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바벨론 심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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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6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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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계 17:15-18:8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인류가 만들어 놓고 자랑하는 모든 크고 웅장한 아름다운 것들이 다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10에서 주의 날에 있을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온 하늘이 불에 휩싸여 큰 소리로 순식간에 떠나 버리고 하늘에 있는 해나 달이나 별들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것들이 타버린다고 합니다. 계시록 17장과 18장은 바벨론의 멸망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는데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모든 세속적 도성에 대한 심판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벨론의 멸망은 이미 선언되었고(14:8), 이제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펼쳐집니다. 바벨론은 인간의 죄와 타락을 지칭하는 일종의 암호로 볼 수 있습니다. 계시록이 기록되던 당시 배경에서는 로마를 가리킵니다. 로마는 악의 제국이자 성도를 핍박하는 나라로, 타락과 퇴폐적인 풍조가 만연된 곳입니다. 바벨론의 멸망은 21-22장에서 언급할 새예루살렘의 영광과 대조됩니다. 특히 본문은 바벨론에 대해 성도들이 취해야 할 태도를 가르쳐 줍니다. 바벨론이 저지르고 있는 죄악에서 빠져나오라는 요청입니다. 그 속에 있으면 죄를 짓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지고 구별된 삶을 살면서 언제 주님이 오실지라도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하는 신실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음녀의 최후(17:15-18)
15:1에서 큰 음녀는 많은 물 위에 앉아 있다고 했습니다. 17:15에서 천사는 음녀가 앉아 있는 물을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라고 합니다. 요한이 살던 당시 이 표현은 지중해 세계를 다스리던 로마를 떠올리게 했을 것입니다. 붉은 짐승을 탄 ‘큰 음녀’는 세상을 지배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체제와 문명을 구축했습니다. 창조주의 이름을 모독하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성도들을 위협하고 박해했습니다. 야심과 야욕에 찬 열국의 왕들과 거민들은 큰 음녀 바벨론의 ‘거대함과 화려함과 힘’에 매료되어 음녀를 추종했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요한에게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를 것이라고 합니다. 열 뿔은 열방의 왕들을 의미하므로, 그녀를 추종했던 열방의 왕들과 적그리스도가 음녀를 배신합니다. 사탄의 세력과 음녀 사이에 분열이 생깁니다. 그들은 음녀를 벌거벗깁니다. 도덕적인 부패를 폭로해 만천하게 수치를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음녀의 살을 먹는다는 표현은 아합의 부인인 이세벨이 창밖으로 던져져 사나운 개들에게 뜯긴 사건을 생각나게 합니다(왕상 21:23). 하나님을 대적하고 모욕했던 음녀는 치욕스러운 최후의 심판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불로 아주 사르리라’는 말씀은 불태워 재로 만들 듯이 완전히 파멸시킨다는 것입니다. 결국 열 왕과 짐승이 음녀를 심하게 미워하며 공격하여 음녀가 철저하게 파괴될 것이라고 합니다. 열 왕과 짐승 그리고 음녀는 불가분의 운명 공동체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개역개정에는 번역이 안 되어 있지만 17절은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주다’라는 동사의 주어가 하나님이므로 악의 세력이 계획하고 행하는 일조차 하나님에 의해 비롯됐음을 암시합니다. 또한 짐승과 열 왕들이 가진 ‘한 뜻’도 ‘자기의 뜻’(하나님의 뜻)과 동일한 단어로 표현되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합니다. 열 왕과 짐승은 자신의 뜻을 이루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하나님의 섭리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사탄의 세력이 멸망당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성취될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대적을 치시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스스로 무너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한 세력들끼리 서로 미워하며 싸우다가 망하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그들의 목적이 탐욕과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악인은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다른 이를 공격하고 죽이는 것을 머뭇거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 모든 일은 하나님의 허락하셔야만 행해집니다(마 10:29). 즉 악인이 악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용하심으로 행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악을 행하도록 누구에게 악역을 맡기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악인은 자기 죄 가운데서 죗값을 받고 하나님은 그 죄를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유다를 징계하기 위해 바벨론을 사용하셨고, 도구로 사용하신 바벨론을 바사를 통해 징벌하셨습니다. 