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새 예루살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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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3-09-03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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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계 21:9-27


‘버킷 리스트’란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것들을 정리한 목록을 의미합니다.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것, 한번 해보고 싶은 것 등. 국립국어원에서는 외국어인 버킷 리스트 대신 ‘소망목록’이라는 단어를 제시했습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분들은 어떤 버킷 리스트를 갖고 있습니까? 지금까지 다녀본 곳들 중에서 어느 곳이 제일 아름답거나 인상적이었습니까? 가보지는 않았지만 기회가 된다면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어디입니까?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허락하신 가장 좋은 곳을 제시합니다.

계시록 21~22장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궁극적으로 어디로 초대하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어린양의 신부로서 마지막에 완성될 교회의 모습입니다. 1-8절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 다루고 난 후 본문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집중적으로 다룹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으로 인해 그 성은 아름답고 장엄합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이 새 예루살렘의 성전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새 창조를 통해 에덴의 영광과 교제를 회복하시고,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을 그 생명과 그 영광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새 예루살렘에 보이는 보석과 아름다운 모습은 교회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영광스럽게 완성될 것을 암시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자들로서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할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9-11절)
요한에게 말한 천사는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입니다. 일곱 천사들은 아마겟돈 전쟁에서 용과 두 짐승 그리고 바벨론과 같은 악의 세력을 제거하는 일을 주도했습니다. 이런 역할을 감당한 천사가 새 예루살렘을 소개하기 위해 등장합니다. 악의 세력을 제거하는 것과 새 예루살렘의 등장이 밀접하게 연관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대접에 담겼던 재앙이 전부 옛 땅에 쏟아졌기에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더 이상 진노의 대접이 필요 없습니다. 천사가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고 말합니다. ‘보이리라’는 ‘세상에 알리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신부를 공식적으로 소개할 것이라는 의지를 나타냅니다. 신부에 대해 ‘어린양의 아내’라고 부연한 이유는 십자가의 희생을 치르고 얻은 아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내어주시고 교회를 아내로 삼으셨습니다(엡 5:25). 음녀가 심판의 대상이라면 어린양의 아내는 구원의 대상입니다.

요한을 황량한 광야로 데려가서 큰 음녀 환상을 보여주셨던 성령께서(17:3), 이번에는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어린양의 아내인 ‘거룩한 성’예루살렘의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라는 표현은 성령의 감화에 의한 ‘예언적 환상 상태에서’보는 것을 뜻합니다. ‘데리고’는 문법적으로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의 공간 이동을 나타내는데, 강제적으로 이끌고 갔다는 뉘앙스를 내포하여 천사의 강권적 행위를 암시합니다. 결혼식 날 신부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단장합니다. 순결하고 고귀한 신부의 모습에 많은 하객들이 기대와 기쁨에 찬 환호를 보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임하는 새 예루살렘의 모습도 이와 같습니다. 신부가 남편을 위해 단장한 것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옵니다. 그런데 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떠나신 적이 있습니다.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전에 하나님은 예루살렘과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온갖 가증한 일들을 피해 떠나셨습니다(겔 8~11장). 그 모습에 안타까워했던 에스겔에게 하나님은 시온 산에 새롭게 세워질 새 예루살렘의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겔 40~48장), 그러나 에스겔은 새 성전이 건축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이 하신 약속을 결코 잊지 않으셨습니다. 마침내 새 땅에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내려 보내십니다. 요한이 그 광경을 보며 경이로움을 인해 감격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이는 지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잃은 옛 예루살렘과 대조를 이룹니다. ‘영광’을 뜻하는 히브리어는 ‘코보드’인데 ‘육중하고 무겁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이 무겁고 귀함을 의미합니다. ‘영광이 있어’에서 ‘있다’는 ‘갖다, 소유하다’는 뜻을 가진 현재 분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소유하시지 않은 순간이 없음을 말해 줍니다. 이‘영광’(쉐키나)은 지성소에 임하던 하나님의 영광으로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이 표현은 에스겔 43:5을 생각나게 합니다. “영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더라.”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 되었다가 돌아올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 위에 있었던 것을 반영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영원한 빛이 되어주시겠다는 약속의 성취를 가리킵니다(사 60:1,2,19). 헬라어에서 ‘빛’으로 번역되는 단어가 둘 있습니다. ‘포스’는 빛 자체를 가리키고, ‘포스테르’는 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체를 가리킵니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에서 ‘포스테르’가 사용됩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빛’은 스스로 반짝이는 빛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나는 빛을 의미합니다. 성도가 영화롭게 되는 것은 그 자체의 공로나 선행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임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의 외적 영광(12-21절)
요한이 크고 높은 산에서 새 예루살렘을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곽이 ‘크고 높다’고 한 것은 그 크기와 높이가 상당하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 줍니다. 요한은 새 예루살렘성을 묘사하면서 열두 문과 성곽에 있는 열두 기초석을 언급합니다. 새 예루살렘에는 열두 문이 달린 크고 높은 성벽이 있습니다. 열두 천사가 열두 문을 지키고 있습니다. 열두 천사가 열두 문을 지키는 것은 어떤 위협 때문이 아닙니다. 모든 악은 이미 심판을 받은 상태입니다. 그것은 새 예루살렘에서 누리는 복된 삶의 완전함과 영원함을 상징합니다. 열두 문들 위에는 열두 지파의 이름이, 열두 기초석 위에는 열두 사도의 이름이 쓰여 있습니다. 에베소서 2:20에 따르면 성도들은 사도와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졌습니다. 열두 지파는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모든 백성을 의미합니다. 열두 지파가 구약의 배경을 가지고 있다면, 열두 사도는 신약시대에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세워진 교회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열두 지파와 열두 사도는 구약과 신약을 아우르는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교회의 열두 사도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연결시킨 것은 속량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루는 통일성과 연속성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새 예루살렘이 구약과 신약의 백성으로 이루어진 장엄하고 완전하고 완성된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천사는 거룩한 성을 측량하기 위해 금으로 된 갈대 자를 가졌습니다. ‘네모가 반듯하다’는 것은 예루살렘 성이 세워진 상태가 완전하고 온전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새 예루살렘은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은 정육면체입니다. 이 형상은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를 연상시킵니다. “그 내소의 안은 길이가 이십 규빗이요 너비가 이십 규빗이요 높이가 이십 규빗이라 정금으로 입혔고 백향목 제단에도 입혔더라”(왕상 6:20). 새 예루살렘의 한 변의 길이가 12,000스타디온인데 약 2400km에 해당합니다. 성벽의 두께는 144규빗으로 약 65m에 해당합니다. “사람의 측량, 곧 천사의 측량이라”는 표현은 천사가 척량한 치수가 사람이 척량한 치수와 동일한 방법으로 계산된 것임을 말합니다. 췠’과 幐(12x12)’, 그리고 구약의 열두 지파와 신약의 열두 사도는 하나님 백성을 상징하는 12의 배수로 교회의 광대함, 완전함, 영광스러움을 상징합니다.

