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바벨론 심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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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23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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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계 18:9-24


우리가 사는 인생은 희로애락의 연속입니다. 그런 와중에서 기뻐해야 할 때 기뻐할 수 있고 슬퍼해야 할 때 슬퍼할 수 있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지금 무엇 때문에 기뻐합니까, 무엇 때문에 슬퍼합니까? 주님을 인하여 기뻐합니까? 혹시 미혹된 줄도 모른 채 허탄한 기쁨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습니까? 사도 요한은 바벨론의 멸망에 대해 계속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바벨론에서 부와 사치를 누렸던 자들이 바벨론의 멸망을 보며 애통해 합니다. 바벨론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바다에 던져진 맷돌처럼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된다고 합니다. 이는 땅에서 죽임 당한 성도들의 피가 그 성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당하는 핍박과 환난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순교자의 피를 기억하시고 세상의 죄악을 심판하십니다. 본문의 주제는 바벨론의 멸망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하나는 결코 멸망할 것 같지 않은 바벨론과 더불어 성공가도를 달렸던 사람들이 보이는 절망적인 반응이고 다른 하나는 바벨론의 박해로 고난 받았던 사람들의 즐거워하는 반응입니다. 요한 당시 로마 제국의 모습은 오늘날의 세태와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은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왕들의 애가(9-10절)
큰 성 바벨론의 멸망을 안타까워하는 세 그룹의 사람들은 모두 바벨론과 결탁하여 모종의 혜택을 누렸던 자들입니다. 그 혜택이 사라지자 슬픔의 노래를 부릅니다. 첫 번째 그룹이 땅의 왕들입니다. 그들이(17:2; 18:3) 음행과 사치를 보장해 주던 바벨론이 멸망당하는 것을 보고 애통해합니다. ‘음행’이 상징하는 영적, 도덕적 죄를 범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범죄도 저질렀습니다. 땅의 왕들이 바벨론의 멸망과 연관지어 ‘그가 불타는 연기’라고 말합니다. ‘불’과 ‘연기’의 이미지는 심판이나, 세상의 종말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표현(18:8, 17; 19:3)입니다. 이 구절은 특히 ‘연기’에 초점을 두는데 이는 소돔과 고모라 사건을 연상시킵니다(창 19:16). 세상의 왕들이 불타는 도시를 보고 울며 가슴을 칩니다. 그런데 왕들이 흘리는 눈물이 회개의 눈물은 아닙니다. 그들이 ‘바벨론을 위하여’울며 가슴을 치는 이유는 바벨론이 제공한 정치적 경제적 이권을 더는 챙길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음행과 방탕을 즐길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벨론의 고통을 동정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에게 닥칠 재앙을 두려워하여 멀리 서 있습니다. 결코 멸망할 것 같지 않은 크고 강한 바벨론이 순식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해 멸망하는 것을 보고,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하며 애가를 부릅니다. 하나님은 도저히 무너질 수 없다고 생각되던 바벨론을 한 시간(일순간)에 불을 내리시고 무너뜨리십니다. 역사적으로도 바벨론은 벨사살 왕 때에 페르시아에 의해 하룻밤 사이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심판이 일어나는 것은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6:10)라는 순교자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 때문입니다.

