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다른 복음은 없나니

Author
Myung Myung
Date
2022-01-09 14:21
Views
331

짝퉁은 화려한 포장이나 광고를 통하여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이 보이게 하면서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영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은 속이는 자입니다. 그리스도를 모방하여 적그리스도가 있고 선지자를 모방하여 거짓선지자가 있습니다. 복음이 있으니 다른 복음이 존재합니다. 다른 복음에 물들면 진짜 그리스도인이 아닌 짝퉁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분들은 성경이 말씀하는 구원의 길로 확실하게 가고 있습니까? 혹시 진짜와 짝퉁을 분별하지 못하여 짝퉁을 붙들고 있으면서 진짜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지는 않습니까? 오늘날의 교회에도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한 것과 같은 다른 복음이 있기에 주의를 요합니다.  


 


갈라디아서의 저자는 바울이고 수신자는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입니다. 갈라디아는 하나의 도시가 아니라 소아시아 중앙에 위치한 지역 이름입니다. 아마도 바울이 1차 선교 여행 중에 방문한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등이 포함된 지역일 것입니다(행 13:13~14:28).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1차 전도 여행을 마친 후인 48~50년 혹은 3차 전도 여행 중인 54~56년에 쓰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근거지로 한 율법주의자들이 갈라디아 지역까지 와서 그릇된 주장을 펼치니 적지 않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미혹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2:4에서 ‘거짓 형제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바울이 사도가 아니라고 깎아내렸습니다. 바울이 사도가 아니라면 그의 가르침을 따라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세우고 얼마 되지 않았는데 교인들이 복음에서 속히 떠나 버린 상황을 알게 되자 바울 자신을 변화시켰던 복음, 자신이 전했던 참된 복음이 갈라디아 교인들 사이에서 다른 복음으로 변질되는 것을 보면서 참된 복음으로 돌아올 것을 권면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격렬하고 공격적 어조로 편지를 씁니다.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하고, 복음을 왜곡하는 대적자들에 맞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증하며 ‘다른 복음’을 쫓는 갈라디아 교인들의 어리석음을 책망하고 설득합니다. 그러다 보니 바울의 다른 서신들은 대부분 수신인들로 인한 찬송과 감사로 시작되는데, 갈라디아서는 긴장감 있는 어투로 시작합니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도의 모습이 무엇인지, 복음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주님 뜻대로 순종하면서 예수님의 흔적을 지닌 교인들로 지어져가기를 바랍니다.  


 


사도권의 변호(1-2절) 


바울이 편지 서두에서 자신을 어떻게 소개합니까?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주어는 ‘바울’인데 그 앞에 수식어가 왜 이렇게 깁니까? 바울의 사도직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전서 1:1에서 베드로는 자신을 어떻게 소개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 간단합니다.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베드로가 사도임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통상적으로 사도로 인정받기 위한 자격은 공생애 기간 중 주님과 함께 있던 자,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본 자,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직접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공생애 기간에 예수님과 함께 있지도 않았고,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도 그 자리에 없었고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셨을 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을 사도라고 주장하니 그의 대적들은 바울의 사도직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사도직을 의심하는 무리가 있는 교회들에게 편지할 때는 반드시 그 서두에 자신의 사도된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합니다. 더구나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들과 더불어 편지를 보낸다고 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떠나려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바울과 함께 하는 형제들이 있다는 사실은 바울의 주장에 신뢰성을 더해줍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는 것의 의미는 사도직이 사람들이 만든 직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앞에서 사람을 복수형으로 사용했는데, 여기서는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바울의 사도직이 베드로나 야고보, 요한과 같이 어떤 특정한 인물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사도라는 특별한 지위를 강조함으로 자신의 복음이 거짓 선생들과는 그 권위에서부터 다름을 강조합니다.  


 


교인들을 향한 축복(3절)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강조하면서 성도들을 축복합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자신에게 주어진 사도직이 그리스도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듯이 ‘은혜와 평강’도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기를 기원합니다. ‘은혜’가 아무런 자격이 없는 자에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선물을 표현이라면, ‘평강’은 그 선물이 각 개인에게 적용된 결과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사랑과 인도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평강은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풀려지고 온전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샬롬의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평강을 선포하셨습니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예수님께서 사탄의 권세 아래 놓여있던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결과, 우리가 이 은혜와 평강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비록 이 세상 안에 살지만 더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으며, 죄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내어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일을 행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마땅히 영광을 돌리며, 오늘 하루도 그분이 행하신 일을 감사함으로 누리고, 내가 가는 곳마다 그분의 영광이 선포되기를 열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4-5절)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속죄제물과 화목제물로 드리신 일입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입니다. 이 속죄의 희생으로 인해 우리가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희생이 우리에게 죄 사함만 가져다 준 것이 아니요 우리로 하여금 하늘에 속한 자로서 세상에 대해 죽고 하나님에 대해 사는 삶을 살게 했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에 의해서 완성되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되신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하나님에 의하여 그가 부활하셨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것이기에 ‘다른 복음’은 필요 없으며 구원을 얻기 위해 또 다른 무엇이 필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우리가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영원한 생명을 얻는 통로입니다.    


