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너는 나를 따르라

Author
Myung Myung
Date
2020-05-03 14:06
Views
381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못 믿어도 저 사람만은 틀림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로부터 배신을 당했다면 그 충격이 클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이 관계로 연결되는데 만약 믿었던 사람에게 그런 상처를 받았다면 그 관계는 더 이상 지속되기 힘듭니다. 그런 사람은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것이 우리들의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같으면 어떻게 하실까요? 믿는 사람들은 주님의 관점에서 보아야 하고 주님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본문에 보니 배신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심지어 저주하며 맹세하며 부인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와 관계를 끊으시고 다시 보지 않으셨습니까? 찾아와서 멱살을 잡으셨습니까? 그것으로도 속이 풀리지 않아 때려주었습니까? 전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그 사람을 위하여 따뜻한 조반을 차리셨습니다. 그 조반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걸으시면서 그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그 사람의 마음을 녹였습니다. 그 사람은 주님을 끝까지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심지어 그분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각오를 했습니다. 실제로 그 사람은 주님을 위하여 순교했습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였을까요?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베드로가 사명자로 회복되는 과정을 살펴보고 각자에게 적용하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명자로 굳게 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15-17절)
베드로는 모두 주님을 버릴지라도 자기는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마 26:33). 또한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노라고 말했습니다(요 13:37). 그러던 그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심한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상처를 씻어주길 원하셨습니다. 조반을 마친 후에 주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셨을 때, 베드로는 ‘이제 올 것이 왔구나’하며 속이 뜨끔하였을지 모릅니다. 주님은 그에게 ‘이 배신자,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데 너는 나를 세 번씩이나 부인했느냐’하며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셨을 때 그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지어주시고 공생애 동안 주로 베드로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를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시는 이유는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가졌던 사랑과 감격을 회복하라는 겁니다. 주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그를 사랑하신다는 겁니다. 

본문에 제일 많이 반복되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사랑. 일곱 번 나옵니다. 설교자들 중에는 ‘사랑’을 뜻하는 헬라어에 신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agapao와 친구 간의 사랑을 의미하는 phileo가 있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두 단어를 선택하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두 번은 주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을 의미하는 agapao로 물었는데 베드로는 그보다 정도가 약한 phileo로 대답하였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질문하실 때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입장을 고려해 phileo를 사용하시며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니 베드로가 phileo로 주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만일 그런 의도로 세 번째 질문을 하셨다면 베드로가 안심했어야 하는데 본문을 보니 근심하였다고 합니다.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agapao, phileo 두 단어를 구별하지 않고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시려고 이 질문을 하신 것이지 사랑의 정도를 확인하시려고 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부인한 베드로를 회복시켜 사명자로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이 사람들’로 번역된 touton은 남성 복수 지시대명사가 될 수 있고 중성 복수 지시대명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남성 대명사라면 ‘이 사람들’이 되고 중성 대명사라면 ‘이것들’이 됩니다. “이 사람들”로 번역한다면 함께 식사하던 다른 여섯 제자들을 가리키고, ‘이것들’로 번역한다면 베드로에 관련된 삶 전체, 즉 가정이나 사업, 사역 등이 다 포함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실 때마다 베드로는 자기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신다고 대답하였는데 세 번째로 같은 질문을 하시자 베드로는 근심합니다. 아마 베드로는 얼굴이 뜨거워지며 간신히 대답하였을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같은 질문을 세 번씩이나 던지십니까?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의심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세 번 부인하였기에 주님에 대한 사랑을 세 번 고백하게 함으로 그가 가진 죄책감을 씻겨주시고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함입니다. 세 번의 사랑 고백이 베드로에게 고통스러운 과거를 기억나게 했지만, 이는 그의 영적 회복과 주님의 백성들에 대한 지도력 회복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었습니다. 언제나 행동과 반응이 빠른 베드로였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반복되는 사랑의 확인 앞에 그는 자신에게 있는 주님에 대한 사랑이 과연 진짜인지 생각해보았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진심을 주님께 전합니다. ‘주님이 모든 것을 아시고,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도 아십니다.’‘사랑’, 그 단어는 예수님이 베드로로부터 가장 듣기 원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가진 수많은 단점, 약점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있는 겨자씨만한 믿음을 보십니다. 베드로와 대화를 나누면서 주님은 베드로 속에 감추어져 있는 주님에 대한 사랑을 끄집어내십니다. 그러자 베드로의 마음이 열리고 믿음으로 반응합니다. 사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것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갑자기 일어난 주변 상황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갈릴리 호숫가에서 주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주님에 대한 사랑을 진심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회복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따라가려면 그분과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님이 주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일은 주님을 먼저, 그리고 더 사랑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자신과의 사랑의 관계가 회복된 사람들에게 자신의 양들을 맡기십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할 때마다 주님은 그에게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말씀하십니다. 첫 번째와 세 번째 명령하실 때는 ‘먹이라’하시고 두 번째는 ‘치라’하셨지만 그것은 같은 단어의 반복을 피하려는 것뿐이지 단어의 선택에 특별한 의미를 둘 필요는 없습니다. 한 마디로 주님이 맡기신 양을 잘 돌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사랑하시고 베드로의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에 베드로가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라는 것입니다. 