세상을 호령하던 음녀와 그녀를 무너뜨린 짐승 모두 하나님의 주권 아래 움직이는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뜻하신 바를 성취하십니다. 따라서 성도가 믿고 의지할 대상은 온 우주를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뿐입니다. 음녀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입니다. 계시록에서 ‘큰 성’은 바벨론을 가리킵니다(16:19; 18:10, 18-19,21). 요한 당시에 큰 성은 로마였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바벨론과 로마는 비도덕성, 성전 파괴, 우상 숭배, 사치, 성도의 핍박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행을 만천하에 드러내며 철저하게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지만 마지막 심판의 때에는 악인들을 철저하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바벨론의 죄목(18:1-3)
요한은 17장에서 보았던 천사와는 ‘다른 천사’를 봅니다. 짐승이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것(17:9)과 반대로 ‘다른 천사’는 하늘로부터 내려옵니다. 이 천사의 특징은 두 가지인데, 큰 권세를 받았다는 것과, 땅을 밝히는 영광의 광채를 가졌다는 점입니다. 이 천사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임을 의미합니다. 천사의 모습을 미루어 보아 그가 선포하는 바벨론 심판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천사는 큰 소리로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라고 외칩니다. 이는‘함락되었도다 함락되었도다 바벨론이여’는 이사야의 선포와 유사합니다(사 21:9).“무너졌도다”라는 과거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직 바벨론이 무너진 상태가 아닌데 바벨론이 무너졌다고 선언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과거 시제는 미래적 성취의 확실성을 가리킵니다. 바벨론의 멸망이 너무나 확실하기에 천사는 바벨론이 이미 무너졌다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그곳이 귀신의 처소,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가 모이는 곳이 되었다고 외칩니다. 이는 바벨론이 패망하여 그 땅이 황폐하게 될 것을 예언한 이사야 선지자의 말과 맥을 같이합니다(사 13:20-22). 바벨론은 하나님의 대적자들이 결집하는 장소입니다. 성경에서 귀신은 사막이나 외딴 장소에서 사는 것으로 기록됩니다(사 34:14, 마 12:43). 여기에서 장소에 해당하는 단어 ‘곳’이 반복해서 사용되는데, 이것은 ‘소굴’혹은 ‘감옥’이라는 뜻입니다. 천하를 호령하던 영광의 도성이 귀신과 더러운 영과 가증한 새들의 소굴로 전락할 것입니다.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되었다는 사실로 인해 바벨론은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는 악의 세력을 상징하는 대표자가 되었습니다(렘 51:7; 계 17:5). 역사적으로 바벨론을 멸망시키셨던 하나님은 교회 공동체를 멸망시키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미래의 바벨론도 반드시 멸망시키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상 나라는 반드시 무너질 것이기에 우리는 썩어질 것이 아닌 영원한 하늘에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3절은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로 시작해 바벨론의 멸망의 이유를 제시합니다. 그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만국이 그 음녀가 준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만국의 멸망이 바벨론 멸망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를 다른 나라에까지 전염시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신과 불경건은 불의한 행위를 낳을 뿐 아니라 주변까지 오염시킵니다. 둘째, 땅의 왕들이 바벨론과 더불어 음행을 했기 때문입니다. 17:6은 17:2의 ‘음행의 포도주’를 성도들의 피로 해석합니다. 따라서 음행의 포도주란 성도를 핍박하는 행위가 됩니다. 같은 의미를 18:3에 적용하면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와 ‘땅의 왕들이 바벨론과 더불어 음행하였다’는 말은 성도를 핍박하고 죽여서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셋째, 멸망의 이유는 땅의 상인들이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사치의 세력’이란 사치가 능력의 원천이 되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데, 당시 로마인들은 사치스러운 삶을 곧 그의 능력으로 보았습니다. 바벨론의 음행이 반복되어 언급되는데, 음행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르네이아’는 육체적 음행뿐만 아니라 영적 음행, 즉 우상 숭배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음녀, 즉 바벨론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이 가득한 짐승을 타고 있었으며(17:3), 성도들과 이름이 가득한 짐승을 타고 있었으며(17:3), 성도들과 예수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해 있었습니다(17:6). 또한 땅의 상인들이 바벨론의 사치 덕분에 치부했다는 진술로 보아, 바벨론의 영적 죄는 경제적 죄와 연관됩니다. 짐승과 바벨론은 경제적 이익을 미끼로 사람들을 박해하고 미혹했습니다 (13:16-17). 결론적으로 바벨론은 영적, 경제적, 도덕적 죄를 범했을 뿐 아니라, 모든 나라와 땅의 왕들 및 땅의 상인들을 공범으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 백성을 향한 명령(18:4) 성도를 향한 명령(4절)
