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주님을 기다리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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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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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마 25:1-13


오늘은 교회력으로 대림절 둘째주일이면서 성서주일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사건이 예수님의 탄생이었기에 성경말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보는 성서주일이 대림절 기간에 있는 것도 의미가 있다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려서 읽히고 있는 책이 성경입니다. 성경은 앞으로도 베스트셀러로 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읽을 때 성령의 감동이 임하고 읽으면 읽을수록 은혜가 됩니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이“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시 19:10)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책만큼 공격을 많이 받고 박해를 받은 책도 없습니다. 로마제국에서는 큰 박해가 있을 때마다 성경책이 압수되어 불살라졌습니다. 중세시대에는 성경이 라틴어로 되어 있어 평신도는 읽을 수 없었습니다. 18세기 프랑스 자유사상가인 볼테르는 앞으로 약 40년 후에는 성경책을 읽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였습니다. 그로부터 50년 후 그가 앉아서 장담하던 그 집이 바로 성서공회가 되어서 마루에서 천정까지 성경책으로 쌓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로버트 잉거솔이라는 무신론자가 친구인 Lew Wallace에게 기독교의 가르침은 다 거짓말이고 쓸 데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기독교가 거짓 종교임을 증명하는 소설을 쓰면 대단한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월리스는 성경의 허구성을 철저하게 파헤쳐서 성경의 이야기가 허무맹랑한 거짓임을 밝히고, 인류를 신에게서 해방시키기로 작정했습니다. 월리스는 우선 기독교가 무엇인지 알려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성경을 반복해서 읽으면서 마음 깊은 속에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그가 1880년에 예수님의 생애를 소재로 소설을 한 편 썼습니다. 그 소설이 1959년 William Wyler 감독이 영화로 만들어 11개 부문의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벤허’입니다.

대림절 둘째 주일에는 초를 두 개 켭니다. 기다림, 바라봄, 깨어 있음이 대림절의 3대 요소입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고, 그분을 바라보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날과 때는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고 합니다(막 13:32). 또한 주님은 맞이할 준비가 된 자들에게만 오시는 것이 아니라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에도 오십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생명의 빛을 인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이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본문은 잘 알려진 ‘열 처녀의 비유’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천국에 대하여 비유로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비유는 일상생활에서 쉽게 발견하거나 접하는 평범한 소재를 이용하여 교훈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그 비유가 예수님의 의도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지 못하면 그 비유는 닫힌 이야기가 되어 그 의미를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연결고리를 잘 풀면 그 비유는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보다 더욱 분명하게 의미를 전달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세 비유가 나옵니다. 열 처녀 비유(1-13절), 달란트 비유(14-30절), 그리고 양과 염소의 비유(31-46절)입니다. 이 비유들은 하나같이 말세를 사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에 관한 교훈을 줍니다. 본문은 단지 비유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종말에 모든 사람들이 실제로 경험하게 될 상황을 보여줍니다. 이 예배를 드리시는 분들은 비유의 의미를 알고 주님을 제대로 기다리면서 천국 잔치에 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신랑을 기다린 열 처녀(1-4절)
1절을 시작하는 ‘그때에’는 본문이 24:36에서 시작된 재림의 시기에 관한 주제와 연결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천국은 마치 ~ 같다 하리니’라는 표현이 마태복음에서 많이 등장하며, 천국에 관한 비유를 시작할 때 쓰입니다. 열 처녀 비유는 13:24; 18:23; 22:2와 같이 천국에 관한 비유이지만, 그 세 비유에서는 과거형 동사들이 사용된 반면, 열 처녀 비유에서는 미래형 동사가 쓰였습니다. 이는 열 처녀 비유가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다룬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는 신부나 신랑의 시중을 드는 종들이나 친구나 이웃으로 여겨지는데, 이들은 신부의 집에 간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신랑의 집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신랑을 기다린 열 처녀에게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의 이름이 비유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들 모두 어두운 밤을 밝히고자 등을 들고 신랑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신랑이 더디 오자 다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결과부터 본다면 열 처녀 모두 혼인잔치에 참여한 것은 아닙니다. 