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비전의 사람 요셉

Author
Myung Myung
Date
2020-06-21 14:09
Views
583

어린아이들을 축복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사람들 중에 요셉과 다니엘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의 공통점은 총리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스토리를 토대로 이런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요셉에게 꿈이 있었습니다. 그 꿈은 애굽의 총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요셉과 같이 할 수 있다는 꿈을 가지세요. 그러면 그 꿈은 이루어집니다.  애굽의 총리가 되는 것이 과연 요셉의 비전이었을까요? 이런 식으로 자기의 신념을 강조하다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좌절하거나 신앙의 회의를 품을 수 있습니다. 

비전과 목표의 차이
구약에서 말하는 ‘비전’과 오늘날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비전’은 그 의미에 있어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비전이라 할 때는 보통 ‘꿈’이나 ‘사명’을 염두에 두고 말합니다. 그런데 비전은 그저 추구하고 싶고 이루고 싶은 꿈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비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허존’입니다. 그 의미는 ‘보인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구약의 관점에서 ‘당신의 비전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하나님이 당신에게 보여 주신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지 앞으로 무엇이 되고 싶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개인의 소원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라를 데려간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당장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돌려보내고 그에게 기도를 받으라 하시면서 “그는 선지지라”(20:7)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그를 선지자라 하셨습니다. 
 
비전과 목표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만일 ‘큰 부자가 되고 싶다, luxury car를 갖고 싶다, 남가주에서 가장 큰 교회로 만들고 싶다’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비전이라기보다 개인의 목표를 말하는 것입니다. 켄 블랜차드는 “비전으로 가슴을 뛰게 하라”는 책에서 ‘비전은 자신이 누구이고, 어디로 가고 있으며, 무엇이 그 여정을 인도할지 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목표는 있는데 비전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목표를 비전으로 알고 나아가면 설령 원하는 것을 성취한다 해도 자칫 허탈감에 빠질 수 있습니다. 목표는 달성하고 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지든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비전은 지속적인 생명력이 있기에 자기의 삶에 뚜렷한 방향을 제시하고 그 비전을 이룰 때까지 계속해서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도록 도와줍니다. 물론 자신의 야망을 하나님의 비전으로 포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 야망을 추구하다가는 자신도 망치고 다른 사람들도 피곤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기도 합니다.
 
지난 주일에는 아브라함을 살펴보았습니다. 그가 하란에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그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비전이 되었습니다. 비록 당대에 그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아브라함은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비전이 이끄는 복 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가진 비전이 자손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란에서 하나님의 비전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 나오는 요셉은 언제 어디서 비전을 갖게 되었을까요? 십대 시절 꿈을 꾸었을 때입니까?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을 때입니까? 아니면 총리가 되었을 때입니까? 요셉의 경우는 정확한 시점을 알기 어렵습니다. 분명한 것은 요셉도 아브라함과 같은 비전을 가졌다는 점입니다. 오늘은 아브라함의 증손자인 요셉이 어떤 비전의 사람인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분들이 믿음의 조상들처럼 하나님의 비전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풍성히 거두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비전의 사람이 되어가는 요셉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은 땅과 자손에 관한 약속, 그리고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는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또 다른 약속을 주셨습니다. 자식이 없어 실망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그의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이 그 말씀을 믿으니 이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언약체결 준비를 시키셨습니다. 뜨거운 대낮에 짐승을 쪼개 놓으니 솔개가 냄새를 맡고 덤벼들었습니다. 솔개를 쫓으면서 짐승을 지키느라 피곤해서 그런지 해질 무렵이 되자 아브라함이 깊이 잠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이방에서 노예가 되어 사백년 동안 괴롭힘을 당하겠고, 그들이 섬기던 나라를 하나님께 징벌하신 후에는 그들이 큰 재물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장수하다가 평안히 죽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왜 4대 만에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셨습니다.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15:16). 아브라함의 자손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 땅에 거하는 것은 그들이 무엇을 잘해서가 아니라, 그 땅에 거하는 족속들의 죄악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나안 족속의 소유권 박탈과 이양까지도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하신 민족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방 민족까지 공의로 다스리는 분임을 분명하게 드러내십니다.  

새롭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계획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는 것입니다. 그 계획이 이루어지려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이방 땅에 가야 합니다. 그 과정을 다룬 것이 창세기 37-50장에 나오는 소위 요셉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의 초점은 요셉이 어떻게 애굽의 총리에 오르는가에 있지 않고 어떻게 아브라함의 자손이 애굽 땅에 정착하게 되는가에 있습니다. 

