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비전의 사람 아브라함

Author
Myung Myung
Date
2020-06-14 15:11
Views
466

5월에는 Mother's day가 있어서 두 여인을 중심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과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입니다. 6월에는 Father's day가 있으니 이번에는 남자들을 중심으로 전하려고 합니다. 지난주일 설교 때 비전의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요 성령의 사람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비전에 따라 산 믿음의 선배들을 몇 주간에 걸쳐 나눌 것입니다. 본문은 설교나 성경공부를 통해 많이 다루었는데, 오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어떻게 비전의 사람이 되어 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7월이면 창립 25주년을 맞이하는 팔로마한인교회 모든 교우들이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의 뜻하신 바를 이루는 비전의 사람들이 되어, 때를 따라 베푸시는 복을 받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신 하나님
창세기 1-2장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대해 언급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창조 사역의 정점에 사람을 만드셨고,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1:28)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1:31a)는 평가를 하시고,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2:1)는 언급으로 창조 사역이 마무리됐음을 알렸습니다. 이 모든 일을 마치신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습니다(2:3-4). 문제는 하나님이 주신 명령(1:28)을 사람들이 어떻게 이행하는가 여부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부터 전개되는 사람들의 모습은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립니다. 선악과 사건, 가인의 살인, 노아의 홍수, 바벨탑 사건으로 이어지는 땅의 이야기에는 심각한 죄의 문제가 반복적이면서도 점진적인 패턴으로 소개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사람으로 다시 시작하십니다. 그 한 사람을 통해서 새로운 씨앗, 하나님을 경외하는 한 민족을 번성하게 하십니다. 그들을 통하여 만민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입니다. 그렇게 해서 선택받은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아브람 이야기는 그 이전에 기록된 암울한 인류 역사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아름다운 관계가 회복되는 길이 열리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지만 그가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믿음 생활을 잘한 것은 아닙니다. 여호수아 24:2에 의하면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였다고 합니다. 아브람이 태어난 곳은 갈대아 우르로서, 바벨론 성에서 그리 멀지 않았으며, 우상을 숭배하고 죄악이 만연한 곳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곳에 살던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갈대아 우르에 살던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가족을 데리고 가나안으로 가려 하다가 무슨 연유에서인지 하란에 정착하였습니다. 그곳에서 60년을 살다가 데라가 죽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사실 아브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 이때가 처음은 아닙니다. 사도행전 7장에 스데반이 공회에서 증언하는 내용이 있는데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7:2-3).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60년을 살았고, 75세에 되어 하란을 떠났으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에서 처음 나타나셨을 때는 그의 나이가 15살을 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처음으로 들었지만 그때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잘 몰랐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섬기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은 그에 대한 계획을 가지셨고 그를 계속 주목하셨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1-3절)
아브람 이야기는 여호와의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12:1). 히브리어 어순은 ‘가라’가 먼저 나옵니다. ‘가라’는 문법적으로 ‘너 스스로 가라’의미입니다. 아브람이 자신의 익숙한 환경으로부터 스스로 자신을 단절시키고 홀로 떠나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출발점은 어디입니까? ‘네 고향, 네 친척, 네 아버지 집’이라고 말합니다. 이 항목들은 아브람에게 삶의 터전을 제공했던 것들이며 갈수록 떠나기 어려운 순서로 되어 있으며 아브람이 자신의 가장 친숙한 곳으로부터 단절돼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지금까지 내가 누리면서 살아온 이 세상의 방식을 떠나 하나님과 함께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포기할 때 얻게 되고, 낮아질 때 높아지게 되고, 약할 때 강해집니다. 비우고 내려놓을 때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참 제자가 되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좇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보여 줄 땅에서’에서 ‘땅’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으니 직역하면 ‘보여줄 그 땅’입니다. ‘너의 고향’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너의 땅에서’입니다. 즉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너의 땅에서  ... 보여 줄 그 땅으로 가라’종착지가 분명히 언급되지 않지만, 현재 아브람이 있는 땅은 그가 머물러야 할 곳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에서 ‘복이 될지라’의 형태는 명령형이지만 아브람이 결심한다고 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라’는 명령의 이행 여부에 따라 주어지는 결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아브람이 만약 가지 않고 하란에 머물러 있다면, 복이 되지 않을 텐데, 순종해서 간다면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아브람이 단순히 복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그가 복을 받고 천하 만민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얻게 할 복의 통로가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러나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아브람이 앞으로 그를 축복하는 자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저주하는 자도 만나게 됩니다. 신앙생활에도 고난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일도 벌어집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고 그들로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고, 사람들의 죄로 말미암아 저주받은 땅에서 사람들을 쓸어버리기도 하시고, 흩기도 하셨지만, 마침내 아브람을 부르시고 그를 통하여 사람들을 복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아브람의 자손이 시내 산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시고 언약을 세우시는 궁극적인 목적을 그들에게 선포하십니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6). 그러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부하십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사실 그들에게 주신 율법은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아야 할 거룩한 삶의 지침입니다. 열방과 하나님 사이에 제사장 나라로 서야 한다는 말씀이고,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백성이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실 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야 하는 이유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이 종말론적으로 완성하실 새 하늘과 새 땅에 합당한 자들을 얻으라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땅에서 풍요로운 삶을 사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복의 전달자임을 언제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를 인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복을 받아야 합니다. 