무엇이 문제였기에 같은 장소에서, 같이 등을 들고, 같이 졸면서 기다렸는데 절반만 참여하였을까요? 본문에는 처녀들의 외모가 어떻다든지 출신 배경이 어떻다든지 성격이 어떻다든지 하는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은 잔치에 참여한 처녀들을 ‘슬기 있는 자들’이라 하고 그렇지 못한 처녀들을 ‘미련한 자들’이라 부릅니다. 그렇다면 ‘슬기로움’과 ‘미련함’을 구분하는 기준이 무엇일까요? 한 번 묻겠습니다. 처녀들이 등에 불을 켜고 신랑을 기다렸습니까 아니면 등만 들고 있다가 신랑이 오니 그제야 등불을 켰습니까? “등불이 꺼져가니”하는 것으로 미뤄 열 처녀들은 모두 등에 불을 켠 채로 신랑을 맞이하려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미련한 처녀들은 등은 있었지만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고,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여분의 기름이 들어있는 그릇을 준비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 당시에 사용하는 등은 올림픽에서 성화주자가 들고 달리는 횃불과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그 등 안에 있는 기름은 두세 시간이면 다 타버렸기에 계속 불을 밝히려면 등에 기름을 더 부어주어야 했습니다. ‘미련하다’는 말의 원뜻은 ‘얼이 빠졌다’는 것입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신랑을 맞이하기 위하여 등불을 가지고 가야하는 것은 알았지만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는 것까지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얼빠진 행동을 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신랑이 금방 올 것 같은데 귀찮게 기름 담는 그릇을 가져가지 말고 신랑이 오면 그때 가서 준비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 눈에는 여분의 기름을 그릇에 담아 가져간 처녀들이 도리어 미련하게 보였을지 모릅니다.

신랑 맞을 준비를 한 열 처녀(5-9절)
“신랑이 더디 오므로”유대 지방의 결혼식은 일반적으로 초저녁에 있었는데, 밤중까지 신랑이 오지 않았다는 것은 결혼식이 상당히 지체됐음을 보여 줍니다. ‘다 졸며 잘 새’는 깨지 않고 잠들었음을 비판하는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미련한 처녀들만 잠이 든 것이 아니라 모든 처녀들이 잠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에서 신랑이 늦은 이유는 중요하지 않고, 신랑이 지체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인자의 재림이 지연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밤중에’는 밤이 깊었음을 의미하며 이들이 잠이 들 만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기다리다 지쳐 졸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생리적인 현상이니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이 비유에서는 졸은 것 자체를 가지고 문제삼지 않습니다. 그런데 졸았다고 해서 깨어 있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소리가 나되’는 직역하면 ‘큰 소리가 울렸다’입니다. ‘나되’라고 번역된 동사는 완료시제로 종말 사건이 완성됐다는 내러티브의 극적 요소를 반영합니다. “신랑이로다 맞으러 오라”라는 소리는 신랑이 올 때 신랑의 들러리들이 나팔을 불면서 외치는 풍습이었습니다. 갑자기 소리가 나니 졸고 있던 열 처녀가 깜짝 놀라 깨어 소동을 벌였을 것입니다. ‘등을 준비한다’는 것은 ‘정돈한다’라는 뜻으로, 횃불이 잘 타도록 천에 기름을 먹이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처녀들이 각자 자기의 등불을 점검하니 등 안에 있는 기름이 거의 떨어져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그릇에 담아온 여분의 기름을 등에 넣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미련한 처녀들은 여분의 기름이 없었기 때문에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등불이 꺼져가는 이미지는 악인의 등불이 꺼진다고 묘사하는 잠언 13:9과 욥기 18:5을 연상시킵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미련한 처녀들의 요청을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라는 구절을 직역하면 ‘우리와 너희에게 결코 충분치 않으니 절대 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의 행동이 너그럽지 못하다고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름을 나누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넉넉지 못한 상태에서 기름을 나누다 자칫 행렬 전체의 등불이 꺼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신랑을 잔치 장소로 안내해야 할 시간입니다. 그들이 준비한 기름을 신랑을 인도하는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의 거절은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 도덕적 차원이 아니라, 구원론적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구원은 타인에게 의존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더구나 이때는 보통 때가 아니라 비상시국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심판의 때입니다. 신앙은 스스로 준비해야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가 믿어야 합니다. 