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여 사사 드보라

Author
Myung Myung
Date
2022-06-19 15:32
Views
264

잘 잊어버리는 증세를 가진 사람을 가리켜서 건망증에 걸렸다고 합니다. 안경을 쓰고도 안경 어디 있느냐고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열쇠를 손에 들고 열쇠를 찾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아주 심한 건망증 증세를 보였습니다. 사사기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의 특징은 이전 세대가 하나님 앞에 범죄 함으로 징계 받은 것을 한두 세대가 지나면서 까맣게 잊어버리고 여전히 이전 세대의 전철을 밟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그렇게 경험하고도 잊어버리는 실수를 반복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한심하게 생각됩니까? 각자의 신앙생활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전에 지은 죄들을 인해 때로 눈물콧물까지 흘리며 회개했는데 같은 죄들을 “또”범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기도와 말씀 생활에 충실하리라 다짐해보지만 어느 샌가 나태해져서 영적으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사사기는 이스라엘 전역에서 벌어진 사건이 아니라 일부 지역을 배경으로 일어난 사건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솔, 납달리, 게데스, 스블론, 다볼산, 기손 강은 가나안 북쪽에 있는 지명입니다. 본문은 또한 하나님이 여성들을 통해 큰일을 행하심을 보여 줍니다. 물론 남성 중심 사회였던 이스라엘에서 여성인 드보라가 지도력을 발휘한 것은 당시 사회가 많이 무너져 있었음을 방증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드보라의 지도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는 야엘이라는 여인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구약성경이 시대적으로 여성을 소홀히 여기는 문화 속에서 기록되기는 하였지만, 여성을 차별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남자와 여자 모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며(창 1:27), 남자나 여자나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갈 3:28).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면서 그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주신 사명을 끝까지 잘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가나안 왕 야빈의 학대(1-3절)


에훗이 죽자 이스라엘은 다시 악을 행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근본문제는 하나님이 세우신 사사의 죽음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납달리 지파의 지경에 있는 하솔의 가나안 왕 야빈에게 넘기셨습니다. 야빈의 군대 장관의 이름은 시스라로, 하로셋 학고임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야빈 왕이 이끄는 북부 가나안 연합군은 이전에 여호수아에게 정복당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산과 주변 땅으로 도망해 남은 자들이 다시 하솔을 건설하고 등장한 것입니다. 야빈에게는 철 병거가 900대나 있었습니다. 당시 변변한 무기가 제대로 없던 이스라엘에게 철 병거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군사력의 상징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처음 점령할 때도 이스라엘은 철 병거를 가진 가나안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사울이 왕이었던 왕정 시대에도 철제 무기는 사울과 요나단만 가지고 있었을 정도로 철제 무기는 희소했습니다(삼상 3:19-22). 야빈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심히 학대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고통 가운데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이전에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 압제 하에서 8년 만에, 모압 왕 에글론 압제 하에서 18년 만에 부르짖었는데 이번에는 20년 만에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기까지의 기간이 점점 늘어났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점점 강퍅해졌다는 뜻입니다. 개역개정의 번역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야빈 왕의 심한 학대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본문을 어순대로 읽으면, 약간 다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이십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힘으로 압제했다’이스라엘은 압제의 원인이 자신들의 불순종 때문임을 깨닫고 회개하며 부르짖은 것이 아니라, 철 병거 때문에 고통스럽다고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입니다. 