아브람의 순종(4-9절)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그의 즉각적인 행동은 믿음과 순종의 증거가 됩니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는 말씀 속에 아브람에게 주시는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자손에 대한 약속이고, 둘째는 땅에 대한 약속입니다. 자식이 없는 아브람에게 자손을 주시고, 아브람에게 보여주신 땅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아브람의 믿음이 인정받은 후 맹세의 형태로 더욱 분명하게 밝혀지고, 이후 그의 자손에게 재확인되면서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에 대한 근거와 당위성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3절에 언급된 대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주신 약속의 궁극적인 목적은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입니다. 땅을 주리라고 하시면서, 당장은 아니고 이방에서 객이 되어 400년 동안 괴롭힘을 당하며 기다려야 하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을 고통 속에서 기다려야 하는 이유가 그 땅에 이미 사람이 살고 있으며, 그들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창 15:13-16). 아브람의 자손에게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 안에, 죄악으로 가득한 가나안 족속에 대한 심판과 징벌의 의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단순히 가나안 족속을 내쫓고 단지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브람의 자손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그들로 말미암아 복을 얻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 제단을 쌓은 것처럼 아브람도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를 드렸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브람이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창 13:4에 의하면 아브람은 이 제단으로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와 같은 믿음의 예배는 아브람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람의 아들 이삭은 브엘세바에서 그에게 나타나 자손의 번성을 약속하신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창 26:25). 또한 이삭의 아들 야곱은 자신에게 나타나셨던 벧엘에서 제단을 쌓습니다. 아브람과 이삭과 야곱의 제단은 여호와의 약속, 즉 자손의 번성과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과 연결됩니다. 이런 면에서 예배는 우리를 부르신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표현하고 또한 예배를 통해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재확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전의 사람을 만드시는 과정 
구약에서 ‘비전’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말씀과 관계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약속의 말씀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비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브람이 어떻게 비전의 사람이 되어갑니까? 
1)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12:2-3) 이 말씀은 몇 가지 특성을 가집니다. 첫째, 아브람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 즉 비전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이것은 아브람뿐 아니라 아브람을 통하여 복을 받는 땅의 모든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둘째, 이 약속은 한순간 혹은 한 세대에 관한 것이 아니라 먼 미래의 일입니다. 약속을 받았을 때 아브람은 아들이 없었고 아내 사라는 불임이었습니다. 어딘지도 모르는 “보여 줄 땅”도 그렇고, 자식 하나는 아브람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약속은 어찌 보면 황당한 소리로 들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하고 단호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습니다. 셋째, 약속의 성취가 아브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 있음을 확실히 합니다. ‘내가 ... 할 것이다’라는 표현을 네 번 사용해 여호와의 확고한 의지를 분명히 합니다. 따라서 아브람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 즉 그 약속 성취의 주체는 아브람이 아니라 여호와 자신입니다. 그 결과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그의 마음에는 먼 미래에 성취될 하나님의 비전이 분명히 심겨 있었습니다.

