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계시로 받은 바울의 복음

Author
Myung Myung
Date
2022-01-16 20:33
Views
305


살다보면 사람들에게 비방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 그런 비방을 받으면 기분이 좋을 리 없습니다. 그럴 때 보통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터무니없는 모함이라고 목청을 높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말한 사람을 찾아가 따지기도 합니다. 그래도 분이 안 풀리면 하던 일을 팽개쳐 버리기도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변함없이 자기가 맡은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어떠했습니까? 사역하면서 바울처럼 비난과 박해를 많이 받은 사도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셨다는 소명감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열정과 헌신이 없었다면 그는 도중에 사역을 포기하였을지 모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에 이어 자신이 전한 복음의 신적 기원을 밝힙니다. 자신이 전하는 복음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임을 강조합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부르심 받기 전후의 자신의 행적을 소개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끝까지 충성스럽게 감당하려는 바울의 모습을 통해 사명자로서의 삶을 본받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의 계시(11-12절)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주의자들은 바울을 어떻게 공격하였습니까?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복음에 대해 배웠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바울이 사람들에게 영합하는 자요 자칭 사도라고 비난했습니다. 얼마나 터무니없는 모함입니까? 바울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성령에 충만하여 사명감에 불타고 사역에 많은 열매를 거둔 사도가 그런 비난을 받는다면 부족한 우리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라고 하면서 말문을 엽니다. 얼핏 보면 처음으로 공개되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말하려는 내용은 그들이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았다거나, 예수님을 알기 전 그의 행동, 그리고 다메섹 경험을 그들과 나누지 않고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13절에서 ‘너희가 들었다’고 말합니다. 바울로부터 처음 복음을 들었을 때 그들은 바울에게 육신적인 연약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열광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4:13). 그런데 지금은 가만히 들어와 교회를 소란케 하는 거짓 형제(1:7; 2:4)들의 선동에 넘어가서 다른 복음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 다른 복음은 사실 복음이 아닌 거짓 복음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바울은 복음의 진리가 왜곡된 상황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는 의지를 보여 줍니다.


 


자신의 사도직이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님을 단호하게 선언한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도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바울이 갈라디아를 처음 방문했을 때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전한 복음을 가리킵니다. 그 복음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배운 것도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그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하면서 복음의 출처를 분명히 합니다. ‘그리스도의 계시’에서 그리스도를 소유격으로 볼 수도 있고 목적격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계시의 주체로 보면 그리스도가 계시하셨다고 할 수 있고, 계시의 내용으로 보면 계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시’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나님께 소명을 받을 때 경험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경험을 바울도 했음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의 종은 자원자가 아니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회심 전의 바울(13-14절)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자신이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삶에 놀라운 변화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회심하기 전의 자신에 대해 두 가지 사실을 밝힙니다. 교회의 박해자였다는 것과 유대교의 열렬한 신봉자였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5-6을 보면 “내가 팔 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고 합니다. 열성적인 유대주의자로서 바울은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자신이 미워하는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인 것을 알지 못했기에 그는 교회를 심히 박해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없애버리려고까지 했습니다. 나보다 하나님께 열심인 사람 있으면 나와 봐. 그것이 회심 전의 바울의 태도였습니다. 바울은 유대교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데 그의 많은 동년배들보다 뛰어났으며,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유대교 전통에 대해 남다른 열정을 가졌습니다. ‘조상의 전통’이란 랍비들의 율법 해석과 적용 지침인 ‘구전법’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그가 쓴 다른 편지들을 통하여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회상합니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고전 15:9).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3). 바울이 회심 전의 자기의 모습을 밝히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그가 가진 복음이 유대교의 전승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유래되었거나, 그가 받은 유대교 교육에서 얻어진 것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자신의 출신이나 교육여건, 복음에 대한 극단적인 대립 상태에서 자기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전혀 없었는데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 놀라운 변화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15-16a)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바울은 독실한 유대교 신자였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었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 3:6)였습니다. 스스로도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은 물론, 다른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을 참을 수 없을 만큼 율법에 대해 ‘열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가 다메섹에 간 이유는 박해를 피해 다메섹에 간 교인들을 예루살렘으로 붙잡아오려 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직접 만났습니다. 그 체험 이후 바울의 삶에 일대 전환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인생의 전환을 회심(conversion)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이 교회를 열심히 박해한 것이나 율법에 대하여 가졌던 열심을 본다면 바울은 복음을 전할 자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정죄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는 바울이 지은 죄를 덮고도 남았습니다. 바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그렇게 싫어하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까? 이 놀라운 전환의 계기가 다메섹 사건입니다. 다메섹 사건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바울에게 계시하신 사건입니다. 바울의 다메섹 경험은 사도행전에서 9장, 22장, 26장에 걸쳐 세 번이나 나옵니다. 그만큼 바울의 회심이 교회에 미친 영향이 컸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바울에게 그리스도를 계시하시고 기뻐하신 때는 바울이 열심으로 교회를 박해하던 때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기쁨을 ‘예정의 성취’에서 찾고 있습니다. ‘예정의 성취’속에 행위로 말미암지 않은 은혜의 계시가 담겨 있습니다. 또한 바울이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세워진 것은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루어진 하나님의 택하심과 다메섹 도상에서 그를 부르신 부르심에 의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택하심 없이 부르심이 있을 수 없고 부르심이 있는데 택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회심 이후의 바울(16b-24절)


