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주님을 기다리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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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3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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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사 40:1-5, 막 1:2-5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 있는데 그것은 곧 절망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희망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진실로 예수님만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형편에 있든지 참된 희망이 되시는 예수님을 꼭 붙들어야 합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대림절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대림절은 ‘도착’이라는 뜻의 라틴어 ‘어드벤투스’에서 유래됐습니다. 대림절의 ‘待’자는 ‘기다릴 대’이고 ‘臨’는 ‘임할 임’이므로, 문자적으로는 주님이 ‘이 땅에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라는 뜻입니다. 성탄절 4주 전부터 시작해 성탄절 전야까지가 대림절인데, 처음 오신 주님을 감사할 뿐 아니라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주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오셨다는 확신과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연약한 육신의 모습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인하여 우리는 죄 사함을 얻었고 영생의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첫 번째 오셨을 때는 고난 받는 종으로 오셨지만, 두 번째 오실 때는 심판주로 오실 것입니다. 2000년 전 유대인들은 메시아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렸지만 이제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준비하는 때에 주님 보시기에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묵상으로, 회개로, 때로는 금식으로 그리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나누며 예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 살펴보겠습니다.

믿음의 특징 중의 하나가 기다림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기다림에 대한 구절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아 이리저리로 안타깝게 방황하듯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며 기도합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 130:6). 남들이 자는 시간에 자지 못하고 깨어서 망을 보아야하는 파수꾼이 어서 아침이 왔으면 기다리는데 그 파수꾼의 기다리는 것 이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4-5)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오직 기도에 힘쓰며 기다리다가 성령 충만을 경험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성도들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언제 잘살아볼까 하며 경기 회복을 기다립니까? 언제 병이 나을까 하며 육신의 회복을 기다리십니까? 주변 상황이 우리를 낙심시키거나 우울하게 할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오실 주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기름을 충분히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깨어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이사야는 주전 700년경에 활약하였던 선지자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멸망과 회복을 예언하면서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자기 백성을 결코 잊지 않고 구원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메시아의 오심을 알리시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사야서는 66권으로 되어 있는데 내용상 1~39장과 40~66장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전반부가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를 다룬다면 후반부는 언약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회복을 다룹니다. 39장에서는 히스기야가 병이 나은 직후 교만으로 방심해 바벨론 사절단에게 무기고의 무기들과 보물 창고의 보물들을 모두 보여 줌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로 인해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함락될 것이며, 그 모든 보물은 옮겨지고, 귀인들은 포로로 끌려가는 비참한 일들을 겪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0장은 39장의 내용으로부터 약 150여년을 건너 뛰어 포로 중에 있는 유다 백성을 위로하는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위로하라(사 40:1~2)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켰습니다. 비록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저지른 죄악으로 그들을 징계의 채찍으로 때리셨지만 이제 그들을 회복시킬 때가 된 것입니다. 바벨론에서의 귀환은 출애굽의 재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이 부르짖는 고통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어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게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포로가 된 자기 백성을 위하여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자들을 보내어 그들을 ‘위로하라’고 하시면서 이제 고난의 때가 끝났음을 알립니다. 40장이 히브리 성경에는 아름답고도 장엄한 시가체로 쓰였는데 개역성경 번역은 서술체로 되어 있어 그 맛을 제대로 살리지 못합니다. “위로하라, 위로하라 내 백성을! 너희 하나님이 말씀하시니라”하면서 시작합니다. ‘위로하라’는 명령형의 반복은 이 메시지의 중요성을 부각시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있을 때에는 위로할 자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멀리 쫓아내실 때 ‘이 백성’(6:9,10)이라 불렀는데 그들을 돌아오게 하시면서 ‘내 백성’이라 부르십니다. 호칭의 변화는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사라지고 언약 백성으로서의 회복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누구에게 위로하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2절을 보면 ‘말하라, 예루살렘의 심장을 향하여 부르짖으라, 예루살렘을 향하여 실로 그 노역이 끝났도다! 실로 그 죄악이 사해졌도다! 실로 여호와의 손으로부터 그 모든 죄의 값을 갑절이나 받았도다.’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심장부에 해당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소가 있고, 다윗 왕의 보좌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과 다윗의 보좌는 이스라엘을 지탱하는 두 기둥이었습니다. 무너진 성전이 다시 세워지고 끊어진 다윗 왕조가 다시 세워져야 진정한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심장을 향하여 말한다는 것은 부드럽고 애정 어린 말을 전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 위로의 대상도 백성을 상징하는 의인화된 여성 예루살렘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세 번에 걸쳐 사용된 접속사 ‘키’는 위로의 근거를 제공합니다. 첫째, 예루살렘의 노역의 때가 끝났습니다. 노역이란 죄를 짓고 갇혀서 형기를 채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벨론의 침략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이 황폐해지고 백성이 포로로 잡혀가 고통을 당하면서 70년이 지났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에게 가장 기쁜 소식은 노역기간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둘째, 예루살렘의 죄악이 사함을 받았습니다. 작정한 기한이 지나서 죄 값을 다 치르고 모든 죄악을 용서하셨습니다. 셋째, 예루살렘이 죄에 대한 벌을 배나 받았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벌을 배나 받았다’는 말씀은 형벌이 죄악에 미치지 못하지만,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그 정도의 형벌이면 충분하다고 여겨주신다는 뜻으로써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나타내십니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사 40:3~5)