요셉의 삶을 잠시 정리해보겠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편애하자 형들이 요셉을 미워했습니다. 그러다가 요셉이 꾼 꿈을 형들에게 이야기 하면서 그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두 꿈은 비슷한 패턴을 가집니다. 첫 번째 꿈 이야기는 형들의 곡식 단들이 요셉의 단에게 절한다는 것으로 형들이 반문하고 이 일로 형들이 요셉을 더욱 미워하게 됩니다. 두 번째 꿈 이야기는 해, 달과 열한 별이 요셉에게 절한다는 것으로 이번에는 야곱이 반문하고 형들은 시기하고 야곱은 그 말을 마음에 담아둡니다. 어느 날 야곱이 요셉을 형들에게 보내면서 그들이 잘 있는지, 그리고 양 떼들이 잘 있는지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요셉이 헤브론에서 세검을 거쳐 도단에 이르러 형들을 만났습니다. 형들은 요셉을 보자마자 그를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요셉이 입은 채색 옷을 벗기고 르우벤의 조언에 따라 요셉을 구덩이에 빠뜨렸습니다. 그들이 식사하고 있을 때 마침 애굽으로 향하는 이스마엘 상인들이 지나가자 유다는 요셉을 상인들에게 팔고 그의 생명은 건드리지 말자는 제안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요셉은 졸지에 은 20에 팔려 노예의 신분으로 애굽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방 땅인 애굽에서 어린 나이에 게다가 자기 운명을 주체적으로 살 수 없는 노예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요셉을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으로 보내셨습니다. 요셉이 그 집에서 성실하고 지혜롭게 일하므로 보디발은 그를 가정 총무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피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감옥에서도 성실하게 일했더니 간수의 호의를 받았습니다. 요셉 자신의 의도가 아니라 형들의 시기로 종으로 팔려 애굽에 갔고 그 후에 일어나는 사건들은 요셉을 힘들게 하였지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그런 일을 통해서도 뜻을 이루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이 힘들고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허물조차 은혜로 바꾸어주시는 분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함이란 믿음이나 능력에 따른 결과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요셉의 길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장차 애굽에서 큰 민족을 이루고 탈출해서 가나안 땅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일부입니다. 

그 후 요셉은 바로가 꾼 꿈을 명쾌하게 해석함으로 애굽의 총리가 되어 칠년 풍년 뒤에 임한 칠년 기근을 잘 대처하였습니다. 요셉은 이런 과정에서 자신이 노예로 팔린 것이 단지 형들의 질투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통해 하나님 언약 백성의 생명을 보전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애굽 땅에 언약 백성이 정착할 수 있도록 고센 땅을 준비하였습니다. 고센은 가나안과 지리적으로 가까우면서 아버지의 유업인 목축을 하기에 적격이었습니다. 고센은 나일 강 하구에 위치한 비옥한 삼각주 지역에 위치하여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별로 영향을 받지 않고 사시사철 비옥한 토지에서 곡물과 과일이 쏟아져 나오는 풍요의 장소였습니다. 그 결과 야곱이 가족들을 이끌고 고센 땅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이방에서 객이 된다는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들, 즉 야곱 가족을 애굽으로 내려오도록 하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브엘세바에서 야곱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말씀 속에 분명히 나타납니다.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46:3-4). 애굽은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만들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비전을 성취하기 위해 선택된 장소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그의 후손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성취해 가시는 하나님의 열정을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장은 야곱의 가족 70인을 언급하면서 시작합니다. 또한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라고 반복하여 강조합니다(1:7,12,20). 모세는 “애굽에 내려간 네 조상들이 겨우 칠십 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하늘의 별 같이 많게 하셨느니라”(신 10:22) 선포합니다. ‘하늘의 별같이’라는 표현은 분명히 창세기 15장에 있는 하나님의 비전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삶의 뿌리를 떠나 하나님의 비전을 품고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의 성취를 맛보지 못했지만 언젠가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 삶의 자세가 그의 후손 이삭과 야곱과 요셉에게서도 발견됩니다. 아브라함이 사라가 죽었을 때 막벨라 굴을 사서 그곳을 사라의 매장지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그의 자손들이 이방의 객이 되어 사 대 만에 돌아올 것이라는 하나님의 비전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애굽에서 죽습니다. 그러나 죽기 전에 요셉에게 중요한 유언을 합니다. 자신이 죽거든 자신을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는 내용입니다 (47:30). 그리고 야곱은 요셉에게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48:4)고 하며 자신이 루스에게 받았던 비전을 전달합니다. 그리고 다시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48:21)라는, 그 자신과 그의 후손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남깁니다.  