작년 성지답사 중에 갈릴리 호수 근처에 있는 Tabgha라는 마을을 들러서 그곳에 있는 Church of the Primacy of Saint Peter(베드로 수위권교회)를 방문했습니다. 4세기 후반에 세워진 비잔틴 교회의 벽면을 보존하면서 1933년에 갈릴리 호숫가에 다시 세워진 이 교회 안에는 ‘주님의 식탁’(Mensa Christi)이라고 불리는 돌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물고기와 빵으로 아침 식사를 드신 후에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시는 대화를 나누셨다고 합니다. 당시 장면을 머리에 그려보면서 감격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교회당 마당에는 베드로가 열쇠와 지팡이를 든 형상의 석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마태복음 16:13-20에 나오는 대로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고 그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기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형상화하였습니다.

“스스로 띠 띠고 ... 남이 네게 띠 띠우고”(18절)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막 14:31)라고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장담했으나 예수님이 체포되셨을 때 그들은 모두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이제 주님을 사랑한다고 세 번이나 고백한 베드로는 진심으로 주님을 따르기 원합니다. 그때 주님은 베드로에게 장차 일어날 일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무엇인가 중대한 사실을 말씀하실 때 자주 사용하시는 표현입니다. ‘띠다’라는 동사는 흘러내리는 옷을 허리띠로 묶는 것을 의미합니다. 먼저 나온 ‘띠고’는 과거 습관적인 동작을 가리키는 미완료시제로서 젊었을 때는 상당 기간 동안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자신의 혈기와 육체적 정욕을 따라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남이 네게 띠 띠우고”에서 ‘띠우고’는 타인에 의해 띠를 매는 행위를 가리키는데 미래 시제로 되어있습니다. 베드로가 늙어서는 다른 사람들이 그를 띠 띠우고 그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리고 갈 것이라고 하십니다. ‘네 팔을 벌리리니’라는 표현은 베드로가 죽임당하는 방식, 즉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 모습을 십자가에서 이미 보여주셨습니다. 요한은 그 예언의 의미에 대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라는 주석을 덧붙입니다. 이는 요한이 복음서를 쓸 당시에 베드로가 이미 예수님의 예언대로 죽음을 맞이했음을 말해줍니다. 또한 베드로의 죽음에 대한 사실이 초대교회에 널리 퍼져 있었음도 알려줍니다. 베드로는 그가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벧후 1:14)라고 했을 때 이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주후 64년 로마 황제인 네로의 박해 때에 순교하였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죽음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십니다.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22절)
예수님과 대화를 하며 걷던 베드로가 문득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라오는 모습을 봅니다. 이 글의 저자인 요한은 자기를“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고 소개하며 최후의 만찬 때도 예수님 품에 안겨 있었다고 합니다. 요한을 보니 베드로가 갑자기 그의 장래에 대해 궁금해져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여 나는 죽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데 요한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지겠습니까?’복음서 어디를 보더라도 베드로가 요한에 대하여 드러내놓고 시기하거나 견제하였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베드로가 그 동안 예수님 곁에 있던 요한의 존재를 은근히 의식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의 그러한 호기심을 채워주지 않으십니다. ‘내가 다시 올 때까지 그를 살려둔다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알 바 아니야. 너는 나를 따르기만 하면 돼. 내가 너에게 준 사명, 나의 양 무리를 섬기는 사명만 잘 감당하면 돼.’같이 가던 제자들이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 내용을 듣습니다. 그런데 그 대화 내용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왜곡됩니다.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라는 표현을 오해해서 그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알려졌습니다. 그 소문이 베드로의 죽음에 관한 말씀과 더불어 초대 교회에 퍼진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잘못된 소문을 정정합니다. 요한이 이 복음서를 쓸 때는 그가 이미 늙어서 죽음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자기가“죽지 않겠다”가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였음을 강조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주님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제자들이었지만 그들의 성격 차이만큼이나 그들의 소명과 사역의 형태 또한 달랐습니다. 같은 사도로서 복음을 전하고 목양을 했지만 베드로의 두드러진 사역은 전도였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는 오순절에 삼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전도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했습니다. 또한 그 후에 오천 명의 회심자를 한꺼번에 얻었습니다. 또한 고넬료의 집에서 복음을 전함으로 이방인 전도의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주로 교회를 회복하고 세우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복음서를 완전하게 보충하고 서신서와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교회에 거룩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요한은 사도들 중 유일하게 순교를 당하지 않고 가장 오랫동안 지상에 남아 어린 교회의 보호자가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대립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서로 가는 길은 다르지만 예수님을 충성스럽게 따른 제자들이었습니다.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24절)