상인들의 애가(11-17상)
왕들에 이어 땅의 상인들이 바벨론의 멸망을 슬퍼합니다. 그들이 슬퍼하는 진짜 이유는 더 이상 그들이 파는 상품을 살 사람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벨론으로 인해 많은 부를 축적했기에 바벨론의 멸망은 그들의 경제적 파탄을 의미합니다. 그동안 상인들이 바벨론과 거래한 상품의 목록이 자세히 열거됩니다. 12절은 상업에 있어서 가장 탁월했던 두로가 주변국과 거래한 상품 목록과 유사합니다(겔 27:12-16). 이런 유사점은 로마가 종교, 정치적으로는 바벨론의 후예이지만,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두로의 후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목록을 보면 대부분 부자들만 가질 수 있었던 물건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로마와 같이 부유한 도시가 값비싼 물건들을 독점하다시피 했다는 것은 경제적 불균형이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경제적 정의는 하나님의 관심사 중의 하나입니다. 목록 끝에 등장하는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에서 ‘종들’은 ‘노예들’을 가리키는 헬라인들의 관용어법입니다. ‘노예들과 노예들의 목숨’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당시 바벨론으로 상징되는 로마가 얼마나 잔인했고 인간의 존엄성을 하찮게 여겼는지를 말해 줍니다. 세상은 생명을 경시하는 것을 묵인했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영혼을 지닌 고귀한 존재인 사람을 물건처럼 사고파는 인명 경시 세상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14절에 상인들이 애통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나옵니다. 음녀 바벨론이 탐하던 과일들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맛있는 것들과 빛난 것들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화려한 것들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5절에서 상인들이 바벨론의 멸망을 무서워하며 바라보고 있는 이유를 11절에서는 자기의 물건을 사줄 이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15절에서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들이 애통하는 모습은 땅의 왕들이 애통하는 모습과 유사하나, 바벨론이 ‘세마포와 자주색 옷과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몄다’라는 표현이 추가되었습니다. 이것은 음녀에 대한 묘사와 매우 비슷합니다(17:4). 바벨론이 망하고 사람들이 심판을 당하고 있는데도, 그들의 눈에는 타 버린 재물만 보입니다. 화려하게 꾸민 바벨론이 한 시간에 망했다고 탄식합니다. 요한이 본 계시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권력과 부를 의지해 탐욕과 사치로 교만하게 행하는 악의 세력들이 일순간에 망할 것임을 알려줍니다. 겉으로는 크고 힘 있고 화려하게 보이지만 하나님을 떠난 어리석은 자들의 종말이 무엇임을 보여 줍니다. 성도는 악인들의 부함과 잘됨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로부터 영향 받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뱃사람들의 애가(17하-19절)
바벨론의 멸망을 애통해하는 세 번째 무리는 바벨론의 해상 무역과 관련된 사람들입니다. 여기에는 선장과 선객 및 선원들과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이 포함됩니다. 그들도 땅의 왕들이나 상인들과 유사하게 반응합니다. 그들 모두 바벨론을 통해 부를 쌓았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의 멸망으로 더 이상 부를 쌓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며 애통해 합니다. ‘이 큰 성과 같은 성이 어디 있느냐’‘이 큰 성이 한 시간에 망하였도다’라는 표현에서 바벨론의 멸망을 매우 당혹스러워하는 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유사한 표현이 두로의 멸망을 슬퍼하는 선원들의 애통하는 모습을 그린 에스겔 27:30에서 발견됩니다. “너를 위하여 크게 소리 질러 통곡하고 티끌을 머리에 덮어쓰며 재 가운데에 뒹굴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촉구(20절)
‘땅의 왕들’과 ‘상인들’과 그리고 ‘바다 사람들’이 애가를 불렀던 것과 대조적으로 이제 바벨론의 멸망을 즐거워하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계시록에는 환난 중에 천국의 모든 자들이 기뻐하는 경우가 세 번 나옵니다. 사탄이 내어 쫓길 때(12:12), 바벨론이 멸망할 때(18:20), 그리고 어린 양이 교회와 결혼할 때(19:7)입니다. 본문은 예레미야 51:48을 배경으로 합니다.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바벨론으로 말미암아 기뻐 노래하리니.”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자들은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입니다. 노래 내용은 사탄이 하늘로부터 쫓겨난 후 불렀던 기쁨의 노래(12:12)와 비슷합니다. 20절은 12:12의 ‘하늘과 그 가운데에 거하는 자들’을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이라고 구체적으로 표현합니다. 18장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신 권면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는데 다소 소극적인 측면으로서 죄에서 나오라는 것입니다. 죄에서 나오라는 말은 바벨론처럼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어떤 것으로도 의존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하나는 적극적인 명령으로 제시됩니다. 죄에 참예하지 말라는 명령에서 기뻐하라는 명령으로 나아갑니다. 물론 기뻐하라는 것은 바벨론의 멸망을 잘 되었다고 하면서 통쾌하게 바라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벨론이 철저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면서, 그 바벨론을 위하여 통곡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어린양의 길을 가는 것이 진정 복 받는 길이며, 나만이 아니라 우리가 공존할 수 있는 길이라는 확신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세상 것을 인하여 가지는 기쁨과는 차원이 다른 기쁨을 바벨론에서 나온 자들에게 주께서 허락해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주의 나라에 참여하게 되면서 누리게 되는 기쁨입니다. 우리 모두 이 기쁨을 알고 이 기쁨을 얻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20하반절을 직역하면 ‘이는 하나님이 바벨론에게 받은 너희의 심판을 심판하셨기 때문이다’입니다. 바벨론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진실하고 정당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종들이 흘린 피에 대해 심판하셨는데 있습니다.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6:10) 바벨론 심판은 순교자들의 탄식기도에 대한 궁극적 응답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증거로 인해 핍박당하는 성도를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바벨론의 멸망은 눈에 보이는 세상을 전부로 아는 자들에게 임하는 심판입니다. 그러나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알고 고난과 핍박을 견디며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성도들에게는 심판의 날이 곧 구원의 날입니다.

