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에덴의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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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3-10-08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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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계 22:1-11


인류 역사의 마지막을 묘사하는 계시록은 여러 면에서 인류 역사의 시작을 묘사하는 창세기와 대조됩니다. 창세기가 모든 것의 시작에 관한 책이라면 계시록은 모든 것의 완성에 관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계시록은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타락한 세상을 그분의 주권으로 새롭게 창조하시는 이야기이기에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 승리와 잃어버린 낙원의 회복과정을 자세히 소개합니다. 20장 후반은 주님이 재림하셔서 사탄을 영원히 패망시키고, 모든 죽은 자가 부활하는 가운데 흰 보좌 앞에서 최후 심판을 행하시는 모습을 소개합니다. 21장은 옛 하늘과 옛 땅이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거듭날 것을 예언합니다(벧후 3:10). 악인들은 불과 유황이 타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고, 의인들은 새 땅에 임하는 어린양의 신부들의 천상 공동체, 즉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22장의 전반부인 본문은 회복된 에덴동산의 모습이 어떠할지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장차 재림의 주를 맞이하며 새 예루살렘에 거하게 될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생명수 강과 생명나무(1-5절)
최후 심판 후 펼쳐질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은 전에 있던 더러운 것들을 제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완전히 새롭게 됩니다. 성 가운데로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 강이 흐릅니다. 생명수 강으로 불리는 것은 그 강물이 생명의 힘을 주는 물이기 때문입니다. ‘수정같이 맑다’로 묘사된 것은 한 점의 얼룩이나 티도 없이 깨끗하고 정결한 상태를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생명수의 강’은 요한복음 7:39의 생수의 강과 병행을 이룹니다. 요한복음에서 ‘생수의 강’은 성령을 가리키고, 에스겔 36:25-26에서 ‘정결케 하는 맑은 물’도 종말론적 성령을 상징합니다. 여기서도 생명수의 강은 성령의 정결케 함과 생명의 회복을 상징합니다. 에스겔이 환상 가운데 본 강은 성전 문지방 밑에서부터 흘러나와 사해로 흘러들어갔지만(겔 47:1), 요한이 환상 가운데 본 생명수 강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이는 하나님과 어린양이 생명의 근원임을 뜻합니다. 이제 성도들은 더 이상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히 8:5)에 해당하는 성전으로부터 나온 생명수가 아니라 실제 생명의 근원되시는 예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수를 받아 마시게 됩니다. 그 결과 보좌로부터 나온 포도주로 만국을 취하게 만드는 바벨론과 달리, 하나님과 어린양은 신자들을 영원히 만족시키고 그들의 필요를 공급해 주십니다.

에덴동산 가운데에 생명나무가 있었듯이(창 2:9), 새 예루살렘에는 생명수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습니다. 생명나무는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두신 나무인데,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에는 그 열매를 먹지 못하도록 접근을 막으셨습니다(창 2:9; 3:22-24). 강 좌우에 있는 생명나무는 에스겔 47:12의 이미지와 비슷합니다.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생명나무’는 한 그루가 아니라 새 예루살렘을 가득 채운 수많은 나무들을 가리키며, 그것이 에덴의 복을 회복하는 동시에 능가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 나무들에 달마다 열매들이 맺힐 것입니다. 생명나무의 열매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실 영생을 의미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이 맺는 성령의 열매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여기서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는 표현은 그 잎사귀가 치료를 위한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계시록은 그 의미를 그대로 살려서 에덴의 삶이 회복되어 생명수 강처럼 소생케 됨을 경험할 것이라고 합니다. 새 예루살렘은 아픔과 사망이 없는 완벽한 곳입니다. 그 결과 새 예루살렘에서는 완전한 영적, 육체적 회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삶을 그분의 은혜로 충만케 하시기 원합니다. 하나님께 붙어 있는 가지는 어떤 시련에도 결코 시들지 않고 오히려 더욱 견고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저주가 없으며”저주는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뜻하는데, 저주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엔 더 이상 죄악과 그 죄에 대한 심판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로 인해 이 땅에 들어온 저주가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음으로 그의 종들 곧 성도들이 섬깁니다.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성경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과 관련된 내용이 여러 번 나옵니다.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나타나셨는데 인간의 타락 후에 하나님은 얼굴을 감추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은 얼굴을 다시 보이셨고 계시록에서 새 예루살렘 공동체에게 얼굴을 보여 주십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지만 그분의 얼굴은 보지 못했습니다(출 33:20,23).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마 5:8)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신적 영광을 보았고(요 1:14; 14:7), 신자들은 성령을 통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합니다(고후 3:18). 죄에서 해방된 하나님의 백성은 새 예루살렘에서 마침내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바울은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고전 13:12)이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에게 예배드리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하나님과 교제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제한적으로 경험하지만, 새 예루살렘에서는 하나님의 임재를 풍성하게 누릴 것입니다. 짐승을 따르는 자들이 오른손이나 이마에 받은 표는 그들이 짐승에게 속함을 상징합니다(13:16). 반면에 하나님 종들의 이마에 쓰인 하나님의 이름은 그들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빛으로 인해 새 예루살렘에는 밤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양이 등불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는 표현에서 ‘왕 노릇’은 ‘통치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교회가 불신자 위에 군림한다거나 특정 성도가 다른 성도를 지배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만물을 통치하도록 위탁 받았던 사명(창 1:26)의 회복으로 새 창조, 곧 새롭게 된 만물에 대한 통치 사역을 의미합니다. 지금 하나님의 빛을 사모하고 기뻐하는 사람들만이 그날에도 온전히 비치는 그 빛을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됩니다.