새 예루살렘을 묘사하는데 사용된 다양한 보석은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는 거룩한 성의 위엄과 아름다움을 상징합니다.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모습을 설명하는데 벽옥과 홍보석과 녹보석이 사용된 것과 비슷합니다(4:3). 한편 지성소가 정금으로 입혀졌는데(왕상 6:20), 새 예루살렘도 정금으로 입혀져 있습니다. 이 땅의 정금은 불투명한 데 반해, 새 예루살렘의 정금은 맑은 유리 같습니다. 이것은 새 예루살렘에 사용된 보석들이 이 땅의 보석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벽의 열두 기초석은 열두 보석으로 꾸며져 있고, 열두 문은 열두 진주로 되어 있습니다. 성의 길도 맑은 유리 같은 정금으로 되어 있습니다. 보석의 이름이 한자말로 되어 있으니 익숙하지 않습니다. 많이 알려진 보석 몇 개를 살펴보면 벽옥은 jasper, 남보석은 sapphire, 녹보석은 emerald, 담황옥은 topaz입니다. 주석들을 보면 벽옥은 무엇을 상징하고, 남보석은 무엇을 상징하고 등등 기가 막히게 그 의미를 설명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단락을 읽을 때 주의할 점은 보석 하나하나의 특별한 의미를 찾고자 하여 풍유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28:17~20에 의하면 대제사장의 가슴에 12개의 보석이 붙어 있는데, 거기에 등장하는 보석들의 이름이 본문과 거의 비슷합니다. 에스겔 28:13에서도 비슷한 목록이 나옵니다.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음이여”또한 이사야 54:11~12도 비슷합니다. “보라 내가 화려한 채색으로 네 돌 사이에 더하며 청옥으로 네 기초를 쌓으며 홍보석으로 네 성벽을 지으며 석류석으로 네 성문을 만들고 네 지경을 다 보석으로 꾸밀 것이며”보석 모티프는 새 예루살렘, 에덴동산, 성전을 서로 연결합니다. 곧 계시록에서의 새 예루살렘은 창세기의 에덴동산이 그 출처이며 잃어버린 에덴동산이 구약의 성전을 통해 회복되었고, 새 예루살렘에서 완전한 모습으로 완성될 것을 의미합니다.

