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안디옥에 전해진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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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09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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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행 11:19-30


오늘은 팔로마 한인교회 창립 기념주일입니다. 에스콘디도에 있는 Calvary Chapel에서 1995년 7월 둘째 주일에 첫 예배를 드렸는데 벌써 28년이 지났습니다. 이 자리에는 당시 예배를 같이 드린 분들이 계십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세 번 가까이 지나면서 교회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함께 신앙생활을 하다가 주님 품에 안긴 분들이 많습니다. 주님을 모르던 분들이 교회에 와서 믿음을 갖게 되고 세례를 받을 때 기뻤지만, 반면에 함께 신앙생활 하던 분들이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떠나갈 때는 너무도 안타까웠습니다. 좀 더 지혜롭게 섬겼더라면 주님의 교회가 더 든든히 세워졌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돌아보면 어려울 때도 있었고, 위기의 때도 있었지만, 기뻤던 일, 감사한 일들이 더 많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교우들의 아름다운 섬김의 결과라 하겠습니다. 19년 동안 상가 건물에서의 셋방살이를 마감하고 2014년 10월14일에 이 본당에서 감격의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2017년 비전센터 건물을 구입해서 교육관과 체육관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헌신자들이 되어서 맡기신 사명을 자발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감당해야겠습니다. 금년 교회의 표어처럼 이번 창립주일을 계기로 신앙의 열정을 회복하여 주님이 보시기에 풍성한 열매를 거두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사회 집단이든지 변화를 끊임없이 추구하며 발 빠르게 나아가려는 소수의 무리가 있고, 변화에 저항하며 현 상태에서 움직이기 싫어하는 무리가 있고, 안정을 바라면서 천천히 변화를 모색하는 무리가 있습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입니다. 그러나 교회사를 볼 때 교회를 개혁하려는 세력과 현 상태를 고수하려는 세력 사이에 끊임없는 긴장이 있었습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교회는 끊임없이 활동해야 하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급변하는데 교회가 정체되어 있으면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도리어 세상에서 무시를 당하거나 도태 당하게 됩니다. 복음의 본질은 같으나 그것을 담는 그릇이나 전하는 방법은 끊임없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향한 주님의 비전을 알아야 하고 그 비전을 이루는 지혜와 능력이 필요합니다. 사도행전은 기도와 말씀을 통해 성령의 역사에 민감하게 반응한 성도들의 스토리를 담고 있습니다. 이번 창립주일에는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 교회와 더불어 아름다운 사역의 본을 보여준 안디옥 교회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의 배경
예루살렘 교회 하면 이상적인 교회의 모델로 꼽힙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120명에게 오순절에 되자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그들이 능력을 받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성령 충만, 말씀 충만, 기도 충만, 교제 충만 가운데 열심히 전도하여 놀라운 성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쉬운 것이 하나 있었는데, ‘구원은 유대인에게만 있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주님의 지상 명령을 사도들이나 일반 성도들이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복음이 팔레스타인을 넘어 땅 끝까지 전파되기 원하셨습니다. 1절에 언급된 ‘스데반의 일’은 스데반의 순교 사건(7:60)을 말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예루살렘에 박해가 일어나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유대 지경을 넘어 사마리아로 사마리아를 넘어 팔레스타인 지방 밖으로 흩어졌습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빌립을 중심으로 사마리아 지방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9장을 보면 바울의 회심이 있었고, 베드로를 통하여 룻다와 샤론, 욥바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보여주신 환상과 고넬료와의 만남을 통해 복음은 유대인들에게만 전해져야 한다는 편견을 갖고 있던 베드로의 생각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이 복음을 듣고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10:35)라고 말했습니다. 이방인과 교제를 나누었다는 이유로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있는 교인들 중에 할례자들로부터 책망을 받을 때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10:17) 라고 반문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무리는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10:18)라고 선언했습니다. 고넬료의 회심 사건은 앞으로 전개될 이방인들의 회심 스토리의 서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방인들을 향해 복음을 전파할 교회를 세우는 작업을 추진하십니다.

