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신령한 자의 삶(2)

Author
Myung Myung
Date
2022-05-01 15:36
Views
268

그동안 살아오면서 제일 잘 심었다고 생각되는 것이 무엇인가요? 사업, 결혼, 자녀, 신앙생활? 혹시 의욕적으로 심었는데 기대만큼 제대로 거두지 못한 것이 있습니까? 바울은 다른 서신들과 마찬가지로 갈라디아서 후반부에서 성도의 삶에 관해 다루면서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는 경작의 법칙이 영적으로도 유효하다고 합니다.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둔다는 것이요, 좋은 것 심으면 좋은 것을 거두고 악한 것을 심으면 악한 것을 거둡니다. 평범한 진리이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이 법칙대로 살지 않고 복권 한 장에 대박을 기대하는 것과 같이 투기적인 행동을 합니다. 가게를 시작할 때 인근 주민들의 생활수준, 교통량, 기호 등을 조사하며 사업 전망을 따집니다. 하물며 신앙생활 하면서 영적인 성장을 위하여 시간과 정성을 쏟지 않고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지 막연히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려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사랑이 이웃 사랑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앙여정에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시고 믿음의 동역자들을 붙여 주십니다. 함께 갈 동역자들이 있다는 것은 큰 힘이 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믿음 안에서 동역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신령한 자들에게 바울이 제시하는 신앙의 원리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서로 짐을 지라(1-2절)


어떤 사람이 죄를 지은 것을 알게 되면 ‘어떻게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어?’라고 불쾌감을 표시하며 은연중에 자기는 그런 죄와는 거리가 먼 사람인 척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나 허물에 대하여 쉽게 흥분하는 사람일수록 그런 기회를 통하여 자기의 죄성을 감추려고 합니다. 이웃의 불행을 인하여 기뻐하거나 자신의 의를 자랑하는 기회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도리어 다른 사람의 죄를 볼 때 나도 그런 상황에 있었더라면 같은 죄에 빠질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의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단지 재수가 없어서 들켰고, 누가 떠벌였기에 그렇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도 다하는 것이라고 변명합니다. 죄는 마음에서 시작되기에 말씀의 강렬한 빛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본성을 비출 때 비로소 치료되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교회에 있는 어떤 형제가 범죄했을 때 신령한 자들이 해야 할 일을 가르칩니다. ‘범죄’는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온 육체의 일들의 결과일 것입니다. 성령을 따르지 않음으로 말미암은 죄들입니다. 또한 일부 갈라디아 교인들이 거짓 가르침에 미혹되어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애쓴 결과 도리어 율법을 깨뜨리고 범죄가 더하게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 떨어진 성도들에게서 죄가 나타나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신령한 자는 삶과 행동이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신령한 자들이 죄를 범한 형제를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온유’는 성령의 열매에 속한 덕목으로 거만하고 자기중심적 주장을 버리고 타인을 배려하는 것입니다. ‘바로 잡다’는 말은 원래 ‘뼈를 고정하다’를 뜻합니다. 죄란 뼈가 어긋나듯이 사람의 원래 위치에서 벗어난 행동입니다. 어긋난 뼈를 바로 잡겠다고 무리하게 힘을 주면 부상당한 사람은 더 큰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드럽게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분노와 거친 감정을 가지고 범죄한 형제를 대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또한 범죄한 사람을 바로 잡을 때 자신을 돌아보아 시험받을까 두려워하라고 가르칩니다. 성령을 좇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자칫 빠지기 쉬운 함정이 영적 교만과 형제 비판입니다. ‘신령한 자’의 눈에는 영적으로 자기보다 못하거나 죄를 범하는 자들이 더 잘 보입니다. “서로 종노릇하라”는 권면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으면 그 형제를 긍휼히 여기기보다는 판단하고 정죄하는 태도를 가지기 쉽습니다. 신령한 자는 범죄한 형제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회복시키는데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특히 복수형 인칭 대명사 ‘너희’가 나중에‘너’라는 단수로 바뀐 것은 그 경고를 개개인에게 적용해야 함을 보여 줍니다. 남을 바로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을 살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와 같은 죄를 범하지 않은 것은 다만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인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은 타인을 정죄하거나 교만하지 않도록 이끄십니다. 우리 자신의 내면을 살피도록 도우시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게 하십니다. 성령을 좇아 자신을 깊이 성찰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다른 지체의 허물이나 죄를 덮어 버리거나 간과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무관심이요 방관입니다. 예수님은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마 18: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한 사람을 공개적으로 창피를 준다든지 그 사람과의 교제를 금지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위의 형제들이 죄를 범했을 때 그것을 남의 일로 여겨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지나가게 해서는 안 됩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는 요청은 앞에서 제시한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5:13)라는 요청과 같은 맥락입니다. 바울은 율법의 완성으로서 사랑을 말했는데, 믿는 이들이 서로 다른 이들의 연약함을 짊어짐으로써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합니다. 아직 부족하지만 믿어주고 격려해주고 받아줄 때, 서로 짐을 나누어지게 되고,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계명을 이루게 됩니다. 


