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비전의 사람 모세

Author
Myung Myung
Date
2020-06-28 14:16
Views
460

우리의 삶은 수많은 선택과 결정, 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와 책임의 연속입니다. 어떤 선택, 어떤 결정을 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됩니다. 살아가면서 몇 번은 자신의 인생에 획을 긋는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 안에 사는 삶이 가장 안전하고 의미 있는 길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시고,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깊고 넓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삶의 갈림길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따른 것이 얼마나 탁월한 선택이었는지, 그 과정에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살펴봅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약속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땅과 후손에 관한 것입니다. 창세기는 족장들의 생애에 일어난 이야기를 전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들과 맺은 언약 중에서 주로 후손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어 가는가를 담고 있습니다. 반면에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그리고 신명기는 모세를 중심으로 족장들에게 주어진 땅의 약속들이 어떻게 성취되어 가는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가정에 사내아이로 태어났기에 나일 강에 버려질 수밖에 없었던 모세는 애굽의 공주에 의해 건짐을 받고 왕궁에서 자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사람들에게 압제를 받으며 노예로 살아가던 어느 날 모세는 동족들을 핍박하던 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모래 속에 몰래 묻어 버렸습니다. 행한 일이 탄로가 나자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 40년을 지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면서 열조와 맺은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 15:13-14). 하나님은 이제 모세를 구원자로 세워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불러내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노예로부터의 해방’과 ‘약속의 땅 획득’이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비전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시하고 그들을 애굽에서 탈출시켰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언약 백성으로 만들었고 율법을 그들에게 전함으로써 사회 질서와 정의의 토대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약속의 땅을 바라만 보았을 뿐 안타깝게도 요단강을 건너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모세의 역할은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고 요단 강 동편, 약속의 땅 건너편까지 인도하는 일까지였습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가 땅을 정복하고 12지파에게 분배하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 하나님의 비전이 모세를 거쳐 여호수아에 이르러 이루어졌습니다. 
 
요즘 비전의 사람 시리즈 설교를 준비하며 제게 주신 비전은 무엇일까 계속 생각해봅니다. 목회자로서 비전은 팔로마한인교회를 건강한 교회로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우들이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말씀을 잘 준비하여 선포하고, 성경 공부를 인도하고, 목장 사역을 통해 삶을 나누며 성숙해지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고 세상을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 못하면 선교사들을 후원해서라도 땅 끝까지 증인이 되라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지난 25년의 사역을 돌아보면 주신 사명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것이 많았음을 고백합니다. 온 교우가 같은 비전을 가지고 나아간다는 것, 그리고 세대를 넘어 그 비전을 이루어간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작년 1월말에 일어난 본당 침수 사고로 1년 4개월에 걸친 재건축 공사가 있었고, 금년에는 3월부터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인하여 사회적 격리를 실시하다 보니 사역을 하는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와 모든 교우들은 주님이 주시는 아름다운 꿈을 함께 꾸며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창립 25주년을 맞는 우리의 자세라 하겠습니다.

모세를 만나신 하나님(3:1-6) 
모세는 미디안에서 장인인 이드로의 양들을 돌보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세는 평소와는 달리 미디안 지역을 벗어나 양들을 먼 곳까지 몰고 갔습니다. 광야 서쪽은 시내 광야를 말합니다. 호렙은 ‘황량한 장소’란 뜻을 가졌으며 시내 산(19:1-2, 신 1:6)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혹자는 호렙은 산맥의 이름이고 시내 산은 그 산맥에 있는 특정한 한 산봉우리를 지칭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호렙 산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그 일은 여호와의 사자가 가시덤불의 불꽃 속에서 나타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때로 하나님과 동일시되기도 하고 때로 하나님과 다른 존재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하나님과 동일시됩니다. ‘가시덤불’로 번역된 히브리어 ‘쎄네’는 와디나 습지에서 자라는 가시가 있는 사막 식물로 봅니다. 모세의 관심을 끈 것은 불이 붙은 가시덤불이 타서 사라지지 않은 것입니다. 모세는 그 현상을 ‘큰 광경’이라 했는데, 이는 한 번도 그런 장면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호기심에서 불붙은 가시덤불로 다가갔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그를 이끄신 것입니다. ‘보잘것없는 나무 가운데 있는 불’바로 그것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불이십니다. 어느 누구도 가까이할 수 없는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보잘 것 없는 떨기나무 가운데 계시며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모세가 접근하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가시덤불 가운데로부터 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처음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의 이름을 두 번 부르신 것은 그 부름의 중요성과 긴급성을 의미합니다. 그러자 모세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직역하면 ‘보셔요 나를’인데 자기가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면서도 모세를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모세가 선 곳이 ‘거룩한 땅’라는 것은 그곳이 원래 거룩해서가 아니라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에 성도라 불립니다. 모세는 발에서 신을 벗어야 했습니다. 신을 벗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는 존경과 겸손의 태도를 나타냅니다. 발에 묻는 먼지나 어떤 부정한 것도 거룩한 성막에 가지고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제사장은 신을 벗고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거룩’이라는 것은 인간의 죄성과는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냅니다. 모세 또한 하나님 앞에 죄인이었기에 신을 벗어야 했습니다. 모세는 이 만남을 통해 자기 의지대로 방황하던 것을 끝내고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종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란 칭호로서 자신의 신분을 밝히십니다. “나는”이란 표현은 고대 근동에서 종종 왕의 선언으로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때 사용됐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알리십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참된 언약의 하나님이신 것을 상기시키고, 또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그때 모세의 마음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얼굴을 가립니다.  
 
