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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왕국과 최후의 심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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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3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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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계 20:1-6


계시록에서 恚’과 더불어 가장 관심을 끌며 논쟁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천년왕국’입니다. 기독교 초기부터 정통 주석가들 사이에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된 천년왕국의 본질과 시점에 관한 해석이 갈렸습니다. 과연 이 세상과 다음 세상 사이에 천 년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 성경적입니까? 이 세상과 새 예루살렘이 있는 다음 세상 사이에 천년왕국이 존재한다는 개념을 예수님의 말씀이나 바울 서신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말하는 천년왕국을 어떻게 설명해야만 합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이 고난의 현장에서 가졌던 가장 심각한 질문은 하나님의 교회를 무너뜨리는 사탄은 어떻게 될 것이고, 이에 대항하여 계속 피를 흘리는 교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본문을 읽으면서 언제 천년왕국이 올 것인가에 대한 관심보다는 용의 최종적인 운명과 성도들의 최종적인 운명에 대해 알기 원했을 것입니다.

계시록 안에 악의 실체들이 등장하는 순서와 악이 심판을 받는 순서는 뒤바뀌어 있습니다. 등장하는 순서는 12장에서 용이, 13장에서는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그리고 17장에서 음녀로 상징되는 바벨론입니다. 반대로 악의 세력이 멸망하는 순서는 18장에서 바벨론이, 19장에서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그리고 20장에서 용입니다. 그러니까 20장에 이르기까지 비록 하나님 백성을 괴롭히는 원수들과 악의 실체들이 거의 제거되고 있음을 목도했지만, 여전히 악의 우두머리가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천년 왕국의 본질과 시점에 관한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것보다 사탄의 결박과 첫째 부활이 주는 의미를 깨달아 말세를 사는 교회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길을 바로 가야 합니다.

사탄의 결박(1-3절)
본문은 바벨론의 심판과 멸망(17:1~19:10), 두 짐승의 심판과 멸망(19:11-21)에 이어서 악의 세력으로서 용의 심판(20:7-10)을 소개하기 전의 도입 부분입니다. “또 내가 보매”는 새로운 환상을 소개할 때 빈번히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사도 요한은 한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저갱은 ‘밑바닥이 없는 구덩이’라는 뜻으로 사탄과 악령들의 근거지 혹은 감금 장소입니다(눅 8:26-31, 계 9:1, 11:7). 계 9:1-11에 보면 무저갱에서 나온 황충들은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맞지 않은 사람들을 다섯 달 동안 괴롭히며, 그것들의 왕은 ‘파괴자’(아바돈 혹은 아볼루온)라고 불리는 무저갱의 사자입니다. 11:7절에 보면, 무저갱에서 올라온 짐승은 1260일 동안 예언하던 두 증인과 싸워 이기고 그들을 죽입니다. 17:8절에 보면, 큰 음녀가 타고 있던 짐승은 ‘전에 있다가 지금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라고 합니다. 계시록 외에도 무저갱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라사인의 땅에서 만난 ‘군대 귀신’들은 예수님께 자기들을 무저갱으로 들어가라고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눅 8:30-31).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범죄한 천사들을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다고 말했고(벧후 2:4), 유다는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다고 했는데(유 6), 그곳이 바로 무저갱입니다.

“용,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라는 번역보다는 ‘마귀요 사탄인 용 곧 옛 뱀’이라는 번역이 더 낫습니다. 2절은 12:9절과 동일한 표현으로 하나님을 대적한 악한 자에게 대한 호칭을 네 가지로 진술하고 있습니다. ‘용’은 구약성경에서 리워야단, 라합, 악어, 뱀 등으로 불리는 것으로(욥 40:15, 시 74:14, 89:10, 사 27:1, 51:9, 암 9:3)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며 그 머리에는 일곱 면류관이 있습니다(12:3). 이는 하나님을 대항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고 박해하는 존재를 가리킵니다. ‘옛 뱀’은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를 속이던 뱀을 상징하는 호칭으로 ‘속이는 자’를 의미합니다. ‘마귀’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볼로스’는 문자적으로 ‘비방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또한 ‘사탄‘은 ‘대적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본래 일반명사가 아니었으나 후에 고유명사로 바뀌었습니다. ‘마귀와 사탄’은 사람들의 죄를 하나님에게 고소하거나 비방합니다.

