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배자

Author
Myung Myung
Date
2021-12-05 16:38
Views
309

오늘은 교회력으로 대림절 둘째 주일입니다. 이 귀한 절기에 성도들은 주님께서 이미 오셨다는 확신과 더불어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하늘 보좌를 떠나 연약한 육신의 모습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죄 사함과 영생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첫 번째 오셨을 때 고난 받는 종으로 오셨지만, 두 번째 오실 때 믿는 자들에게 구원주로,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주로 오실 것입니다. 2000년 전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렸지만 오늘 우리들은 다시 오실 주님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주님 보시기에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며 말씀 묵상으로, 회개로, 때로는 금식으로 그리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나누며 예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과부의 헌금에 관한 story는 서기관들을 향한 예수님의 비판과 13장의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처럼 부패한 성전 제도와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을 배경으로 삼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진정한 경배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엉뚱하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가진 것을 전부 바쳤으니 아무리 가난해도 헌금은 반드시 해야 한다. 가난한 과부가 그 정도 바쳤으면 대부분의 교인들은 헌금을 더 많이 해야 마땅하고 그래야 하나님이 복을 많이 내리신다. 건축헌금 같이 교회에 필요한 돈은 빚을 내어서도 해야 한다’본문의 목적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들처럼 성도들의 주머니를 짜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싫어하시는 위선된 종교 행위와 주님이 기뻐하시는 경건을 대조하여 보여주십니다. 13장이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로 시작하니까 본문은 성전에서 나가시기 전에 있었던 마지막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현재 우리의 신앙생활을 점검하신다면 기뻐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안타까워하시겠습니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그 사랑이 우리의 삶에 배어있어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과부를 통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자의 모습을 살펴보며 그 여인과 같이 주님을 감격시키는 제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서기관들을 그릇된 가르침을 지적하시는 예수님(35-37절)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의 질문이 잠잠해지자 시편 110:1을 인용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십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이를 근거로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는가’라고 물으십니다. 이 질문을 통해서 예수님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인 것을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으로는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소경 바디매오도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불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께 대한 군중의 외침도 그러했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의 자손이 자신들을 이방인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줄 정치적, 민족적 메시아로 여긴 유대인들의 생각은 거부하셨습니다.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에서 앞에 있는 ‘주’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가리키고, 뒤에 있는 ‘주’는 보좌 오른편에 앉으실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다윗이 ‘내 주’라고 부르신 분의 지위가 다윗보다 탁월한 것은 당연합니다. 시편 110:5에 보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계신 ‘내 주’는 열왕을 쳐서 파하신다고 합니다. 더구나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이 말을 했다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은 다윗의 이러한 이해가 단순히 인간적인 생각이 아님을 보여주십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로 불렀다면, 그분이 어떻게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는 말씀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했습니다. 예수님의 논리 전개가 명쾌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다윗의 자손이 아니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다윗의 왕국은 이미 유대 왕국의 멸망과 포로기를 통해 실패로 판정이 났습니다. 이제 새로이 임하는 나라는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가 세우시지만 이는 단순한 다윗의 왕국의 연장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좌를 언급하셨습니다. 또한 이 말씀을 현재 성전에서 하고 계십니다. 성전은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이 좌정하시는 곳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서기관들이 대화를 나누던 장소인 성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을 자는 바로 자신임을 시사합니다.  


 


서기관들을 그릇된 행동을 지적하시는 예수님(38-40절)


