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일곱 대접 재앙의 시작

Author
hgchoi hgchoi
Date
2023-06-11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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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계시록 15:1-8


출애굽 1세대가 하나님을 크게 찬양한 적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15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추격해오던 애굽 군대와 마병을 바다에 던지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눈으로 목도한 후 감격 속에 소고를 치며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용사로 소개하면서 여호와 같은 신은 없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감격의 찬양을 드렸는데 이후로는 출애굽 1세대가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다는 말이 없습니다. 도리어 광야 생활 중에 끊임없이 불평과 원망을 털어놓았습니다. 믿음이 없다보니 그들의 삶은 불순종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세렛 시내를 건넌 출애굽 제2세대는 브엘까지 믿음으로 전진하였는데, 그들은 거기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샘물을 얻을 수 있었고 찬양을 드렸습니다. 민수기 20:17-18은 일명 ‘우물의 노래’라고 불립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이 노래하여 이르되 우물물아 솟아나라 너희는 그것을 노래하라 이 우물은 지휘관들이 팠고 백성의 귀인들이 규와 지팡이로 판 것이로다”출애굽 후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은 찬양과 함께 시작되었지만 광야를 지나는 동안 찬양을 잃어버리고 불평으로 채웠습니다. 불신의 마음에서는 불평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다시 신뢰하게 되니 그들의 입에서 감사와 찬양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찬양하는 이스라엘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물리치며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계속 나아갈 수 있었고 마침내 가나안을 정복했습니다. 성도는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을 다시 상기하는 것입니다. 입술로만 주여 하며 머리로만 믿는 사람들은 진정으로 우러나오는 찬송을 부르지 못합니다. 편하게 믿으려 하고 도무지 희생하려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위대한 찬양이 나오지 않습니다. 역경에 빠져 씨름하다가 믿음으로 거기서 헤어 나오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의 입에서 진정한 찬송이 나옵니다. 성도들은 광야에서도 하나님을 경험하며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예배를 드리면서 경배팀과 함께 찬양을 부르셨는데 어떤 마음으로 찬양을 부르셨나요? 본문에 보니 하늘에서도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계시록 15장과 16장에 언급되는 대접 재앙은 6-7장의 7인 재앙과 8-14장에 걸친 일곱 나팔 재앙의 대미를 장식합니다. 일곱 인 재앙에서 일곱 나팔 재앙에 이르기까지 과정과 비교해 보면 7대접 재앙은 보다 철저하고 전면적인 성격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재앙은 끝이 날 것입니다. 16장에서 대접 재앙이 끝나고 나면 계시록은 악의 도성인 바벨론의 멸망과 어린양의 신부인 예루살렘의 완성으로 막을 내립니다. 마지막 대접 재앙이 쏟아 부어지는 이유는 끝까지 왕께 예배하기를 거절한 자들이 받게 되는 보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다른 재앙들(인-나팔)과는 달리, 16장부터 진행되는 대접 재앙은 15장을 서론으로 합니다. 서론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대접 재앙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구속받은 자들의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지고, 동시에 대접 재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16장에서는 최종적 재앙이 집행되는 것을 통해 어떻게 마지막 심판이 종결되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자세를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구속받은 자들의 노래(1-4절)