사탄은 하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미가엘 천사에게 패하여 땅으로 쫓겨난 바 있습니다(12:7-9). 이제 하늘에서 내려 온 천사가 큰 쇠사슬로 사탄을 결박해 무저갱에 가두고 인봉합니다. 사탄에 대한 통제가 완벽하게 이루어졌음을 뜻합니다. 용은 이런 상태로 천 년을 보냅니다. 여기서 ‘천 년’은 문자적인 천 년을 의미하기보다는 어느 일정 기간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용’혹은 ‘옛 뱀’이라는 상징 때문입니다. 요한이 본 것은 사탄이나 마귀가 아니라 그것을 상징하는 용이었습니다. 따라서 요한의 이 메시지는 필연적으로 상징성을 내재하고 있습니다. 사탄이 결박된 시점은 언제입니까? 2하반절에서 ‘결박하다’로 번역된 동사 ‘에데센’은 마가복음 3:27을 비롯한 여러 구절에(마 12:29; 눅 10:17-19) 나옵니다. 곧 예수님이 사역을 하실 때부터 이미 사탄은 결박되었습니다. 따라서 천년이라는 기간은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은 용이 무저갱에 감금되어 천 년 동안은 세상을 미혹하지 못하게 되었다가 그 후에 반드시 잠깐 놓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용을 천 년 동안 무저갱에 가두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향력을 제어하여 세상을 미혹하거나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백성을 대적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 후에 잠깐 놓이게 된다는 것은 그들에게 영원한 형벌이 예비되어 있음을 암시합니다. 이것은 사탄의 ‘결박’이나 ‘놓임’이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고,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과 통제 속에서 이루어짐을 보여줍니다. 또한 ‘궁극적인 승리’와 ‘확실한 승리’가 보장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현실의 삶에서는 악의 세력이 의의 세력보다 강해 보이고 세상의 권세를 누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탄의 존재를 무시해서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사탄의 존재를 너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악의 세력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아 멸망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사탄과 함께 하나님을 배신하고 사탄의 미혹에 넘어가 악을 따르는 모든 자들이 사탄과 함께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도가 고난 속에서도 의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인내로 걸어가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첫째 부활(4-6절)
요한이 먼저 본 것은 심판하는 권세를 받고 보좌들에 앉아 있는 자들입니다. ‘심판하는 권세’는 사탄의 권세를 이기고 행하는 통치권을 의미합니다(단 7:13-14, 마 19:28, 계 5:10). 계시록에서 보좌에 앉으신 이는 하나님을 의미하고 보좌들에 앉은 자들은 하나님의 왕적인 통치에 동참한 성도를 가리킵니다. 이런 성도는 순교자들이나 고난 가운데서도 신실하게 믿음을 지킨 자들입니다. 그들이 살아서 천 년 동안 왕 노릇하는데 ‘천년왕국’이라는 표현이 여기에서 온 것입니다. ‘천년왕국’은 그 시작이 언제인지를 놓고 많은 논란이 있지만 그 천년 왕국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는 분명합니다. 먼저 천년 왕국은 기나긴 고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신앙의 중심을 잃어버리지 않은 백성들을 위한 나라입니다. 또한 그 왕국은 충신과 진리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나라요, 공의로 다스려지는 나라입니다. 진정으로 살아남은 자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주관하는 생명의 나라이기도 합니다. 천년왕국은 극심한 핍박 속에서 날마다 죽음의 공포를 겪고 있는 의로운 백성에게 주어지는 희망의 상징입니다.