 


은혜에서 떠난 다른 복음(6-7절)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그의 불편한 심기를 드러냅니다. 다른 복음을 좇는 것은 어리석다고 합니다. 바울은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은 예수님을 믿는 자일뿐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자로서, 할례를 받아 유대인의 계보에 속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오신 후에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의 눈에 갈라디아 교인들은 할례, 음식법, 절기 등을 지키지 않는 등 부족한 자들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또한 바울이 예루살렘 사도들과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에 오래 머물며 사역하지 않았기에 바울의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교인들은 거짓 형제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할례를 행하고 음식법이나 유대교 절기들도 지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대적자들은 실제 예루살렘 사도들이 보낸 자들이 아니며, 사도들보다 훨씬 더 엄격한 율법 준수를 요구하는 바리새파 유대인 그리스도인인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단의 주요 전략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은혜의 말씀을 받지 못하도록 방해를 합니다.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하거나 빼면서 복음을 변질시키려고 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사단의 도구가 되어 바울이 전한 복음을 의심하게 하고 그의 사도직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바울은 복음을 ‘은혜의 복음’과 ‘다른 복음’으로 구분합니다. ‘은혜의 복음’은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해준 복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담당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해결되고 그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이 주어진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반면에 ‘다른 복음’은 율법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와 전해준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믿음과 행위, 은혜와 율법을 섞어 넣은 변질된 복음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을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이상히 여겼습니다. ‘은혜로 부르심’은 행위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선물로’‘값없이’주어진 것임을 의미합니다. ‘이같이 속히 떠나’라는 말은 ‘시간적으로 빨리’라는 뜻보다 ‘그토록 쉽사리’라는 뜻이 더 강합니다. “속히 떠나”라는 말은 군사 용어로 탈영하는 것과 같은 행위를 말합니다. 아마 갈라디아 교인들은 율법주의자들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면서도 자기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나 하나님을 떠난다고 생각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6절에서 ‘떠나다’에 해당되는 동사가 현재시제를 취하고 있으므로 지금도 그들 중에 떠나는 자들이 있지만 아직 모든 교인들이 다른 복음을 받아들인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바울이 전한 복음에 여전히 충실한 교인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대적자들의 그릇된 가르침의 결과, 일부 교인들은 참된 복음의 진리에서 떠나 다른 복음을 좇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그 다른 복음이 아예 복음도 아니며, 그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방법이나 형식은 달라질 수 있으나 복음의 핵심은 변할 수 없습니다. 복음의 핵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우리는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를 영접하기만 하면 그가 예비하신 구원에 참여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참된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의 죄가 해결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영생이 주어졌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새로운 은혜의 길을 주셨는데 또 다른 구원의 조건을 찾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오늘날도 성도들의 불완전한 모습을 비난하며 믿음의 교리 외에 행위를 강조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을 변질시키는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님만으로 충분하고 은혜만으로 충분하고 믿음만으로 충분합니다.  


 


다른 복음에 대한 경고(8-10절)