낙원의 회복
에덴 (창 2-3장) 새 예루살렘(계 21-22장)
거주하며 가꾸어야 할 동산(2:8-9) 완성된 영광스러운 도성(21:10)
에덴에서 흘러나온 강(2:10)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수의 강(22:1)
금과 호마노(2:11-12) 금으로 된 거리, 온갖 보석으로 만든 성곽(21:19-21)
다스리고 섬기라는 부르심(1:26; 2:15) 왕과 제사장으로 섬김(22:3,5)
한 남자와 한 여자(2:22-24) 만국에서 온 신자들(22:2)
유혹하여 수치를 가져온 부정한 뱀(3:1) 속되고 가증하고 기만적인 것이 전혀 없음(21:27)
하나님의 임재로부터의 추방(3:23-24) 영원히 지속되는 하나님의 임재(21:3,23)
생명나무에 대한 접근 금지(3:22-24) 도성을 통해 주어지는 영원한 양식과 치료제(22:2,14)

계시의 신뢰성(6-7절)
22:6-21은 계시록의 에필로그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가 요한에게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라고 말합니다. ‘이 말들’이란 좁게는 21:1~22:5의 내용이며 넓게는 계시록 전체를 가리킵니다. ‘신실하고 참되다’는 표현은 이미 여러 번 언급되었습니다. ‘충성되고 참되신 증인’(3:14), 그 이름을 ‘충신’과 ‘진실’로 표현되시는(19:11) 주 예수님. 계시록의 계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들의 영들의 하나님’으로 묘사됩니다. 여기에서 ‘선지자들의 영들’이란 그들의 증거가 성령에 의해 감동된 선지자들을 가리키는데 이들을 구약과 신약의 선지자들로 이해해도 좋습니다.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이 1:1에 이어 다시 한 번 언급됩니다. 계시록을 시작하면서 언급한 이 말을 22장에서 반복함으로 종말론적 긴장감을 더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시는 것은 ‘속히 될 일’인 하나님의 심판과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으로 완성될 구원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내가 속히 오리니”현재 시제의 문장으로 ‘내가 속히 오고 있다’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마치 지금 오고 계신 것과 같은 생생한 모습을 나타냅니다. 문맥과 위치를 고려하면 ‘속히 온다’라는 말은 재림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재림을 알려주심으로 누구든지 아직 기회 있을 때 예수님을 믿고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기 원하십니다. 편지의 서두에서는 계시록의 계시를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것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했는데(1:3), 여기에서는 특별히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복을 선포합니다. “지키는 자”는 현재분사로 ‘꾸준히 지속적으로 지켜 행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게 하고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가게 하는 영적 능력을 갖추게 합니다(딤후 3:15-17). 그러므로 성도는 그 말씀을 믿고 지켜 행함으로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끝까지 지켜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응답해야 합니다.

요한의 반응(8-9절)
요한은 자신이 모든 계시를 보고 들은 자라고 진술하면서 자신에게 계시를 전해 준 천사에게 경배하려고 엎드렸습니다. ‘엎드리다’는 ‘복종하다’는 뜻을 가지며 여기서는 천사의 임재에 압도당해 엎드려 예배할 수밖에 없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전에도 요한은 같은 행동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19:10). 천사는 이런 요한에게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도 요한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중개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천사는 요한과 그의 형제 선지자들 그리고 이 책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은 모두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종으로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말합니다. 요한이 이것을 언급한 이유는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천사 숭배 사상을 경고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 경배하라”는 계시록 전체를 요약하는 권고입니다.