사명을 주시는 하나님(3:7-10)
출 3:7-8은 출애굽기의 핵심 구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여기에 언급된 동사들을 중심으로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과정을 5단계가 나눌 수 있습니다. ‘보고, 듣고, 알고’는 출 1-2장에, ‘내려가서’는 3-11장에, ‘건져내고’는 12장에, ‘인도하여’는 13-24장에, ‘데려가려 하노라’는 25-40장에 각각 해당합니다. 하나님은 백성의 고통을 보시고,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근심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시며 불의한 압제자에 대해서 공의의 심판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이제 직접 내려오셔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출해 내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550여 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창 15:13-16)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구원자로 부르시고 ‘이제 가라’고 명하십니다. ‘이제’라는 단어는 하나님이 판단하시기에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때로서의 ‘바로 지금’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사람들의 손에 건져내어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말은 가나안 땅의 풍요로움을 지칭하는 전형적인 표현 양식입니다. 신학적으로 이 표현은 ‘하나님이 사랑으로 자기 백성과 함께하시고 돌보시는 땅’이란 뜻입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켜서 그분을 전심으로 사랑할 때 그 풍요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땅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땅은 임자 없는 땅이 아니라 이미 여러 족속들이 살고 있는 곳입니다. 여기에 언급된 여섯 족속들은 이스라엘보다 강한 민족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는 이스라엘이 믿음으로 그 땅을 차지해야 한다는 임무도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듭 이스라엘을 ‘내 백성’이라고 하시며 언약 관계를 강조하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아직 공식적인 언약을 맺지 않았지만 족장들에게 한 약속에 근거해 은혜의 언약이 이미 적용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40년 전에 모세는 자신의 손으로 이스라엘을 위해 무엇인가 해보려고 했지만 그때는 하나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80세가 돼서야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즉 비전을 발견했습니다.  

모세의 반응(3:11-14)
모세도 하나님께서 애굽의 압제를 끝내실 것이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아마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그 일을 수행해야 하는 것을 알게 되자 주저합니다. 첫 번째 변명은 자기는 임무를 담당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의 사명을 맡은 자들에게 많이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은 인간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렵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모세에게 애굽 왕 바로를 대항해서 싸우라고 하십니다. 아직까지 어느 누구도 바로에 대항해서 이긴 적이 없습니다. 애굽 사람 하나 죽이고도 사십 년 동안 도망자 생활을 하던 모세가 어떻게 바로를 대상으로 싸워 이길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그가 인도해야 할 백성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전투 경험이 전혀 없는 노예들이요 목이 곧은 사람들입니다. “내가 누구이기에”그 말에는 겸손함보다 하나님의 능력이나 지혜를 제대로 신뢰하지 않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 모세를 향해 하나님은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라고 격려해 주십니다. 이는 모세는 약하지만 하나님은 강하게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이 친히 개입하시는 해방의 사건임을 확인해 주시고, 애굽과의 싸움에서 분명히 이길 것이라고 하십니다. 성도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시겠다는 약속보다 더 확실한 보장은 없습니다. 그러시면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호렙 산에 세우시겠다고 하십니다. 실제로 모세와 출애굽 1세대는 출애굽 후에 호렙산에 와서 율법을 받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게 됩니다. 모세는 단지 말씀에 순종만 하면 됩니다. 모세는 사용되는 지팡이고 모든 일을 행하실 분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두 번째 변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이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으라는 모세의 염려는 나름 근거가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400년 동안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노예가 된 히브리인들에게 혼자 가야 했고, 자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임을 나타내야 했습니다. 오랜 시간 애굽인들의 우상에 젖어 산 이스라엘 백성은 당신을 보낸 신이 누구이며, 그분의 성품은 어떠하냐고 물을 것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름을 아는 것은 존재를 아는 것이며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이름 안에는 그의 칭호, 인격, 활동, 신분, 존재, 능력 등을 알 수 있는 단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질문에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I am who I am)라는 신비로운 대답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이름인 ‘스스로 있는 자’란 어구는 동사 ‘있다’(존재)의 모든 시제를 포함합니다. 곧 ‘있었던 (나)’, ‘있는 (나)’, 그리고 ‘항상 계속해 존재해 있을 (나)’를 의미합니다. 이 대답이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완전 독립, 완전 초월의 존재로서 만들어진 우주 만물과 구별되십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며 모든 존재의 원인과 뿌리가 되십니다. 그 하나님 안에 참된 신성과 영원불변의 진리가 있습니다. 모세를 부르시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 내고자 하시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여호와이십니다. 모세는 하나님과의 대면을 통해 자기가 누구인지 알게 되고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되면서 비로소 사명을 감당할 자가 됩니다. 불붙은 떨기나무의 ‘스스로 있는 자’가 신약시대에 예수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생명의 떡, 선한 목자, 양의 문, 세상의 빛, 길이요 진리요 생명, 부활이요 생명, 참 포도나무’라고 계시하셨습니다. 그분은 영원히 ‘있는 자’, 곧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를 지켜보시고 인도하시고 도와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믿고 의지할 때, 세상과 담대히 싸워나갈 힘을 얻게 됩니다.

