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율법의 행위냐 믿음이냐

Author
Myung Myung
Date
2022-02-06 16:03
Views
290

좋은 것을 가지고 있는 데도 그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할 때 그것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거나 더 좋다고 생각되는 것을 찾게 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좋은 것을 주셨는데도 그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할 때 더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을 얻으려고 합니다. 아담이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었던 에덴동산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거기서 쫓겨났습니다. 이 땅에 죄가 들어오고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지 않고 가나안의 우상들을 섬기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샀습니다. 결국 나라도 망하고 이방 땅에 포로로 끌려가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에 와서 복음을 전했을 때 많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 가짜 복음을 전하니 일부 교인들이 그들의 말에 현혹되어 복음에서 떠났습니다. 혹시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은 없는지요? 정말로 좋은 것, 가치 있는 것이 우리에게 있음에도 분별하지 못해 엉뚱한 것을 붙들려고 애를 쓰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을 받고 싶다면 십자가 복음을 믿고 그 복음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믿음을 통해 태어난’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하나님의 백성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지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바울의 탄식(1절)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밝히 보여 주었다고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했다는 뜻일까요? 바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현장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밝히 보인다’가 무슨 의미입니까? 바울이 예수님을 인해 고난 받은 흔적을(6:17) 자신의 몸으로 보여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격앙된 감정으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호소합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 누가 너희를 꾀더냐”하며 복음의 진리를 떠나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보고 안타까워합니다. ‘어리석다’는 ‘지각이 없다, 생각이 없다’는 뜻을 가집니다. 쉽게 말하면 ‘이 바보들아 만약 너희가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었다면 이렇게 쉽게 복음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생각하는 신앙생활’을 하기 원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그에 합당한 신앙생활을 하기 원했습니다.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는 말은 거짓 교사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현혹시켜 바울이 전한 복음이 버리고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게 한 것을 비판하는 말입니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는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다고 이미 말했습니다(2:21).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이 율법을 지킴으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임을 밝히 보여 줍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의 성령 받음(2-5절)


바울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갈라디아 교인들의 경험과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논증합니다. 먼저 바울은 그들이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얻은 것인지,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인지를 되돌아보도록 질문합니다. 그 대답은 물론 ‘듣고 믿음으로’입니다.  ‘율법의 행위’는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라는 뜻인데,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의롭다 함을 받으려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도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모든 노력이 다 이런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배 드렸으니까, 헌금했으니까, 봉사 활동을 많이 했으니까 등등. 이에 반해 ‘듣고 믿음으로’는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은 공로를 힘입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을 말하며, 이는 곧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뜻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이 전해 준 복음을 듣고 믿었을 때 하나님의 성령이 그들 마음속에 임하였으며, 그들은 거듭나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돌아선 갈라디아 성도들은 아마 이렇게 변명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성경에 있는 대로 할례를 받으려고 한 것뿐입니다.’그러나 바울은 ‘성령으로 시작했다면, 성령을 따라 계속 살아야 하는데,  도중에 율법의 행위로 돌아서면 결국 육체로 마치겠다는 말이냐’하며 안타까워합니다. ‘육체’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인간의 약한 본질을 나타냅니다. 거짓 교사들은 할례와 율법 준수가 의롭게 되는 길이고 복음과 자유를 완전하게 한다고 했지만, 바울은 그렇게 하는 것이 결국 자기 자랑과 만족을 추구하다가 육체로 마치게 되는 신앙의 퇴보라고 합니다.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와 감격이 사라지면 언제든 형식과 전통만을 중시하는 율법주의나 사람의 의 그리고 통제되지 않는 육체의 소욕만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육신의 소욕이 아닌 성령에 이끌려 사는 사람이 새 이스라엘이요 하나님의 참 백성입니다.


 


당시에 그리스도인이 되면 유대교도들에게서 많은 핍박과 압력과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길을 제대로 가려면 고난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갈라디아 성도들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들이 율법의 행위로 돌아선 것은 단지 유대교도들에게서 들은 대로 행하려는 것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굳이 이런 어려움을 받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 영향력을 갖고 있는 유대교도들의 말을 들을 때 지내기가 쉽고 또 율법을 지키라는 말씀도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 할례를 받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복음을 믿음으로써 겪은 괴로움이 헛된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믿음을 따라 살면서 고난을 겪었을 뿐 아니라 고난 가운데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율법으로 돌이켜서 과거에 당했던 모든 수고를 허사로 만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행위가 아닌 믿음을 따라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데 무슨 조건이 있겠습니까? 믿음으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감당할 능력을 주시고 피할 길로 마련해 주십니다. 살아가는 것이 힘듭니까? 앞길이 막막합니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칭의(6-9절)