요셉은 110세를 살며 그의 둘째 아들인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까지 보았고 장자인 므낫세의 아들인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자기의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이때에도 슬퍼하거나 후회함이 없이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준비합니다. 자신의 아버지 야곱이 자신에게 한 하나님의 비전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남깁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주실 것을 확신하고 자기가 죽은 후에 애굽 땅에 묻지 말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묻히게 해달라고 유언을 남깁니다. 애굽을 떠날 때 자기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면서 형제들에게 맹세를 시킵니다(50:24-26). 과연 요셉의 유언대로 후손들이 따릅니까? 요셉이 죽은 후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기는 하였으나 애굽땅에 아주 매장하지는 않고 400년 동안 잘 보관하여 두었다가 출애굽 할때에 모세는 요셉의 해골을 가지고 갔습니다(출 13:19). 불과 보름이면 도달할 수 있는 가나안이었으나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40년을 광야를 헤맬 때도 그들은 요셉의 해골을 갖고 다녔습니다. 이스라엘을 이끌던 모세도 그 형 아론도 죽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출애굽 제일세대는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으나 요셉의 후손들은 요셉의 유언을 끝까지 지켜 마침내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습니다(수 24:32).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상황으로 본다면 400여 년 전쯤이면 임진왜란 때에 해당합니다. 그때에 이순신 장군이 어떤 유언을 했는데 덕수 이씨의 후손이 그 유언을 기억하였다가 2020년에 지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힘든 광야 길에 가능하면 귀찮은 짐들은 다 버리고 간편하게 가기를 원하는 여정이었으나 온갖 시련과 역경 속에도 그 후손들은 요셉의 유언대로 요셉의 해골을 가나안에 장사지냈습니다. 그 일을 한 이스라엘 민족도 대단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섭리가 역사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죽음으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 이어 요셉으로 내려오는 족장시대는 막이 내립니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태초에 (1:1)로 시작한 창세기가 애굽에서 입관 (in a coffin in Egypt) 즉 죽음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가 관으로 끝난다면 우리의 인생은 서글픈 것입니다.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할 것이라”하며 요셉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을 떠날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즉 새로운 세대를 통하여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비전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하여 계속 이어져갑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가진 요셉의 특징 
요셉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야곱의 편애로 형들의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꾼 꿈을 알려준 것을 인하여 형들의 미움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만약 자기들을 만나러 온 요셉을 형들이 아버지에게 순순히 돌려보냈다면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아들이 됐을지언정 비전의 사람이 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오랜 고난의 세월을 보내면서 요셉은 자신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분명히 발견했습니다. 자기에게 일어난 일들을 젊었을 때 보여주신 꿈과 연결시키면서 하나님의 비전을 갖게 되었습니다. 비전의 사람 요셉이 보여준 삶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1) 삶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합니다 
요셉은 17세에 애굽에 팔려 갔고(37:2), 13년 동안 보디발의 집과 감옥에서 전전하였고, 30세에 총리에 올랐습니다(41:46). 고난의 세월을 보냈지만, 요셉은 불평하거나 억울하다고 원망하거나 눈물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에 형통한 삶을 살았습니다. 물론 그 형통함은 그의 믿음이나 행동에 따른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합니다. 가족들과 주위 사람들을 선하게 다스리고 섬기는 사명을 발견하게 된 요셉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서 가는 곳곳마다 맡은 일을 성실하게 수행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모든 소유물을 주관했고(39:5-6), 감옥 안에서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했고(39:22), 애굽의 총리가 되어 기근에 처한 애굽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그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복이 임합니다. 요셉 때문에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습니다. 요셉이 총리가 되니 애굽과 온 세상 백성이 기근을 잘 넘기고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12:3)는 약속을 요셉을 통해서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인정하는 사람은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도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 가운데 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삶의 주관자요 섭리자로 모시고 그분의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하루하루 살아야 합니다.

2) 다른 사람들에게 덕을 세웁니다
요셉은 자신의 젊은 시절을 고통스럽게 만든 형들을 22년 만에 다시 만났습니다. 형들이 자기에게 절을 하는 꿈을 꾸었는데  형들이 그들의 얼굴을 땅에 대고 요셉에게 절하는 것을 보며 자신에게 보여주신 꿈이 현실로 이루어진 것을 깨달았습니다. 요셉이 자신을“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45:4)라고 소개했을 때 형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45:8)라는 요셉의 말은 그가 원한과 증오로 세월을 보내지 않았음을 분명히 말해줍니다. 요셉은 자신이 애굽으로 팔려 온 것을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자신을 이용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를 형들에게 말하며 위로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50:19-21). 우리 주변에는 요셉과 같은 고난을 겪으면서 원한과 분노의 나날을 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깨닫고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셉과 같이 자신의 삶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한 사람에게 원한과 분노는 사라지게 될 것이며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만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3)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한 형들에게 요셉은 자기가 하나님을 경외한다(42:18)고 말했습니다. 성경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 백성의 삶의 목표는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소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거나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생각하며 두려워할 줄 아는 자세를 말합니다. 그런데 적극적으로는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깨닫는 가운데 그분을 존경하고 높이는 것과 예배를 통해 그분을 찬양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삶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인정하고 살았던 요셉은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존경하고 예배드리며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을 잃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삶의 모든 영역에서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항상 기뻐할 수 있고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야곱의 가족 70명이 애굽에 갔는데 400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장정만 60만 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대적의 침략을 당하지 않고 안전하게 보호받고 번성할 수 있도록 애굽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궁극적으로 열방의 제사장 나라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위대한 비전에 요셉이 훌륭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 요셉은 말할 수 없는 시련과 연단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을 때 하나님은 그를 형통케  하셨습니다. 혹시 요셉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니까 그런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요셉에게 이런 영광을 주신 것은 그가 단지 믿음의 조상의 피를 이어받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연단의 과정을 믿음으로 잘 소화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요셉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비전을 함께 이룰 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정, 이웃, 일터, 교회, 사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 비전을 잊지 않고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길을 열어 주시고 또한 도와주실 것입니다. 요셉과 같이 비전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비전이 이끄는 복 된 인생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