아름다운 마무리를 한 모세
히 11:25에 의하면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하면서 히브리서 저자는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이고 망명하게 된 사건이 믿음의 행위였다고 합니다. 모세는 바로의 왕궁에서 그가 누릴 수 있는 높은 지위를 거절했습니다. 그 이유는 죄가 주는 즐거움을 잠시 동안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더불어 고난 받는 것을 더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유모 역할을 한 어머니 요게벳의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모세를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는 영적 지도자로 삼으시고, 크고 놀라운 일들을 그와 함께 행하셨습니다. 호렙 산에서 하나님을 대면한 이후로 모세는 더 이상 자기를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까지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그대로 순종하며 모세는 능력과 기적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즉 모세의 지도력과 능력은 기도, 말씀, 순종으로부터 나온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비스가 산꼭대기에 데리고 가신 후 동서남북 온 땅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곳은 아브라함 때부터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땅이요, 꿈에 그리던 땅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기 위한 모세의 역할은 이스라엘 백성을 모압 평지까지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아쉬웠지만 하나님이 부르시는 죽음의 자리에 겸손히 순종했습니다. 무디는 모세의 생애를 삼등분하여 처음 40년은 “자기가 무엇인 된 줄 알고 산 40년이요”, 다음 40년은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산 40년이요”, 마지막 40년은 “하나님께서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들어 하나님의 대역사를 이룬 40년”이라고 하였습니다. 신명기 34장에 의하면 모세는 120세로 생을 마감합니다. 모세는 역사의 무대에서는 사라졌지만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서는 길이 남을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서 이스라엘을 하나의 민족으로 세우는데 기초를 놓았습니다. 모세는 여호수아라는 탁월한 후계자를 세워 비전을 물려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를 따라 계속해서 가나안 정복이라는 꿈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잘 사는 것보다 잘 죽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작보다 마지막이,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가 더 중요합니다. 모세는 아름다운 마무리를 지은 비전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부르시는 이유는, 그들과 교제하시기 위함이요, 그들에게 사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모세가 가시떨기 나무 근처에서 하나님을 만났듯이, 멀리서 보고 느꼈던 하나님이 어느 날 우리 삶의 현장에 나타나셔서 만나주시고 그분의 팔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강력할수록 그분과의 만남은 두려움과 떨림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크신 하나님 앞에서 작고 초라한 우리 자신을 느끼며 연약함과 죄의식 때문에 그분 앞에서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갖게 됩니다.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나 자신, 그럼에도 그 강력한 빛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강한 열망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분인 동시에 가장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고 싶어도 그분을 만날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그분이 직접 우리 삶의 현장에 찾아오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정하신 때요, 우리가 스스로 겸비하고 우리의 주권을 포기하는 때이며, 성실히 일하는 삶의 현장 한 부분 한 부분에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때입니다. 특히 하나님은 스스로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겸손하고 가난한 심령에 임하십니다. 우리는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택함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겸손과 순종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공은 우리가 모든 것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는 과정에 역경도 있지만 때를 따라 필요한 사람도 붙여 주십니다. 팔로마 교우들이 하나님의 비전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 임마누엘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