세상을 뒤덮는 재앙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죄와 악행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고 기다리시지만, 때가 되면 그분의 공의를 위해 일어나시고 세상의 불의와 악행에 보응하실 것입니다. 요한은 마지막 7대접 재앙을 가리켜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이적’이란 경이로운 일을 드러내려는 것이라기보다 다른 무언가를 계시하려는 목적을 갖습니다. 이 ‘다른 이적’이 일곱 대접 심판을 가리킨다고 보면 그 이적은 일곱 인 혹은 일곱 나팔과 구별된다는 의미입니다. 요한이 이렇게 표현한 이유는 이 재앙으로 펼쳐지게 될 하나님의 진노가 마치기 때문입니다. 이 재앙으로 땅 위에서 전개되던 하나님 백성들과 세상 사람들의 운명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마친다’는 말은 ‘완성한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합니다. 하나님은 7일 동안 천지창조를 완성하셨던 것처럼, 일곱 천사의 손에 일곱 재앙을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요한은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를 본 후에 유리 바다 가에 서 있는 자들을 봅니다. 유리 바다는 4:6에 언급되어 있는, 보좌 앞의 수정 같은 유리 바다를 떠올립니다. 포도 추수에 등장했던 불을 다스리는 천사의 경우처럼(14:18), 불은 심판을 상징합니다(눅 9:54; 히 10:27). 유리 바다에 불이 섞여 있다는 말은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이 심판자이심을 상징합니다. 짐승을 이긴 성도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은 이제 짐승을 따르는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유리 바다 가에 서 있는 자들은 짐승(적그리스도의 정치적인 압제)과 그의 우상(우상 숭배를 강요하는 적그리스도의 종교적 압제), 그리고 그의 이름의 수(계시록 13장을 연상시키는 경제적 압제)를 이긴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지켰다는 의미에서 진정한 승자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주신 거문고로 노래를 부릅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그들이 구원되었음을 상기시킵니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모세의 노래이며 또한 어린양의 노래입니다. 사실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는 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모세의 노래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하나님, 바로와 그 군대를 홍해에 잠기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한 노래입니다(출 15장). 어린 양의 노래는 예수님의 피로 열방에 속한 이들을 완전히 속량하신 새로운 출애굽(5:9)을 찬양합니다. 구약의 백성들이 부른 노래를 짐승을 이긴 자들이 부르는 것은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 왕 바로의 압제에서 해방하셨듯이, 어린양을 따르는 당신의 백성을 짐승의 박해에서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구원받은 기쁨을 크게 노래하는 것은 박해를 이긴 자들의 특권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에 이렇게 크고 놀라운 일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이러한 구원과 심판은 위대할 뿐 아니라, 정의롭고 진실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은 하나님의 능력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들에 근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경배의 이유일 뿐 아니라 두려움의 이유도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이 불의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므로 만국이 주께 경배할 것입니다. ‘의로우신 일’은 ‘심판’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행하시는 심판 혹은 의로운 일들로 인해 세계만방에서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국적이나 인종을 불문하고 하나님을 믿는 모든 자에게 주어집니다.

짐승을 추종하는 자들은 외견상으로는 힘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패하고, 반대로 전혀 이길 것 같지 않았던 자들이 구원의 반열에 서 있게 되는 놀라운 일들이 펼쳐집니다. 이 때문에 대접 재앙은 놀라운 사건이 됩니다. 그러므로 15장의 기능은 마지막 재앙에 대한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것뿐만이 아니라, 동시에 마지막 재앙을 감격 속에서 맞이하게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승리자들이 부르는 노래는 감동이 있고 환희가 있습니다. 이런 감격의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인생들이 아니었으나 그의 은혜로 이런 대접을 받기 때문입니다(고전 1:26-31). 요한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합당한 심판으로 인해 하나님을 경배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위대한 찬송의 제목이 될 것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구원의 감격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다시 한 번 감동의 자리로 초대해야 합니다. 애가를 불러도 곡하지 않는 시대에 눈물을 흘리게 하는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진노의 대접을 받은 일곱 천사(5-8절)