우리가 대통령을 만난다면 평상시 입던 옷을 입고 운동화를 신고 그냥 만나겠습니까? 나름대로 잘 꾸미고 약속 시간에 미리 나가 만날 준비를 할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3~5절은 ‘여호와의 오심’에 대해 말합니다. 1~2절이 예루살렘을 위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담고 있다면 3~5절은 선포된 위로가 확실히 성취될 것임을 강조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예루살렘에 영광으로 임재하시리라는 약속입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3절) “외치는 자의 소리”는 길을 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길을 준비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대로의 건설이 전쟁에서 승리한 왕의 귀환과 관련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여호와의 길’, ‘하나님의 대로’는 예루살렘의 보좌로 귀환하시는 하나님을 위한 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된 대로를 통해 자기 백성을 본토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주목할 점은 이 대로가 약속으로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명령으로 요구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명령형 동사들인 ‘예비하라’와 ‘평탄하게 하라’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고 곧고 평탄한 도로를 만들어 여호와의 귀환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고대에는 왕이 행차할 계획이 세워지면 선발대가 먼저 출발해 골짜기는 돋우고, 산이나 언덕을 깎아 내리고, 고르지 않은 곳은 평탄하게, 울퉁불퉁한 곳은 평지가 되게 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여기서 ‘광야’는 예루살렘 동쪽에 있는 유다 광야를 염두에 두고 외친 듯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 동편으로 떠나가는데(겔 10~11장), 훗날 그 영광이 떠나가셨던 동편으로부터 다시 임하게 될 것(겔 43장)을 에스겔 선지자가 예언했습니다. 바벨론 포로의 상황에서 주어진 이 명령은 하나님이 주권과 능력으로 반드시 회복을 이루실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은 하나님 임재의 다른 표현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은 출애굽 때에도 강하게 부각된 이미지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산에서 구름 가운데 나타났으며 그 후에 성막으로 옮겨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바벨론에서 나오게 될 때도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을 다시 인도하고 그 뒤에 이스라엘이 지날 것입니다. 성전의 멸망으로 인해 사라진 줄 알았던 여호와의 영광이 모든 육체에게 나타날 것임을 선포함으로써, 이스라엘의 확실한 회복을 나타냄은 물론 이를 통해 여호와께서 온 세상의 통치자임을 드러내십니다(49:26). 신약에서도 출애굽의 이미지가 나타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거한다’는 것은 ‘장막에 머문다’는 뜻으로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것입니다. 신약 시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약속된 메신저 세례자 요한(막 1:2-3)
예수님이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아라면 세례자 요한은 약속된 메신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온 세상에 알리는 약속된 메신저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마가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서 인용하였다고 하지만 사실은 출애굽기, 말라기, 그리고 이사야서에 나오는 말씀들을 종합한 것입니다.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를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출 23:20).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말 3:1a).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 40:3). 이 예언들은 서로 다른 시기에 한 것들이지만 출애굽이라는 주제를 공통적으로 갖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3:20에서는 출애굽 이후에 하나님께서 주의 사자를 보내어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약속의 땅까지 인도하실 것을 약속합니다. 말라기 3:1에서는 장차 일어날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속행위를 언급합니다. 이사야 40:3에서는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합니다. 마가복음 1:2은 출애굽기 23:20과 말라기 3:1을 합성한 것이고, 마가복음 1:3은 이사야 40:3을 인용한 것입니다. 마가는 예수님과 관련해 일어난 사건들이 구약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주며, 세례자 요한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말라기에 의하면 주의 사자는 여호와의 마지막 심판의 날이 도래하기 전에 주의 길을 준비하라는 사명을 부여받은 인물입니다. 이사야는 그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부르며, 그가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고 메시아의 오실 길을 곧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회개의 세례 선포(막 1:4-5)
세례자 요한의 사역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는 일’은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는 것으로 온 유대인들을 향한 언약 갱신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고 외쳤습니다. 회개는 단순한 마음의 변화가 아니라, 자신의 모든 가치를 하나님 중심으로 바꾸는 전인적 행동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세례로 번역된 ‘밥티스마’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기 위해 물속에 깊이 잠겼다가 일으켜 세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죄를 자복한 사람들에게 회개의 징표로 물 세례를 시행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이름 앞에 ‘세례자’라는 호칭을 붙입니다. John the Baptist. 따라서 정확한 번역은‘세례 요한’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입니다. 죄 사함을 받기 위한 요한의 정결 의식을 유대교의 성전 제의와 비교하면 세 가지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유대교 정결 의식에는 제물로 짐승이 사용되지만, 요한의 정결의식에는 회개가 요청됩니다. 둘째, 유대교에서는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림으로 정결해지지만, 요한의 세례는 ‘물’이란 매개체를 사용합니다. 셋째, 유대교는 짐승을 통한 반복적 정결 의식을 행하지만, 요한의 물 세례는 일회적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거쳐서 하나님과 첫 언약을 맺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 것처럼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베푼 세례는 장차 다가올 하나님의 구원을 대망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반드시 거쳐야 할 첫 관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세