2)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본문은 ‘명령-약속-순종’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아브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람의 순종 여부에 상관없이 주어지는 무조건적인 약속이 아니라, 그의 순종 여부에 따라 그 성사가 결정되는 조건부 약속임을 강조합니다. 여호와의 명령에 대한 아브람의 반응은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라고 표현됩니다. 히브리어 본문을 직역하면 ‘아브람이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했던 바와 같이 갔다’입니다. 이 상황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11:3)라고 말합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가지고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사람들을 이끌고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 집을 떠나 가나안 땅에 갔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상황은 어땠습니까? 가나안 사람들이 이미 살고 있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여호와는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데반은 이 상황에 대해 “그러나 여기서 발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행 7:5)라고 해석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브람은 당황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또 벧엘과 아이 사이에 위치한 벧엘 동쪽 산으로 이동하며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점점 남방으로 이동했습니다. 아브람이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것은 예배와 기도로서 여호와의 약속에 대한 아브람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3) 하나님이 약속을 재확인하십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따라 간다고 모든 일이 순탄하게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위기를 겪을 때마다 하나님이 개입하심으로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약속을 재확인하십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12장과 13장에는 하나님의 비전이 이루어지는데 위기를 초래하는 두 사건이 소개됩니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서 만난 심한 기근으로 애굽에 내려갑니다. 아브람은 사래에게 애굽 사람이 물으면 자기가 아브람의 누이라 하라고 알려줍니다(12:11-13). 그런데 바로가 그 말을 듣고 사래를 데려감으로 아브람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비전의 실현이 힘들게 됩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림으로 아브람과 사래를 위기에서 구하십니다. 가나안에 돌아왔을 때 아브라함과 롯 사이에 갈등이 생깁니다. 그런데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13:9) 하며 아브람이 제시한 해결책은 도리어 위기를 자초할 수 있습니다. 만약 롯이 가나안에 머물겠다고 하면 아브람을 그곳을 떠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롯이 요단 동편을 택하여 아브람을 떠나니 땅의 약속에 대한 위기가 해결됩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13:15),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13:16)라는 말씀을 통해 아브람을 향한 비전을 재확인하십니다.
 
창 14장은 소돔과 고모라의 왕들이 엘람 왕 그돌라오멜을 배반함으로 발생된 전쟁에 아브람이 개입한 사건을 소개합니다. 아브람은 조카 롯이 사로잡혀 갔다는 소식을 듣고 사병 318명을 거느리고 쫓아갑니다. 한 족장이 4개국 연합군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습니다. 자칫하면 아브람의 생존 뿐 아니라 자손과 땅의 약속이 동시에 위기에 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승리해 룻과 모든 재물과 또 다른 사람들을 찾아옵니다. 아브람이 소돔 왕과 멜기세덱의 환대 속에 외적으로 당당한 모습을 보이지만, 창 15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아브람이 가진 내적 두려움을 잘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으려는 아브람에게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15:4)고 말씀하시고 네 자손이 하늘의 뭇별과 같이 될 것이라 하시며 자신의 비전을 재확인하십니다.
 
하나만 더 보겠습니다. 창 16장은 아브람이 사래의 요청으로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은 사건을 다룹니다. 여호와께서 자손에 대한 약속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래가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이 사건 후 여호와는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17:1)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창 17장에서 여호와는 ‘내가 ... 할 것이다’라는 표현을 10번 이상 사용하셔서 아브람의 자손의 번성과 땅에 대한 약속을 재확인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이름을 바꾸십니다. 또한 할례를 행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육체에 있게 하여 그 언약을 언제나 기억하게 하십니다.  

성취될 하나님의 비전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비전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손의 번성, 즉 큰 민족을 이루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으나 고작 이삭 하나를 얻었을 뿐입니다. 사라가 죽었을 때 에브론에게 막벨라 굴을 사서 사라를 위한 매장지로 삼았습니다(창 23장). 가나안에서 아브라함 소유의 땅은 그곳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땅을 소유한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이방의 객이 되어 사 대 만에 돌아올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의 삶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히 11:13-14). 아브라함은 비전의 사람입니다. 삶의 토대를 떠나 하나님의 비전을 품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 여정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가 주어진 상황에서 믿음으로 대처한 적도 있었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대처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부족함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는 비록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의 온전한 성취를 맛보지 못했지만 항상 하나님의 비전을 바라보았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예상치 않은 일들이 많이 벌어집니다. 미국을 떠나야 하나, 사업을 접어야 하나, 다른 데로 이사를 가야하나 눈앞이 캄캄해지는 상황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떠나셨는데 2주간의 격리 때문에 가지 못하는 분도 있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속담은 믿는 자들에게도 통하는 말입니다. 앞뒤좌우가 막힌 것 같아도 위로 길이 열려져 있기에 우리는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아브라함 같이 비전을 주시옵소서. 그것을 실천한 믿음을 주시옵소서. 순종할 때 약속하신 복을 주시옵소서. 부족하지만 우리를 통해 일하시고 또한 힘들어할 때마다 약속을 재확인시켜주옵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삶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을 뿐 아니라 그 복을 나누어주는 복덩이가 됩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이제부터 시기나 불평이나 원망 대신에 복을 비는 말, 위로하는 말, 격려하는 말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한 말이 씨가 되어 하나님의 복, 위로, 격려를 우리가 받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주게 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의 비전을 갖게 된 자들입니다. 아브라함 같이 하나님이 주신 비전에 이끌리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아브라함 같이 예배자와 사명자로서 살며 아브라함 같이 복을 받고 아브라함처럼 복의 통로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