), 많은 천사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고 경배하고(5:12), 모든 만물이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돌립니다(5:13).

흰옷 입은 자들에 대한 환상(13-17절)
흰옷 입은 무리와 천사들의 합창 후에 장로들 가운데 하나가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와있는지를 요한에게 묻습니다. 몰라서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 숨은 의미를 알려주려는 수사적 질문입니다. 이에 요한은 그 장로에게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요한은 장로에게 ‘주’라는 호칭을 쓰는데, 이것은 일종의 경외심을 나타냅니다. 그 장로는 요한에게 그들은 큰 환난에서 나온 자들이라고 합니다. 큰 환난은 초림과 재림사이에 모든 교회공동체가 주님을 믿고 섬기는 과정에서 겪는 고난을 총체적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어린양의 보혈의 능력으로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어린양의 피에 옷을 씻었다’는 말은 단지 어린양의 피로 깨끗하게 되었다는 수동적 상태를 넘어, 어린양을 따라 큰 환난을 통과함으로 승리했다는 능동적 행위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인 치신 사람들이 승리합니다. 주님의 생애가 땀과 피와 눈물로 얼룩진 삶이었듯이 그들은 주님을 본받아 고난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들에게 예비 된 것이 임마누엘의 복이요 주님이 그들의 목자가 되어주시는 복입니다. 그 큰 무리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런데 천국에는 성전이 없다(21:22)는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여기에 언급된 성전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임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 곧 하나님이 그 큰 무리 위에 장막을 치십니다. 장막을 치신다는 것은 그들 가운데 거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는 출애굽 시의 성막을 연상시킵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약속의 표시입니다.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와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라는 표현도 출애굽 때의 광야 여정을 토대로 한 것입니다. 이사야 49:10에 의하면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이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라”하셨는데, 이는 바벨론 포로로부터 귀환할 것을 약속한 것입니다. 이사야는 바벨론 포로 귀환 사건을 하나님의 구속이 드러나는 새로운 출애굽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계시록에서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은 또 다른 출애굽이 하늘에 존재하는 ‘큰 무리’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17절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는 말씀도 에스겔 34:23,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는 말씀의 성취로 나타납니다. 어린양 예수님이 바로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5:5)인 참 목자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는 말씀도 이사야 25:8에 언급됩니다. 즉 구약에서 언급된 종말에 관한 예언들이 다 이루어짐을 보여줍니다.

* 우리의 자세
- 구원의 감격으로 섬겨야 합니다
성도들은 세상의 위협이 있다고 망하지 않습니다. 출애굽한 광야 일세대가 왜 망했습니까? 길이 험해서요? 먹을 것이 없어서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물론 세상이 우리를 위협할 때 우리는 위축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와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소년 다윗이 골리앗보다 무장이 좋고 능력이 출중하여 이겼습니까? 아닙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구별하시고 보호하십니다. 그 증거가 이마에 인을 치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 믿기 전에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를 믿고 이제는 심판과 상관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감격을 어떻게 표현하기 원하십니까? 열정을 회복하여 주님과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섬길 때 기쁨이 있고 보람이 있고 믿음의 성장이 있습니다.
- 세상으로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천상에 있는 허다한 무리는 인종, 민족, 문화를 초월하여 선택받은 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그렇지 못한 사람도 그들 속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게 손해를 끼쳤던 사람들도 그들 속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의 구원을 위해 선교적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당연시하는 정죄적 태도가 아니라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인 맞은 자로서 혹은 승리자로서 기뻐해야 합니다. 그와 더불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대상인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전달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 돌아온 자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시는 영광과 승리를 함께 누리며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계시록 10:11을 보면 “너는 백성과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해야 하리라”고 합니다. 복음 때문에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고난의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도록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 찬양으로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어린양의 피에 그 죄를 씻어 깨끗하게 된 사람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승리한 사람들이 하나님과 어린양을 찬양합니다. 천국에서는 네 생물과 장로들과 수많은 천사들이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또한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찬양에 동참합니다. 시편에 나오는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올라가면서 구원의 하나님께 찬양으로 나아갔듯이 우리 역시 하나님께 나아가는 순례자들로서 십자가의 은혜를 누리게 하시고 날마다 천국의 소망을 품고 찬양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영의 귀가 열려져 계시록에 담긴 찬양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인생의 고통 앞에서 찬양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찬양을 다시 부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먼저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육신의 문제, 재정상의 문제, 관계의 문제 등등 환경을 볼 때는 도저히 할 수 없지만 주님께서 베푸신 구원을 인하여 주님을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감격 속에 새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나가면서
하나님이 엘리야가 몰랐던 칠천 명을 남겨두셨던 것처럼 계시록 7장은 고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어린양의 피로 씻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의 소유를 삼으신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것을 확신하며 함께 고난의 시대를 헤쳐 나가야 합니다. 무서운 재앙이 쏟아지게 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그의 천사들을 보내셔서 구원을 받을 사람들의 이마에 인을 치십니다. 지금도 이 땅에서는 고통과 질병과 사고와 죽음 등 고난이 계속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는 끝이 있습니다. 누가 승리합니까? 고난의 때를 믿음으로 이겨내고 어린양의 피로 죄 씻음을 받아 깨끗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모든 환난을 이기고 승리한 성도는 흰옷을 입고 종려 가지를 흔들며 구원의 주님을 찬양합니다. 사망을 이기신 주님이 우리를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입니다. 주님 주신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말씀대로 살면서 승리의 찬가를 부르시는 어린양의 종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