순교자들의 찬양 소리를 배경으로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립니다. 성막은 증거의 장막이라고 불렀습니다(민 10:11; 17:7). 이 성막은 하늘 성전을 모방한 것입니다(행 7:44; 히 8:5). 장막을 수식하는 말로 ‘증거’라는 말이 붙었습니다. ‘증거’는 언약궤 안에 놓인 십계명이 새겨진 두 돌판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증거하는 표였습니다. 이런 의미로 구약에서는 언약궤를 증거궤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성전을 ‘증거 장막의 성전’으로 표현하는 이유는 언약을 상기시키기 위함입니다. 언약은 반드시 그것을 파기하는 자에게 죽음의 심판이 있다는 점을 전제합니다. 따라서 ‘증거’는 심판을 암시하며 이어지는 16장에서 나타날 대접 심판을 예고하는 역할을 합니다. ‘증거’는 십계명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율법 전체를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땅에 거하는 자들이 하나님이 명령을 거부하여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1절에 언급된 일곱 천사가 다시 등장합니다.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 곧 증거 장막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나온다는 것은 14:15, 17-18에서 등장한 세 다른 천사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봐야 합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뜻이 정해지는 통치의 발원지이므로 거기서 나온 일곱 천사 역시 하나님의 뜻을 시행하는 자들입니다. 나아가서 일곱 천사는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 띠를 띠고”있었습니다. 제사장이 입었던 세마포를(레 16:4,12) 천사들도 입고 있습니다(겔 9:2-3; 단 10:5; 12:6-7), 가슴에 두른 금 띠는 인자의 모습을 상기시킵니다(1:13). 금 띠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므로 일곱 천사는 그리스도의 권위를 부여받은 심판의 대행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네 생물은 하나님의 보좌 가까이에서 (4:6-7) 천상적 예배를 인도하며(5:6-7) 말과 말 탄 자들을 심판의 전령으로 파송합니다(6:1-8) 또 찬양에 동참하며(7:1; 14:3), 하나님 앞에 엎드려 ‘아멘 할렐루야’를 외칩니다(19:4). 여기서도 네 생물은 일곱 대접 심판 시행에 개입합니다. 금 대접에는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가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금 대접들’은 5:8에 나오는 ‘금 대접들’과 같은 표현입니다. 5:8에서 금 대접들은 성도의 기도를 상징하는 향으로 가득 찼습니다. 성도의 기도와 종말론적 재앙들이 모종의 방식으로 연결되는 가능성을 암시합니다. 의인들이 믿음으로 인해 박해당하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드린 간구와 탄원이 진노와 심판으로 응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는 때에는 하나님이 죄악에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결국이 구원이듯, 악의 결국은 사망과 심판입니다.

8절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부터’그 성전이 연기로 가득 차게 되었다고 합니다. 구약에서 ‘구름’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상징합니다. 특별히 연기나 구름은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시내산으로 갔을 때, 시내산은 옹기 가마 연기 같은 연기로 자욱했으며,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 강림하셨습니다(출 19:17-18). 출애굽기 24:15-16에서 구름은 ‘여호와의 영광’과 관련됩니다. 그리고 그 구름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기둥이 되었습니다(출 13:21; 14:19; 24). 또한 성막이 세워질 때도 하나님의 영광과 구름이 증거 장막을 덮었습니다(출 40:34-35). 이사야 6:1-4에서 스랍들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노래할 때도 성전은 연기로 가득 찼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날 때는 구름이 안뜰과 성전을 가득 채웁니다(겔 10:2-4). 구름이 성전에 가득할 때는 제사장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했습니다(왕상 8:10-11). 다시 말해,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가득 찬 곳입니다. 이 장엄한 광경은 영광과 능력의 하나님이 심판의 주로 임재하심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 아무도 성전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결연한 의지를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 일곱 대접 재앙은 돌이킬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애굽 사람의 학대로 인한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달하자 모세를 보내 애굽에 재앙을 내리셨고, 가나안 사람들의 죄악이 가득찼을 때 가나안 족속들을 몰아내시고 멸절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로마 제국이 용과 짐승들이 만든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를 학대하며 죽인 것에 대해 보응하십니다. 하늘에게서 나오는 재앙의 소식은 세상에서 영적 전투를 감당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군대가 도착했다는 승리의 소식이 될 것입니다. 신앙을 지키며 살기가 힘든 상황이라도 조금만 더 버티면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 부어질 것이고, 세상은 우리 앞에서 패퇴할 것입니다.