서기관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지적하셨던 예수님이 이번에는 그들의 잘못된 삶과 가치관을 지적하십니다. 서기관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했습니다. 서기관들이 입었던 ‘긴 옷’이란 세마포로 된 통 옷으로 발까지 내려오는 흰색의 긴 두루마기인데 그 옷 끝에 술이 달려 있습니다. 긴 옷이 땅에 끌려서 활동하기에 불편한데도 그런 옷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했습니다. ‘다닌다’는 것은 영어로 ‘walk around’뚜렷한 목적지가 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을 말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로부터 대접과 존경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에 나가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랍비라는 칭호를 들으며 자기들의 존재를 인정받으려고 했습니다. 사람들의 문안 인사를 받으며 거드름을 폈을 것입니다.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했습니다. 회당에서 가장 특별석은 앞자리에 있는데 그 자리 뒤에는 율법을 보관하는 궤가 있습니다. 더구나 그 자리는 회중을 향하여 있기에 앉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또한 과부들의 가산을 삼켰습니다. 예수님이 ‘삼키다’와 같은 노골적인 표현을 쓰실 정도로 서기관들의 약한 자들에 대한 착취는 도를 넘어섰습니다. 당시에 과부들은 법적으로 재산권을 행사할 수 없었기에 서기관들이 대리인 역할을 했고, 이 제도를 악용해 과도한 수수료를 부과하고 부당 이득을 취했습니다.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출 22:22) 규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가난한 자들의 재산을 빼앗으며 율법을 어기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겉으로는 경건한 모습을 하고 있으나 속에는 노략질 하는 이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보통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데 외출 중이라도 기도 시간이 되면 길가에 서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서기관들은 일부러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큰 거리 어귀에서 기도하고 또 기도를 잘한다는 보이기 위하여 길게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도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라고(마 6:5) 하시며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와 같이 다섯 가지에 걸쳐 조목조목 지적한 서기관들의 행위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자기의 존재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 하는 교만과 위선입니다.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하기보다 사람들 앞에서 선생이나 지도자 취급을 받으며, 자기들이 영광 받는 것에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서기관들은 성전에서 올바른 예배를 시행하고 율법을 백성에게 바르게 해석하고 설명함으로써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본을 보여야 했는데 도리어 그들은 성전 예배와 율법을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며 확장하는 도구로 남용했습니다. 이런 서기관들의 모습은 ‘강도의 소굴’로 타락한 성전 체제의 대표적인 단면을 보여 줍니다. 서기관들은 백성의 지도자이기에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일반 사람들에게 대한 심판보다 훨씬 더 무거울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위선과 허영과 탐욕으로 가득한 현대판 서기관들이 자칫하면 우리도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인의 행위를 칭찬하시는 예수님(41-44절)


가르치기를 마치신 예수님이 여인의 뜰로 오십니다. 여인의 뜰(The Court of Woman)은 이방인의 뜰을 지나 성소의 바깥 입구와 인접한 곳에 있습니다. 여인의 뜰에는 다양한 헌금의 용도가 표시된 열세개의 나팔 모양의 헌금함이 벽을 따라 놓여 있어서 경배자들은 성전세와 제물을 위한 헌금, 성전 수리나 장식을 위한 헌금,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헌금 등으로 드렸습니다. 지금은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주간입니다. 삼일 후에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금 쪽 같이 귀한 시간에 예수님이 헌금함 맞은편에 앉으셔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지켜보신 것은 제자들에게 무엇인가 특별한 교훈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여러 부자들이 와서 헌금을 많이 했습니다. ‘넣는다’가 미완료형입니다. 계속해서 넣는다, 부어넣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는 말입니다. 헌금함은 놋쇠로 되어 있어서 동전을 집어넣을 때 동전의 크기나 무게에 따라 다른 소리를 냈습니다. 소리가 요란할수록 사람들의 시선을 더 끌었고 헌금하는 사람은 그만큼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은 자로 인정되었습니다. 헌금함을 향하여 오는 부자들의 발걸음은 어떠하였겠습니까? 아마 천천히 걸으며 자기가 헌금을 드릴 때 더 많은 사람들이 근처에 있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가지고 온 주머니를 열고 동전을 쏟아 부을 때 쩔렁쩔렁 소리가 나면 부자들은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을 것이요, 다 드리고 나서 주위를 슬쩍 살핀 후에 보무도 당당하게 그 자리를 떠났을 것입니다. 많은 부자들에게 헌금 행위는 자기 자랑과 과시의 기회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과부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서기관들은 사람들의 문안을 받지만 예수님께서 주목하신 여인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가난한 과부입니다. 예수님 당시 과부는 가장 가난하고 소외되고 불쌍한 사람들의 대명사입니다. 세상적으로 내세울 만한 것이 전혀 없고, 의지할 사람이 없습니다. 가진 것이 없으니 생계가 불안합니다. 헌금을 드리는 여인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그저 송구스러워서 고개를 숙이고 궤 앞에 나아가 동전 두개를 넣었을 것입니다. 띵그랑 띵그랑. 그뿐입니다. 여인이 넣은 동전은 렙돈으로서 가장 작은 화폐 단위입니다. 노동자 하루 품삯에 해당되는 돈이 한 데나리온인데 렙돈은 데나리온의 1/64입니다. 요즈음 미국에서 노동자의 하루 임금을 어림잡아 100불로 잡을 때 두 렙돈은 2불이 채 되지 않습니다. 그나마 그것이 가진 전부였는데 여인은 그것을 드렸습니다. 