바울은 8절과 9절에서 중복된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보다 명료하게 강조합니다. 바울 자신이나 하늘에서 온 천사라 할지라도 ‘바울이 전한 복음’곧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에게서 받은 복음과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저주”는 본래 율법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에서 쫓아내는 벌을 가리키는 것으로 가장 가혹한 형벌입니다(신 13:1-10). 심지어 바울 자신이라 할지라도 자기가 이전에 전한 복음을 바꿀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이 말은 사도권을 가진 바울 자신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할 뿐이지, 자기의 사도권이 복음을 초월할 수 없음을 나타냅니다. 거기에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요란케 하는 자들이 누구든지, 그들이 심지어 사도들이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저주를 받아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는 것이 곧 바울에게 사도직을 부여하신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헛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더라도 할례를 받아 유대교로 개종하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할례를 받고 유대교로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유대교에 관심을 갖고 율법을 배우고 회당 예배에 참석하는 이방인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들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불렀습니다. 예를 들면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행 10:22).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나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 부담이 되어 쉽게 유대교로 개종하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해 할례와 율법 준수 없이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는 길, 즉 믿음으로 구원 얻는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 중 대부분은 기쁨으로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 들였습니다. 거짓 선생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은 헬라인들을 기쁘게 하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기쁘게 하지 못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면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질문을 던집니다. ‘좋게 하랴’로 번역된 단어는 ‘설득하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10절을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지금 설득하고 있는 대상이 하나님인가 아니면 사람들인가’라는 뜻입니다. 설득의 목표는 상대방의 동의를 얻어 기쁨을 구하는 데 있습니다. 만약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사람들을 설득해 그들의 기쁨을 구하는 복음이라면 그것은 거짓 복음임이라고 합니다. 만약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라면 자신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통한 ‘설득’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을 향하며 그분의 기쁨을 구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자신을 부르신 분의 말씀만 전했고, 그분이 원하시는 삶만을 살았습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주인이신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예수님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것 같아 염려하고 다른 길을 찾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자세


- 복음을 바르게 붙들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에 대해 강력하게 변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주된 관심사는 사도권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전한 복음의 정당성에 있습니다. 바울의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 섭리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으심과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부활을 기초로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의지하는 것 외에 다른 행위의 필요성을 덧붙임으로 복음을 변질시키면, 그것은 다른 복음이 되어 버립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다른 복음에 의해 믿음이 흔들렸고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 위에 세워집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고 교회는 구원의 통로입니다. 따라서 구원에 이르는 길에 있어서 예수님 이외에 다른 복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거짓 복음의 미혹은 사도 바울 당시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 시대에도 세상의 기호와 가치에 영합하여 십자가의 복음을 퇴색시키고 변질시키는 다른 복음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에 미혹되면 안 됩니다. 그러려면 복음의 진리를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나아가 그 복음을 분명하게 선포하고 가르치고 전하는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교회적으로도 중직자 훈련이 끝나면 봄부터 일반 교우들을 대상으로 말씀을 공부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하니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 복음으로 회복시켜야 합니다


문제에 대처하는 바울을 통해 두 가지 귀중한 교훈을 얻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들의 문제는 복음의 변질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 중심적인 복음의 이해를 갈라디아 교회 문제해결의 전제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복음의 제시를 통해 교회를 회복시키려고 했습니다. 우리도 많은 교회의 문제들을 해결할 때 이러한 복음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삼아야 합니다. 먼저 말씀 위에 든든히 서야 합니다. 또한 바울은 교인들이 은혜의 복음을 떠나며 자기가 수고한 것이 헛될 지경에 이르렀고, 심지어 그들에게 저주를 선포해야 하는 처지에 있었어도 갈라디아 교회들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교인들을 ‘형제들아’혹은 ‘나의 자녀들아’라고 부르면서, 그들을 복음으로 회복시키려고 했습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목회자로서의 바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 주변에 아직도 복음을 모르는 자들이 있습니다. 복음을 접하기는 했지만 그 뿌리가 깊지 못해 다른 복음에 유혹을 받는 자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의 복음에 든든히 선 뒤 우리 주변을 돌아보아 연약한 자들을 복음으로 회복시켜야 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전서 2:9에 의하면 성도는 하나님이 만세 전에 선택하신 백성이요, 왕이신 하나님을 모시는 자녀로서 그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하나님이 구별해서 부르신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값을 주고 사셔서 구속하신 그분의 소유된 자들입니다. 성도의 사명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은혜를 세상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가정이든, 직장이든, 학교든 하나님을 기뻐하시는 일을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작은 것부터 구체적으로 실천해하며 복음으로 회복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나가면서


바울은 하나님은 누구신지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소개할 때 늘 하나님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은 사도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영적 권위와 사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다는 분명한 확신이 수많은 자격 시비와 공격으로부터 그를 지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보내심을 받고 이 땅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고, 주권자 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복음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선포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라고 요약했습니다. 사람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죄인이 받을 형벌을 대신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복음을 변질시키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허물려는 사탄의 시도는 계속됩니다. 참된 복음을 붙들고 우리 자신부터 참된 복음의 기초 위에 든든히 설 뿐 아니라 우리의 이웃에 다가가서 복음을 나누며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고 회복시켜야 합니다. 이런 자세로 살아갈 때 성도들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풍성하게 임합니다. 2022년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금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수고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