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사명자로 빚으시는 하나님

Author
Myung Myung
Date
2022-07-24 15:32
Views
291

살다보면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낙심이 되고 앞으로 어떻게 진행이 될지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소심해지고 무엇인가를 해보겠다는 의지도 약해지기 쉽습니다. 기드온이 바로 그랬습니다. 당시 미디안과 아말렉, 동방 사람들의 침입은 이스라엘에 매우 위협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수확기가 되면 어김없이 쳐들어와 장기간 진을 치고 약탈했습니다. 이러한 일이 매년 계속되자 이스라엘은 생존의 위협을 느끼며 부르짖으니 하나님은 한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의 배교를 지적하시고, 사자를 보내 기드온을 사사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매우 의심이 많고 소심한 인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선뜻 응하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기드온 이야기는 적들의 손에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구원받았는가에 초점을 두기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는 데 중점을 둡니다. 즉 기드온의 영웅적인 모습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의 주체가 되시고, 하나님만이 유일한 경배의 대상이시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돌이키시기 위해 열정적으로 일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각자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일이 순적하게 풀리면서 기쁨이 있고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앞뒤좌우가 막힌 것 같아 낙심이 되고 하나님은 내게서 멀리 계신 분으로 생각됩니까? 기드온을 인도하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살펴보며 어떤 상황에서도 그분을 여전히 신뢰하고 그분의 인도함을 받으면서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룹바알이 된 기드온(25-32절)


기드온이 ‘여호와 샬롬’이라는 단을 쌓은 바로 그날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아버지에게 있는 7년 된 둘째 수소를 끌어오고, 그의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산성 꼭대기에서 하나님을 위해 규례대로 한 제단을 쌓고 끌어온 수소를 잡아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리라고 하십니다. 보통 번제 규정에서는 번제로 드릴 소의 연령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7년 된 소의 연령과 7년의 미디안의 압제 기간이 같은 것이 흥미롭습니다. 미디안의 압제가 시작하면서 태어난 소를 번제로 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미디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네 하나님 여호와”로 묘사하시며 기드온과의 관계를 강조하십니다. 제단을 세울 장소로 ‘이 산성 꼭대기’가 제시되는데, 그곳은 바알의 제단이 있었던 곳이거나 그 제단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을 것입니다. 찍어버린 아세라는 번제를 위한 땔감이 됩니다. 기드온의 집안뿐 아니라 온 동네 사람들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지시하신 대로 행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그 일을 시키신 것은 기드온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사사로 나서기 전에 먼저 신앙적으로 바로 서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여호와만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종 열 명과 함께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했다는 것은 그의 집안이 부유했음을 알려 줍니다. 기드온이 ‘밤에 행했다’는 설명은 명령을 받은 바로 그날 밤에 행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밤’앞에 정관사가 없는 것은 기드온이 그다음 날 밤 혹은 며칠 후 밤까지 기다렸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가 낮에 그 일을 실행하지 못한 것은 자기 집안과 성읍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밝힙니다. 날이 밝자, 온 성읍이 난리가 났습니다. 그들이 섬기던 바알의 제단이 파괴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새로 만들어진 제단에 수소가 번제로 드려져 있고, 아세라 상은 땔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본 즉’이라고 번역된 ‘히네’는 마치 성읍 사람들이 본 장면을 클로즈업해서 보여 주는 듯한 기능을 하면서 성읍 사람들의 당혹감을 생생하게 드러냅니다.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일을 저질렀음을 알게 된 성읍 사람들은 요아스에게 그의 아들을 당장 끌어내라고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을 섬겼다면 그를 처벌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위해 우상을 찍은 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을 끌어내 죽이려 하는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미디안 때문에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사람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일을 한 기드온을 죽이려 합니다. 


 


이에 요아스는 허물어진 바알의 제단이 자신의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드온의 편을 듭니다. “그를 위하여 다투는 자는 아침까지 죽임을 당하리라”라는 말은 바울 때문에 기드온을 해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이 그를 죽이겠다는 경고입니다. ‘바울이 그토록 위대한 신이라면 너희가 감히 바알을 위해서 논쟁을 벌이고 바울을 구해낼 수 있겠느냐? 바알이 알아서 처리하게 내버려두라. 바알이 신이라면 자기 스스로를 지킬 것이다. 요아스는 바알이 참 신이 아니라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무능한 우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성읍 사람들은 잠잠해졌을 것입니다. 바알의 무능함을 드러내고 바알 숭배를 여호와의 섬김으로 바꿔놓은 후에 기드온은 바알과 맞서 다투는 여룹바알이라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여기서‘더불어 다투다’라는 표현은 같은 편이 되어 함께 싸운다는 의미가 아니라 싸움의 대상으로 삼아 다툰다는 의미입니다. ‘여룹바알’이란 이름은 무능한 우상 바알에 대한 기드온의 승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여호와의 영이 임한 기드온(33-35절)


