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기드온을 부르시는 하나님

Author
Myung Myung
Date
2022-07-03 15:39
Views
252


다음 주일은 저희 교회 창립 주일입니다. 1995년에 창립되었으니 벌써 27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때가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참 빨리 흘렀습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분들 중에는 창립 멤버도 있고 오신 지 20년, 10년, 5년, 그리고 최근에 오신 분들도 있습니다. 창립주일을 맞이하는 감회가 어떠십니까? 정말 후회없이 섬겼다고 생각하십니까? 앞으로 잘 섬겨보려고 결단하십니까? 발등의 불을 끄는데 신경을 쓰다 보니 제대로 섬기지 못했습니까? 돌아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의 부족함,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여기까지 도우신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현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느라 애쓰시는 교우들, 그리고 함께 신앙생활 하다가 사정상 다른 곳으로 떠나신 분들까지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드온 하면 ‘기드온과 300용사’가 먼저 떠오릅니다. 주일학교 시절부터 신나는 무용담으로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6장부터 8장에 나오는 기드온 스토리를 살펴보면 ‘기드온과 300용사’는 일부일 뿐입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주제들을 다룹니다. 기드온이 부름 받을 때 이스라엘의 상황이 어땠습니까? 왜 기드온이 선택되었습니까? 그가 그 부르심에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기드온의 반응을 보시며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비전을 받은 기드온이 어떤 모습으로 나아가는지 앞으로 몇 주에 걸쳐 살펴보려고 합니다. 


 


다시 압제를 당하는 이스라엘(1-6절)


사사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영적 침체기에 해당합니다. 350년 동안 ‘백성의 범죄 -> 이방인의 억압 -> 백성의 부르짖음 -> 사사를 통한 구원 -> 또 다시 범죄’라는 패턴이 반복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기를 싫어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함으로써 점점 깊은 침체를 경험합니다. 드보라가 강력한 철병거를 소유한 가나안 왕 야빈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한 후 40년 동안 평화를 누렸지만 이스라엘은 ‘또’‘여호와의 목전에’악을 행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 7년 동안 붙이시며 징계하셨습니다. 미디안 족속은 아브라함의 후처인 그두라의 자손으로 에돔의 남쪽에 살던 유목 민족이었습니다. 미디안은 모세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크게 패한 적이 있으나(민 31:1-12), 200여 년이 지난 기드온 시대에는 이스라엘의 압제자로 등장했습니다. 미디안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특히 4장의 내용을 생각할 때 아이러니합니다. 시스라를 죽인 야엘은 겐 사람 헤벨의 아내였는데, 4:11에 의하면 헤벨은 미디안 사람이었던 모세의 처남의 자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미디안을 통해 구원을 받았는데 이제는 미디안에 의해 압제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미디안 족속을 피해 산에서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만들어 살아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씨를 뿌려 놓으면 추수 때가 되었을 때 미디안 사람들이 아멜렉 사람과 동방 사람과 연합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와 토지소산만이 아니라 양과 소와 나귀도 빼앗아 갔습니다. 4절에는 ‘진을 쳤다’고 하고, 5절에는 ‘장막을 가지고 올라왔다’고 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미디안의 침입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땅의 모든 소산이 없어질 때까지 장막을 치고 거주하면서 약탈한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아예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작정이었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이 몰려오는 모습은 마치 메뚜기 떼와 같았습니다. 메뚜기 떼가 한 번 지나가면 들판에 남는 것이 없듯이 미디안이 이스라엘 땅을 한 번 지나가면 남는 것이 없었습니다. 대적이 “메뚜기 떼 같이”왔다고 묘사하는 것은 선지서에서 ‘여호와의 심판의 날’을 연상시킵니다(사 2:19; 욜 1:4). 멸망의 분위기를 더합니다. 이런 일이 7년 동안 연례행사처럼 계속되었습니다. 미디안의 장기적이고 철저한 약탈로 인해 이스라엘은 심히 궁핍하게 되었습니다. ‘궁핍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단순한 굶주림이 아니라 극심한 결핍으로 인해 비참해진 상태를 묘사합니다. 그제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다시 부르짖습니다. 사사기 전체의 맥락으로 미루어 이 부르짖음은 진정한 회개라기보다 압제로 인한 괴로움을 토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부르짖음에 대한 여호와의 반응(7-10절) 


6절과 7절에서 ‘부르짖다’라는 동사를 두 번 사용해서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스라엘의 상황이 절박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 부르짖음에 응답하십니다. 그런데 이번 반응은 이전의 것과 다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바로 사사를 구원자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 먼저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한 메시지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출애굽부터 가나안 정복까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을 설명합니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는 표현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를 지칭합니다.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며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여 애굽 사람의 손과 너희를 학대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고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었으며”여기에 사용된 동사들은 모두 하나님이 주어인 1인칭 동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도해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 너희가 거주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음을 상기시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어떤 존재이고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어떤 존재인지를 그들이 분명히 알기 원하셨습니다. 여기서 아모리 사람은 가나안 사람을 가리킵니다. 가나안 땅의 신들은 대표적으로 바알, 아스다롯, 그모스, 몰록, 다곤 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명하셨는데, 이스라엘은 흉년에 대한 두려움, 주변 민족들로부터 공격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방 우상들에게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이스라엘은 이방의 압제와 착취에 시달리며 고통당해야 했습니다. 선지자는 마지막으로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하며 그들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현재 당하고 있는 고통과 억압은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에 나타나는 언약의 저주의 내용으로 그들이 ‘언약의 파기’의 대가를 치르고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하나님의 책망은 회복으로 이끄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책망하실 때 속히 깨닫고 그분의 은혜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기드온을 부르시는 하나님(11-16) 