우리의 자세
마지막 재앙인 일곱 대접 재앙이 시작되기 전에 구속받은 성도들이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며 만국의 왕이요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께 경배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서 말세를 사는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은 일곱 인 재앙과 일곱 나팔 재앙에 이어 마지막 일곱 대접 재앙(15-16장)을 예고합니다. 이 재앙은 한시적이거나 국지적인 재앙이 아닌 전 우주적인 최후의 재앙입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끝나고 구속의 계획도 완성될 것입니다. 악의 도성인 바벨론이 멸망하고 어린양의 신부인 예루살렘이 완성될 것입니다(17-21장). 더 이상 심판도 없지만, 더 이상 회개의 기회도 없을 것입니다. 일곱 나팔 재앙이 끝날 때까지 하늘 성전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마지막 심판을 내리시기로 하신 이상, 아무도 막을 수 없고, 아무도 피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두려운 것입니다. 어린양을 따르는 성도들을 박해하고 짐승의 편에 서서 지금까지 안락한 삶을 산 악인들에게 남은 것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뿐입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종말을 준비해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남아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할 중요한 일이 많지만 영혼이 달린 문제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어리석은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지만,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습니다(전 7:4). 사탄은 갖가지 방법으로 성도들을 박해하고 미혹합니다. 성도는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과 영광스러운 상급을 내다보고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 어린 양을 높여야 합니다
유리 바다에 선 승리자들은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부릅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찬양했듯이, 고난과 환난을 통과한 자들이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을 찬양합니다. 홍해를 가르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애굽 군대를 전멸시켰던 하나님을 높이면서, 종말론적으로 구원을 완성하시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홍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의 바다였지만, 애굽 군대에게는 죽음의 바다였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맛본 성도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은혜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공로나 선행이나 노력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홍해를 건넜듯이, 우리도 오직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잊지 말고 날마다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예배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성도들은 장차 승리의 노래를 영원토록 부를 자들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이러한 영원한 승리와 기쁨의 노래를 지상에서 미리 부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권면합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기도와 함께 반드시 해야 할 것이 찬양입니다. 즉 하나님께 도움이 필요한 경우는 기도로,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면 찬송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이러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자격을 갖고 있는 자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믿음으로 이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라는 단어가 계시록에서 여섯 번 나옵니다. 하나님의 최후 심판과 관련한 종말론적 의미를 가집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심판을 받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서 이 세상에서 고난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손해 본다 할지라도 우리는 패배자가 아닙니다. 요한은 추수 때에 모든 시대의 신자들이 ‘이긴 자’들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하늘의 유리 바다를 건너 승리자의 모습으로 우뚝 서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후의 승리를 믿으며 오늘 하루 주어진 삶에서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마지막 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이 땅에 쏟아질 것입니다. 믿음을 지키는 성도는 하나님의 전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하는 영광을 누릴 것이고, 성도들을 핍박한 세상은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은 재앙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유혹, 어떤 위협에 맞서 싸워 이겨야 합니다. 인내하며 견디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하나님께 지혜와 능력을 구하며 이기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나가면서
계시록을 읽으면서 세상의 종말이 언제 올 것인가 논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실 환상 가운데 나타나는 재앙들은 일차적으로 초대교회를 핍박했던 로마와 가이사를 향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재앙들은 출애굽기에서 애굽과 바로가 당했던 재앙과 긴밀히 연결됩니다. 출애굽기의 애굽은 로마요, 바로는 가이사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이 애굽에 재앙을 내리심으로써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셨던 것처럼, 로마에게도 재앙을 내리셔서 교회를 해방시키시는 환상을 보고 있습니다. 말세에도 택하신 주님의 백성들을 건지실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 날에 믿음으로 이긴 자들은 노래를 부릅니다. 그 노래는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향한 기쁨의 고백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찬양입니다. 그 노래는 우리의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말세를 사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린 양을 바로 알고 그분만을 높여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린 양을 붙들고 믿음으로 이겨야 합니다. 영원한 천상의 노래는 결코 슬픔의 노래로 바뀌지 않습니다. 고난과 역경이 있을지라도 낙심하지 않고 신앙을 지키고 말씀에 따라 살면서 구원으로 인도하신 은혜에 감격하여 주님 앞에 가는 그날 까지 찬양을 멈추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