그때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쳤습니다. 이번에도 이스라엘로부터 곡식과 가축들을 약탈하려고 온 것입니다. ‘골짜기’라고 번역된 단어는 사실 평지를 의미합니다. 그곳은 갈릴리 호수와 사마리아 사이에 있는 매우 비옥한 땅이요 군사적, 경제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습니다. 그들은 요단을 건너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을 넘보고 있습니다. 이때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합니다. ‘임하다’라는 동사는 문자적으로‘덮다, 감싸다’라는 뜻으로 구약성경에 두 번 더 나옵니다. “그 때에 성령이 삼십 명의 우두머리 아마새를 감싸시니”(대상 12:18). “이에 하나님의 영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대하 24:20). 기드온은 출중한 능력이나 자질, 담대한 믿음이 없지만, 여호와의 영이 친히 그를 둘러싸고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기드온이 여호와의 영을 힘입어 싸우는 대리인이며, 이 싸움은 철저하게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행하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기드온은 곧바로 군대를 소집합니다. 나팔을 불자 그가 속해 있던 아비에셀 족속이 몰려듭니다. 이어서 가나안 땅의 서북쪽 지파들인 므낫세와 아셀, 스블른과 납달리에도 사자를 보냅니다. ‘또 사자들을 ... 보내매’라는 표현이 두 번이나 사용된 것은 성령의 인도함이 아닌 기드온의 독자적인 행동임을 뜻합니다. 7장을 보면 하나님이 두 번에 걸쳐 모인 군대의 수를 줄이십니다. 기드온이 두 번이나 군대 수를 늘인 것을 무산시키려는 의도와 연결돼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미디안과 싸우려면 많은 군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여호와께 의존하기보다 나름대로의 안전망을 구축하는데 많은 관심을 두었습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후에 다른 사사들처럼 곧장 적에게 나아가야 하는데 기드온은 망설였다는 것이 이제부터 시작하는 기드온 스토리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입니다.


 


양털 표징을 구하는 기드온(36-40절)


기드온은 군인들이 소집된 상황에서도 여전히 주저합니다.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이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하신 구원에 대해 조심스럽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삿 6:14,16). 특히‘내 손’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자신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는지에 대해 확신을 갖기 원합니다. 여호와의 관심은 바알이 아닌 여호와만이 참 신이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할 능력이 있으신 분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자신이 여호와가 약속하신 대로 용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보소서’하면서 기드온은 여호와께 자신의 말에 주목해 주실 것을 부탁합니다. 기드온은 양털을 타작마당에 두었을 때,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고 주변 땅이 말라 있으면 자신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는 여호와의 말씀을 믿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의 제안에 순순히 응해주십니다. 38절은 아주 간결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그대로 된지라’라고 말합니다. 기드온이 다음 날 아침 일어나 보니 과연 타작마당은 마른 채 양털만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슬이 습기를 많이 오래 함유하는 양털에 있고 그 주위의 땅이 마르는 것은 자연적으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제시한 첫 번째 시험이 스스로 보기에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을 기드온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초자연적인 개입이 없으면 불가능한 증거를 요구합니다. 주변 땅은 모두 젖고 그 가운데 있는 양털만 말라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또다시 하나님께 증거를 요구하는 것이 무례한 일이라는 것을 기드온도 알았기에 “주여 내게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라고 하며 부탁합니다. 아브라함도 소돔을 위하여 간구할 때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창 18:32) 그러나 그때는 50명에서 45, 40, 30, 20으로 여러 번 부탁하고 난 후였는데 기도온은 두 번 만에 이런 말을 합니다. ‘시험’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도 부적절합니다. 여호와를 시험하는 것은 모세의 율법에 금지돼 있습니다(신 6:16). 사사기 2:22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이 모세의 율법을 청종하는지를 시험한다는 표현이 있는데 기드온이 지금 여호와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증거를 두 번이나 구한 이유는 그의 소심한 성격과 여호와에 대한 편견, 그리고 부족한 믿음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미 기드온에게 바알의 제단을 헐라는 명령을 하시면서 자신을 ‘네 하나님 여호와’라고 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드온은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선언했을 때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셨다’라고 여호와에 대한 실망감을 토로했습니다. 미디안의 강력한 압제로 인한 비참한 상황이 기드온을 소심하게 만들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의심을 갖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드온은 말씀을 듣고도 눈에 보이는 증거 없이는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비슷한 요구를 두 번이나 반복하는 기드온의 무례함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베푸셔서 그의 요구대로 응해주셨습니다.


