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Author
Myung Myung
Date
2022-02-20 16:33
Views
290

우유, 빵 등 대부분의 식품은 유효기간이 있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것, 비싼 것이라 할지라도 유효 기간이 지나면 변질이 되어 먹으면 되레 몸에 해로울 수 있습니다. 기계도 내구연한이 있습니다. 오래 쓰다보면 고장이 자주 발생하고 성능이 이전만 못합니다. 인간의 몸도 세월이 흐르면 약해집니다. 그래서 모세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유효기간이 없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도 영원하기에 나중에 주어진 율법이 그 약속을 대체할 수 없다고 합니다. 바울은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과 모세를 통하여 준 율법과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구원의 원리를 강조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유업으로 받게 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감사한지 살펴보며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성도의 삶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율법의 저주(10-12절) 


9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 받는 복을 언급했던 바울이 10절에서는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이 받는 저주를 언급합니다. ‘저주’라는 단어는 10-14절에 5번이나 등장하며 율법과 짝을 이루어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의 소망 없음과 절망적인 상태를 강조합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신명기 27:26을 참고한 말씀인데, 여기서 핵심단어는 ‘모든’과 ‘항상’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모든’율법의 행위들을 다 지켜야 하며 하나라도 어기면 죄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율법을 ‘항상’지켜야 합니다. 어제까지 잘 지켰어도 오늘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면 의롭다함을 얻으려는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런데 아담의 범죄 이후 타락한 인간으로서 율법에 기록된 모든 것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죄에 머물게 되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기는커녕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율법의 저주’입니다. 인간이 자기 의를 구원의 방편으로 삼아 율법을 지키려고 할 때 결국 저주 아래 있게 되고, 죄인이 되고 맙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믿음을 떠나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데, 이는 자신들을 율법의 저주 아래 두려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율법을 행하는 것이 저주가 되는 이유는 율법 행함이 ‘하나님 앞에서’의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율법의 저주’는 사람들로 하여금 ‘율법 외에’나타날 다른 의, 곧‘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롬 3:21-22)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를 얻을 수 있습니까? 바울은 하박국 2:4을 인용해 설명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살 수 있었다면 왜 하나님께서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고 하셨겠습니까? 율법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즉, 율법으로는 성취될 수 없었던 의가 믿음으로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을 대신해 죽음의 저주를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하나님이 의로 여기시기에, 의인은 믿음으로 살게 됩니다. 12절은 11절에 대한 부연설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는 말은 율법과 믿음이 서로 같은 범주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며 믿음에 속한 것도 아닙니다. 물론 구약 성경에서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하셨지만 율법을 지켜서 온전한 삶에 이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속량(13-14절)


바울은 율법을 행함으로 저주 아래 있는 인생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바울만이 ‘속량’이라는 단어를 신약성경에서 네 차례 사용합니다(엡 5:16; 골 4:5). ‘속량하다’라는 동사는 ‘값을 치르고 어떤 사람을 해방시키다, 자유하게 하다’라는 뜻으로 종노릇하는 데서 놓아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해결 방법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완전히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시켜서 죄 문제를 해결해주신 것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그리스도께서 ‘대신 받으심’으로 해결하셨습니다. ‘위하여’로 번역된 전치사는 ‘대신하여’라는 뜻도 있습니다. 여기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받으셨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이는 율법을 범한 모든 인간의 저주를 친히 짊어지신 대속적 죽음을 나타냅니다. 이렇게 함으로 율법의 저주는 죄인들에게서 그리스도께로 옮겨졌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전했을 때 유대인들은 신명기 21:23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려 죽은 자가 어찌 메시아가 될 수 있는가’반문했을 것입니다. 신명기 21:23을 읽겠습니다.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사형은 법정 최고형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이미 처형을 당해 죽은 범죄자의 시신을 다시 나무 위에 달아 두는 일은 더욱 잔혹한 징벌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를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시체는 반드시 해가 지기 전에 장사하라고 말합니다. 이는 거룩한 공동체로부터 부정한 것을 제거하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면서 우리가 당할 저주를 주님이 대신 당하셨다고 합니다. 그분이 대신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는 율법의 저주로부터 벗어나 용서와 자유의 은총을 누리게 됐습니다. 우리를 위해 나무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생각할 때 그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속량하신 목적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들에게 미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복’은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복을 의미합니다. 둘째, ‘우리’가 믿음 안에서 성령의 약속을 갖는 것입니다. ‘성령의 약속’으로 번역되어 있으니 성령이 약속하신 무엇인가를 신자들이 받을 것이라는 의미로 오해할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약속된 성령’혹은 ‘약속하신 성령’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복’과 ‘성령의 약속’은 본질상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복’이 참된 복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지 아니하고는 영생을 얻을 수 없으며, 이 세상에서 누리는 복도 모두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주어지고 ‘믿음으로 말미암아’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은 객관적 사실입니다. 그 죽음이 우리에게 효력을 발생하려면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율법의 저주를 받으심으로 이제 믿음의 시대, 즉 새 언약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이방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약속된 성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교인들도 약속된 성령을 받게 된 것입니다.


  


대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15-18절)


바울은 ‘언약’을 중심으로 말씀을 이어 갑니다. ‘언약’에는 쌍방 간에 체결하는 ‘계약’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사람들 사이에 있는 언약의 규칙을 예로 듭니다. 사람들 사이의 계약도 한 번 체결하고 나면 폐하거나 더하거나 추가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집을 사고 팔 때 매매계약서에 사고파는 양측에서 사인을 하게 되면 법적인 구속력을 가집니다. 계약서에 규정된 내용을 어길 때 계약이 파기되거나 위약금을 물게 됩니다.  