바울은 회심 이후에 자기에게 일어난 일들을 언급합니다. 바울은 회심하자마자 복음을 전하였다고 하면서 자기가 받은 계시는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며 다른 사도들을 통하여 듣고 배운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힙니다. 이 말은 다른 사도들과의 교제의 필요성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그가 전하는 복음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것들은 바울이 자세히 알지 못하였기에 회심한 후에 다른 사도들이나 믿음의 형제들로부터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계시를 받은 바울이 어떻게 했습니까? 첫째,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곧’이란 시간적 부사는 바울이 계시를 받은 후 지체 없이 행동했다는 의미입니다. ‘혈육’은 친척이라는 뜻이 아니라 피와 살, 즉 ‘인간’을 가리키는 유대교 숙어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사건 직후 자신의 소명과 복음에 대해 다른 사람들과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사도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바울보다 먼저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임한 계시의 의미를 사도들에게 묻거나 사도들의 승인을 받으려고 가지 않았습니다. 그의 복음이 그들에게서 기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회심 이후의 바울의 행적이 어떠한가요?


 


- 아라비아와 다메섹


바울이 아라비아로 간 목적에 대해서는 해석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습니다. 아라비아 광야에서 바울은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면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준비를 했을 것이라고 낭만적인 추측을 많이 합니다. 로마 행정 구역인 아라비아는 요단 강 남동쪽에서부터 시나이 반도 하단에 이르는 지역입니다. 당시 그곳에는 나바티안 왕국이 있었습니다. 고후 11:32,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 새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여기에 언급된 아레다 왕은 당시 나바티안 왕국의 왕 아레다 4세입니다. 그의 신하들이 바울을 체포하려고 당시 나바티안 왕국의 국경 밖에 있던 다메섹까지 쫓아왔다는 것은 바울이 아라비아에서 그들 보기에 무엇인가 적대적인 행동을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조용히 묵상하며 사역을 준비하는데 왜 바울을 잡으려 했겠습니까? 바울은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파하는 사명을 독자적으로 수행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회심 이후 복음 전파에 힘썼습니다. 


 


- 예루살렘 


아라비아에서 3년을 보낸 후에 바울은 비로소 베드로를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 그가 베드로를 만난 기간은 고작 15일에 불과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자신의 행적을 언급하는 이유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사람들에게 배운 이론도, 신념 체계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전하는 것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임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방문’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탐구, 연구’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단지 베드로를 문안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이 아니라 그를 만나 자기가 전하는 복음을 나누고 함께 검토하려던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 외에는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진실성을 강조하는 것은 자신의 복음과 사도직의 독자성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 수리아와 길리기아 


바울은 예루살렘을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갔습니다. 수리아는 안디옥이 있는 곳이고, 길리기아는 그의 고향 다소가 있는 지방입니다. 몇 년 후에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의 사역을 위하여 바울을 부를 때까지 바울은 길리기아에 머물렀습니다. 바나바가 바울을 불렀다는 것은 바울이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동안 복음 사역을 잘 수행함으로 많은 전도의 열매가 있었던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에 있는 교회들은  바울의 얼굴도 모르고 그와 개인적인 친분도 없었습니다. 다만 그들이 바울에 대하여 아는 것은 바울이 전하는 믿음이 자기들과 가진 것과 같은 믿음이라는 것과 전에 열정적으로 교회를 박해하던 바울이 변화되어 이제는 그 복음을 전한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의 삶에 일어난 놀라운 변화가 분명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믿음’이라고 부른 이유는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유대의 교회들이 자신의 복음 전파 사역과 자신이 전파하는 복음의 내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음을 부각시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과 이방인을 위한 사도직의 정당성을 강조합니다.  