  


* 우리의 자세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쓰임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거룩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본문은 믿음이 온전하지 않은 사람도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거룩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냥 사용하신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삶의 방식에 영향 받지 않고 구별된 삶을 살아야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이 먼저 자기 집안에 있는 우상 제단과 우상을 제거해 하나님을 거룩하게 섬기기 원하셨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정욕과 탐심에서 벗어나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시며,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고 예배하기를 원하십니다. 성도의 거룩함은 예수님의 십자가 승리로 주어진 것이기에 그분과 동행함으로 거룩함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는 바알이 참된 신이 아니라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무능한 우상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죄와 사탄의 지배에서 벗어나 성령 안에서 죄의 정욕을 죽이며 사탄과 맞서 대적하는 ‘여룹바알’과 같은 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도는 새 신분에 맞게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 성령의 임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영이 임한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옷니엘과 에훗에게 임한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했고, 그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로 부름 받았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그를 감싸고 두를 때, 그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선포하며 세상 앞에 설 수 있는 용사가 되었습니다. 우리 삶에 두려움과 염려가 찾아올 때 가장 먼저 점검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으로 무장되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모든 상황을 주목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그 상황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확신을 가지고 반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알려주시며, 우리가 하나님을 확신 있게 바라볼 수 있도록 성령으로 친히 옷 입혀 주십니다. 기드온처럼 소심하고 문제 많던 예수님의 제자들을 쓰임 받게 한 것 역시 성령이었습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사명을 위해 간헐적으로 임하던 그 영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임합니다. 성도는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영적 전쟁을 수행해야 합니다.


-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두려움은 믿음이 연약할 때 나타나는 보편적인 감정입니다. 두려움을 이기려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견고히 합니다. 믿음이 견고해지도록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과 인내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명을 받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았음에도 여전히 믿음의 발걸음을 힘차게 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믿음의 연약함을 탓하실까 두려워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귀신 들린 아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나아온 아버지가 예수님으로부터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라는 말씀으로 믿음 없음을 지적받았습니다. 그때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막 9:24)라고 외쳤던 아버지처럼 성도는 믿음을 갖도록 도우시는 하나님 앞에 언제든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사역을 감당할 때에는 자신의 현재 상태나 조건이나 자격만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그분의 능력과 지혜를 붙들고, 그분이 이뤄 가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나약한 모습에 실망하고 포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도리어 좌절한 자를 일으켜 세우시고, 두려워하는 자에게는 용기를, 무능을 고백하는 자에게는 능력을 주심을 알게 하시며 사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기드온의 양털 시험은 그의 소심한 성격과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의 요구는 하나님께 무례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드온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의심과 불신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신뢰를 회복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믿음을 책망하고 정죄하기보다, 믿음을 갖기까지 인내하시며 마침내 승리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분입니다. 


 


나가면서


기드온은 주님이 이미 말씀하신대로 자기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확신은 없었습니다. 연약한 자신이 과연 구원 사역을 감당하실 수 있을까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털 한 뭉치를 사용해 하나님의 뜻에 대한 확신을 얻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이 말한 대로 행하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지 못하는 기드온에게 표징으로 확신을 주셨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연약한 우리를 통해 그분의 나라를 세워 가기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사명을 주실 뿐 아니라 그 사명을 감당하도록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용기와 확신을 주십니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으려면 우상을 제거하고 거룩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사모하며 성령을 힘입어 삶의 두려움을 이겨내야 합니다. 믿음이 견고해지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상황이 예나 지금이나 결코 만만치 않지만 우리의 시선은 주님께 고정해야 합니다. 독생자까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임마누엘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모든 분들이 이 시대의 여룹바알이 되어 영적 전쟁을 잘 치르며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며 거둔 열매를 인해 주님으로부터 칭찬 들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