 


드보라의 등장(4-5절)


사사기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우리를 놀라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상 밖의 사람들을 택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장애인 에훗과 농부 삼갈을 세우셨던 하나님이 이번에는 드보라를 사사로 세우셨습니다. 여자는 인구조사에 들지도 않던 시절, 인간으로서의 가치보다는 소유물로 취급받던 때에 하나님은 드보라에게 성령의 감동을 주어 이스라엘 구원의 중책을 맡깁니다. 더구나 지금은 철 병거 900대를 거느린 막강한 이방 군대와 싸워야 하는 상황입니다. 드보라가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로 소개됩니다. 드보라를 소개하는 히브리 본문을 보면 ‘드보라, 여자, 여 선지자, ~의 여자, 그녀, 사사가 되다’가 모두 여성형입니다. 옷니엘과 에훗을 소개하는 히브리어 본문을 보면 사사의 이름 다음에 누구의 아들이라는 관계가 나오고 그 다음에 동생, 왼손잡이와 같이 별명이나 중요한 특징이 나옵니다. 드보라의 경우 먼저 이름이 소개되고, 가족관계가 나오는 자리에 ‘여자’와 ‘여선지자’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사들의 특징을 묘사하는 자리에 ‘랍비돗의 아내(여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랍비돗’은 드보라의 남편 이름으로 볼 수 있지만 드보라가 어떤 여자인지를 묘사하는 표현을 보는 것이 사사기의 맥락에 어울립니다. ‘랍비돗’의 뜻은 ‘횃불’입니다. 따라서 ‘랍비돗의 아내’를 드보라의 인물됨을 묘사하는 ‘햇불 여인’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이 벧엘, 길갈, 미스바를 순회하며 이스라엘의 사사 역할을 감당했던 것처럼(삼상 7:16) 드보라도 에브라임 산지의 라마와 벧엘 사이에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에 거하며 사사의 역할을 감당했는데 그곳은 베냐민 지역과 에브라임 지역의 경계였습니다. 사사는 하나님의 율법으로 백성 가운데 일어난 일의 옳고 그름을 판결하고 또 그들이 나아갈 길을 가르쳤습니다. 드보라는 다른 사사들처럼 전선에 나가 직접 무기를 들고 싸우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치를 깨달은 백성들이 일어나 싸워 대적들을 이길 수 있게 했습니다.  


 


바락의 출전(6-10절)


드보라는 가나안 왕 야빈과 싸우기 위해 납달리 게데스에 있던 바락을 불러 여호와의 명령을 전달했습니다. 바락에게 가서 납달리 자손과 스블론 자손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이끌고 가라는 것입니다. ‘다볼 산’은 이스르엘 골짜기 북동쪽에 있는 산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스라와 그 병거들과 그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바락의 손에 붙이시겠다고 합니다. ‘기손 강’이 건기에는 물이 거의 없지만, 우기에는 흘러넘쳐 범람할 수도 있는 건천(와디)입니다. 이 강은 이스르엘 골짜기를 거쳐 북서쪽 지중해까지 흐릅니다. 시스라가 이스르엘 평지를 선택한 까닭은 군사적으로 볼 때 그의 병거가 크게 유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가나안 족속을 멸하기 위해 그들을 이 장소로 인도하신 분이 여호와이심을 밝힙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기에 바락은 순종하기만 하면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락의 눈에는 시스라의 철병거가 하나님보다 강하게 보입니다. 자기 혼자 전쟁을 수행할 자신이 없어서 드보라에게 동행해달라고 요청합니다.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는 가지 않겠노라. 믿음을 사용할 시간에 바락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앞세웁니다. 드보라가 함께 있어야 하나님이 더 도우실 것 같고 백성들이 더 힘을 낼 것 같습니다. 자기는 부족하니 드보라의 영적인 권위와 능력을 빌리자는 것입니다. 드보라를 통하여 분명히 하나님의 뜻을 전해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보다 눈에 보이는 드보라의 존재가 그에게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드보라가 바락의 요청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바락이 전쟁에서 승리하고도 영광을 얻지 못할 것이며, 적장을 죽이는 가장 영광스러운 일은 한 여인의 손에 빼앗길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바락이 스블론과 납달리에서 군사들을 소집하니 만 명의 용사가 모여들었습니다. 드보라가 그들과 함께 올라갑니다. 