 


각각 자기 짐을 지라(3-5절)


바울은 형제가 죄 지은 것을 보고 바로 잡아 주려 하지 않고 도리어 교만하여 자신이 무언가 된 줄로 생각하지 않도록 권면합니다. 그런 사람은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했습니다. 그는 세리와 따로 서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 18:11)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실패를 보고 자신이 그와 같지 않으므로 자기를 상당히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이것이 자기를 속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는 것은 자신의 상태를 진지하게 살피고 시험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일’은 행동이나 미덕을 의미합니다. 자신을 살필 때 우리에게도 다른 사람의 약점과 같은 것들이 많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바울은 이렇게 자신을 돌아봄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와 양심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고 하나님의 기쁨이 됨으로 자랑할 것이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자기에게 자랑할 것이 있는지 확인해 보라는 것입니다.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남에게 있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영적 상태입니다. ‘내가 믿음에 서 있는가’살피는 것이 성도에게 중요한 관심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각각 자기의 짐을 지라고 합니다. 5절의 ‘짐’과 2절의 ‘짐’은 헬라 원문에서 다른 단어를 사용합니다. 5절의 ‘짐’은 믿는 이가 각각 하나님 앞에서 책임져야 할 짐을 스스로 지라는 것입니다. 2절의 ‘짐’은 믿는 이가 사랑으로 다른 사람의 약점을 짊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져야 할 짐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살폈을 때 남에게는 없고 우리에게만 있는 어떤 장점이나 은사가 있다면 그것을 소중히 여기며 그것으로 하나님을 충성되게 섬겨야 합니다. 신령한 사람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자 자신을 드러내거나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저 맡겨진 사명을 묵묵히 감당합니다. 자신을 돌아보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 위해 애씁니다. 성령을 좇아 자신을 깊이 성찰하는 사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령의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좋은 것을 함께하라(6절)


삶에서 하나님 말씀이 차지하는 비중이 신앙생활의 질을 좌우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배우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를 향한 자세는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자세와 다르지 않습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이는 복음 사역자에 대한 섬김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바울은 앞 단락에서 사랑으로 종노릇하기 위해 성도들 간의 섬김을 말했는데, 여기에서는 그 섬김을 가르침을 주고받는 관계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가르치는 자들이 말씀을 전함으로 섬겼으니 가르침을 받은 자들이 가르치는 자의 수고에 감사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움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은 쓸데없는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물질적 후원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지만(고전 9장), 그렇다고 사역자가 가르치는 이들을 통해 생계를 지원받을 권리의 정당성을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교회 안에는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이런 사역자들을 물질적으로 후원해서 그들이 가르치는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일군이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눅 10:7). 바울도 고린도전서 9:14에서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서로 재정적인 짐을 나누어지는 것이 그리스도의 명령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6절의 가르침은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2절)과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5절)의 가르침과 연결됩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충성스럽게 성도들에게 가르치고 공급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들은 할 수 있는 대로 가르치는 자들이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고 말씀과 기도에 전념할 수 있도록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합니다.


 


물론 바울의 가르침은 ‘재물’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에게 필요한 것은 말씀을 듣는 청중들의 호의적인 반응입니다. 모이기를 힘쓰고 전하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설교자는 설교를 통하여 청중들과 주고받습니다. 청중들이 말씀을 제대로 받는지 안 받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몸은 교회 안에 있으나 생각이 다른 데 가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밀려오는 잠을 이기지 못하여 눈이 게슴츠레 풀어지거나 눈을 감고 묵상 중인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어느 누구도 언제나 자신 있게 설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습니다. 듣는 자들이 기도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설교자의 가장 큰 기쁨은 들을 수 있는 청중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자의 가장 큰 상급은 그 말씀으로 듣는 자들의 인격이 변하고 삶이 변하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리라(7-10절)


