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예수님의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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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Date
2023-11-27 0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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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요 6:11, 마 11:25, 요 11:41-42, 막 14:22-24


예수님은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본이 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모든 면을 제대로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감사 생활에도 완벽한 모범이 되시기에 11월 마지막 감사주간을 보내면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감사를 살펴보며 우리도 수준 높은 감사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빈들에서 드린 감사(요 6:11)
첫 번째 예수님의 감사는 빈들에서 오병이어를 놓고 드리신 기도 속에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벳새다라는 고을로 가시자 무리가 따라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영접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해가 저물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빈들에 몰려든 사람들을 앉히고 보니 남자의 숫자만 오천 명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풍습대로 가족의 대표인 남자 성인만 헤아린 숫자입니다.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계수하면 만 명은 족히 넘을 만한 사람들이 빈들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모인 사람들의 숫자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많은 사람에게 음식을 먹인 사건이 표적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저녁이 되어 허기진 무리와 예수님의 손에 들려진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는 상황은 너무나 초라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시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 먹고 다 배불렀습니다. ‘축사하셨다’는 말은 축복하고 감사하셨다는 뜻입니다. 감사할 것이 별로 없을 것 같은 상황이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떡과 물고기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감사)하시고 떼어 나누어 주셨다고 할 때, ‘가짐(take)’, ‘축사(bless)’, ‘깨뜨림(break)’, ‘주심(give)’이라는 동사들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동사들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성찬을 하실 때의 상황을 묘사할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그 동사들이 예수님의 전 생애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영광을 돌리셨고, 십자가에 자신을 깨뜨려 생명을 주셨습니다. 무리가 먹은 것은 바로 예수님의 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먹고 먹어도 남는 양식이며 나누고 나누어도 없어지지 않는 양식입니다. 오병이어 표적은 2000년 전 벳새다 광야에서 한번 있고 마는 사건이 아닙니다. 오늘도 얼마든지 재현될 수 있습니다. 주님과 역동적인 관계를 가지고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마음을 품고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의 복 주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실패 후에 드린 감사(마 11:25)
두 번째 예수님의 감사는 갈릴리에서의 전도사역이 외견상 실패하신 것 같은 상황에서 드린 것입니다(마 11:20-26). 예수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라신과 벳새다 고을들이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이방 땅인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셨다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고 한탄하셨습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신 곳이고 갈릴리 사역의 중심지였습니다. 많은 권능을 경험하고 말씀을 듣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반응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치러야 할 대가도 큽니다. 예수님은 회개치 않는 가버나움의 죄악이 얼마나 심각한지, 심판 날에 소돔 땅이 가버나움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는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과 주권자 되심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천국의 임재를 나타내는 갈릴리에서의 말씀과 행위들을 가리킵니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은 스스로 지혜 있다 생각하며 자기 의를 자랑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거절하고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자들에게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들은 숨겨진 계시였습니다. ‘어린아이’는 문자적으로 나이가 어린 사람이 아니라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과 대조되는 사람들입니다. 어린아이는 헬라어로 ‘네피오이스’인데 ‘젖먹이’를 가리킵니다. 젖먹이의 특징은 의존성입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씻지도 못하고, 스스로 먹을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어린아이들’은 당시 자기 의로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던 세리와 죄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눈앞에 펼쳐지고 있든 새로운 계시의 빛에 열려 있었습니다. 이것은 당신의 뜻을 감추기도 하시고 드러내기도 하시는 아버지의 은혜로운 섭리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께 감사하셨습니다. 겉으로 볼 때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은 회개한 자들이 많지 않아 실패로 돌아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럴지라도 감사하신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 때문입니다. 실패 속에서 감사할 줄 아는 자들에게 복이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감사하는 자들에게 복이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부르심에 순종하여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만을 따르기 원합니다.