사탄이 천 년 동안 결박당해 무저갱에 갇히고 성도들은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린다고 하는 것과 관련해서 세 가지 설이 대두되었습니다. 전천년설은 천년왕국이 이루어지기 전에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문자적인 천년 동안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한다고 봅니다. 후천년설은 천년왕국이 이루어진 후에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후천년설에 따르면, 복음이 점점 흥왕해 의와 평화의 세상이 도래할 것이고, 그 후에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무천년설은 천년왕국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징일 뿐이며, ‘천 년’을 예수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으로 봅니다. 가장 지지를 많이 받는 견해입니다. 여기서‘무천년’이라 함은 천 년이 없다는 말이라기보다 교회 시대를 천 년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순교자들과 죽임 당한 영혼들이 실상은 죽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살아 있어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고, 땅에 있는 자들도 영적으로 살아 있어 천 년 동안 통치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첫째 부활이라고 말합니다. 전천년설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 시 성도의 첫째 부활이 있고, 천년 왕국 마지막 때에 성도 전체의 부활이 있는데 이를 둘째 부활이라고 합니다. 무천년설에서는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중생하는 것, 즉 영적 부활을 첫째 부활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 때 성도 전체의 육체적 부활을 둘째 부활이라고 합니다. 우리 인생이 누리는 최대의 복은 둘째 사망을 피하고 예수님을 믿어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라고 하셨습니다. 첫째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은 지금도 살아 있고 영원히 살아 있게 될 것입니다. 성도의 고난의 잠시지만 수고가 끝나고 누리게 될 승리는 천 년이며 영원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첫째 부활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만 허락된 복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이 그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또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셔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게 하셨습니다(엡 2:5-6). 첫째 부활의 때에 사탄이 결박되어 무저갱에 들어가게 됩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임하게 하실 때, 사탄의 세력은 이미 힘을 잃고 패퇴하기 시작했습니다(12장). 성도는 부활 소망을 품고 인내하며 사탄의 거짓과 미혹과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그와 더불어 첫째 사망은 모든 사람이 겪는 육체의 죽음을 가리키고, 둘째 사망은 불신자의 영혼이 불과 유황 못에 던져져 영원히 고통당하는 형벌을 의미합니다(21:8). 첫째 사망은 일회적 사건이지만, 둘째 사망은 밤낮 괴로움을 받으며 세세토록 이어집니다(20:10). 첫째 부활이 몸의 부활을 가리키든 영적 부활을 가리키든,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둘째 사망에 해당하는 불 못에 들어가지 않고 천 년 동안 왕 노릇하고, 궁극적으로 새 예루살렘에서 세세토록 왕 노릇할 것입니다. 제사장과 왕의 직분을 동시에 갖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누리는 영광인데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하는 은혜를 누립니다. 베드로 사도는 구원받은 성도들을 향해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벧전 2:9)이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을 소망하며,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서도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이 주는 교훈
7-10절은 용의 궁극적인 멸망을 그려 보여줍니다. 그런데 1-3절에서 용이 현재적으로 이미 패망한 존재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천사가 용을 천 년 동안 결박하고 무저갱에 가둡니다. 무저갱은 10절에 나오는 불과 유황 못과는 달리 사탄의 임시 감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용이 결박되어 투옥되는 장면을 통하여 사탄의 현재적인 상태를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입니다. 사탄은 영적 존재입니다. 영적인 존재가 감옥에 결박되고 투옥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천 년’이라는 기간도 사탄이 활동할 수 없는 문자적인 기간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목회적 관점에서 본다면 요한은 고난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목자의 심령으로 호소하고 있습니다. 천년에 대한 문자적인 적용이 강조되면 성도들은 더 깊은 위로를 받기보다 더 혼란스럽게 될 뿐입니다. 만약 천 년이 문자적으로 존재하게 된다면 성도들은 천년왕국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천년왕국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또한 ‘천 년’은 사탄이 결박된 시기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들 편에서는 승리를 축하하고 통치자로서의 실력을 발휘하는 시기를 지칭합니다. 결국 이 두 가지를 종합하게 되면 천 년 동안의 사탄의 결박은 상징적으로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의 시기에 사탄이 우리를 해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기 위함입니다. 현재 사탄은 이미 망한 존재라는 것을 요한이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악의 세력이 기승을 부리는데 사탄이 패했다고 말할 수 있는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12장에서 이미 사탄은 초림과 재림 사이에 맹렬한 기세로 우리를 공격한다고 주장하는데 20장에서는 사탄이 결박되어 아무런 미혹도 할 수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차이가 나온 이유는 12장의 성격과 20장에서 강조되는 사탄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머리를 상하게 되었습니다. 치명적인 출혈이 시작되었고 곧 쓰러질 것은 기정사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탄은 출혈이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도 칼을 휘두르며 신자를 위협합니다. 12장은 교회의 전투를 독려하는 장입니다. 사탄이 우리를 향하여 눈을 부릅뜨고 삼킬 자를 찾는 모습을 통하여 사탄을 만만한 존재로 보지 말고 경각심을 가지고 허리를 동이고 서 있어야 할 것을 독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0장에서는 지금 하나님 백성을 괴롭히는 악이 마지막에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를 최종적으로 확인시켜 줍니다. 악의 궁극적인 패망을 보이면서 성도들에게 그 악이 현재도 멸망한 상태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사탄의 또 다른 국면에 대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천년왕국을 통해 악의 최종적인 멸망만이 아니라 악의 현재적인 멸망에 대해서도 말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이미 패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탄이 천 년 동안 결박되고, 후에 궁극적으로 패망하는 이유는 사탄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하여 결정적으로 망하여 무저갱에 투옥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이름이 갖는 권세요,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을 만들어낸 위대한 역사요 능력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사탄의 최종적인 멸망 이전에 현재적인 제한(결박)을 말함으로써, 하나님 백성의 ‘궁극적 승리’이전에 ‘확실한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자합니다. 그런데 이 승리는 우리가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마련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천사와 용’의 싸움입니다. 천사를 보냈는데도 쉽게 이겼는데 주님이 오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분이 얼마나 힘 있는 분이신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사탄의 힘을 무서워합니다. 그런데 사탄은 주님이 부리시는 천사에게도 도전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사탄은 신자를 향해 그저 위협하면서 으르렁거릴 뿐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우리가 담대해야 합니다.