 


여인이 헌금하고 난 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이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액수 상으로 보면 부자들이 드린 헌금은 과부가 드린 동전 두 개와 비교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과부가 더 많이 넣었다고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말씀을 하실 때 통념을 깨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그런 말씀에는 깊은 통찰력이 감추어져 있기에 문자적으로 보면 안 됩니다. 이를 테면,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으러 왔노라”(2:17). 자칭 의인이라 여기던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죄인 취급하며 무시할 때 예수님은 도리어 그들을 구원하려고 이 땅에 오셨음을 밝히면서 그들과 더불어 교제 나누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부자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드렸습니다. 그들은 풍족한 중에서 얼마를 드렸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사람들의 선망의 탄성과 부러움의 시선이었습니다. 그러나 과부는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보며 가난한 중에서 자기 소유 전부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이 과부를 칭찬하신 것은 그 여인이 가난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체를 넣었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생활비’로 번역된 헬라어 ‘비오스’는 ‘생명’이란 뜻입니다. 그렇다면 여인은 자신의 생명을, 자신의 삶 전체를 드린 것입니다. 과부의 재산을 삼키는 서기관들과 대조적으로, 그 여인은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였기에 자신의 생계 심지어 생명까지도 하나님의 손에 맡길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 돈과 부자에 대한 경고가 많이 나와 있습니다. 본문의 의도는 돈이 필요 없다거나 부자는 전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 하는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이를 테면 마가복음 9장에 부자 청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자 청년은 세상적으로는 남부러울 것이 없는 청년이요 율법을 지키는데 관심이 있을 정도로 기특하였지만 하나님보다 자기가 가진 물질을 더 사랑하다가 영생의 문턱에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서기관들은 외적으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내적으로 탐욕이 가득하였기에 주님의 책망을 받습니다. 부자들은 풍족한 중에서 일부를 드렸지만 사람들에게 과시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드렸기에 주님의 칭찬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과부는 자기의 가진 모든 것을 드림으로 칭찬을 듣습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거짓 경건, 남보다 낫다는 교만, 속마음은 감춘 채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남을 괴롭히는 가증한 행동은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서기관들은 사람들의 존경과 부러움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마음의 중심을 살피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부자가 드리는 그 많은 액수의 헌금이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런 것으로 감명을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시지 않고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액수를 드리는지에 관심을 두시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믿음을 담아 드리는지, 얼마나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지를 지켜 보십니다. 주님은 바치는 물질의 절대 양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비율, 즉 상대적인 양을 보십니다. 그것이 드리는 자의 중심, 즉 정성과 마음을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쓰고 남은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습니다. 시간도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이 준 자에게 많이 찾으시는 공평하신 하나님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헌금의 액수나 행위 자체보다 마음의 중심을 살피는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평가하실까요? 