사랑하는 자의 무덤 앞에서 드린 감사(요 11:41-42)
세 번째 예수님께서 드린 감사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하신 기도 속에 들어 있습니다. 베다니라는 마을에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3남매가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그들을 아끼고 사랑하셨습니다. 어느 날 나사로가 병이 들었고 누이들이 예수님께 기별하여 고쳐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베다니에 오신 것은 나사로가 죽은 지 4일이 지난 후였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빠의 죽음을 인해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병든 나사로 곁에 계셨다면 그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원망 섞인 아쉬움을 쏟아내었습니다. 예수님은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울지 말라 하셨지만 당신도 나사로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 오셔서 ‘돌문을 옮겨 놓으라’(요 11:39) 하시고,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기도 응답은 기도하는 자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어야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과거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았고 앞으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을 “아버지여”라고 부르시면서 시작됩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 만물을 당신의 뜻대로 섭리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향해서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란 호칭은 오직 자녀에게만 허락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그 하나님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잠시 낙심했을지라도 다시 일어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과 함께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42절을 보면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라고 고백하십니다. 여기서 ‘안다’는 두 가지 의미로 쓰입니다. 하나는 ‘보았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믿는다’는 것입니다. 보았다는 것은 과거에 들어주신 것을 본 것이며, 믿는다는 것은 지금도 들어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전에도 나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 이제도 듣고 응답하신 하나님인 것을 믿고 감사하십니다. 예수님은 아직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주신 것으로 믿고 응답을 확신하며 미리 감사를 드리셨습니다. 주변에 있던 무리들이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기도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사람들로 하여금 확실히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목적은 문제 해결자체보다 그를 통하여 우리의 믿음의 진보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고통과 환난의 때에 불평하고 원망하기보다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는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히 4:15,16).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신 예수님은 나사로가 누워있는 무덤을 향하여 창조주의 권세를 가지고 ‘나사로야 나오라’고 외치셨습니다. 주님의 외침은 사망의 권세 앞에서 절망하는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게 하는 함성이었습니다. 그 생명의 말씀이 예수님의 입에서 나가자 죽은 나사로의 몸에 생명이 임하였고 수족을 베로 동인 채 무덤 밖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주님은 다시 살아난 나사로를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에게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자유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하여 육신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과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셔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을 보이셨습니다. ‘주의 사랑하시는 자’도 병이 들 수 있습니다. 때로 주님의 손길이 너무 먼 것 같아 안타까워 할 때가 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더욱 빛을 발하게 됩니다. 고난을 통하여 그분의 능력과 사랑의 영광을 체험하며 믿음이 더욱 견고해집니다. 살다 보면 힘든 일, 괴로운 일, 고통스러운 일, 짜증나는 일, 육체의 고통과 질병 등 다양한 아픔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작은 감사가 우리 인생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성도의 감사 고백은 역경 속에서 더욱 아름답게 빛이 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행복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면 행복해지는 것을 교훈합니다. 결과를 보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길을 책임져 주십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복을 받게 하는 그릇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그릇이 준비된 자에게만 하나님의 복이 임합니다. 쌓을 곳이 없이 넘치도록 채워 주십니다.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드린 감사(막 14:22-24)
네 번째 예수님의 감사는 최후의 만찬석에서 드린 기도 속에 있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과 유월절 음식을 잡수실 때였습니다. 예수님이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말씀하셨습니다. ‘축복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감사하고 찬미한다’는 뜻으로 하나님께 구별해 드리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기원하는 행위를 나타냅니다. ‘떼어’로 번역된 단어는 ‘깨다, 조각으로 부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채찍질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창에 찔리시는 예수님의 몸을 이 단어가 적나라하게 상징하고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이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임을 계시하신 사건이고, 마지막 만찬은 그분이 메시아, 즉 그리스도로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새 언약의 복을 가져다주실 분임을 예고합니다. ‘이것은 내 몸이니라 ... 이것은 나의 피니라’는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받는 것과 마시는 행위는 주님의 죽음에 인격적으로 동참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유월절 구속의 의미를 기념하기 위해 유월절 양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떡을 사용하신 것은 주님의 희생으로 더 이상 희생 제물이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히 9:12). ‘죄 사함’은 죄인이 죄의 빚에서 해방되는 것을,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는 이사야 53장에 기록된 대속적 희생이 성취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누어 주신 포도주는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언약의 피”입니다. ‘언약의 피’라는 표현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언약이 체결될 때 사용했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린 후 그 피를 가지고 제단 위에 뿌리고, 또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자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준행하겠다고 다짐합니다. 그 후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피를 뿌리면서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 24:8)고 선포했습니다. 즉 이 피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됐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타락했을 때, 하나님께서 장차 이스라엘과 새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렘 31:31) 새 언약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대속의 죽음을 전제로 하며 예수님의 피가 흘려지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시내 산의 언약은 육신적인 이스라엘과 맺었으나 예수님을 통한 새 언약은 새로운 이스라엘 즉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들에게 적용이 됩니다. 예레미야가 예언을 한 지 600년 만에 나타나신 예수님이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하셨고 바울도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고전 11:25) 하시면서 예수님의 피가 새 언약을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짐승의 피를 기초로 맺어진 옛 언약은 폐기되고 그리스도의 피에 기초한 새 언약 관계가 시작되었습니다(렘 31:31-34). 따라서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마시는 유월절 식사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끝나고 다음 식사는 천국에서 있을 것입니다(마 8:11). 예수님은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마치신 후 찬송을 부르시며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마지막 기도를 하시기 위해 겟세마네로 가셨습니다.