바벨론의 멸망이 선포되는 가운데 요한은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을 듣습니다. 그 음성은 1-3절에서 바벨론 멸망을 선포한 천사의 음성이 아닙니다. ‘다른 음성’은 10:4,8과 14:2,13에서 사용된 바 있는데 보좌에서 직접 들려옵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하나님의 주된 관심은 바벨론을 심판하는 것보다 성도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에 머물러 있는 자들을 여전히 ‘내 백성’이라고 부르십니다. 바벨론이 받을 심판은 이미 정해졌지만 성도들에게는 여전히 기회가 있습니다. 이것은 소돔이 심판받아 멸망하는 와중에도 롯에게 여전히 기회가 주어진 사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늘로부터의 음성은 바벨론에서 나와야 하는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합니다. 첫째는 바벨론과 함께 죄에 빠지지 않기 위함입니다. 바벨론에 계속 있으면 바벨론의 죄에 동참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바벨론이 받을 심판을 피하기 위함입니다. 누구든지 바벨론의 죄에 참여한다면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바벨론의 죄에 계속 동참하면 바벨론이 받을 재앙을 같이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요청은 예레미야서를 배경으로 합니다. “너희는 바벨론 가운데에서 도망하라 갈대아 사람의 땅에서 나오라”(렘 50:8) “바벨론 가운데서 도망하여 나와서 각기 생명을 구원하고 그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끊어짐을 보지 말지어다”(렘 51:6) 바벨론은 하나님의 손에 들린 금잔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담긴 포도주가 온 세상을 취하게 만들었습니다. 남 유다를 포함한 주변의 모든 나라 백성이 그 포도주를 마시고 취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 가운데 살았지만, 멸망 전에 도망했습니다. 바벨론의 죄악은 관영했고,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미련을 두고 더 머물러 있다가는 함께 멸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을 합리화함으로써 자신을 속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고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도 피할 수 없습니다. 성도는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자신이 머무는 곳이 하나님의 성읍인지, 멸망의 성읍인지 알아야 합니다.

바벨론의 교만(18:5-8)
개역개정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5절도‘왜냐하면’으로 시작하면서 바벨론이 심판을 받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바벨론의 죄가 하늘에 사무쳤고 하나님이 그 불의를 기억하신다고 합니다. 죄가 하늘에 사무쳤다는 말은 그 죄가 이미 극에 달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바벨론을 치료하려 하여도 낫지 아니한즉 버리고 각기 고향으로 돌아가자 그 화가 하늘에 미쳤고 궁창에 달하였음이로다”(렘 51:9)을 배경으로 합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회개하기를 거부한 바벨론의 죄를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바벨론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만국이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고 무너졌는데, 이제는 바벨론이 하나님의 진노를 마시고 멸망할 차례입니다. 6-8절은 우주적 법정을 상상하게 합니다. 이 법정에서 재판관은 하나님이시고 원고는 순교자들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며(18:24), 피고는 권력을 행사하며 우상숭배를 위해 살인을 저지른 바벨론입니다. 선고는 세 가지로 표현됩니다. 음녀가 준 그대로 음녀에게 갚아 주고, 음녀가 행한 행위의 갑절로 갚아 주며, 음녀가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갑절’은 문자적으로 두 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한 보응을 의미합니다. 7절에서도 선고는 계속 됩니다. 바벨론이 스스로 영광을 취하고 사치를 누린 만큼 바벨론에게 고난과 애통을 주라고 명합니다. 계시록의 주제는 ‘영광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입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그 모든 영광을 잃어버릴 것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바벨론은 사치를 자신의 능력으로 알았습니다. 사치야말로 자기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자들이 취하는 전형적인 행동입니다. 음녀는 독백하기를 “나는 여왕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함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이 표현은 이사야서에서 쾌락을 추구하는 바벨론이 “내가 영영히 여주인이 되리라 ...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 너는 이제 들을지어다”(사 47:7-8)고 한 것을 배경으로 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죄악을 갚아 주실 때 하루 동안에 사망과 애통함과 흉년, 그리고 불에 살라지는 심판이 바벨론에 임할 것을 예고하십니다. ‘하루 동안에’는 정확히 하루의 기간을 말한다기보다 ‘단기간에’라는 뜻으로 심판의 신속함을 뜻합니다. 이런 심판이 가능한 것은 심판하신 주 하나님이 강하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언젠가 망할 세상 나라에 소망을 두면 안 됩니다. 영원한 하늘나라를 소망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세