각자가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파는 자들에게 가서 기름을 사라”고 말을 듣고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갔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의 운명(10-12절)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 가지고 돌아왔을 때는 이미 혼인잔치의 문은 굳게 닫혀버렸습니다. 그들이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애원해 보지만 신랑의 대답은 냉정하고 단호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문을 열어 주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그들을 아예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신랑도 늦게 오고서는 늦게 온 처녀들을 모른척하니 신랑이 너무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것은 그 당시 풍습을 알지 못하는 우리들의 생각일 뿐입니다. 혼인의식이 저녁에 행해지면 행렬은 등을 이용해 길을 밝혔습니다. 당시 풍습에 의하면 신랑의 집까지 들고 갈 등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는 것은 큰 실례였습니다. 신랑이 맞이한다면서 등을 밝히지 못하는 것은 신랑을 무시한 행동이었습니다. 안타깝게 호소해도 소용이 없는 그들의 가련한 모습은 야곱의 형 에서의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창 27장). 에서는 혈통적으로 장자이니 장자의 복을 당연히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장자로서의 영적인 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도 받겠다고 아버지 야곱에게 눈물로 호소했지만 장자권은 이미 야곱에게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비슷한 내용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마 7:22)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들 같았습니다. 귀신을 쫓아낸 적도 있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능력도 행하였습니다. 자기들은 당연히 구원 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7:23)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을 이 비유와 연결시켜 보면,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그들을 ‘불법을 행하는 자’로 여기신다는 의미입니다.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그들의 기다림은 헛수고가 되고 말았습니다.

깨어 있으라(13절)
“깨어 있으라”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 주제입니다. ‘깨어 있으라’는 ‘깨어서 지켜보다’라는 의미로, 단순히 잠들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준비하고 있으라’는 뜻입니다. 명령형 현재 시제로 되어 있으니 계속해서 준비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레위기 24장에는 성소에 켜져 있는 등잔과 등불, 그리고 기름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불을 켜기 위하여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네게로 가져오게 하여 계속해서 등잔불을 켜 둘지며 아론은 회막 안 증거궤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24:2-3). 여기서 ‘정리하라’가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준비합니까? 순결한 기름으로 태우는 등불이 “항상 켜지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이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당번을 정해서 계속해서 기름을 채워 넣었습니다. ‘그 날과 그 때’는 재림의 날과 재림의 시간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깨어 있으라”는 것은 “오실 주님을 항상 준비하는”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세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을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철저히 준비를 해야 합니다
열 처녀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단지 신랑을 맞이하겠다는 각오를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한 것을 볼 때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등과 더불어 여분의 기름을 담는 그릇을 준비하였고 미련한 처녀들은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준비할 줄 아는 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이 기름을 미리 준비하지 못한 것을 후회해보았자 소용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에도 천국잔치에 들어가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것이요 주님을 부인한 것이기에 주님도 그들을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이 비유의 의도는 종말을 준비하되 제대로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 설교를 하는 것도 주님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항상 깨어서 준비해야 하는 이유는 신랑이 언제 오실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재림이 지체되는 것처럼 느껴져도 준비하는 삶을 계속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지 벌써 2000년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더디 오심은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언제 오실지 모르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하여 성도들은 영적인 준비를 제대로 그리고 계속 해야 합니다.