인봉하지 말아야할 말씀(10-11절)
다니엘은 마지막 때까지 말씀을 비밀리에 지키고 글을 봉함해야 했습니다(단 12:4). 그러나 요한에게는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이는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 예수님이 인봉된 책을 열게 된 사건(5장)과 관련됩니다. 인봉이 떨어지고 책이 개봉되는 것은 종말이 임박했다는 의미입니다. 종말론적 계시는 계시록으로 인해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문제는 독자들이 계속해서 종말론적 긴장감을 가지고 말씀을 지키는가 여부입니다. ‘때가 가까우니라’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임박함을 시사한 것으로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예언의 말씀을 교회가 알 필요가 있으며 모든 사람이 들어야 합니다. 계시록에 따르면, 사람들은 어린양을 따르는 의인들과 짐승을 따르는 악인들로 양분됩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러운 채로 내버려 두라고 합니다. 의로운 자와 거룩한 자 역시 그 상태를 유지하라고 합니다. 마치 죄인과 의인의 운명이 정해진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은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강렬하게 죄인들의 회개를 촉구하고 성도들의 믿음을 굳건히 유지하려는 역설적인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종말에 대한 모든 계시가 드러났고 그때가 가까웠으므로 신속하게 불의와 더러움에서 회개하여 하나님 앞에 의롭고 거룩한 자로 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의 가능성이 사라지는 때가 분명히 올 것입니다. 종말론적 심판과 구원의 때가 오면, 불의한 자는 영원한 벌을, 의로운 자는 영원한 상을 받습니다. 그런 때가 가까울수록 성도는 밝히 드러난 계시의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또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세
장차 새 예루살렘에서 살게 된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죄인인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할 수 없습니다. 그분의 얼굴을 대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화목하여 아무런 제약 없이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만왕의 왕이신 그분과 함께 왕 노릇 할 수 있습니다. 회복된 에덴동산에서는 저주도 죄악도 어두움도 없이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서 모든 피조물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복된 삶을 누리게 됩니다. 바울은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라고 했습니다. 이 땅에서 끝없는 고통과 아픔을 경험하는 인생들이 모든 수고를 그치고 참된 안식(히 4:11)에 들어가서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를 누리며, 그분을 통해 새 힘을 공급받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왕의 신분으로 풍성함을 누릴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을지라도 소망 중에 주 예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마라나타, 곧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22:20)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 말씀을 잘 지켜야 합니다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 말씀을 거역한 결과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다는 것은 무한한 자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공급이 차단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로 인해 인간은 끊임없이 결핍의 문제를 안고 살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들은 말씀대로 순종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우리에게 복이 됩니다. 우리를 향한 칭찬과 격려, 위로와 소망이 됩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를 향한 징계와 견책이 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듣기 싫고 순종하기 힘들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면 우리는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실하고 참됩니다. 계시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갈 때 약속된 영원한 삶의 복을 누리게 됩니다.
- 현재의 삶에 충실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속히 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종말론적 긴장감을 자아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목적은 재림의 시기에 대한 정보를 주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재림을 준비하며 살도록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종말뿐만 아니라 개인의 종말을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당장 오늘 밤에 죽더라도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습니다. 종말론적 구원과 심판에 관해 알게 된 독자는 어느 길을 선택하여 살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새 예루살렘의 영광스러운 모습은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 지 회화적으로 잘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성도들이 믿음을 고백하는 순간, 이미 생명의 나라로 옮겨졌으며, 하나님의 통치 행위가 효력을 발휘하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그들의 마음 가운데 시작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내세만을 바라보며 이 세상의 삶을 소홀히 여길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철저히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가면서
계시록 22장은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에서의 복된 삶의 내용을 좀 더 종합적으로 언급하며,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잃어버린 에덴동산을 완전히 회복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찬란한 성 예루살렘의 모습은 마지막에 완성될 교회의 모습입니다. 새 예루살렘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완전한 세계이자 그들이 영원히 거할 처소로, 하나님의 새 창조에 속한 전적으로 새로운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는 에덴동산을 연상시킵니다. 에덴동산과 새 예루살렘에 모두 생명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은 에덴동산보다 완벽한 곳입니다. 에덴동산에 있던 선악과가 새 예루살렘에는 없습니다. 하와를 미혹한 옛 뱀, 즉 마귀는 불 못에 던져집니다. 죄뿐만 아니라 죄의 결과로 이 세상에 들어온 모든 저주는 새 예루살렘에서 사라집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위해 완벽한 성을 준비해 놓으십니다. 성도들이 가장 사모해야 하는 궁극적 상급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갈라졌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새 예루살렘에서 완전히 회복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세세토록 왕 노릇 할 것입니다. 역사를 시작하신 하나님이 역사의 마지막을 아름답고 영광스럽게 완성하십니다.

주님은 앞에서도 여러 번 말씀하신대로(2:16; 3:11; 16:15) 속히 오겠다고 하십니다. 그 약속의 말씀은 신실하고 참된 것이기에 반드시 성취됩니다. 특히 이번 약속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흐르는 생명수의 강, 새 예루살렘의 모든 것을 다 보여 주신 후에 또다시 선포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계시록의 말씀이 인봉된 채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 심판의 때가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에 따라 성도는 깨어서 주님의 재림을 대비해야 합니다. 주님이 곧 오실 것이니, 의로운 자는 계속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도 그대로 거룩하게 자기를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또한 계시의 말씀을 전파하여 될 수 있으면 많은 영혼이 생명수 강의 샘물을 마시고 영생을 누릴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가 장차 경험하게 될 이러한 삶의 질적 변화를 우리가 지금도 부분적으로 맛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에게 완전하지는 않지만 영적으로 풍성한 은혜를 지금도 경험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삶에 찾아오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성도는 어떤 형편과 처지 속에서 미래에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말씀을 잘 지켜야 합니다. 현재의 삶에 충실해야 합니다. 주님과의 아름다운 교제를 통해 그 은혜를 이 땅에서도 누리고 나누고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