나가면서
오늘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감사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날이 저무는 황량한 빈들에서 아이가 가져온 오병이어를 놓고 무슨 감사할 것이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빈들에 모인 무리에게 식탁을 마련하셨습니다. 오병이어는 적은 양이었지만 그것을 들고 하나님께 감사하셨을 때 모인 무리가 배불리 먹고 남고 거둘 정도였습니다. 예수님 사역의 중심지였던 가버나움 사람들의 불신앙을 보면서 무슨 감사할 것이 있습니까?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받아들이지 않은 반면에 세상적으로 내세울 것 없는 자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은혜를 넘치게 받았음에도, 배운 지식이 많음에도 깨닫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주님의 경고는 비록 어린아이 같지만 말씀에 반응하고 깨닫는 이들에 대한 감사의 기도로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어린아이처럼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사랑하던 자의 무덤 앞에서 무슨 감사할 것이 있습니까? 병든 나사로는 죽어 무덤에 장사 된지 나흘이나 되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의 무덤 앞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 하나이다”(요 11:41). 예수님의 기도는 응답을 확신한 감사기도였습니다. 우리는 결과를 보고 감사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결과를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일하시는 과정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미리 감사를 드렸습니다.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하셨더니 죽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나사로가 다시 살아남으로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습니다. 너무나 감사하여 마리아는 나사로가 살아난 것을 축하하는 식사 자리에서 예수님의 몸에 나드 향유를 부었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감사표시를 한 것입니다. 이것이 낭비처럼 보여 가룟 유다가 비난을 했지만, 예수님은 가만 두어라 괴롭게 하지 마라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고 하시면서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막 14:6,9).

자신의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무슨 감사할 것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날 저녁에 다락방에서 제자들을 위하여 식탁을 마련하셨습니다. 때마침 유월절인지라 유월절 만찬을 준비하였는데 예수님은 그 만찬을 성찬으로 승화시키셨습니다. 자신의 찢기실 몸과 흘리실 피를 상징하는 떡과 잔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하시면서 당신이 오실 때까지 기념하라 하셨습니다. 성찬식이 영어로 Eucharist인데 그 의미는 give thanks, 즉 감사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실 시간이 다가옴을 아시고 자신의 죽으심, 살과 피를 기념하라고 하실 때에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희생 제물로 주시는 것에 대한 감사요 자신이 십자가에서 희생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드리는 감사는 오직 영생에 대한 소망을 가진 자들만이 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무슨 일을 당해도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믿어야 합니다. 믿으면 봅니다. 감사하면 행복해집니다. 이 평범한 진리를 붙들고 주님과 동행하면서 주님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야고보 1장에 보면 고난의 유익은 우리를 믿음의 사람, 인내의 사람, 성숙한 사람으로 빚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기뻐하라(약 1:2), 기도하라(약 1:5) 권면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니 예수님은 고난 속에서 감사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16-18에 나오는 바울의 권면을 보면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결국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내용이 되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환경을 초월한 진정한 감사자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본받아 감사하며 더 풍성한 감사의 열매를 거두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