이 복음서를 기록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가 바로 자신임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관한 자신의 모든 증언이 참되다고 합니다. 요한복음은 증언의 책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증언으로부터 시작해서 그분을 처음 소개한 세례자 요한의 증언, 그분이 보여주신 표적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분이 가르쳐 주신 교훈을 직접 귀로 들은 제자들과 많은 사람의 증언을 소개하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요한이 알고 있는 예수님의 행적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것 이외에도 많아서 그것을 다 기록한다면 이 세상이라도 그 책을 수용하기에 부족하다고 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문학적 과장법으로, 예수님에 대한 전승이 많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또한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할 때 자료를 선택적으로 사용했음을 말해 줍니다. 20:31에서는 자료를 선택한 기준에 대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계속 믿게 하는데 있다고 말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성품과 행하신 모든 일들 속에는 죄인들을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구원의 은혜가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참 구원과 진리의 빛을 얻고자 하는 이들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 주님이 원하시는 사명자가 되려면   
-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랑하느냐’고 세 번 반복하여 물으셨습니다. 믿음생활은 첫째도 사랑, 둘째도 사랑, 셋째도 사랑입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전에 베드로가 실패했던 이유는 “내가 부인하지 않겠다”고 하며 자신이 근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주님께서 아시나이다.”이제는 내가 사랑의 근거가 아니라 주님이 근거가 됩니다. 내 결심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신뢰가 근거가 됩니다. 베드로의 사랑 고백에 이어 사명이 그에게 주어집니다. 사랑만이 사명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에 대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믿음의 행위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 되어야 합니다. 찬양, 기도, 헌금, 봉사로 나타나는 예배에 주님에 대한 사랑이 들어가 있지 않으면 주님 보시기에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의무감이나 공로를 세우기 위해 억지로 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사랑으로 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에게 복이 됩니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주님의 질문입니다. 혹시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도 베드로처럼 육체에 져서 주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았다는 자책감에 빠진 분들은 없습니까? 방향감각을 잃고 방황하던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주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함으로 베드로가 원래의 모습을 찾게 된 것처럼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믿음으로 고백할 때 회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셔서 복음을 위해 살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잡힌 자들은 더 이상 자신들을 위하여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삽니다. 우리 모두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한다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것이 우리의 본성을 거스릅니다. 우리는 편안한 길, 희생을 최소로 하는 길을 찾으려고 합니다. 주님이 맡기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려면 자발적으로 고난과 희생의 길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동시에 그 고난의 길이 영광의 길로 이어짐을 확신해야 합니다. 사명을 말하면서 편안한 길만 선택하고 순종과 희생을 회피하고 있지는 않는지 스스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뒤에 부활의 기쁨과 영광이 있다는 변하지 않는 진리를 가슴에 품어, 그 진리가 우리를 이끌게 해야 합니다. 
- 끝까지 충성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이 있는 것은 사명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전하는 것도 사명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사랑으로 주신 사명의 길을 가야 합니다. 믿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실패를 인하여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 일이 크든 작든, 남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충성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될 때 우리는 예수님의 흔적을 가질 뿐 아니라 우리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예수님의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하나님은 성도 각자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다른 사람의 일에 신경 쓰지 말고 자신이 받은 사명에 충성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명 감당의 척도는 성공이 아니라 충성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직 성도는 사명을 주신 예수님만 바라보며 처음부터 끝까지 신실하게 따라가야 합니다.
 
베드로를 찾아오신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뿐 아니라 우리가 더 풍성한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주님을 따르기 원합니까? 그렇다면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끝까지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지만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며 맡겨진 사역에 충성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며 용서를 경험하고 회복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붙들고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주님을 끝까지 성실하게 따르는 제자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함께 지어가는 교우들, 땅 끝까지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는 일꾼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