바벨론의 완전한 멸망(21-24절)
성도가 바벨론의 멸망을 기뻐해야 하는 이유는 개인적 원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그 백성을 핍박하던 악한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결코 다시 아니하리니’라는 구절을 여섯 번 반복함으로써 심판받은 바벨론의 상황을 강조합니다. 멸망당하는 바벨론을 바다에 떨어진 큰 맷돌에 비유합니다. 이는 바다에 빠진 큰 돌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없는 것처럼 바벨론이 멸망해 그 모습을 결코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천사의 이 상징적 말과 행동은 예레미야 때 시종장인 스라야의 행동을 상기시킵니다. 스라야는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한 책을 읽은 후 돌을 유브라데 강으로 던지며 “바벨론이 나의 재난 때문에 이같이 몰락하여 다시 일어서지 못하리니 그들이 피폐하리라”(렘 51:64)라고 하였습니다. 22-23상반절에서는 바벨론의 참상을 또 다른 비유로 소개합니다. 흥을 돋우었던 악기와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고, 세공업자들이 일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고, 음식을 만드는 맷돌 소리도 사라질 것입니다. 등불 빛이 다시는 비치지 않을 것이며,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다시 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며 심판의 참상을 말해줍니다. 바벨론은 죽은 도시가 될 것입니다. 그 분위기는 예레미야서에서 유다의 멸망을 예언한 구절인 “내가 그들 중에서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와 맷돌 소리와 등불 빛이 끊어지게 하리니”(렘 25:10)를 배경으로 합니다.

23하반절-24절은 바벨론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제시합니다. 첫 번째 이유는 바벨론에 속해 있는 상인들이 ‘땅의 왕족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땅의 왕족들이 누구인지 짐작하기는 어렵지만, 이사야 23:8을 연결시켜 보면 ‘땅의 왕족들’은 ‘세상의 존귀한 자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스스로 높아져서 하나님을 업신여겼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복술로 말미암아 만국이 미혹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으로부터 미혹을 받아 그들도 음행에 동참했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그 성 중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를 전한 자들을 미워해 박해하고 죽인 것이 바로 바벨론이 멸망하는 가장 큰 이유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세상에서 복음으로 인해 핍박받고 심지어 순교까지 당하는 성도들에게 소망을 줍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임할 때 얻게 될 영원한 승리를 바라보게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모든 고통과 억울함을 다 아시고 반드시 보응해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현실에서 적당히 버틸 힘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장차 임할 심판의 날, 바다에 던져진 맷돌처럼 완전히 망할 세상에 휩쓸려 함께 망하지 않고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자세
- 떠나야 할 곳을 떠나야 합니다
바벨론과 결탁된 사람들이 바벨론의 멸망에 대하여 애가를 부르고 있습니다. 바벨론의 패망이 가슴 아픈 것이 아니라 바벨론을 상대로 더 이상 경제적인 이익을 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맺는 관계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철저하게 이익을 위해서 하나 되고 이익이 사라지면 등을 돌립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땅의 왕들, 상인들, 바다에서 일하던 자들이 모두 바벨론의 무너짐을 슬퍼하기는 하지만 그저 멀리 서서 방관하고 있을 뿐입니다. 바벨론과 더불어 권력과 경제적 이익을 얻었던 자들도 바벨론과 함께 심판받을 것입니다. 여기에 언급된 왕과 상인과 무역상들은 세상에서 성공한 부류입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그들의 성공은 지푸라기와 같이 불에 타 버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 또한 알게 모르게‘물질주의적 가치관’에 영향을 받고 살아갑니다. ‘물질을 사랑하는 것이 무슨 문제인가?’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나는 물질을 사랑하지만 신앙을 지킬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물질은 하나님과 대등한 위치에 올라선 현대인의 우상입니다. 물질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인간 이하의 짓도 서슴지 않으며, 물질 때문에 고귀한 인생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짓밟고 있습니다. 물질은 지극히 제한적, 한시적 안전을 제공할 뿐입니다. 재물이 분명 우리에게 편리함을 제공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찾으시는 날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눅 12:20).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라고 하셨습니다. 탐심은 우상 숭배입니다(골 3:5). 