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

Author
Myung Myung
Date
2022-03-06 16:31
Views
294

아무리 설명해도 도무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과 대화하면 얼마나 답답합니까? 요즈음 새벽기도 시간에 누가복음에서 공생애 마지막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도중에 당신이 받으실 수난에 대해 세 차례나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지난 3년 동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사역을 가까이서 지켜 본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으니 예수님이 얼마나 답답하셨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런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이 전해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놀라운 신분의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음으로 그들의 죗값을 치러 주심으로 그들은 노예 상태에서 풀려나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유인이 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얻게 하셨습니다. 노예의 신분에서 상속자의 신분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런 큰 은혜를 받고도 갈라디아 교인들이 유대주의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미혹되어 다시 옛날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우리는 다릅니까? 우리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고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라는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고 있습니까? 본문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야 하는지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초등학문 아래 종노릇함(1-3절)


3장에서 바울은 율법을 죄수를 가두고 감시하는 간수와 주인의 아이들을 통제하는 초등교사로 비유했습니다. 본문을 보니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기 전 상태에 대해 또 다른 이미지를 제공합니다. 1절의 ‘어렸을 동안’과 2절의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는 모두 특정한 시점을 전제로 합니다. 비록 미래에 ‘모든 것의 주인’이 되는 상속자(유업을 이을 자)라 하더라도 미성년일 때에는 그의 처지가 ‘종’과 별로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정해 준 ‘후견인’혹은 ‘청지기’의 권위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후견인’과 ‘청지기’는 비슷한 말로 주인을 대신해 집안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직무자를 뜻합니다. 따라서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은, 상속받기 전에 ‘후견인’과 ‘청지기’아래 있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그러다가 어른이 되어 주인의 유산을 상속받게 되면 더 이상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후견인과 청지기를 주관하는 주인의 자격을 가집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무론하고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자유하게 하시기 전까지는 초등학문 아래 노예 상태로 있었습니다. 바울은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라고 하는데, 바울이 ‘우리’로 표현한 것은 갈라디아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도 초등학문 아래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초등학문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스토이케이아’인데, 그 의미는 ‘고유한 구성 요소들’혹은 ‘세상의 기본 원리’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까지 이방인들은 ‘세속적 초등학문 밑에서 종노릇하던 자들’이었고, 유대인들은 율법을 섬기며 ‘율법 아래에서 종노릇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을 믿기 전 우리는 세상과 죄와 율법에 대해 종의 상태에 있었다고 합니다. 


 


종에서 아들로의 신분 변화(4-7절)


하나님께서 율법을 먼저 주신 이유는 율법을 통해 죄인 된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율법을 다 지키면 구원을 얻을 수 있지만, 죄성을 가진 어느 누구도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하신 것은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곧 율법이 요구하는 죄에 대한 대가를 충분히 치르셨다는 뜻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이 주어집니다. 이것은 혈통으로 얻어진 신분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게 된 법적 신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 어떻게 하셨습니까?


 


-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때가 차매’라는 말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내기로 예정하신 시간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또한 세상이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라는 말은 예수님이 신성을 가지신 분임을 나타내며,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이라는 말은 인성을 가지신 분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본성을 공유하신 아들 예수님을 역사의 시간 속으로 보내셨습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하나님께서는 창세전부터 그리스도를 통한 새 창조를 계획하셨습니다. 여자로부터 나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의미합니다. 원시복음이라 불리는 창세기 3:15에 보면,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예수님은 창세기에서 약속된‘여자의 후손’, 즉 구원자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자의 도움 없이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의 몸에서 죄 없이 탄생하셨습니다. 반면 율법 아래 나셨다는 것은 그가 무죄하나, 율법의 요구 아래 있었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속량’으로 번역된 단어는 ‘몸값을 지불하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우리가 치러야 할 죄의 대가를 대신 치르셨습니다. ‘아들의 명분을 얻다’라는 말은 ‘양자로 삼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죄의 종이 된 처지로부터 자유하게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종’에 불과했던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 변화시키는데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아들의 신분과 자격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이 된다는 것입니다.


 