나가면서
재림의 날을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재림을 준비하며 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천년왕국 본질과 시점에 관한 논쟁이 아니라, 사탄과의 싸움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승리하셨고 만왕의 왕으로서 통치한다는 사실입니다.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을 비교 연구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천년왕국에 참여할 자로 사는 것입니다. 계시록은 독자에게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요구합니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 천년왕국을 소개한 것입니다. 천년왕국은 짐승을 따르는 안락한 삶 대신에 어린 양을 따르는 고난의 삶을 선택한 자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역할을 합니다. 현재 고난당하는 교회의 모습 속에서 교회의 승리를 어떻게 내다볼 수 있습니까? 성도들은 사탄과 그 추종자들의 권세 아래서 육신의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과 함께 영광스러운 사역에 여전히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음으로 새롭게 거듭난 성도들도 주님의 사역에 쓰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첫째 부활입니다. 이처럼 첫째 부활에 속한 자들은 사탄이 사로잡힌 천 년 동안 왕 노릇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악의 세력에 타협하며 살아가는 자들은 실상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들입니다.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둘째 사망을 면합니다. 그들은 육체의 죽음인 첫째 사망을 각오하고 어린 양을 따른 자들입니다. 그러나 첫째 사망이 무서워 짐승을 따른 자들은 둘째 사망을 겪을 것입니다. 종말론적 상과 벌은 대조적입니다. 어린 양을 따르는 자들은 새 예루살렘에 거할 것이고, 짐승을 따르는 자들은 불과 유황 못에 세세토록 거할 것입니다. 현재 사탄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머리가 손상을 입은 상태입니다(창 3:15). 사탄은 교회를 흔들어 타격을 주고 어려움을 끼치려고 합니다. 성도들을 위협하고 미혹하고 분열시키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탄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결박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열방을 속여 교회 시대에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마 12:28-29; 요 12:31-32). 이 시대의 마지막에 이르러 사탄은 잠시 풀려나 교회에 마지막 공격을 가할 것입니다(20:7-9). 그때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그분의 원수들을 심판하시고, 자기 백성을 도우셔서 새 창조를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러한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사탄의 미혹과 속임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있으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이루는 일에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날마다 승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