새 예루살렘의 내적 영광(22-27절)
요한은 새 예루살렘성 안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백성 중에 함께 거하심, 즉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데 이제 그 실체이신 하나님과 어린양이 계시니 더 이상 상징물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성에는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다고 합니다. 이는 문자적으로 해와 달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햇빛이나 달빛보다 강력한 하나님과 어린양의 영광이 새 예루살렘을 비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어린양이 새 예루살렘의 ‘성전’과 그 가운데 머무르는 ‘영광’이 되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가운데 장막을 치시고, 새 예루살렘을 당신의 임재로 충만히 채우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는 이사야 60:19의 예언이 성취됨을 의미합니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는다는 약속(요 8:12)이 새 예루살렘에서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새 예루살렘인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찰 그날은 꼭 올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친히 세우시고 함께하시고 영광을 나타내시겠다는 이 임마누엘의 약속이 속히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그곳에는 밤이 없어서 성문들을 닫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는 빛이신 하나님의 영광이 영원히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라는 표현은 이사야 60:11의 예언의 성취입니다. “네 성문이 항상 열려 주야로 닫히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들이 네게로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가져오며 그들의 왕들을 포로로 이끌어 옴이라”성문을 도무지 닫지 않는다는 것은 새 예루살렘을 대적하거나 공격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새 예루살렘은 항상 열려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이 만국으로부터 자기 영광을 가지고 성 안으로 들어올 것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온 자기 영광은 무엇일까요? 이 세상에서 선한 행위를 통해 맺게 된 아름다운 삶의 열매들, 순종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의의 열매들입니다. 우리가 가정과 일터 등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뜻을 받들어 행한 모든 삶의 열매가 영광스럽고 존귀한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렇듯 복된 열매들을 가지고 새 예루살렘으로 모인 구원받은 성도들이 그곳에 함께 거하며 하나님을 섬기며 다른 지체를 온전한 마음으로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구원받은 큰 무리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옵니다(7:9).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는 말씀은 이사야 60:3의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는 말씀을 배경으로 합니다. 열방이 새 예루살렘으로 순례의 길을 걸을 것임을 말해줍니다. 이사야 60장에서 관찰되는 순례의 특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속이 완성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새 예루살렘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 성에 들어갈 자들이 누구인지를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계시는 거룩한 성이므로 속된 것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속된 것”은 ‘세속적인 것, 부정한 것’을 의미하며, 계시록에는 여기서만 나타납니다. ‘가증한 일을 하는 자’는 8절의 ‘흉악한 자들’과 연결됩니다. 성경에는 거짓 선지자들을 거짓말 하는 자들로 묘사한 곳이 많습니다.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지만(20:15),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은 새 예루살렘에 들어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은 거룩한 성도들만이 그 영광스러운 성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세
- 교회다운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새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의 신부요 어린양의 아내로 표현된 교회 공동체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비록 초림과 재림 사이에 많은 고난을 당하지만 결국에는 영광스럽고 온전한 모습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에 대한 상징적 이미지는 교회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임재는 에덴동산 이후에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하고 구별된 공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 성안에는 성전이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성 전체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지성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양이 등불이 되시기에, 해와 달도 필요 없습니다. 따라서 더럽고 불완전하고 죄가 가득한 자들, 즉 어둠에 속한 자들은 결코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직 빛에 속한 자들, 즉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어 속죄함을 받고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칭함 받은 자들입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충성된 삶을 사는 헌신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인지 진단해 보아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다이내믹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까? 전도를 통해 구원의 진리를 전하고 있습니까? 양육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있습니까? 봉사를 통해 주님의 마음으로 섬기고 있습니까? 교제를 통해 주님의 사랑을 이웃과 나누고 있습니까? 부족한 것을 바로 알고 고치면서 함께 부르심에 주님의 뜻에 합당한 교회로 지어져가야 합니다.
- 성도다운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계시록은 우리에게 세상과 타협하지 말고 고난을 감수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섬기라고 요구합니다. 이 땅에서의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상급이 예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에게 가장 큰 상급은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함께 하심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사모해야 하는 것은 새 예루살렘의 각종 보석이 아니라, 그것들이 상징하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계시록에 묘사된 새 예루살렘의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모습은 고난에 직면한 성도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줍니다. 그리스도인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빌 3:20). 이 땅의 삶은 하늘나라의 삶을 준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기쁘고 복 된 날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날을 사모하며 오늘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삶의 자리에서 꾸준히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그리스도를 닮아 감으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럴 때 믿지 않는 자들도 우리의 행함을 보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의 모습은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로 누리는 큰 영광을 교훈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신부다운 거룩한 삶을 요구합니다.

나가면서
본문의 의의는 교회 공동체의 완성된 모습을 볼 수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가 가득한 새 예루살렘의 모습은 장차 영광스럽게 될 교회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친히 거하시는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한 거룩함과 의로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은 먼저 교회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외적 요소들을 들어 묘사했습니다. 새 예루살렘 성 전체가 지성소이며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입니다. 성곽은 벽옥이고, 성과 그 안의 길은 정금으로 되어 있습니다. 열두 개의 성곽 기초석은 각종 보석으로 되어 있고, 열두 개의 문은 진주로 되어 있습니다. 각 문에는 열두 지파의 이름이, 각 기초석에는 열두 사도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구약과 신약의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 아래 하나의 통일된 공동체임을 의미합니다. 요한이 이것을 자세히 묘사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 완전히 드러나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로 임할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지금은 그 나라의 영광이 그림자같이 느껴지지만, 그날에는 온전히 실체가 드러날 것입니다. 거룩한 성과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을 오늘날 우리의 모습, 우리 교회의 모습을 통해 드러내야 합니다. 새 예루살렘, 즉 완성된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 교회가 그리스도께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 땅의 교회가 여전히 연약하고 부족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능력으로 교회를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성도는 새 예루살렘에 거할 그날을 소망하며 하나님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자신과 교회를 세워 나가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자신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훗날 새 예루살렘에서 영광스럽고 완전한 승리를 맛볼 것을 기대하며 오늘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