- 우리의 삶을 항상 지켜보십니다


헌금함 맞은편에서 사람들의 헌금하는 모습을 지켜보셨듯이 우리의 삶의 모습을 항상 지켜보십니다. 집이나 길거리, 일터나 시장, 잔칫집 등 모든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행동하는 모습을 보십니다. 살펴보신 후에는 평가를 하십니다. 히브리서 4:13에 보면,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모든 언행 심사가 나중에 주님 앞에 밝히 드러나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를 보시는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거나 헌금을 드리거나 봉사를 하거나 가정이나 직장에서 행동하면서도 항상 주님의 시선을 의식해야 합니다. 그럴 때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영적으로 깨어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시선이 과부에게 머물렀던 것처럼 지금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헌신자들에게 주님의 시선이 머뭅니다. 주님과 올바른 교제를 통하여 우리가 은혜를 체험하게 되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주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신앙고백이 삶 속에 표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의 행위를 통하여 표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건강을 주셨습니까? 건강을 가지고 하나님께 헌신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물질을 주셨습니까? 물질을 가지고 하나님께 헌신을 해야 합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와 작은 실천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작은 헌신들이 조화 있게 합쳐질 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주님 안에서 자라 갑니다.  


 


우리의 자세: 주님을 감격시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타락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성전의 귀퉁이에서, 한 보잘것없는 과부를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의 실재를 보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든 재물을 갖고도 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고, 지극히 작은 재물을 가지고도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재물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커야 가능합니다. 과부가 헌금한 액수는 부자들이 헌금한 액수와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작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헌금의 양이 아닌 헌금한 자의 마음가짐과 헌신이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자신이 가진 지위나 재물 때문에 하나님을 크게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사랑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갈 5:6). 과부의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충만했습니다. 과부가 드린 헌금은 생명을 다해 드린 헌금입니다. 며칠 후면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의 전적 헌신과 희생을 통하여 다가올 자신의 희생의 의미를 제자들에게 알리기 원하셨습니다.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했던 것처럼 이 과부도 목숨 바쳐 헌신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었습니다. 이 여인의 행동과 대조적으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고, 다른 제자들처럼 도주함으로써 자기들의 살 길을 찾았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8:35). 이 여인이야말로 참 제자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에도 정결하고 헌신된 사람들은 있었다는 점입니다. 사사기의 시대에도, 아합의 시대에도, 그리고 암흑기의 포로 후기시대에도 신실한 사람들은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두운 시대에 살면서 어두움을 한탄하기보다는 빛이 되어 어두움을 밝히며 주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나가면서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한다면 내가 가진 모든 것도 주님의 것이요 주님의 뜻대로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가난한 과부처럼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된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주님만 알아주시면 된다는 자세를 가지고 겸손히 섬기는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헌금으로 우리의 믿음을 달아보십니다. 헌금을 하는 것도 우리가 드리는 희생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생각해보면,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바친다고 해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 이상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맡아 잘 관리해야 하는 청지기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감사함으로 드려야 합니다. 재물 뿐 아니라 시간과 달란트도 잘 관리하고 주님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마가복음에는 믿음이 있는 무명의 여인들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혈루증 걸린 여인(5:24-34), 수로보니게 여인(7:24-34), 본문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 등은 ‘예수님의 생명을 주시는 능력에 대한 담대한 믿음’에서부터 ‘자기부인과 희생의 삶’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들의 ‘믿음’과 ‘헌신’은 정말 고귀합니다. 정말 그들의 제자도는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10:31)는 말씀을 여실히 입증하였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면서 주님을 감격시키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열매 맺는 신앙생활, 가식 없는 진실한 신앙생활, 이웃을 세우고 격려하는 사랑의 생활, 주님 앞에 순종하고 헌신하는 생활을 통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이번 대림절을 계기로 다시 한 번 영적으로 깨어 있어 마음을 새롭게 하여 주님이 베푸시는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고 기쁨으로 주님의 일에 동참하여 하나님과 이웃과 화목하며 진정한 의미에서 평강을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