이어서 바울은 아브라함을 예로 들면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더욱 분명하게 논증합니다. 여호와께서 환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그러자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다고 하면서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자가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늘의 뭇별과 같이 자손이 많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아브라함이 그 약속을 믿었고, 하나님은 이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법적으로 인정하신다는 것이지, 아브라함이 신앙적으로 완전해졌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후에도 여전히 거짓말도 하고 실수도 합니다. ‘의로움’이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이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 즉 구원의 자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와 그분의 의를 우리의 것으로 삼아 주십니다.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로 여기시고 의를 덧입혀 주십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할례나 율법을 지킴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자랑하면서 이방인들을 멸시했습니다. 그들은 그 증거로 할례받았다는 사실을 내세우면서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바울이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설명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은 율법이 있기 전에 살았기에 율법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께 의로운 자로 인정받은 것이 아닙니다. 할례는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 14년이 지난 후에야 받았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은 아브라함의 후손에게도 주신 복입니다. 만약 우리가 아브라함과 같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간다면 우리 역시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별이 없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과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그들을 위해 특별히 기도하고 도와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을 이방인들과 같은 차원에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특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해야 하며 그들에게 선교할 것이 아니라 그들과 대화하고 심지어 그들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은 유대주의적인 발상으로서 성경이 말하는 복음에 위배됩니다.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이라’는 말씀은 아브라함 때부터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라고 하면서 바울은 자신의 이방인 선교의 정당성을 밝힙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주셨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은 예수님이 누구시고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다는 내용인데 아브라함에게도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까? 여기서 ‘복음’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을 받고 의롭게 되는 것은 이미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너로 말미암아”는 직역하면 ‘네 안에서’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안에서’복을 받습니다.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모든 이방이 ‘아브라함 안에서’복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할례 받은 유대인들뿐 아니라 할례 없는 이방인들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복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시작해 믿음으로 마치는 자입니다. 성령으로 시작했으니 성령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이미 주셨습니다(엡 1:3). 성부 하나님이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시고 성자 하나님은 우리를 구속하시고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인치셨습니다. 바울은 이 놀라운 복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고 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그분이 베푸시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게 됩니다.  


 


* 우리의 자세


구원은 하나님이 거저 주신 선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부 갈라디아 교인들은 굳이 힘든 길을 선택하여 힘은 힘대로 들고 구원도 얻지 못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본문이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 믿음으로 서야 합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의 시작은 좋았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거짓 교사들에게 속았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단순한 진리를 무시하고, 구원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자신들의 노력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노력으로 율법을 지켜서 스스로를 구원하려 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다 지키다가 그 중의 한 개라도 어기게 되면 율법의 저주 아래 떨어지게 됩니다. 율법을 지킴으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그렇다면 율법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율법은 사람으로 죄를 깨닫게 하고 그로 하여금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인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시고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다른 말로 하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어떤 행위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으려면 염려와 초조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이야말로 바울이 탄식하던 대로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는 비결은 이 땅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아브라함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이 왕이심을 고백하고 그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내세를 얻고 누리게 됩니다.  


 


-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경건생활이 중요하지만 경건 생활 자체나 그런 생활을 하는 자기 자신에게 초점이 맞추어질 때 어리석게 행동을 합니다. 이 모든 일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하나님이 허락하신 성령의 역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처럼 처음에는 성령의 역사나 은혜의 믿음을 강조하다가 시간이 가다보면 원래의 의미는 잊어버리고 그저 종교적인 활동에 빠진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나 나의 관심사가 성령의 역사하심입니까? 아니면 그냥 나 개인의 의욕입니까? 성령으로 시작했다면, 성령을 따라 계속 살아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믿음과 율법의 행위 중 어느 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보장하는지 가늠하는 잣대가 됩니다. 갈라디아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오늘도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자에게 역사하십니다.  


 


머지않아 개솔린으로 움직이는 자동차를 밀어내고 전기자동차가 대세가 될 것입니다. 전기자동차를 계속 운전하다 보면 배터리 속에 있는 전기 용량이 자꾸 떨어집니다. 배터리를 발전기나 외부에서 재충전을 받지 않으면 전기자동차는 멈추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능력은 우리 속에 항상 충만하게 있지 않습니다. 외부로부터 채움을 받아야 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성령을 받은 것은 특별한 의식을 행하거나 종교적 관습을 따르거나 율법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성령 충만을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습니까? 첫째로 회개할 때 성령이 임하십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 2:38-39). 죄악 된 삶을 청산하고 주님께로 돌아올 때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합니다. 둘째로, 기도할 때 성령의 능력이 회복됩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셋째로, 말씀을 들음으로 성령이 임합니다.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행 10:44-46).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복음을 증거할 때에 말씀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넷째로, 순종할 때에 성령이 임합니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행 5:32). 때로 힘들지만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으로 알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합니다. 회개하면서, 기도하면서, 말씀을 들으면서, 순종하면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 진리의 터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바울이 은혜와 믿음을 강조하였다고 해서 구약 성경을 무시한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바울의 가르침이 구약성경에 부합됨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율법을 지키라고 강조한 구약이 이미 율법의 조항을 다 지킨다고 해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 아님을 암시하고, 그로 인한 저주에 대하여 말하면서도 그 저주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메시아에 대해 이미 예언하고 있습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을 지키는 것 같았지만, 사실상 구약성경의 메시지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셈이었고, 바울은 구약성경을 반대하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 그 메시지를 새롭게 전달한 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지 않으면 잘못된 교리에 빠져 복음의 진리를 부인하는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말씀을 온전히 붙잡을 때 우리는 잘못된 길로 미끄러지지 않습니다. 신구약 전체를 흐르는 ‘믿음을 통한 의’에 대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성경을 보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시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말씀은 우리의 인생을 이끌고 성공적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므로 우리 모두 말씀의 기초 위에 든든히 서야 합니다. 


 


나가면서


바울은 성령으로 시작해 육체로 마치려는 갈라디아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책망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인한 것임을 강조합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도 믿음 때문이었고, 모든 이방 민족이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 것도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율법적이 되어 그리스도의 은혜를 흐리지 않게 해야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 함을 받았다하여  함부로 행동함으로 경건의 모습을 잃지 않도록 균형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성도의 삶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삶은 자기의 죄악 된 욕심을 주님 앞에 내려놓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은 믿음에 든든히 서서 성령의 인도함으로 지속적으로 받으며 진리의 터 위에 굳게 서는 삶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의 합한 청지기들이 되고, 한 마음이 되어 신앙을 경주를 하게 되고, 세상에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는 예수님의 흔적을 지닌 교회로 지어져 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