- 바른 동기를 가지고 심어야 합니다


바울은 육체를 위해 심으면서 썩지 않을 영적인 결실을 거둘 것을 기대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만약 육체에 빠진다면 그것은 육체를 위해 심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사람의 짐을 지지 않고 스스로 된 줄로 아는 것도 육체를 위해 심는 것이요 각각 자기의 짐을 지지 않는 것도 육체를 위해 심는 것이요 가르침을 받는 자가 가르치는 자와 좋은 것으로 함께하지 않는 것도 육체를 위해 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고 합니다. ‘속이다’는 ‘길을 잃고 헤매게 만들다’라는 뜻으로, 목적을 놓쳐 버린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활동이나 신앙적인 일들을 하면 당연히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때로는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 되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 됩니다. 나의 섬김이 진정 하나님을 위해서 하고 있는지 아니면 개인의 유익을 위한 것인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감춰진 동기에서 헛된 영광을 구하는 마음으로 섬긴다면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시는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바울은 성숙한 성도들에게 심고 거둠의 원리에 대해 설명합니다. 이 원리는 물질세계와 영의 세계 모두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육체를 위해 심으면 영원한 것을 거둘 수 없습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교회를 위해 재물을 사용하는 것이 곧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이며, 그런 사람은 자신의 영생을 포함해서 다른 사람들의 ‘영생’을 열매로 거둡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힘을 함께 모아 이렇게 구제와 선교를 위해 끊임없이 씨를 뿌려야 합니다. 열매를 거두기 원합니까? 동기를 점검해야 합니다. 동기가 선하다면 끝까지 해야 합니다. 눈물로 뿌린 씨앗을 기쁨으로 거둘 때가 곧 올 것입니다.  


 


-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외국 사람들이 한국말을 배울 때 제일 먼저 배우는 단어 중의 하나가 ‘빨리빨리’일 것입니다. 우리는 빨리 결과를 보고 싶어 조급해 합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는데 40년이 흘렀습니다. 불과 보름이면 갈 수 있었는데 40년 걸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야곱 같은 기질을 가진 백성들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독수리가 새끼를 떨어뜨리고 받는 것을 반복하며 새끼를 훈련시키듯이 이스라엘을 훈련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의 훈련장이었습니다. 광야 여정을 통해 출애굽 2세대가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아버지 세대가 광야에서 죽은 것은 물이 없거나 양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어야 합니다. 인간적인 열심으로 하는 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대단한 일을 할 듯이 일을 벌이지만 얼마가지 않아 시들해집니다. 그러나 성령이 주도하시는 일은 지속적입니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라고 격려하는 말씀이요 그런 일을 할 때 낙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때가 되면 거둘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결과가 보이지 않더라도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 앞에 설 때에는 반드시 온전한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 심을 곳에다 제대로 심어야 합니다 


바울은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착한 일은 하는 것을 9절에서 선을 행하는 것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범죄한 형제를 돌이키는 것도 포함됩니다. 서로 짐을 나누어지는 것도 해당합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좋은 것을 함께 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도 포함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 주시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는 것도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섬길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착한 일을 할 기회가 언제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병들고 힘이 약해지면 하고 싶어도 섬길 수 없습니다. 오늘 잘 심고 많이 심으면 그 날에 기쁨으로 풍성하게 거둘 것이니 기회 있는 대로 착한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이라는 날은 우리가 심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의 말입니다. 오늘이 가면 더 이상 심을 수 있는 기회가 없을 지도 모릅니다. 심는 길은 궁핍한 가정이나 이웃들, 복음의 일꾼들이나 하나님의 종들의 필요를 공급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착한 일을 하는 범위는 ‘모든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지 않는 가난한 이웃도 돌보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특별히 믿음의 가정에게 하라고 했습니다. 주위의 형제자매들에게 우선적으로 선행을 베풀어야 합니다.   


 


나가면서


성령의 열매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성도들은 주 안에서 서로 섬기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얼굴에 묻은 얼룩은 누가 지적해 주기 전에는 알지 못합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잘못이 드러난 경우 온유하게 그의 죄와 부족함을 지적해 줄 때 잘못을 깨닫고 올바른 삶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만약 누군가를 바로 잡으려 할 때, 자신도 그러한 죄를 범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을 ‘온유한 심령’으로 대해야 합니다. 신령한 자는 무엇보다 자신을 깊이 돌아보며 살아갑니다. 신령한 자는 사랑을 실천하며 그리스도의 법을 이룹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영적인 도움을 주는 자들에게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좋은 것으로 섬깁니다. 심고 거두는 원리를 따라 믿음으로 끝까지 인내하며 복음을 심고 뿌리며 세상에서 선을 행합니다. 영생과 썩지 아니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해 선한 일들을 실천합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믿음을 사용하고 연습하는 장소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생명의 씨를 가진 자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생명의 씨를 세상에 뿌려야 합니다. 성령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면 풍성하게 거둘 것입니다. 충성스러운 일꾼은 주님이 맡기신 복음의 씨를 끝까지 인내하며 뿌립니다. 때로 애써 행하는 선행이 이 세상에서 전혀 빛을 발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선한 일이 보람이 없다고 생각되어 낙심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만 알아주시면 된다는 자세로 기다리면 하나님의 때에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믿음의 형제들과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함께 주님의 공동체를 세워가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고 산 위의 도성이 될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함으로써 세상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