모든 탐심을 물리쳐야 하는 이유는 생명이 소유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눅 12:15). 만약 하나님과 재물을 모두 섬길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미 미혹된 것입니다. 바벨론이 주는 물질적 안전을 사모하면 바벨론이 당하는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마가복음 5장에 나오는 군대 귀신 스토리를 보면 예수님이 군대 귀신을 돼지 떼에 들어가도록 허락하심으로 돼지 떼가 갈릴리 호수에 빠져 몰사했습니다. 짐승처럼 살던 한 불쌍한 청년이 귀신들의 무서운 속박에서 풀려난 기적을 보았으면서도 주민들은 한 사람의 회복된 영혼보다 돼지 떼의 손실을 안타까워하며 예수님에게 떠나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주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신들의 우상 앞에 무릎을 꿇고 있을 때에 우리 삶의 터전이나 우리가 의지하는 것을 일시에 무너지게 하시기도 합니다. 우리들의 돼지 떼로부터 인연을 끊게 하셔서 귀신들렸던 청년처럼 치유를 받고 온전한 정신으로 주님 앞에 서기 원하십니다. 사탄은 인간을 실족시켜 얼마든지 돼지 같이 만들어버릴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물질주의적 가치관을 거절하고 살아야 합니다. Richard Foster가 말했듯이 money, sex, power가 현대인을 위협합니다. 우리는 심판의 자리에 머물지 말고 속히 그 자리를 떠나야 합니다. 죄를 짓지 않고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죄의 유혹을 다스리고 죄 된 행동을 통제할 수는 있습니다. 죄의 종이 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따르는 믿음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 가야 할 길을 가야 합니다
바벨론의 멸망을 보면서 애통하는 자들도 있지만, 반대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고 핍박하던 바벨론의 멸망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던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바벨론 안에서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도를 기억하고 반드시 보상해 주십니다. 바벨론의 가치관이 창궐한 이 땅에서 우리가 끝까지 성도로서 살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은 계속 화려한 성공의 삶을 살 수 있다고 계속해서 성도들을 유혹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정결한 그리스도의 신부로 믿음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바벨론의 주인인 사탄은 성도들의 믿음을 증오합니다. 만약 하나님께 순종하는 가운데 어려움과 고난에 부딪혔다면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악한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당할 것을 아는 성도는 세상과 다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하나님 없는 성공보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곤경을 선택하고, 온갖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길을 의지하며 말씀을 청종하는 사람들에게 승리와 기쁨과 영광을 안겨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과 함께 영생의 길을 걸어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나가면서
멸망한 바벨론을 두고 애가를 부르는 애가 속에서 나타나는 두 가지의 공통점이 있는데 하나는 그들 모두 바벨론이 받은 심판이 자신들에게도 미칠까 염려하는 것이고(10,15,17), 다른 하나는 견고하고 찬란하던 성 바벨론이 순식간에 멸망하였다고 노래하는 것입니다(10,17,19). 하나 더 추가한다면 그들은 모두 바벨론의 멸망자체를 슬퍼하기보다 바벨론의 멸망으로 인해 더 이상 이익을 얻지 못해 슬퍼합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악을 조장하던 바벨론의 멸망을 보고 측은히 여기지 말고 악을 심판하시고 의로운 세상을 건설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통해 그때가 가까움을 보고 즐거워하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주후 1세기 로마제국의 폭정 아래 성도들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핍박을 견뎠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바벨론 혹은 음녀로 불리는 로마가 순식간에 멸망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들려 주셨습니다. 바벨론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세상의 권세도 순식간에 사라질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권력자들, 지혜자들, 하나님을 대적하던 자들은 도적같이 찾아오는 마지막 날에 애통해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기름을 충분히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살아야 합니다. 성도는 멸망의 길이 아니라 생명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떠나야 할 곳은 떠나나야 하고 가야할 길은 가야 합니다. 우리를 성도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믿음으로 고난을 견디며 소망을 가지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