종과 아들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유업을 상속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셔서 그분 안에 있는 모든 신령하고 좋은 것들을 받아 누리게 하셨습니다. 하늘에 속한 모든 복을 주셔서 예수님이 갖고 계시는 자녀의 권세에 우리도 동참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특권이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믿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서 자녀의 권세와 복을 풍성히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의 통합적인 사역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을 통한 구원계획을 세우시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고, 하나님의 영이 되시는 성령님은 우리에게 확신을 줍니다. 하나님은 자녀 된 성도들을 위해 아들의 영을 보내셨습니다.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7). 마지막 때에 아들의 영, 즉 성령을 우리의 마음에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졌습니다. 성령은 구원의 첫 열매를 대변할 뿐 아니라 구원을 받으리라는 보증 역할을 합니다. 창세기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아브라함의 언약 속에 성령의 약속이 포함되어 있다고 바울은 해석합니다. 성령님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시면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십니다. 겟세마네의 기도(막 14:36)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도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도록 친근한 관계에 들어가게 해 주시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우리가 입양되어 그분의 자녀가 되었음을 확증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입니다. 우리가 다시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는 길은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것입니다. 오늘도 유혹과 시험이 우리 마음을 빼앗아 가려고 할 때 아빠 아버지를 불러야 합니다. 지혜가 없을 때 하나님께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면  지혜를 주시고, 능력이 부족할 때 ‘아빠 아버지’부르면 능력을 주십니다.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려는 이들(8-11절)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모습을 하나님이 아닌 것들에 종노릇한다고 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도 아신 바 되었는데, 갈라디아 교인들이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그에게 종노릇하려 한다며 책망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기 전에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알지 못해 세상의 우상들을 숭배했지만, 바울이 전해 준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저주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을 떠난 후 가만히 들어온 유대인 율법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복음의 진리에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종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상당수의 성도들이 유대교 사상, 율법의 지배권 아래서 다시 종노릇하던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려 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계시에서 온 것이 아니고 세상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그들이 과거 율법을 좇던 시절을 ‘종노릇하던 때’라고 하며, 그 당시에 세상의 초등학문인 율법의 지배를 받던 일을 상기시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유대주의자들의 미혹을 받아 그리스도의 복음에 율법주의를 보태려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유대 절기들, 곧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켰는데, 날은 안식일, 달은 월삭, 절기는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같은 유대 연중행사 절기, 그리고 해는 안식년, 희년 등을 가리킵니다. 아마도 갈라디아에 온 유대주의자들은 이 절기를 준수함으로 믿음을 완성하게 된다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그들에게 이러한 율법을 지키려는 행위가 구원과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을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진짜가 나타났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모조품만 붙들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는 영원하고 완전한 구원의 능력이 있기에 그리스도의 복음에 무엇을 더하는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불완전한 것으로 만드는 셈입니다. 그런데도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렇게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초등 학문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믿음을 허물고 그리스도를 버리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은 10여년 이상을 그들을 위해 수고하며 사역했습니다. 그들의 어리석은 행위로 인해, 자신의 사역이 허사가 될 것을 심히 염려했습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뿐입니다. 복음에 무엇을 더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를 하나님의 의에 이르게 하고 구원을 얻게 하는 데 충분합니다. 복음 외에 다른 것들에 눈길을 돌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를 헛되게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 우리의 자세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받았기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유업을 받는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부심을 가져야 하겠고 천지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유업을 잇는 상속자라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까? 


 


-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문제를 일으키거나 잘못되면 세상 사람들이 그럴 줄 알았다고 기다렸다는 듯이 조롱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무엇인가 다르다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믿어도 별 수 없다는 것을 보이고 싶어 합니다. 세상은 여전히 우리를 주목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난 자의 삶은 거룩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지만 무엇인가 크리스천으로 구별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믿는 자들을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이 말씀에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비추어 보며 우리의 부족함을 버리고 비우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게 됩니다. 


 


- 기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세례를 받으실 때도 성령이 임하셨고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 나가셨고 성령의 능력으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셨고 성령에 충만하여 갈릴리로 돌아오셨습니다. 제자를 선택하시기 전에 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성령의 사역은 기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6-27). 우리가 무엇을 구할지 모를 때에도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기도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때 구할 바를 바로 알고 구하게 됩니다. 육신이 약합니까? 사업에 어려움을 겪습니까?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거나 믿음의 진보가 없습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아이가 부모에게 맡기듯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주님이 응답을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종은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아이는 자기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며 친밀감을 표시합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의 종노릇 하는 사람들에게 율법은 두려움과 속박을 주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함으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확신하게 하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다정하게 부르게 됩니다. 이런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즐거이 헌신하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인가 함으로 인정을 받아 무엇을 얻겠다고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받은 구원에 감사하여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삶에는 희생과 고난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단순히 육체의 고난이나 핍박이라기보다 이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 시민으로 살기 위한 고난을 말합니다. 신앙생활은 날마다 우리의 옛사람이 죽어가는 과정이요 그리스도의 거룩한 형상을 닮아가는 과정입니다. 이것이 제자도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입니다. 


 


- 소망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구원을 받았는데 왜 이처럼 고난이 많은가 하며 답답해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됨과 그분께서 주실 영광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우리를 담대하게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환경이 아니라 그 환경 너머에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확신입니다. 현재의 삶이 아무리 고달파도 장래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것이기에 위로를 받습니다.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깨닫는 자들마다 어떠한 환경과 처지에서도 항상 기뻐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와 같이 상황을 초월한 기쁨과 감사가 우리의 삶의 내용이 되어야 합니다. 


 


나가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사람들은 율법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진리를 알지 못하므로 율법과 세상의 온갖 초등 학문 아래에 있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모든 인간은 죄와 사망의 세력에 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우리는 율법의 종노릇 하는데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자녀로 입양해 상속자로 삼아 주셔서 하나님 나라의 모든 부요함을 상속받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을 통해 주신 구원입니다. 만일 아직도 세상적인 가치관과 사고방식, 원리에 따라 살거나 특정한 종교 의식을 삶의 의로운 기준으로 여긴다면 종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를 누리려면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고, 성령의 역사에 힘입어 마음과 영이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다시는 하나님 자녀 된 신분을 잊어버리고 종노릇하던 옛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율법주의가 아닌 진리의 복음에 굳게 서야 합니다. 악한 세대 가운데서 다른 이들을 바른 믿음의 길로 인도하는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인도함을 받으시며 주 안에서 승리하는 삶을 사시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복된 간증을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