-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위에 오신 목적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켜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나 자신이 왕 노릇 하는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분께 순종하며 살아가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회개 없이 죄 용서함이 없고 구원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회개에 대하여 여러 번 언급하셨습니다.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5)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참된 회개를 하고 나면 죄를 혐오하고 증오하게 됩니다. 그제야 비로소 자기를 부인하며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며 예수님을 따르는 진정한 제자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회개할 때 광야와 사막같이 적막했던 우리 영혼에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말씀의 길이 열리고 기도의 대로가 회복됩니다. 낮고 음침했던 심령의 골짜기에 주님이 임재하시고 교만하여 높아졌던 영혼의 언덕은 그분의 말씀으로 깎여 낮아집니다. 질서도, 정결함도 없던 죄인의 내면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평탄하게 바뀝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해야 할 일은 참된 왕이신 하나님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그리스도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선포한 메시지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유대 땅 시골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요한에게 나왔다고 합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몰려든 것은 그의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인정했다는 증거입니다. 또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굶주렸다는 증거도 됩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 400년 동안 하나님의 음성이 이스라엘에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선지자를 보내지 않으신 영적인 암흑기였습니다. 물론 그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쉬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준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위로를 간절하게 기다리던 차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서 회개의 메시지를 증거하니 백성들은 그를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의 심령을 괴롭히던 죄의 문제를 해결 받고 싶었습니다. 바짝 마른 스펀지가 물을 잘 흡수하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례자 요한의 회개의 메시지를 달게 받아 들였습니다. 황량한 광야로 나아가 세례자 요한 앞에 자기 죄를 고하고 세례를 받던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그리면서 각자의 신앙생활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심령에 갈급함을 느끼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움을 받기 원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감격하여 아멘으로 화답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위해 얼마나 시간과 정성을 투자합니까? 모든 육체는 풀과 같이 연약하여 언젠가는 마르며, 모든 아름다움은 꽃처럼 시듭니다. 따라서 인간은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이사야는 외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사 40:8). 회복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고, 약속의 말씀은 영원히 서기에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 중에서도 하나님의 위로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유일한 위로와 기대는 어떠한 상황에도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과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 삶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야생 꿀을 먹었습니다. 그 당시 서민들이 입고 먹던 것들이었습니다. 마가가 세례자 요한의 특이한 복장과 먹거리를 소개한 것은 그를 단순히 금욕주의자로 묘사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약속한 주의 사자, 곧 엘리야라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말 4:5~6). 그는 엘리야처럼 ‘광야의 삶’을 살며 자신을 먼저 성결케 하였습니다. 그리고 엘리야처럼 ‘주의 날’이 임하기 전에 이스라엘을 성결케 하는 사명을 수행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약대 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띤 세례자 요한의 모습 속에서 엘리야를 보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말로만이 아니라 그가 입은 복장과 그가 먹는 음식과 그의 삶을 통하여 ‘준비하는 자’의 모습을 잘 보여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버릴 것은 버리면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충실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은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우리가 깎아야 할 산은 교만한 마음이고, 메워야 할 계곡은 낮은 자존감이며, 고르지 않고 험한 곳은 불의와 죄악으로 가득 찬 자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만의 산을 깎아 내지 않으면 주님을 영접할 수 없습니다. 또한 과거에 실패한 아픈 경험으로 인해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자신이 누구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는지, 주님이 누구를 위해 죽으셨는지, 그리고 주님이 그분의 피 값으로 누구를 사셨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불의와 죄악으로 굽어진 길이나 거친 길로 왕을 모실 수 없습니다. 주님이 오시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이 제거되도록 통회하고 자복하며,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나가면서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성전을 잃고, 다윗 왕조의 멸망으로 왕도 잃었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나 바벨론에서 포로로 살아가는 이스라엘에게 무슨 소망이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과의 언약이 파기되어 여호와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을 지켜주지 않은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절망과 고통을 지켜보시던 여호와 하나님이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라고 명령하시며 회복을 선포하셨습니다. 회복의 선포는 승리한 왕으로 예루살렘에 귀환하시는 여호와를 위해 대로를 건설하라는 명령으로 주어집니다. 대로를 통해 자신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때 모든 육체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십니다. 진정한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를 사시다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경의 가장 중요한 약속 중의 하나입니다. 그분이 언제 다시 오실지 알 수 없기에 항상 깨어 있어 준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소망이 약해지면 주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지고 세속적이며 불신앙적인 생활로 빠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는 자세는 거룩함과 경건함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거두며 이 땅에서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번 대림절을 계기로 다시 한 번 영적으로 깨어 있어 회개를 통해 마음을 새롭게 하며, 말씀을 붙들며, 주님의 마음에 합한 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 기쁨과 소망과 평강이 충만한 성탄의 계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