선지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호와의 사자’가 등장합니다. 그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았습니다. 드보라는 ‘자신의 종려나무 아래’(4:5)서 예언한 반면에 여호와의 사자는 가나안 신들을 예배하는 장소로 쓰인 ‘상수리 나무 아래’에 옴으로써 여호와의 사자가 가나안 신의 영역을 침범한 셈이 됩니다. 이미 가나안 신과 영적인 싸움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브라는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의 땅이었습니다. 아비에셀은 므낫세 지파에 속했으며, ‘요아스’라는 이름은 ‘나의 아버지는 도움이다’라는 뜻입니다. 여호와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는 이름을 가진 요아스가 그의 집에 바알 제단이 있었다는 사실이 큰 문제입니다. 그때 기드온은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보통 밀 타작은 넓은 마당에서 소가 끄는 타작기를 이용합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바람이 잘 통하지 않는 좁은 포도주 틀에서 타작합니다. 더욱이 ‘타작하다’라고 번역된 동사는 일반적으로 하는 타작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과실이나 곡식의 알갱이를 막대기 같은 것으로 떠는 행동을 묘사합니다. 사사기 저자는 기드온의 행동을 통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 줍니다. 그런 기드온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큰 용사’라고 부릅니다. 개역개정에는 ‘큰 용사여’라는 호격이 먼저 나오지만, 히브리어 본문의 순서는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는 선언이후에 ‘큰 용사’가 나옵니다. 이 어순이 중요합니다. 기드온이 큰 용사가 되어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포도주 틀에 숨어서 작업하는 기드온에게 ‘큰 용사’라는 타이틀이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하나님은 부족한 기드온의 현재를 보신 것이 아니라 미래를 보셨습니다. 그를 ‘큰 용사’로 부르시는 것이 기드온에게 주신 비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름을 받은 기드온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여호와가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요? 그러면 왜 우리가 이 모양 이 꼴로 살아갑니까? 우리의 조상들이 걸핏하면 출애굽 사건을 떠올리며 하나님의 권능을 이야기했는데 만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그때와 같은 기적이 왜 지금은 나타나지 않습니까? 왜 우리가 미디안에게 이토록 시달려야 합니까? 기드온의 불평은 그 당시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졌던 생각을 반영합니다. 기드온이나 이스라엘이 알지 못한 것은 이스라엘이 압제를 당하는 이유가 하나님이 그들을 버려서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기드온의 항의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으십니다. 이미 선지자를 보내셔서 그 이유를 대답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의 원망 섞인 투정을 받아줍니다.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6:14) 기드온은 이 어려운 상황에 전과 같이 어떤 사사가 나타나서 해결해주지 않을 까 생각하였을 텐데 하나님은 미디안과 싸울 사람은 바로 기드온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이 너의 힘’이란 기드온이 현재 가진 힘이 아닙니다. 34절에서 기드온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는 말씀을 고려한다면, ‘그 힘’은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그분이 주시는 힘을 의지하여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압제에서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는 말을 들으면서 기드온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고 문제 해결을 위해 자신을 선택하셨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자기 집안은 미약하고 자신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에 부족하다고 하면서 부르심에 시큰둥합니다. 오브라가 요아스의 소유였다는 사실은 그의 아버지가 부유하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기드온이 자신의 집안을 극히 약하다고 한 것은 과장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는 세상적인 조건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믿음으로 순종의 첫발을 내디디기만 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신다는 말입니다. 


 


표징을 구하는 기드온(17-24절) 