 


바울은 ‘언약’을 대신하여 ‘약속’이란 단어로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졌습니다.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8)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영원한 언약으로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선택하셔서 특별한 관계를 맺고자 하셨습니다.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이는 언약의 핵심입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창 22:17-18) 여기서 ‘씨’는‘자손’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단어를 아브라함의 자손인 자신들을 가리키는 집합명사로 보았습니다. 그렇게 하면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육신적인 유대인들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씨’를 일반 단수명사로 보고, 이 자손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은 ‘유대 민족’을 통해서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임할 복은 한 사람, 곧 메시아를 통해 이뤄질 것에 대한 약속을 가리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당사자인 그 ‘자손’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사람들은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하나님의 기업의 대상이 됩니다. 갈라디아 성도들도 율법과 관계없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기에 이미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의 수혜자입니다. 즉,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이 주장한 율법과 약속의 상관성을 거부합니다. 아브라함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새 언약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죄에 대한 형벌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받아 돌아가신 희생을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약속하신 유업은 ‘율법’이 아니라 ‘언약’에 기초한 것이며, 430년 후에 생긴 율법이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폐기하거나 무효화할 수 없다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이 애굽에 거한 연수가 430년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간 때는 야곱과 요셉의 때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던 때로부터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할 때까지 500년은 족히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애굽에 들어가기 전으로 보고 모세가 율법을 받은 때를 애굽에서 나온 때로 보아 상징적으로 430년이라 한 것 같습니다. 사람의 약속도 일단 정하면 함부로 취소하거나 더하지 않는데 하물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430년 후에 생긴 율법이 대체할 수 없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 바울의 논지입니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그 역할을 감당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천하 만민에게 구원의 복을 주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 복음을 통해 우리는 아브라함이 약속받은 복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처럼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정하는 것이고, 구원의 은혜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복은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집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유업을 받기 위해 율법의 행위를 지켜야 한다는 거짓 교사들의 주장은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를 저버리게 하고, 율법의 저주 아래 다시 들어가게 하고, 아브라함의 약속에서 떨어져 나가게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상속받을 자녀가 되고 성령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만 가능한 역사요 복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유업’은 ‘상속’이란 뜻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유업’은 물질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게 하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언약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18절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할 때, ‘주다’는 단순히 ‘주다’가 아니라 ‘아낌없이 은혜(선물)로 주다’라는 뜻입니다. 은혜가 ‘카리스’, 선물은 ‘카리스마’인데 ‘주다’라는 동사는 ‘카리조마이’입니다. 같은 어원을 가집니다. 바울은 이 단어를 통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약속이 값없이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되며,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은 모세에게 주어진 율법보다 우월하고 결코 대체될 수 없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연고로 의롭게 여김을 받은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믿음으로 의롭게 여김을 받으며 또 복을 받습니다. 


 


* 우리의 자세


하나님은 저주 아래 있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고 그리스도께서 그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받은 우리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까?


-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임을 믿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유대인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우리는 불가능해 보이는 구원을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며 자신의 죄를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매일 새롭게 믿음의 길을 행할 수 있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믿음의 주시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함께 신앙의 경주를 해야 합니다.


 


- 믿음으로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으로 인해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 아브라함의 복과 성령의 약속에 참여한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날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나님이 베푸신 크고 놀라운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로 흘려보내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요셉이 자신을 팔아버린 형들을 용서했듯이(창 50:20),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 달란트 빚진 종이 왕의 용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옥에 가둔 것은 자신이 받은 은혜를 멸시하는 행동이었습니다(마 18:35). 주인이 그를 불쌍히 여겼던 것과 같이 그도 동료를 불쌍히 여겨야 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제자도를 말씀하신 것은 단지 죄짓지 말고 착하게 살라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위해 살고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구원의 복음, 약속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모두 선교사로 나가라는 것은 아닙니다. 선교 현장에 나가 사역할 수도 있고 선교사를 후원할 수도 있습니다. 누가복음 13:22을 보면 예수님은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시며 가르치셨습니다. 왜 한 곳에 머물며 편하게 사역하지 않으시고 굳이 고단하게 사역하셨을까요? 아프고 힘들고 가난하고 몸이 매인 사람들은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찾아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우리의 주어진 형편과 처지에 따라 가정이든, 직장이든 사업장이든 주신 예수님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런 사랑을 실천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흔적이 생기기도 하고 예수님의 흔적을 남기기도 합니다.  


 


-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며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의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 열심히 노력합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기에 그 소망 안에 도사리고 있는 끝없는 욕심은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을 향해 믿음으로 나아갔듯이 성도는 이 땅에서 새 예루살렘(계 21:2-4)을 향해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한 자손, 즉 그리스도를 통해 대적의 성문을 주실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천한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 22:17).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기에 성도는 신앙 여정이 힘들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면서 불평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며 나아갑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을 향해 믿음으로 나아갔듯이 성도는 이 땅에서 새 예루살렘을 향해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성도에게 이 땅은 나그네 길이며, 그 길이 좁고 험할지라도 불평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며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나가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율법은 구원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며, 사람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본분입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이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흡족하게 채워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인간의 행위는 실패로 돌아갈 뿐입니다. 율법은 좋은 의도로 주신 것이지만, 인간이 자기 의로 구원의 방편으로 삼아 지키려고 할 때 결국 저주가 되고, 인간은 여전히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죄인으로 남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고, 그리스도는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곧 율법의 기준에 미흡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심으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습니다.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아브라함의 씨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입니다. 믿을 때 아브라함의 복과 성령의 약속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구원과 영생의 선물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해야 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받은 은혜를 사랑으로 표현하며, 소망 가운데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합니다. 임마누엘 주님과 동행하며 때를 따라 베푸시는 은혜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