 


시스라의 군대를 물리침(11-16절) 


전쟁에 나선 바락에 대한 이야기 도중에 갑자기 헤벨이라는 사람이 언급됩니다. 겐 사람 헤벨이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이라는 짧은 정보는 나중에 벌어지는 이야기의 복선이 됩니다. 모세의 장인 이름으로 알려진 것은 이드로와 르우엘입니다. 호밥은 민수기 10:29에서 르우엘의 아들, 즉 모세의 처남으로 소개됩니다. 여기서 ‘장인’으로 번역된 단어는 ‘처남’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헤벨은 원래 정착지인 유다 황무지(1:16)를 떠나 납달리 지경까지 이주해서 게데스 인근 사아난님 상수리나무 곁에 정착했습니다. 그의 이주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바락이 다볼산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은 시스라가 병거 900대를 이끌고 백성과 함께 기손강으로 나아왔습니다. 이에 드보라가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넘겨 주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너에 앞서 나가지 아니하시느냐”라고 선포합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시스라의 군대에 비해 바락의 군대는 열세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바락에게 그들을 넘기셨고, 이미 그들 앞서 싸우고 계심을 기정사실로 선포하며, 바락에게 전쟁에 임하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바락이 이스라엘 군사 만 명을 거느리고 시스라와 싸우기 위해 다볼산을 내려가 기손강 쪽으로 향합니다. 이때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군대보다 앞서 나아가시며 시스라와 그의 모든 병거와 그의 온 군대를 칼날로 혼란에 빠뜨리십니다. 여기서 ‘혼란케하셨다’는 표현은 출애굽 당시의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즉 “새벽에 여호와께서 불과 구름 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보시고 애굽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며”(출 14:24) 하셨던 때와 흡사합니다. 여호와 앞에서 패배를 직감한 시스라는 병거를 버려두고 걸어서 도망갑니다. 바락은 시스라의 군대를 하로셋하고임까지 추격해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전멸시켜 승리를 거둡니다. 그런데 바락은 하나님이 시스라와 병거를 혼란에 빠뜨려 시스라가 병거를 버리게 한 일에 주목하지 않고 계속 병거만을 추적하는 바람에 시스라를 죽이는 일은 야엘에게 넘어가고 맙니다. 


 


야엘의 대담한 행동(17-22절) 


도망친 시스라가 야엘의 장막에 도착합니다. 그가 이곳에 온 이유는 하솔 왕 야빈과 겐 사람 헤벨의 집 사이에 ‘화평’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평화조약을 맺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단락은 야엘과 시스라의 대화가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먼저 야엘이 시스라를 맞이하며 “주여 들어오소서 내게로 들어오시고 두려워하지 마소서”라고 말합니다. 야엘은 시스라의 상황을 정확히 이해했으며, 두려움에 사로잡혀 도망쳐 온 시스라를 안심시키고 있습니다. 이에 시스라가 안심하고 야엘의 장막 안으로 들어갑니다. 시스라는 피곤에 지쳐 자리에 누웠고, 야엘이 지친 시스라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습니다. 갈증을 느낀 시스라는 야엘에게 물을 요청합니다. 그러자 야엘이 우유를 마시게 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 시스라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야엘에게 또 다른 부탁을 합니다. “장막 문에 섰다가 만일 사람이 와서 네게 묻기를 여기 어떤 사람이 있느냐 하거든 너는 없다 하라”


 