하나님은 기드온과 함께하시겠다고 거듭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기드온은 말씀을 확신할 수 있는 증거를 보기 원합니다.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라는 개역개정의 번역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주’라는 단어는 여호와를 지칭하거나 상대방을 높이기 위해 사용된 것이 아닙니다. 기드온은 아직 자기 앞에 선 자가 여호와의 사자인지 모릅니다. 히브리어 본문에는 ‘너’라는 2인칭 대명사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17절은 ‘당신이 말한 것과 관련된 표징을 보이소서’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자가 말한 것이 확실하다는 표징을 요구한 것입니다. 기드온이 표징을 구하는 모습은 이후에도 계속 나옵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의 사자에게 예물을 가지고 돌아와 주 앞에 드릴 때까지 떠나지 말라고 요청하자, 하나님의 사자는 그러겠다고 대답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증거를 보여 달라는 기드온의 믿음 없는 행동을 용납하십니까? 하나님의 비전을 수행할 사람으로 기드온을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 택하신 자를 끝까지 붙드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가 오늘도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다. 기드온이 급히 가서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고 가루 한 에바로 무교전병을 만들고 고기를 소쿠리에 담고 국을 양푼에 담아서 상수리나무 아래 그에게로 가져다가 드립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사자가 지시한 대로 고기와 무교병을 가져와 바위 위에 놓고 그 위에 국을 부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고기와 무교병에 대니 불이 바위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병을 살랐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기드온의 예물을 받으셨음을 의미합니다. 우상을 섬기던 장소가 여호와를 섬기는 장소로 바뀐 것입니다. 기드온이 놀라는 동안 여호와의 사자가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그제야 기드온이 자기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고 위로하십니다. 이에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해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샬롬’이라고 부릅니다. ‘여호와는 평강이시다’라는 뜻의 이름에서 기드온이 얼마나 큰 두려움 가운데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바위에서 음식물이 불 탄 흔적과 자기가 쌓은 단을 보면서 비로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들에게 당신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게 하시고, 그 사랑 안에서 담대함을 얻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크고 놀라운 사랑이 우리에게 참된 평안을 가져다줍니다. 우리의 예배 또한 두려움의 예배가 아니라 믿음과 확신에 찬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자세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지속적으로 쓰임 받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광야에서 보호하시며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할 때까지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 생생하게 체험한 그 하나님을 이스라엘은 잊어버렸습니다. 가나안의 풍요로움에 젖다보니 신앙의 열정도 잃어버렸습니다. 가나안의 풍요로움은 가나안의 신들이 준 것으로 착각하고 도리어 그 신들을 열심히 섬겼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전에 이스라엘에게 패했던 미디안을 강하게 하셔서 이스라엘에게 괴로움을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파종하고 농작물을 수확할 때가 되면 미디안 사람들이 쳐들어와 농작물은 물론이고 소나 나귀까지 탈취해 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미디안 사람들을 피해 산에 올라가 굴을 파고 생활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7년의 혹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교만과 영적 둔감함으로 죄악에 빠져 사는 사람들을 각성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때로 고난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 가운데 있다면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보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우상들이 있다면 제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받은 은혜에 감사하지 않고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을 잊어버리거나 주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원하노라”(요삼 1:2). 받은 복이 우리에게 신앙 여정에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가운데 받은 복이 더 큰 하나님의 복을 받는 디딤돌이 되어야 합니다.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세어 보면서 주님께 감사와 헌신의 자세를 회복해야 합니다.


- 말씀을 듣고 돌이켜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부르짖자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셔서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 말씀은 새로운 메시지가 아니었습니다. 옛적부터 이미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말씀해 주신 내용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은혜의 말씀을 통해 자신들이 하나님을 떠나 얼마나 멀리까지 왔는지 듣게 되었습니다. 말씀은 우리를 비추는 거울과 같습니다.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를 회개하게 하고 심령을 새롭게 합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우리의 묵은 밭과 같은 마음을 기경하십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어 이스라엘의 문제점을 지적하신 것처럼  말씀의 거울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의 현주소를 깨닫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바로 나아가야 합니다.  


-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평범한 농부였던 기드온을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자기의 형편을 들어 사양을 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말씀으로 확신을 주시고, 제물을 불사르는 표징을 보여 주시고, 또 위로하심으로 기드온에게 사명감을 갖도록 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사양했으나 끝까지 그를 붙들어 사용하셨듯이, 하나님은 기드온을 끝까지 붙들어 주신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별 볼일 없는 농부 하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부르시고 붙드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오늘 기드온처럼 나약한 우리도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며 부르심을 확신하며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주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 임마누엘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을 찾아와 그를 ‘큰 용사’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들에게 타작한 것을 빼앗길까 두려워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던, 소심하고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왜 기드온을 용사로 부르셨습니까? 기드온과 함께하셔서 그를 용사와 같이 강하게 만드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요셉이 형통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다윗은 점점 강성해졌습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자들을 빚으셔서 놀라운 작품으로 만드십니다. 자신의 부족한 모습이나 약함 때문에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멀리해도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많은 능력과 기적을 경험하게 하시고 우리가 믿음 안에서 당신의 일을 감당하도록 이끄십니다. 우리는 그저 믿고 따르면 됩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라고 하시며 임마누엘을 약속하셨습니다.


 


나가면서


하나님은 의심 많고 소심한 기드온을 사사로 세워 미디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큰 용사’라고 부르시며 주저하는 기드온을 위로하시고 사명감을 심어주셨습니다.  미디안 연합군이 메뚜기와 같이 몰려왔을지라도 기드온은 한 사람을 치듯 그들을 쉽게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를 ‘큰 용사’라고 불러 주십니다. 임마누엘을 약속하십니다. 자기의 형편이나 가진 능력을 인하여 주저하지 말기 바랍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주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드온을 불러 사명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사용하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에 견고해서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 열매 맺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듣고 돌이키고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하고 임마누엘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맡기신 사명을 주님의 능력으로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성도 여러분들과 함께 하십니다. 부르심의 감격 속에 사명을 감당하며 기드온과 같이 하나님이 기뻐 사용하시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