- 죄의 길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엄중하며 죄에 참여한 사람은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그러나 악인의 길과 그 행위를 따르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이 재앙으로부터 보호하십니다. 이제 바벨론에 임할 재앙이 예고됩니다. 바벨론의 죄악은 하늘에 사무쳤고, 하나님은 그 불의를 기억하십니다. 그 결과 순식간에 여러 재앙이 임할 것입니다. 긴장된 상황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향해 ‘그들의 죄악에 동참하지 말고 거기서 나와라’라고 외치십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이 악인들과 함께 멸망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롯의 아내는 죄악의 성 소돔과 고모라를 떠났으나 소금 기둥이 되어 죽었습니다(창 19:24-26). 그것은 그녀가 비록 몸은 소돔과 고모라를 떠났으나 마음이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바벨론에서 물리적으로 떠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 악에서 떠나 하나님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물리적으로 죄악의 도시에서 떠나야만 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 안에는 어느 곳에도 거할 수 없어 세상 밖으로 나가야만 할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세상의 문화는 점차로 악해질 것이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세상이 저지르는 죄에 참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가는 것은 성경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은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이원론적인 삶의 태도를 용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과 하나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여전히 세상 속에 살아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야 세상을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오늘도 우리는 바벨론 도성에서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세상이 우리 속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세상 가운데서 우리의 정체성을 잃고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거룩함은 ‘구별’과 ‘분리’를 뜻합니다. 바벨론의 죄와 그로 인한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스스로 구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죄를 다 기억하시고,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을 향해 죄인의 길에 서지 말고 의의 길, 생명의 길로 나아오라고 하십니다.
- 겸손해야 합니다
바벨론이 심판을 당하는 가장 큰 이유는 교만함 때문입니다. 바벨론은 그들이 누리던 권세와 부유함을 기반으로 영원한 여왕이라고 스스로 높였을 뿐 아니라, 애통함을 당하지 않는다고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습니다. 교만이란 내가 남에게 나를 자랑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를 향한 태도이기 이전에 하나님을 향한 태도입니다. 교만은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선언입니다. 내가 가진 것으로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교만이 바로 창세기 3장에 언급된 죄의 뿌리요, 바벨탑의 원인입니다. 하나님은 그 교만함에 대해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하십니다. 바벨론이 받을 고통과 애통함은 그가 자랑하던 영화로움과 사치에 비례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집니다(마 23:12).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기 때문입니다(잠 16:18). 교만과 헛된 부요로 무장한 세상의 제왕과 제국들이 순식간에 초토화되거나 패망할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 앞에서 주눅 들지 말고 말씀을 통해 날마다 눈에 보이는 현실 너머에 진실을 바라보는 영적인 안목을 키워가야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는 영적 긴장감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의 부족함, 연약함, 죄악됨을 인정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행하는 일들이 하나님께 보응 받을 죄임을 인식함으로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삶이 경건한 삶이요, 하나님 앞에 성도가 드려야 할 영적 예배, 산 제사의 삶입니다.

나가면서
음녀 바벨론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본체를 상징합니다. 사탄에게 힘을 받은 짐승과 연합해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입니다. 외적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우상 숭배와 불경건으로 가득한 곳은 어디나 바벨론입니다. 천사는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해 망하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누리는 온갖 성취는 허상에 불과합니다. 악의 본질은 거짓과 파멸이며, 그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세상을 향한 심판 예언은 성도들에게 승리의 확신과 함께 피해야 할 죄악들에 대한 경고를 줍니다. 바벨론의 유혹에 넘어가 죄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고, 바벨론과 함께 멸망에 이르지 않도록 하나님이 주신 진리를 따라 살기 위해 더욱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주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마 6:33). 썩어질 것이 아닌 영원한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하나님 백성에게 하나님은 영원한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죄의 길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십니다. 결국 예수님이 승리하실 것이고, 교회가 그 승리에 동참할 것입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주님과 동행하며 궁극적인 승리를 맛보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