21절 처음에 시스라가 깊이 잠들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깊이 잠들었기 때문에 야엘이 쉽게 그를 죽일 수 있다고 한다면 긴장감이 떨어집니다. 그런데 히브리 성경을 보면 어순이 다릅니다. 번역하면 ‘그리고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장막 말뚝을 취했다. 그리고 그녀가 방망이를 그녀의 손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그에게 몰래 갔다. 그리고 그녀가 그 말뚝을 그의 관자놀이에 박았다. 그리고 그것이 땅에 밝혔다. 그가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가 기절했다. 그리고 그가 죽었다.’히브리 성경에 의하면, 야엘이 말뚝을 시스라의 관자놀이에 박아 그것이 땅에 박혔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독자는 시스라가 깊이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야엘이 말뚝과 방망이를 가지고 시스라에게 몰래 다가가고 있을 때는 시스라가 깊이 잠들어 있는지 알 수 없기에 강한 긴장감을 느끼게 됩니다. 바락이 시스라를 추격해 왔으나 그때는 야엘이 이미 시스라를 처치한 후였습니다. 야엘이 바락을 맞이하며 “오라 네가 찾는 그 사람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고 말합니다. 시스라를 맞이할 때도, 바락을 맞이할 때도 상황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야엘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바락은 시스라를 추격하면서 자신이 그를 죽이고 완전한 승리를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눈에 펼쳐진 장면은 이미 예언된 것처럼 여인의 손에 시스라가 비참하게 죽어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드보라가 예언했듯이 그는 이 전쟁에서 영광을 얻지 못했습니다.  


 


가나안 왕 야빈의 진멸(23-24절)


군대 장관 시스라가 야엘의 손에 죽임을 당함으로 그날의 모든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납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왕 야빈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 굴복시키셨고, 이스라엘을 점점 강하게 하셔서 가나안 왕 야빈을 마침내 진멸하고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가나안 왕 야빈이 대표하는 가나안 사람들과 전쟁 이야기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구원을 베푸신 은혜의 이야기입니다. 드보라의 담대함이나 바락의 싸움이나 야엘의 행동이 승리의 결정적 요소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승리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자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달하는 중대한 임무를 드보라에게 맡기신 이유는 드보라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울수록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상의 방법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달라야 합니다. 삶에 어려움이 찾아오고 시대가 혼란스러울수록 그리스도인들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 인생의 문제가 올바른 방법으로 해결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의 드보라를 찾고 계십니다. 드보라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어려움에 처한 이 시대를 향해 외쳐야 합니다. 우리에게 언제나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입니다. 철 병거를 가지지 못하는 것보다 하나님과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모습을 안타까워하는 것이 더 지혜로운 태도입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이 이끄시는 승리를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읽고 암송하고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영혼이 말씀으로 채워져 말씀에 붙들리면,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우리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나가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에 들어가 살아가는 동안에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도리어 가나안 문화에 흡수되고 동화되고 타락하였습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영적으로 죽은 자와 같은 상태에 있었는데 하나님은 위기 때마다 택하신 사람들에게 성령의 기름을 부으시고 불가능을 가능케 한 믿음의 승리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사사 시대에 쓰임을 받았던 사람들은 주로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장애인도 있었고, 농부도 있었고, 여자도 있었고, 서자로 태어나 설움 받으며 건달들과 어울리던 자도 있었고, 소심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흠이 많은 자들도 있었습니다. 평범한 삶을 살았지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니 그들은 불꽃처럼 자신을 태우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백성들의 믿음을 독려하고 직접 몸을 던져 나라를 위기에서 건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가 사사 시대와 비슷합니다. 사람들마다 자기 편한 대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세파에 시달리면서 소금의 짠맛을 점차로 잃어버리고 빛을 점점 잃어 가는 성도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오늘도 계속됩니다. 말씀에 헌신되고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으면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전쟁의 승리가 당신의 손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과연 우리가 하나님 편에 있는가, 그분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하찮고 보잘것없는 배경과 조건을 가졌다고 해도 하나님 편에 서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만 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방법으로 우리에게 승리를 맛보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와 더불어 하나님께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부르짖어야 합니다. 우리를 주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성령의 기름을 부어 주시옵소서. 다시 한 번 부흥의 불길이 우리와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와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게 하소서. 성령의 기름부음을 통하여 담대해지며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며 삶 속에서 예수님의 흔적을 가진 믿음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