 


* 우리의 자세


- 택하시고 불러주신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열심히 박해하고 있었는데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바울의 회심 사건은 하나님이 한 개인의 삶에 개입하실 때 얼마나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줍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구주라는 것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과 그를 믿고 따르는 무리가 하나님을 훼방하는 자들이라고 확신하고 스데반이 순교하는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행 7:58). 바울은 조상들의 가르침과 율법에 대한 열심으로 교회를 박해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명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경험은 바울을 근본적으로 뒤집어 놓았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 9:4-5) 주님의 말씀은 바울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깊게 파고들어갔을 것입니다. 아마 그 말씀이 계속해서 바울의 귓전을 울리며 그의 마음을 찔렀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행한 행동이 실상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회심의 과정에서 그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회심은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8에서 말씀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부족함, 악한 것까지도 아시는 주님. 그럼에도 우리를 택하셔서 자녀를 삼으시고 복을 주십니다. 바울을 택하신 하나님은 은혜 가운데 우리를 또한 택하시고 부르십니다.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겸손하게 그분께 나아가야 합니다.  


 


- 복음을 제대로 깨달아야 합니다


다메섹 도상에 햇빛보다 강렬한 빛이 바울을 비추었을 때 바울은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고 눈이 멀었습니다.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손을 얹자 그의 육신의 눈만 회복된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 회심하기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하면서 그 동안 알거나 배운 모든 구약의 지식들을 예수님과 연결시켜 보았을 것입니다. 또한 아나니아를 비롯한 믿음의 형제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이 경험한 그리스도, 그들이 알고 있는 복음, 그 동안 주님이 주신 능력으로 성도들이 행한 놀라운 일들을 들으며 주님과 복음에 대한 영적인 이해가 더 깊어지고 넓어지게 되었습니다. 구약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보게 되니 성경이 열렸습니다. 구약에 등장하는 인물, 사건, 절기, 선지자들의 예언 등이 전부 예수님을 가리킨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을 알고 우리를 알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면서 주님이 계시하신 복음을 떠나 다른 복음에 오염되지 않도록 진리의 말씀을 굳건하게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 안에 굳건하게 설 때 삶이 변화되고, 하나님은 우리의 변화를 통해 주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역사하실 것입니다.


 


-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바울이 이전에 알던 하나님은 창조주요 인생의 주관자 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바울 개인의 신념이 빚어낸 하나님의 허상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바의 영안이 떠지자 자신이 박해했던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자신의 죄악됨과 부족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전에 그렇게 소중하다고 붙들었던 것을 다 버리고 보다 귀한 것 보다 가치 있는 것, 영원한 것을 위하여 자기 생을 드리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불과 며칠 전까지 박해하던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나니 그를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곧 여러 회당에 들어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했습니다. 구약 성경을 이용하여 예수님이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임을 증명했습니다. 회당에서 바울의 말을 듣는 사람들은 불과 며칠 사이에 바울에게 일어난 변화에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핍박자 바울이 전도자 바울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방인 전도를 위한 사명을 본격적으로 수행했습니다. 복음 전파의 역사는 지금도 하나님이 택한 사람들을 통하여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성도의 궁극적인 관심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뒤를 이어 이제는 우리가 영혼 구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나가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르심은 바울로서는 결코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를 예수님의 증인을 삼고자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1세기 초대 기독교 신앙 공동체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교사요 예수님의 증인인 바울을 지체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민족적으로 유대, 지역적으로는 예루살렘이라는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새 언약의 백성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다메섹에서 바울은 인생의 주인이 바뀌는 경험을 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삶을 이끄시고 돕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부르심에 응답하여 나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던 바울에게 찾아오신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찾아오십니다. 자기의 상황, 현재의 모습을 인해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기 바랍니다. 이 모습 이대로 받으시는 주님입니다. 아무리 부족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우리에게도 놀라운 변화가 나타나서 전에는 할 수 없던 일들을 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된 것을 인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의 능력을 받아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알고 자기를 알 뿐 아니라 각자를 향한 주님의 뜻을 깨달으며 순종하면서 주님이 원하시는 풍성한 열매들을 삶의 현장에서 거두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