- 주님이 오기 전에 준비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의 경우 동네에서 열리는 혼인 잔치에서 참여하지 못하는 것은 큰 수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잔치에 들어가는 여부가 신랑이 올 때가 아니라 오기 전에 이미 결정이 났다는 점입니다. 신랑이 오기 전에 충분히 기름을 준비했느냐 아니냐의 차이가 혼인 잔치 참석여부를 결정하였습니다. 준비하고 졸고 있는 자와 준비하지 않고 졸고 있는 자는 다 같이 그저 졸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에는 잔치의 참여자가 되느냐 수치의 대상이 되느냐로 분명하게 갈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재림의 주를 기다린다고 하지만 모두가 주님을 영광스럽게 맞이하는 것은 아닙니다. 안이하게 신앙생활을 하면 죄와 게으름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무뎌지면, 기도 안 해도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아도 답답한 줄을 모릅니다. 예배드리는 것을 게을리 해도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줄을 모릅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지금을 은혜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아직도 회개하고 주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을 기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다시 오실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나중에 준비하려면 늦습니다.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 24:50-51).
- 각자가 준비해야 합니다
본문이 주는 교훈 중의 하나는 기름은 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누가 대신할 수 없습니다. 우리 각자가 주님을 알고 주님이 우리를 아셔야 합니다. 지금 당장 주님이 오시면 주님을 알아볼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평소에 주님과 교제가 있어야 주님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주님을 아는 것보다 주님이 나를 아시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요한계시록 2:2-3에서 예수님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계 2:2,3)라고 하셨습니다. 훗날 주님은 심판자가 되셔서, “내가 너를 아노라!”라고 말씀 하시든지,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라고 말씀하실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너희는 깨어 있으라.”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주님을 어떻게 맞이하려고 하십니까?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이 별로 마음에 와 닿지 않아 덤덤합니까? 아니면 세상일로 분주하다보니 주님의 재림까지 신경을 쓸 여유가 없습니까? 아니면 나는 당일치기에 강하니까 그때 가서 급히 준비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을 갖고 계십니까? 모태신앙이니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까? 각 사람은 자기의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가면서
열 처녀 비유는 신랑이 오기 전에 무엇을, 어떻게, 왜 준비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기름을 충분히 준비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이 성령이든, 믿음이든, 말씀이든, 기도든 주님을 만나는데 필수적인 요소라면 다 기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이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할 신앙의 내용, 삶의 내용이 기름입니다. 기름이 떨어져 갈 때 자동차에는 경고등이 켜집니다. 경고등이 켜진다고 차가 바로 서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 달리면 어느 순간에 차가 서게 됩니다. 우리에게 경고등이 무엇입니까? 기쁨과 감사와 열정이 사라지고 귀찮아지는 것입니다. 자기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하는 것까지 막으려고 합니다. 매사에 독선적이고 부정적입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 상처받은 사람들이 즐비합니다. 기도는 하지만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가 없습니다. 예배를 참석해도 주님을 만나겠다는 사모함이나 기대감이 없습니다. 설교가 어땠느니 판단을 하지만 막상 말씀에 대한 순종은 없습니다. 혹시 우리에게 이런 증상이 나타난다면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처녀 같다는 것을 깨달으며 돌이켜야 합니다. 신자들이나 불신자들이나 처한 삶의 상황은 다르지 않습니다. 차이는 인자의 임함을 준비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깨어 있음’의 참된 의미는 어느 날에 주님이 임하실지 알지 못하기에, 생각지 않은 때에 오실 수도 있기에, 주인이 언제 오시든지 상관없이 그날을 기다리며 주인이 맡기신 권세를 가지고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을 좀 더 즐기다가 나중에 예수님을 믿겠다는 것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립니다. 이왕 기다릴 바에야 제대로 준비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 오시기 전에 각자가 준비해야 합니다. 자기의 부족과 한계를 깨닫고 주님께 나아가 자기 죄를 자백하고 위로 부어주시는 은혜를 사모할 때 주님은 그 사람을 아시고 회복시키십니다. 항상 준비하고, 항상 기도하고, 항상 소망으로 살다가 훗날 주님 앞에 섰을 때 ‘내가 너를 아노라’는 말씀을 듣기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로 서게 될 그날을 생각하면서 이 땅에서의 모든 수고와 고난을 믿음으로 견뎌야 합니다. 천상에서 벌어지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여 영원토록 하나님을 경배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