안디옥에 세워진 교회(19-21절)
-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들이 세운 교회입니다
신약성경에는 사도들이 세우지 않은 교회들이 나옵니다. 로마교회, 골로새교회가 대표적이요 오늘 안디옥 교회도 그러합니다. 사울의 회심과 베드로의 변화를 계기로 복음이 더욱 확산되는 것을 누가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흩어진 성도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렀습니다. 베니게(페니키아)는 갈릴리 북쪽으로 지중해를 따라 길게 뻗은 지역입니다. 시돈과 두로가 베니게에 속합니다. 구브로(키프로스)는 튀르키예 남단에 위치한 지중해 상의 섬으로 시리아 해안에서 약 100마일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안디옥이라는 지명이 신약성경에 두 군데에 걸쳐 나오는데 사울이 일차 전도여행 때 들르게 되는 안디옥은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소아시아의 비시디아와 브루기아의 경계에 있던 도시입니다. 또 하나는 본문에 나오는 도시로서 안디옥은 시리아의 수도로 튀르키예 동남부 해안에 위치하며 로마,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로마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습니다. 이 지역들은 팔레스타인에서 그리 멀지 않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와서 많이 거주하였습니다. 흩어진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말씀을 전했는데, 구브로와 구레네 출신 몇 사람은 안디옥에서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이방인이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결국 박해로 인해 성도들이 흩어짐으로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예수님의 지상 명령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이 주류를 이루는 예루살렘 교회와는 달리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분 없이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안디옥 교회가 생겨났습니다. 인종적 편견 없이 복음을 전함으로 세운 교회이기에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 안디옥 교회에 큰 부흥이 일어납니다. 누가는 안디옥에서 수많은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돌아오는 이 일에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셨다고 증언합니다. 이 표현은 누가가 세례자 요한을 묘사할 때 썼던 수식어이고(눅 1:66) 구약에서 엘리야에게 적용되기도 했습니다(왕상 18:46). 사도행전에서도 기적을 동반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표현할 때 ‘주의 손'이라는 비유가 사용됩니다(행 4:28, 30). 기적은 믿음을 자극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왔습니다.’

안디옥 교회를 섬기는 바나바와 사울(22-26절)
- 믿음과 행실의 본을 보이는 지도자가 있는 교회입니다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예루살렘 교회가 베드로와 요한을 파송했던 것처럼 안디옥에 복음이 전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헬라파 유대인이며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바나바를 파송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선교의 중심 역할을 감당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나바는 어떤 사람입니까? 사도행전 4:36에 의하면 그는 구브로 출신 레위인으로 본명은 요셉입니다. 자기 밭을 팔아 예루살렘 교회에 헌금으로 바쳤습니다. ‘위로의 아들’이라는 그의 이름처럼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고 그들이 가진 달란트를 잘 찾아 개발하여 사용하게 하는 은사가 있었습니다. 요즘 말로 한다면 인재를 발견하여 적재적소에서 쓸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가 안디옥에 와보니 믿은 이방인들이 많음을 보았습니다.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를 넘어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파되고 있음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안디옥 교회에 은혜 베푸심을 보고 바나바는 기뻐하면서 새로운 신자들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고 권했습니다. ‘권하다’는 미완료 형으로 바나바가 계속 권면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굳건한 마음으로 주께 충성을 다하며 머물러 있으라는 것입니다. 바나바가 그런 권면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이었기 때문입니다. ‘착하다’는 말의 의미는 단지 마음이 착하다는 것이 아니라 선행을 많이 베푼다는 것입니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능력과 감동이 그의 사역 가운데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바나바의 온유한 성품과 탁월한 가르침이 더해져 교회가 더욱 부흥했습니다. 온유한 성품 안에 담긴 복음은 수많은 사람을 감동시켰고, 교회로 돌아오도록 이끌었습니다.

- 동역하는 교회입니다
안디옥 교회가 크게 성장하니 바나바는 자기 혼자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바나바는 오래전에 만났던 사울을 기억했고, 그가 안디옥 교회에 꼭 필요한 인재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도들도 있는데 바나바가 왜 사울을 안디옥 교회에 불러 왔습니까? 열두 사도들도 성령에 충만한 신실한 종들이었지만 이방인의 선교에는 바울보다 더 적합한 인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난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헬라어뿐만 아니라 헬라 문화를 잘 알았습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자였기에 로마 제국 어디든지 아무런 제한 없이 다닐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자였습니다. “며칠 있을 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9:19-20) “예수는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9:22). 전에는 율법에 대한 열심을 자랑하던 교회의 핍박자였으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조금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않는 주님의 제자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사울이 회심한 후로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다가 그곳 당국자들과 충돌하였습니다. 사울은 아마 자기 고향인 다소에 돌아가서도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안디옥 교회에서 말씀으로 사역할 일군이 필요하게 되자 바나바는 그를 데리러 다소에 갔습니다. 사울에게는 바나바가 잊을 수 없는 은인입니다. 사울이 회심한 후 삼년 만에 처음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교인들과 교제를 나누려고 시도했지만 교인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냉담하였습니다. 교회를 핍박했던 사울의 모습을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과거에 교회를 박해했던 사울에게 편견을 갖지 않았고, 도리어 사울을 믿음의 형제로 받아들이는 포용력이 있었습니다. 사울을 보는 시선이 곱지 않은 상황에서 바나바는 사울을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에게 소개하며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것과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았다는 것을 말해주었습니다(행 9:27).

바나바가 사울을 안디옥에 데리고 왔습니다. 바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사울이 마음껏 사역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고 이제 막 믿기 시작한 성도들을 가르치게 하였습니다. 사울은 다소에서 십년 가까이 복음전파를 통하여 쌓은 경험을 토대로 안디옥 교회에 밀려들어온 많은 이방인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 지 누구보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바나바와 사울이 일 년 동안 함께 사역했을 때 풍성한 열매가 얻어졌습니다. 다른 사람의 장점과 능력을 인정하며 함께 일하는 바나바의 리더십은 참으로 귀합니다. 목회자와 목회자 사이에, 목회자와 교인 사이에 아름다운 동역이 필요합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함이라”(고전 12:4). 은사, 직책, 교회 활동들은 신자에 따라 다를 수가 있으나 일을 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아름다운 협력을 유지하며 서로를 세우고 유익하게 할 때 교회는 주안에서 아름답게 자랍니다.

- 교인들이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교회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의 일 년 동안 헌신적으로 교회를 섬겼습니다. 교인들은 체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습니다. 말씀을 보는 눈이 열렸고, 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이 있었고, 사도들의 경건한 삶을 통한 감화를 받아 안디옥 교인들의 삶이 달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26절에 보면 안디옥 교인들이 두 가지로 불렸습니다.
1) 제자
성경에서는 어떤 사람들을 제자로 부릅니까?
“무릇 내게 오는 자는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 14:26) - 주님께 우선순위를 두는 사람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33) - 주님을 위하여 희생을 각오하는 사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1-32) -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 인줄 알리라”(요 13:35) - 주 안에서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는 사람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 - 영적인 열매를 많이 맺는 사람
요약하면, 그리스도의 제자는 누구보다도 주님께 우선순위를 두고, 주님을 위하여 희생을 각오하며,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주님의 지체들을 사랑하고, 주 안에서 많은 열매를 거두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제자의 모습이 안디옥 교인들에게 나타났기에 누가는 그들을 제자라고 불렀습니다.
2) 그리스도인
2:43절에 보면 예루살렘 교인들에 대한 세상 사람의 반응이 나옵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고(2:43),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2:46). 비슷한 반응이 안디옥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이전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그 도를 따르는 자들’, ‘나사렛 예수파’등으로 부르며 유대인의 한 파벌로 여겼는데 기존의 전통적인 유대인과 구별되는 새로운 칭호가 생겼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헬라어로 ‘크리스티아노스’인데, 명사 뒤에 붙은 접미사 ‘~이아노스’는 ‘어떤 대상에 예속된 자’를 뜻하는 다소 경멸적 칭호로 ‘그리스도의 추종자’혹은 ‘그리스도의 노예’라는 의미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안디옥 교인들은 ‘예수에 매인 사람들,’‘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경멸적인 칭호를 듣는 것을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도리어 기뻐했을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조차 인정한 안디옥 교인들의 변화된 모습과 열심이 우리에게 도전이 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닮은 성도들, 세상과는 구별된 무엇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입니다
안디옥이라는 도시가 크니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습니다. 더구나 안디옥 교회가 커지니 예루살렘 교회에서 온 지도자들이 방문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들 중에 아가보라는 한 선지자가 예루살렘에서 왔을 때 성령에 감동되어 심각한 흉년이 온 로마제국을 휩쓸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과연 글라우디오 황제 때에 흉년이 들었고 특히 예루살렘이 있는 유대 지방에 그 피해가 심하였습니다. 이제 생겨난 지 얼마 안 된 교회요 주로 이방인으로 이루어진 교회였지만 그리고 자기들도 흉년의 피해를 겪고 있지만 자기들에게 선교사를 파송하여 영적성장에 도움을 준 예루살렘 교회를 잊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복음 때문에 진 빚을 안디옥 교회는 재정적으로 도와줌으로써 은혜를 갚았습니다.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롬 15:27)라고 하면서 바울은 신령한 것을 나누어준 사람에게 육신의 것으로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는 원리를 말해줍니다. 비록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아직도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에 대하여 불편한 사람들도 더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는 구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한 형제요 자매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유대에 살고 있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하면서 안디옥 교인들이 어떻게 참여하였습니까? ‘각각’구제를 위하여 안디옥 교회 제자들이 참여하였습니다. ‘그 힘대로’헌금은 각자의 형편대로, 마음에 감동을 주시는 대로 드려야 합니다. 자기 형편에 따라 많이 낼 수 있는 사람은 많이 내고 형편이 여의치 않은 사람들은 적게 냅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모든 나눔의 근원은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깊이 체험하는 가에 달려 있습니다. ‘실행하여’교인들은 얼마를 구제하겠다고 작정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약속을 그대로 지킵니다. 이렇게 거둔 구제 헌금을 안디옥 교회에서는 바나바와 사울 편에 예루살렘 교회에 보냈습니다. 복음 안에서 서로 구제하고 돕는 것은 교회와 성도들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나가면서
누가는 안디옥에 처음 복음의 씨앗을 뿌린 ‘흩어진 사람’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이는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이 지극히 평범한 무명의 증인들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안디옥에 있는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자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바나바가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파송을 받아 열심히 교회를 섬겼습니다. 바나바는 다소에 있는 사울을 데리고 함께 교회를 섬기며 동역했습니다. 안디옥 교인들의 삶에 놀라운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안디옥 교인들을‘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되자 안디옥 교회가 바나바와 바울 편에 부조를 보내며 이웃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이전까지는 유대인들로 이뤄진 예루살렘 교회가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지만, 새롭게 세워진 안디옥 교회가 기존의 편견을 버리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어 함께 복음을 전하는 이방 선교의 전초 기지가 되었습니다. 팔로마한인교회도 안디옥 교회와 같이 말씀을 잘 배우고 서로 협력하고 받은 은혜 나누면서 건강하고 영적으로 성숙한 믿음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선교하시는 하나님의 비전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섬기며 나누며 그리스도인이라 부름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성도들이 되어 이민 교회에 아름다운 본을 보이는 교회를 이루어 가는데 한 마음이 되어 힘쓰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